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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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루틀
작품등록일 :
2024.03.08 09:43
최근연재일 :
2024.05.0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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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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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토스

DUMMY

심준구는 밀도 높게 책을 읽고, 표절 저격수로 처음 문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존재다. 하지만 양윤정과 엮이면서 표절은 필사 과정에서 일어나는 방심의 산물이며 그 행위야말로 문학의 시작이라고 두둔했다. 한 마디로 아가리 닥쳐야 하는 개소리를 시전하며 태도를 돌변한 것이다.


4천억을 가진 재벌의 남편이 되면서 동시에 문학산책 주간이 되자 자신이 살아온 생을 전부 부정하는 짓을 부끄러움 없이 해냈다.


표절로 인한 당선 취소.


양윤정을 문단에서 몰아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보니 아니었다. 어디에선가 다시 도전할 게 너무 뻔히 보였다.

양윤정이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들이 몇 개 있는데 문단과 남자, 돈이다. 어떻게든 등단하여 심준구를 찾아낼 거라는 뜻이다.


심준구는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는다. 가는 여자 붙잡지도 않는다. 여자들은 길 위에서의 택시 잡기 같은 거라고, 손 흔들면 언제든 잡아탈 수 있다고 믿는다. 합승도 좋고, 가다가 내키면 언제든 내리면 그만인 주의.


여자 문제만 아니면 참 괜찮은 사람인데.


제일 좋은 건 양윤정이 등단에 끝내 실패하여 문단에 나타나지 않는 건데,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스터디를 하고 있다지 않은가. 그것도 도은주를 쥐락펴락하면서.


양윤정이 등단했을 때 등단 동기 가운데 시각을 자극하는 누군가가 있길 바라야 하는데 문단 역사상 문단의 아이돌로 나와 심준구, 정형문을 뛰어넘은 이는 없다. 정형문은 3년 뒤에 등단한다.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간절하게 먼저 찾아내고 싶다. 3년 뒤 나보다 한 살 많은 나이로 등단하게 되는데, 그를 보고는 현이숙이 나와 심준구를 모아 훈남 삼총사로 명명했다.


우리 세 명은 문비와 창사, 문산으로 갈리면서 한 자리에 모일 일이 없었다.


지난 생, 내가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정형문은 분을 참지 못하곤 양윤정 집으로 차를 몰았다고 했다. 외출하는 그녀를 기다렸다가 자동차로 박은 뒤 구치소로 들어갔다.

그 삶은 다시 반복되면 안 된다.


“사실 등단을 완성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저는 그거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이제부터 본 게임이다. 링 위에 올라섰으니까, 트랙 위 스타트 라인에 선 거니까 이제부터 정말 잘해야 한다. 그 생각이에요. 서로에게 코치가 되고 감독이 되는 거,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도윤 님이라면 같이 스터디하고 싶어요. 시도 계속 써야 하는데 객관화가 아직 안 됐거든요.”

“난 이 테이블에 앉은 게 행운 같아요. 무조건 해야죠. 첫 단추 끼고 사라진 작가들이 한두 명인가요?”


심준구와 정종현까지 스터디에 찬성했다.

시로 등단 후 무명으로 소외된 2년이 심준구의 결정을 부추겼다. 이로써 성원 완료.


등단자들과 스터디.


지난 생에 이 일을 해야 했다.

그랬다면 아까운 시인으로 신정수를 놓치지 않았을 테고 심준구와 격의 없는 사이가 됨으로써 서로의 삶을 지켰을 테다.

멀리서만 알던 사이는 양윤정의 비위를 부채질했다. 그녀가 양다리, 문어다리를 걸친 수년의 세월을 누구도 알지 못했으니.


―아니, 제가 무슨 루 살로메냐고! 성은 밖에서 풀고 영혼의 교류는 같이 사는 남자하고 하겠다면서 못 건드리게 한대. 심준구 지금 도 닦는다는데?


양윤정과 결혼한 그가 구가했던 자유의 삶을 벌 받는 중이라는 말을 했다며, 현이숙은 그게 대체 무슨 삶의 방식인가, 어처구니없어했다.


