플레이어가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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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nic
그림/삽화
......
작품등록일 :
2024.01.2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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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1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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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0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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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짐꾼들을 구하다.

DUMMY

현수의 시선이 머문 곳에 가죽으로 전신을 감싼 사람들이 있었다.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들을 보고 현수의 뒤에서 따라오던 헬레나와 셀레나가 현수의 좌우에서 그를 보호하듯 수중의 장궁에 화살을 메겼고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잔느 역시 수중의 장궁을 움켜쥐었다.

무엇이 즐거운지 서로 가볍게 치고받으며 팔과 다리가 없는 사람을 철봉에 꿰어 바비큐처럼 돌리고 있는 사람들과 한쪽에선 여인들을 능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잘려진 사람의 머리통을 들고 손으로 그 안에 있는 뇌수를 파서 먹고 있는 건장한 자도 있었다.

현수는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과 함께 아까 먹은 육포를 다 토해냈다. 온 몸이 다 떨려왔다. ‘저놈들은 뭐지?’ 하는 의문과 함께 그들에 대한 기억이 뇌리를 스쳐갔다. 식인을 하는 저들은 오염자였다.

현수가 토하자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헬레나가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노예가 허락 없이 주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노예 주술의 단계를 1단계로 낮춘 뒤 그들과 함께 했던 며칠 동안 현수는 의도하지 않게 자신의 노예가 된 세 사람과 상당한 관계 개선을 할 수 있었다.

그건 자신들 종족에 대한 저주와 인간들에 대한 적의와 두려움이 섞인 이들에게 단전호흡과 격술 등 무술을 전수하며 공을 들인 현수는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 있었다. 자신은 결코 그들을 노예로 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스스로들 현수에게 약속한 대로 현수를 평생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것을 맹세했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스스럼없이 자신들을 대하는 현수의 태도에 그들 역시 현수의 진심을 느끼고 그를 주인이 아닌 동료로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그들의 주술이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는 것은 다만 그들이 현수의 개인 노예 신분을 가짐으로서 현수와 같이 다니는 한 타인들에게 현수의 노예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발생하게 될 곤란한 일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심스러운 헬레나의 손길에 현수는 뒤집힌 속을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안색은 창백했다. 그렇다고 식인을 하는 저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이젠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은 상당한 능력자였고 옆에는 든든한 조력자들도 있었다. 현수는 조금은 더 차분한 심정으로 광기 어린 현장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오염자들은 아웃사이더라 불리며 대격변 이전인 태곳적부터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바이러스에 침식된 자들이었다.

지금은 면역자들의 혈청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치료제로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이 괴이한 바이러스 질병에 예방을 하고 있지만 떠돌이 광야인들까지는 그 치료제의 해택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도시에 사는 모든 이들이 그 해택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도시 안에서도 신분에 따라 치료제의 해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하여튼 이들 아웃사이더들은 이집트의 미이라처럼 더러운 가죽이지만 전신의 대부분 가리고 있었는데, 그건 그들의 외관이 마치 나병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쌍방이 직접적으로 상처를 입은 피부에 닿은 상태에서만 피를 통해 바이러스가 전염이 되는 아웃사이더들의 병은 유전처럼 후손에게까지 전해지는 천형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태양 아래 노출된 오염된 피는 바로 증발해버렸기에 적절한 방법을 통해서 침식해 들어오는 바이러스를 사람들이 예방할 수 있었다.

아웃사이더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마력을 육체에 담을 수 있어 일반인들보다는 강한 힘을 가졌지만, 빠르게 진행되는 육체의 붕괴로 일반인보다는 훨씬 짧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드문 경우지만 아웃사이더들 중에서도 플레이어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아웃사이더들은 대개 대격변 이후 극한의 상황에 몰렸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나 증오가 강했다. 그래서인지 이들 중에는 정상인에 대한 분노로 식인을 하는 무리들도 제법 많았다. 현수가 지금 보는 자들은 식인을 즐겨하는 부류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미 생을 포기한 모습으로 한쪽에 포박 되어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어찌할까?’ 고민하는 현수 눈에 아웃사이더들을 향해 은밀히 다가가는 석궁을 든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저 여자는 뭐지?’ 하는 현수의 눈에 느닷없이 여자의 상태창이 보인 것이다.