―사천억을 두고 뛰쳐나올 용기는 없나 봐.

―뛰쳐나오면 만용이죠.

―아하하, 그렇군. 만용이군. 사천억인데.


그렇게 애써 웃으면서 헤어졌던 그날이 선명했다.


“무슨 말씀이 그리 재미있습니까?”


42세 변리사 강훈직.

일생 등단이 목표였고 그 목표를 달성한 분께서 우리 자리로 건너왔다.

뒤로 후퇴를 시작한 이마 선을 드러낸 채 사람 좋게 웃는 그의 얼굴에선 문학을 향해 품었던 결기 같은 건 다 빠져나가 보였다. 더 이룰 게 없다는 투.

실제로 그는 생업으로 돌아가 이따금 우리와 만나 주머니를 열어 술 사주길 즐겼다.


여태 부산에서 올라온 대학원생 김문영과 광주에서 올라온 최연소 당선자 하재선을 붙들고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며 손수 챙기더니 테이블을 돌기 시작한 것이다.


“변리사님, 어서 오세요. 술 한잔 받으세요.”


정종현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바로 수면 아래로 내린 채 강훈직을 향해 술병을 들었다.


암묵적으로 비밀이 되어 버린 우리의 스터디 그룹 7명. 여기에 부건과 나영이 등단한 뒤 합류하면 9명.

원고 일정상 서너 명이 빠져도 스터디하기에 무리 없다. 이 모임은 최소 2년은 끌고 가야 한다. 2년은 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지면서 작가로 완성될 기간이다.


“우리 구원자.”


강훈직이 나를 보며 술병을 들었다.

구원자라니. 우습다.

그만큼 표절을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반가울 뿐.


“저는 술 끊었습니다. 사이다 주십시오.”

“아니, 글쟁이한테 술, 담배, 커피, 이성은 사대 필수품 아닙니까?”

“저는 글에서 술, 담배 냄새 풍기는 거 좋다고 보지 않습니다.”

“농담입니다, 농담. 정색하면 내가 부끄럽습니다.”


강훈직은 너스레 한번 떨려다가 내 정색에 바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술로 어머니를 잃어서요.”


테이블을 덮친 침묵 사이로 낮게 “아, 수상 소감······.”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신정수였다. 그녀의 말에 “맞다.” 하며 뒤늦게 말들이 얹어졌다. 언제나 말은 상황보다 늦다.


그래, 이게 맞다.

무턱대고 술을 권하는 사회가 싫지만 그게 또 호감의 표시라니 나는 적절히 거절할 이유를 댈 수밖에 없다.


스터디 멤버로 성원 된 이들 사이에서 오가는 내밀한 신호.


그래, 내가 책임져 준다.

너희들 여섯 명은.


***


「힘에의 의지는 존재도, 생성도 아니다. (천한 것들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열정이다. “나는 저들과는 다르다”는 마음가짐으로 탁월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가리킨다.

파토스가 가장 원초적 사실이며, 이것으로부터 비로소 생성과 작용이 발생한다.」

(-<힘에의 의지> 중에서)


원 역사에서 나는 파토스를 위처럼 정의했으나 문학을 비평하기엔 철학 용어(예술에 있어서의 주관적, 감정적 요소)로 가지고 온 파토스(pathos. 그리스어)가 조금 더 유효했다.

그래서 <빈곤은 빈곤을 낳고:파토스>를 써서 문학과 비평사에 투고했었다.


지난 생, 젊은 평론가들끼리 모여 무크(부정기적) 발간지를 정식 계간지로 등록하면서 「문학·판」을 엎어보자고 의기투합했었다.

그때 창간호로 썼던 비평을 다시 정리했다.


계간지는 겨우 열 개를 채운 뒤 현실적인 문제로 문을 닫았고(창간호 특집으로 빈곤 문학을 다루는 바람에 우리가 빈곤해졌다는 웃지 못할 농담으로 간판을 내렸다) 이후 문비에서 편집 동인으로 불러주더니 편집 위원으로 위촉해 주어 빈곤을 벗어났다.


최근 작가들은 열정 없이, 파토스가 채워지지 않은 채 문학을 쓰고 있었다. 상상의 빈곤이 현실의 빈곤으로 이어지는 건데 이 현상은 매우 고착되어 가고 있었다.


빈곤한 채로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던 옛 작품들을 소환한 시대 비평이었다.


『빈곤은 돈, 밥, 노동의 ‘없음’과 관련된다. 계몽적으로 가난을 퇴치하자던 문학의 지평 아래에서 작가들은 경제적 상승 욕망에 내몰린 채 현재를 썼다. 그 수많은 상상력이 좌절과 맞물리면서 욕망의 패러다임은 확장했다.


신경향파 문학의 기수인 최서해의 소설은 북만주에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에서 출발한다. 빈곤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모여든 작품들이 최서해의 손끝에서 복원되는데 빈곤으로 딸을 빼앗기는 <홍염>을 시작으로 식민 시대 민중의 절대 빈곤을 완연하게 드러낸 <탈출기>에 이르러 드디어 문학이라 부르기에 합당한 경지에 올라선다.


이후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빈곤 문학의 계보를 잇는데, 문학은 가난하지 않았다.


미국 대공황을 지나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시작으로 빈곤은 평등의 이념을 쏘아 올렸다.


빈곤의 플롯이 문학의 장르로 자리 잡는 동안 후기 산업화는 끝났다. 빈곤은 종속될 수 없기에 새로운 무언가를 들고나와야 하건만 이 시대의 작가들에겐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빈곤 문학의 정점에 이른 것이다.


······(후략)······』


상상력은 언제든 열려 있다. 누구도 닫지 않은 문 앞에서 그만 서성이고 상상의 레일 위에 오르길. 그리하여 빈곤의 벽을 뚫고 나가길 바란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빈곤 문학의 거두인 최서해를 시작으로 현진건과 전혜린으로 이어지는 빈곤 문학은 체험적 공유였을 뿐 절대 빈곤하지 않았다.


그 투고한 원고에 대한 답 메일이 왔다.


【우도윤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문학과 비평사 편집부 주하은입니다.

먼저 3관왕 등단을 축하드리고, 좋은 원고를 투고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 투고해 주신 <빈곤은 빈곤을 낳고:파토스> 원고는 잘 수령하였고, 저희 문학과 비평사 계간지에 매우 합당한 원고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다만, 선생님의 원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편집부에서는 두 차례 편집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 결과 우도윤 선생님께서 양해해주신다면 가을호에 <빈곤:사라진 상상력의 신화, 문학>으로 특집을 꾸미고 싶습니다.


이 결론에 도달하느라 투고에 대한 답이 늦어졌음을 알리고, 사죄드립니다.


만약 특집을 허락해 주신다면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통장 계좌번호를 함께 보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원고는 원고료 (정액) 40만 원으로 책정되었으며 바로 입금해 드릴 계획입니다.


선생님의 고견을 기다리며,

봄이 오는 듯 날씨가 많이 풀렸습니다.

간절기에 건강 조심하시길 빌겠습니다.


담당자 주하은(02-338-××××. 내선 7213)】


나는 메일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답 메일을 보냈다. 계좌번호까지 모두 놓치지 않고 적었다. 이걸 거절할 이유란 없다.

특집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매번 편집자들과 편집 위원들이 둘러앉아 원탁회의를 열곤 했는데 그때마다 힘들었다.


특집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매번 어려운 숙제였는데 내 비평 원고가 특집을 안겨준 셈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받아먹지 못하면 바보 인증인 셈인데, 문비가 받아먹지 못할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이 만드는 계간지에 다시 신뢰가 생긴다.


이 시대 문학 진단으로는 매우 유효한 시대 비평이었고, 작가들이 긴장하길 바라는 충고와 응원의 비평이었으니.


다음 날, 마치 짜고 친 것처럼 거의 같은 시간에 문학 산책과 창작과 사회에서 좋은 원고를 투고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자신들 계간지에 원고를 싣겠다는 답 메일을 보냈다.