이아름

잠재력 : 5성, 레벨-23

고유 : 다중 에어실드.


현수의 고유 스킬인 해석안(룬)이 자동으로 플레이어인 여자의 상태창을 떠올린 것이었다. 은밀히 아웃사이들에게 접근하는 여자는 플레이어였던 것이다.

그 때 여자를 능욕 하던 자들 중에 한 명이 칼을 뽑아 들더니 자신이 깔고 있던 여자의 목을 베었다. 무엇이 즐거운지 잘려진 여자의 머리통을 손에 들고 마치 수박이라도 자르듯이 칼을 내리쳤다. 그리고 두 쪽으로 잘려진 머리통에 손을 집어넣어 뇌수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잔혹한 광경이었다.

그것을 보고 묶여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격렬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두어 명의 아웃사이더가 그들을 짓밟자 저항은 사라지고 이내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살해당한 여인의 가족들로 보였다.

그들을 보고 뇌수를 먹고 있던 자가 낄낄거리며 웃자, 주변에 경계를 서던 아웃사이더들의 경계심도 조금은 느슨해졌다. 그 틈을 타고 좀 더 가까이 접근한 여자가 석궁을 들었다.


“크윽.”


하는 소리와 함께 뇌수를 파서 먹던 자의 목에 화살이 박혔다.

석궁으로 뇌수를 파먹던 자를 처리한 여자는 장도를 빼어들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 못한 듯 어리둥절한 모습의 아웃사이더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처음 몇 명을 장도로 처리한 여자는 이내 아웃사이더들에게 포위되었다. 창과 도, 도끼 등으로 무장한 강인한 아웃사이더들은 몰이사냥에 익숙한 지 여자를 자신들 중앙으로 몰아갔다.

아웃사이더들은 점차 저항이 약해지는 여자를 마차 짐승을 사냥하듯 다루었고, 여자도 그런 아웃사이더들을 상대하며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간간히 자신의 고유 스킬인 에어실드까지 발현했지만 레벨이 낮아 다중 에어실드란 스킬을 제대로 활용도 못하고 단 한 개의 에어실드만을 구사했는데, 그것도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다.

일대일로 부딪히면 플레이어인 여자 쪽에서 훨씬 더 강했지만 두어 번 부딪힌 다음에 여자가 생각보단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아웃사이더들은 미숙한 상대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수의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솔직히 이 싸움에 끼어들긴 싫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여자가 아웃사이더들에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식인을 하는 저들을 응징하고자 하는 마음도 컸다.

처음 접하는 현수의 수신호에 당황하지 않고 헬레나 등도 장궁에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식인을 하는 아웃사이더라 해도 처음 살인을 할 생각에 상당히 긴장된 현수와는 다르게 사냥꾼이자 전사인 헬레나 등은 그저 조용한 호수처럼 진중했다. 현수는 헬레나 등의 동요가 없는 얼굴 표정에서 조금이나마 자신을 옥죄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이처럼 살케 종족의 사냥꾼들이 자신과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수는 든든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현수는 몰이사냥을 당하고 있는 여자를 돕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저들에 대한 공포에 조용히 살육의 현장을 벗어났을 것이다.

헬레나 등이 준비된 것을 본 현수는 아공간(룬)에서 미리 장전해 두었던 석궁 3대를 꺼내 아웃사이더들에게 연달아 화살을 쏘자, 뒤따라 헬레나 등도 장궁을 이용해 화살을 날렸다. 비명소리와 함께 아웃사이더들이 쓰러지자, 여자를 몰아붙이던 아웃사이더들의 집중력이 한순간에 떨어졌다.


“뭐지? 누구냐?”

“어디서 날아온 화살이야?”

“제길 여자의 일행이 있었나 봐.”

“저기다. 저쪽에 활을 든 사람들이 있어. 앗! 한 놈이 이리로 다가오는데.”

“막아. 저 자식을 죽여 버려.”


아웃사이더들은 들고 있던 석궁을 내던지고 장도를 빼어든 채 빠르게 다가오는 현수의 모습에 낭패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독기를 들어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광야의 법칙에 익숙한 자들이 당연히 취할 행동이었지만 현수는 아웃사이더들이 상대할 수 있는 그런 자가 아니었다.

짐승 같은 그들의 모습에 자비를 버린 현수의 장도는 호랑이처럼 달려들어 아웃사이더들을 찢어발겼다. 미라처럼 온 몸을 가죽으로 감싸고 아무렇지도 않게 식인을 하는 이들이 현수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고속 스킬을 사용해서 한 칼질에 한 명씩 차례로 베어 넘기는 현수의 장도는 거침이 없었다.

순식간에 아웃사이더들을 처리한 현수는 첫 살인에 대한 후유증에 빠지기도 전에 경계, 불안, 공포, 후회, 고마움 등등 다양한 감정이 실린 소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소녀는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가죽 옷을 입은 단발머리에 키는 거의 170정도에 이르고 예쁘지만, 단아한 태희와는 다르게 풍기는 야생적 기질로 거칠어 보였다.


“아!, 안녕. 난 현수 한현수라고 해.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뛰어들었는데......, 네가 실수한 건가?”

“........”


현수는 경계심을 버리지 않고 자신에게 향한 소녀의 장도를 쳐다보자 소녀는 장도를 슬며시 내렸다. 소녀 역시 자신이 위급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나타나 도움을 준 소년에게 자신도 모르게 장도를 겨눈 것이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현수에게 소녀는 말을 건넸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난......, 이아름이라고 해....,., 요.”

“그래 이아름. 이름 예쁘네.”

“.......”

“난 그럼 저들에게 가 볼게.”


이미 상태창에서 아름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현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현수는 아름이에게 관심이 많았지만 묶여있던 사람들 중에 다수의 부상자들이 있었기에 그리로 향했다. 그런 현수의 모습을 상기된 아름이은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대개 광야에서 자신을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자빠트리나 궁리하며 치근거리는 자들뿐이었는데 쿨하게 돌아서는 현수를 보고 심장이 거칠게 뛰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름이는 이런 기분이 처음이었다. 아니 이런 느낌이 자신에게 있었는가?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하긴 나이는 16,7세 정도라 해도 강인하게 단련된 현수는 180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그래도 훤칠한 키에 탄탄한 체격을 가진 훈남이었기에 아름이가 젠틀한 그의 모습에 호감을 느낀 것은 당연한건지도 몰랐다.

어느새 아웃사이더들에게 윤간을 당하던 여자들이 묶여 있든 사람들의 풀어주고 있었는데, 요단강에 반쯤은 발을 걸쳤다가 돌아온 그들 대부분은 도살장의 개처럼 떨고 있었다.

현수가 다가가지, 그들은 아까처럼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저희를 살려 줘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 정말, 이러지들 마세요. 네가 불편하니깐, 거기 아저씨 상처는 좀 어떠세요?”

“저 말입니까? 견딜만합니다.”


현수를 배척하며 창을 들었던 사내는 현수의 말에 어찌 대답할까 망설이다가 부상을 견딜 수 있다고 말했지만 머리와 배에 난 상처는 그리 간단한 부상이 아니었다. 깨진 머리는 그렇다 쳐도 찢어진 배는 장기가 다 보였다. 그런데 이 놈의 세상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런 상처를 더러운 가죽으로 여인이 감싸고 있었다.

현수는 스승님에게 한의학을 어깨 너머로 배웠지만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그가 죽는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자 아공간(룬)에서 포션 2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현수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는 생각에 아공간(룬)에 있는 포션을 꺼내준 거지만, 사실 포션은 플레이어라도 구하기 어려운 값비싼 물자였다. 하지만 현수의 이런 행동은 헬레나 등을 구할 때도 이렇게 행동했다. 어떻게 보면 천성이었다. 다시 말해 물자보다는 생명을 중시하는 현수의 생각이 잘 들어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창을 들었던 남자는 현수가 포션을 꺼내 자신에게 건네자, 그게 어떤 것인가를 알고는 이제 살았다는 기쁨이 얼굴에 가득 들어났지만 이걸 과연 사용해도 되는지 현수를 살펴보다가 현수에게서 별다른 기색을 찾지 못하자 마음을 정한 듯 사내는 포션의 일부를 상처에 붓고 약간을 마신 다음 다른 이들을 치료했다.