역시 고료는 40만 원.

40만 원 받으려고 원고지 분량을 52매, 51매로 맞췄다. 50매 내외일 때 50매로 치고 장당 8천 원으로 계산하여 준다. (2018년이 돼야 장당 만 원으로 오른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문학 산책은 해설 원고 청탁까지 했다.


【······(전략)······

아울러 원고 청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원고 청탁서>--


우도윤 선생님께


문학 산책에서는 김희경 소설가의 신작 소설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출간 시기는 2013년 2/4분기(6월 중)로 잡고 있습니다.


우도윤 선생님께 이번 소설집에 실릴 ‘작품 해설’ 원고를 청탁 드리오니,

부디 바쁘시더라도 옥고를 부탁드립니다.


1. 원고매수 : (200자 원고지) 50매 내외

2. 원 고 료 : (정액) 40만 원

3. 원고마감 : 2013년 4월 15일

4. 보내실 곳 : [email protected]


담당자 : 이명하 (직통 031-915-××××)


다시 한번 좋은 원고 투고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3관왕 등단을 축하드리며 저희 문학 산책과 좋은 인연을 계속 만들어 가길 바라겠습니다.


선생님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3년 3월 20일

문학산책 편집부 이명하 올림】


새끼치기했다.

최신 말로 해보자면 나 새끼, 칭찬한다.


4월 15일, 5월 21일.

원고 청탁받은 두 편의 마감일이다.


창사와 문산 여름호 계간지에 내 원고가 실릴 테고 문비는 가을호에 특집으로, 쟁쟁한 비평가들이 쓴 원고와 묶음으로 실릴 테다.

내 원고에서 출발한 특집. 문단의 화두를 주도한 비평 원고. 이 사실이 문단에 퍼지기까진 한 달도 안 걸린다.

문단은 좁고, 말은 빠르다.


계간지가 나오면 원고를 읽고 저마다 원고 청탁을 해 올 테다. 청탁이 쏟아지겠다.


「이 삶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문단의 흐름을 주도할 책임과 의무에서 나는 조금도 게을리할 생각이 없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일 오후 3시 05분에 다시 뵙겠습니다.


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건강하고 의미있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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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허위의식 +5 24.03.31 867 45 16쪽
28 창조되는 기억 +4 24.03.30 866 33 14쪽
27 사수 +2 24.03.29 878 31 15쪽
26 빛의 호위 +7 24.03.28 886 37 14쪽
25 낙타, 사자, 어린이 +2 24.03.27 893 35 14쪽
24 침묵을 등반 삼아 +2 24.03.26 939 38 13쪽
» 파토스 +2 24.03.25 965 38 13쪽
22 선악의 저편 +2 24.03.24 990 44 15쪽
21 시차와 시각차 +3 24.03.23 1,011 44 14쪽
20 불청객들 +1 24.03.22 1,033 44 14쪽
19 휴먼토피아 +5 24.03.21 1,090 55 14쪽
18 아모르 파티 +3 24.03.20 1,132 51 14쪽
17 순종 +2 24.03.19 1,136 48 14쪽
16 니나의 집 +5 24.03.18 1,204 53 15쪽
15 올빼미들 +5 24.03.17 1,208 51 13쪽
14 루 살로메 +4 24.03.17 1,245 51 14쪽
13 오토 픽션 +3 24.03.16 1,281 50 13쪽
12 재현의 윤리 24.03.16 1,298 45 14쪽
11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5 24.03.15 1,324 47 15쪽
10 세상 필요 없는 존재 +2 24.03.15 1,327 43 15쪽
9 김장하는 날 +3 24.03.14 1,361 47 14쪽
8 동굴의 시간 24.03.13 1,405 42 14쪽
7 문장 강화 +2 24.03.12 1,554 44 14쪽
6 스터디 그룹 +3 24.03.11 1,678 50 15쪽
5 갈라파고스 신드롬 +1 24.03.10 1,795 50 13쪽
4 소설 쓰는 철학자 +3 24.03.09 1,920 54 14쪽
3 전생에 니체였다 +6 24.03.08 2,069 5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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