서로를 다독거리며 포션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현수의 옆으로 아름이가 다가왔다. 아름이는 현수의 뒤에 서 있는 헬레나 등을 의식하는 듯했고 헬레나 등도 현수에게 접근하는 아름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생겼다.


“오빠,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아름이의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현수는 감정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게 편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 그런데 아름이라고 했지. 아름이는 몇 살이야?”

“난, 열다섯인데......, 오빠는 이름은 뭐고 나이는 어떻게 되요?”


현수는 아름이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은 동안이었지만 언 듯 보기에도 거칠어 보이고 간혹 버스에서 보던 여대생 누나들 같이 성숙한 몸매를 가진 아름이었기에 최소 자신보다는 두어 살 많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던 현수는 아름이의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남자가 감빠가 있지 처음 만난 미모의 여성 플레이어에게 밀릴 수 없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말을 놓았던 현수는 아름이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알자 긴장이 탁 풀렸다. 그런 현수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헬레나 등의 경계심도 조금씩 옅어지면서 이들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도 점차 사라져갔다.


“나? 이름은 한현수이고 나이는 꽉 찬 열여섯. 뒤에 있는 이들은 헬레나, 셀레나, 잔느 라고 내 동료들이야.”


아름이는 현수가 동료라고 말했지만 가려져 있는 헬레나 등의 목에 있는 노예 표식을 봤다. 노예를 동료라 칭하는 현수의 말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자신이 상관할 봐는 아니었다. 아름이는 헬레나 등에게도 살짝 눈인사를 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아름이는 그걸 쿨하게 받아들였다. 적어도 자신은 자유민이었기 때문이었다.


“후훗, 그럼 오빠네 뭐. 그런데 오빠, 네가 보니 포션인 것 같은데 그런 귀한 것을 저들에게 줘도 돼요?”

“괜찮아. 사람이 죽어 가는데 포션이 뭐 대수라고.”


아름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현수를 ‘역시 조금은 이상한 사람이야.’ 란 생각을 하며 묘하게 쳐다봤다.

포션은 연금술사들이 만드는 치료제로 구하기 어려운 귀한 물자였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현수는 그것을 자신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광야인을 위해 어떤 요구도 없이 내놓은 것이다. 떠돌이 광야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런 행동은 그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아름이의 안색이 어색해졌다.

자신이 건네준 포션으로 치료를 마친 자들이 아웃사이더들의 한 끼 식량으로 전락한 자신들의 일행이었던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을 한쪽에 서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현수에게 아름이가 말을 건넸다.


“오빠는 저들 말고 다른 일행은 없나요?”

“저들 말고......, 그건 무슨 뜻이야.”

“살케 종족......, 저들은 노예잖아요.”

“노예? 끙, 그게 그렇게 됐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실은 양구에서 일행들과 같이 있었는데.......”

“양구.......요? 설마 그 곳에 있었어요? 양구에선 생존자가 없다고들 하던데.”

“어, 그걸 아름이가 어떻게 알아?”

“벌써 양구 시가 사라졌다는 것은 광야에 퍼졌는걸요. 대규모로 자이언트 엔트들이 이동하는 길에 위치한 콜로니나 도시들이 사라지는 것은 흔한 일이잖아요. 저항한 양구 시민들이 욕심을 부린 거지......, 그 덕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어요.”

“그러게나. 말이야.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난 야차대의 유일한 생존자야. 아니지. 지금 아름이의 말을 들으니 양구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야차대......, 일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요. 오빠가 야차대에 속해 있었구나. 꽤 실력이 있는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용병대라고 하던데, 양구에서......, 그렇게 되었군요. 저들은 그 이후에 얻은 건가요?”

“저들? 사연이 많아. 휴우······, 난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야.”

“집이면.......”


그때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했던 창을 들었던 남자가 현수와 아름이에게 다가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남은 포션 한 병을 현수에게 건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저, 현수 님. 현수 님이라도 불러도 될까요?”


남은 포션을 건네받은 현수가 대충 상황이 끝난 것 같아서 건네받은 포션을 아공간(룬)에 넘고 몸을 돌리려고 하자 남자가 처연한 음성으로 현수를 불렀다.

아까 아름이와 대화할 때 그들과는 조금은 거리가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현수의 이름을 들었는지 창을 들었던 남자가 현수의 이름을 말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현수 님? 뭐, 그렇게까지 야. 그런데 내게 뭐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힘이 약한 무리를 이끌며 떠돌이로 살아가야 하는 약자였기 때문에 눈치가 지나치게 발달한 것으로 짐작되는 그의 모습에 현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적대감을 들어내던 그들이 운 좋게 살아남아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에서 어떤 간절함이 깃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느낌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게.......”


옆에서 지켜보던 아름이는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수 님, 아까 얼핏 듣자니 야차대에 속해 있다고 들었는데, 죄송합니다. 들으려고 들었던 것이 아니라 두 분 대화가 그냥 제 귀에 들렸습니다. 그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그런데 현수 님, 무례한 부탁이라고 생각하지만 저희를 현수 님이 짐꾼으로 쓰실 수는 없을까요?”

“짐꾼 요?”

“예. 따로 급료를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현수 님에게 속한 개인 짐꾼으로 생각해주시면 합니다.”

“저는 개인 짐꾼이 필요가 없는데요?”


개인 짐꾼이란 플레이어들이 무보수 하인이나 하녀와 같은 개념으로 부리는 수하들을 말했다. 하지만 아공간(룬)을 가지고 있는 현수로서는 느닷없는 남자의 짐꾼 타령에 부정적으로 말하자, 그는 당황한 얼굴로 현수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의 처지도 모르고 주제넘게 말했습니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되겠습니다.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현수 님께서 저희를 버리시면 저희들은 다 죽습니다. 제발 저희를 거두어주십시오.”

“거두어 주세요.”

“제발.......”


저자세로 울먹이며 머리를 조아리는 남자의 모습에 귀를 기울이며 현수와 남자의 대화를 엿듣던 남자의 일행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성인 여자가 둘, 그들 외에 나이 어린 다섯 명 중 두 명은 어린아이였다.

지금 현수의 상황에서 보면 냉정하게 거절하는 게 맞았지만 떨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그의 얼굴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록 자신이 이들을 구해주긴 했지만 불과 얼마 전에 자신을 적대시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그늘 안으로 저리 절실히 들여보내달라며 요청하는 모습이 중학생인 현수는 좀처럼 감당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현수 자신도 이 세상에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지 않는가? 누가 누굴 살피고 도와줄 상황이 안 되었다.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는 현수의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름이가 말했다.


“하긴 나도 오빠와 같이 다니고 싶은데 저들이야 오죽하려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 저들을 봐요. 저들 중에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어린아이를 빼면 여자를 포함해서 불과 여섯. 보아하니 무기도 변변치 않은 저들이 과연 이 광야에서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오늘을 넘기기가 어려울 거예요. 운 좋으면 약탈자들에게 잡혀 노예로 팔리거나, 그게 아니면 마수의 먹이가 되지 않으면 아까 같이 아웃사이더의 식량으로 사라지게 되겠죠.”

“끙, 하지만 난.......”

“알아요. 아공간이 있는 오빠에겐 짐꾼이 필요 없다는 것을....... 그걸 알면서 오빠에게 자신들을 거두어달라는 저들의 입장이 그만큼 절실하단 것이겠죠.”

“아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네가 누굴 데리고 다닐 입장이 못 되.”

“역시....... 그럼 이건 어때요? 오빠도 느꼈지만 저는 플레이어에요. 저도 오빠가 속한 아차대에 들어갈게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오빠에게만 속한 대원이 되는 거지만.”

“네게 속한 대원?”

“그래요. 야차대에 속하지만 오로지 오빠의 말만 듣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오빠와 저, 그리고 오빠 뒤에 있는 이들이면 저들 정도는 충분히 건사하지 않겠어요?”

“아름이와 헬레나들이라며 충분히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때 현수는 아름이의 제의를 듣자, 머릿속에서 반짝 느낌이 왔다.

자신이 야차대의 본부가 있는 헤븐 시로 가는데 이들이 도움이 될 거란 것을....... 자신도 그렇지만 살케 종족인 헬레나 등은 셋 다 요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주식이라고 숲에서 찾아낸 먹을거리는 현수의 입에도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헬레나가 육포와 곡물가루를 섞어 넣어 끓인 이상한 음식을 몇 번 먹었지만 차라리 육포를 그냥 먹는 것이 나았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어쩌면 저들의 합류는 상부상조가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살케 종족의 플레이어가 셋 이나 있지 않은가....... 아름이까지 가세하면 무력은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력해진 야차대의 부활도 가능할 수 있었다.

사실 헤븐의 아차대에는 대장에게 친근한 전투에 특화된 플레이어들은 이젠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랬기에 현수는 반 대장파의 플레이어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는 헤븐으로 가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그랬는데 헬레나 등만이 아니라 아름이까지 가세한다면 대장의 후계자로서 야차대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좋아. 아름이의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좋아.

“감사합니다. 현수 님.”

“저를 부를 땐 그냥 대장이라고 칭하세요.”

“대장님이요?”

“아까 아름이와 애기할 때 잠깐 언급했지만 양구에서 제가 속한 야차대에서 생존자가 저 혼자라서 야차대 수장의 인장을 제가 수습하게 되었어요. 아마도 본부가 있는 헤븐으로 가게 되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인장을 수습한 제가 야차대를 이어받게 되겠지요. 그러니 그냥 대장이라 부르세요. 아름이도.”

“알았어요. 오빠 아니지 대장 오빠. 히히히......”

“.......”

“감사합니다. 대장님.”

“뭘요. 앞으로 잘해봅시다.”


이렇게 해서 현수는 플레이어인 아름이를 포함해서 아홉 명의 사람들을 야차대에 받아들인 뒤 아웃사이더들이 작은 동물이나 마수들을 유혹하기 위해 주변에 뿌려 놓은 시신 조각까지 모두 회수해 불에 태운 사람들은 서둘러 참혹했던 장소에서 벗어났다.

현수와 헬레나가 선두에 서고 아름이와 잔느가 중앙에서 셀레나가 후미를 맡았다.

길을 가는 중 간간히 나타난 무리들이 있었지만 쉽게 이들을 제지하진 못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아무래도 현수 등의 기세와 무장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현수와 일행들은 길을 재촉해서 어두워질 때까지 꽤 먼 거리를 이동해 식수로 사용할 개울이 있고 나무와 바위가 어울린 방어가 꽤 용이한 장소를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본 현수는 딱히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없자 아공간(룬)에서 육포와 약간의 곡물 가루를 꺼내 아이들을 돌보며 쉬고 있던 여인들에게 건네주었다.

현수가 이곳에서 야영을 할 것이라고 말하자 대지의 수호정령 카드모스의 추종자인 잔느가 자신의 스킬인 땅의 의지로 안전지대를 설치했다. 아직 레벨이 낮아 겨우 직경이 8m 원형 정도밖에 안전지대 범위를 확보하지 못하지만 그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일단 보호가 필요한 여인들이나 아이들은 안전지대 안에 머물도록 했다.

여인들은 셀레나의 보호 아래 짊어지고 왔던 철통에 물을 길어와 육포와 곡물 가루를 같이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간간히 여인들이 주변에서 채집해온 온 풀들을 철통에 집어넣자 제법 향긋한 냄새가 풍기가 시작했다. 역시 달랐다. 그것만으로도 현수는 광야인들을 받아들인 것에 만족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아까의 참혹했던 시간들을 다 잊었는지 지쳐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편안함이 엿보였다.

사실 떠돌이인 이들로서는 플레이어와 같이한다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얻었던 거였지만 현수는 조금 전 가족 같은 일행들을 잃었던 사람들의 이런 모습이 잘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수 역시 이 세상에서 눈을 뜬 이후 다수의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들이 이해가 가는 면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의 이름들도 모르네요. 전 한현수라도 합니다.”

“저는......, 이아름이에요.”


아름이는 현수의 눈치를 살피더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렇지만 헬레나 등은 현수의 뒤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람들은 헬레나 등이 현수에게 속한 노예란 것을 알았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플레이어인 현수와 아름이가 자신들을 소개하는 말에 광야인인 자신들이 플레이어들에게 존칭을 받았다는 사실에 창을 들었던 남자를 비롯한 사람들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저는 전기동이라고 합니다. 여긴 제 처인 아정과 제 여동생인 기옥입니다. 이 두 아이들은 7살 세옥과 5살 세정 제 자식들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저는 염재숙이라고 하고 재희, 재하는 제 동생들입니다.”


전기동이 소개를 하려 하자, 한쪽에 따로 앉아있던 3명의 남녀들 중에서 성숙한 여인의 태가 보이는 여자가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들은 염 씨 성을 가진 3남매였다. 아까 윤간 후 머리가 잘려서 죽은 여인의 자식들이었다. 염재숙은 17, 재희는 15, 재하는 13살이었다.

전기동의 말에서 현수는 아까 아웃사이더들에게 몹쓸 짓을 당한 여자들이 그의 아내와 여동생인 것을 알자 내심 무척 놀랐지만 이들은 그것에 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이들이 그랬던 것은 광야에서 일반인 여자들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현수는 왜? 아름이가 아웃사이더 무리를 공격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 점에 대해서 아름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기에 현수는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통성명을 마치자 아이들이 졸기 시작했다. 다들 피곤해 보였다. 강행군이었기에 서서히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들 쉬세요. 오늘 밤은 제가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아닙니다. 불침번은 제가 서겠습니다.”

“아니에요. 오늘 밤 불침번은 저희 남매에게 맡겨주세요.”

“다들 아니에요. 오늘 힘든 일을 겪었으니 오늘 밤은 저희들이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다들 편안한 밤이 되기를.”

“편안한 밤이 되기를.”

“편안한 밤이 되기를.”


만일 다른 그룹이었다면 어떤 일을 겪었든지 간에 일반인들이 외각 보초를 서는 것이 당연했지만 잔느의 안전지대에 일반인들을 밀어 넣은 현수는 오늘 밤만이라도 이들이 편히 자기를 원했다. 그리고 현수는 이곳에 온 이후로 깊은 잠을 이룬 적이 없었기에 하루쯤 경계를 선다고 해서 무리가 될 것은 없었다.

현수의 그런 배려를 느꼈는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다들 현수의 말을 이어 ‘편안한 밤이 되기를’ 따라서 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경계를 서는 현수의 좌우에는 헬레나와 셀레나가 주변을 살피고 있었고 잔느는 현수의 명령으로 일반인들과 같이 안전지대 중앙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사실 경계는 헬레나나 셀레나들 중 한 사람만 서도 됐지만 현수는 오늘밤은 자신의 그늘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위해 경계를 서고 싶었다. 아이들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현수는 아름이의 숨소리까지 편하게 된 것을 알자, 밤하늘을 쳐다봤다.

그때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동안 알지 못했지만 하늘의 별자리가 자신이 학교에서 배운 별자리와 차이가 없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어! 저건 별자리들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네. 그러고 보니 저건 거문고자리의 직녀성 베가 같은데, 어, 저기 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 견우성도 있네. 헤라클레스자리도 있어. 그동안 저걸 왜 몰랐지? 어떻게 집에서 보던 별자리들이 여기서도 보이는 거야. 도대체 여긴 어디야? 설마......, 여기가 지구인가? 그런데 세상이 왜 이렇게 변한 거야?’


하늘의 별자리를 살피고 있건 현수의 시야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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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집으로 돌아오다.(1) 24.02.11 24 0 16쪽
» 아포칼립스에서 짐꾼들을 구하다. 24.02.10 28 0 30쪽
5 살케 종족 노예를 얻다.(3) 24.02.03 33 0 21쪽
4 살케 종족 노예를 얻다(2) 24.01.29 32 0 19쪽
3 살케 종족 노예를 얻다(1) 24.01.27 4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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