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사웨이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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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5.08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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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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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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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에스텔 1장 (3)

DUMMY

지팡이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은 거대한 파문처럼 퍼져나가다 이내 얇고 투명한 벽으로 변해 공터 전체를 둘러쌌다. 에스텔은 내다볼 수는 있으나 오갈 수는 없는 정사각형의 투명한 공간 속에 갇혔다.


"이게 무슨···?"


"주관자의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을 만들어 냈을 뿐입니다. 자, 그럼 기믹을 시작해 볼까요?"


로트는 각각 금빛, 은빛, 동빛으로 빛나는 광석을 하늘로 던졌다.


"수호의 방패여!"


광석들은 허공에서 하나로 합쳐져 빛나더니 곧 형체를 이루어 커다란 금빛의 방패로 변했다.


방패는 심장이 뛰듯이 작게 고동치고 있었으며 각각 동빛과 은빛으로 빛나는 두 개의 막에 둘러싸인 채 둥둥 떠 있었다.


"상당히 수상해 보이는 방패가 나왔군요. 과연 어떻게 해야 기믹을 파훼할 수 있을지 잘 고민해 보시죠. 간단한 기믹이니 시간은 3분 드리겠습니다."


에스텔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제가 기믹을 파훼한다면 로트 사제님이 다치시는 건 아니겠죠?"


"호오? 절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이거 영광이네요."


에스텔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걱정해서가 아니라 수녀가 사제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는 교리 위반이라 그런 거예요. 오해하지 말아요."


에스텔은 조금 전까지 지팡이를 들이밀며 사제를 겁박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이미 잊어버린 상태였다.


로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기믹을 구현하는 데 쓴 생명력은 물 한두 잔만 마시면 회복될 정도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기믹 수행자가 바로 그 에스텔이지 않습니까. 파훼 당할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 말 후회하지 않겠어요?"


"후회야 살면서 많이 해봤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닐 것 같군요."


에스텔은 지팡이로 땅을 쿵 내려찍으며 엄포를 놓았다.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기운 넘치는 모습을 보니 준비는 다 끝나신 것 같군요. 이만 시작하겠습니다."


로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패 뒤쪽 허공이 일렁이며 하얀 시계가 생성되었다.


째깍. 째깍.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닫힌 공간 속에 울려 퍼지며 검은색 초침이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패는 초침 소리에 호응하듯 공중에 떠서 불길하게 웅웅거리고 있었다.


에스텔은 방패는 일단 내버려두고 먼저 공간을 둘러싼 벽부터 살펴보았다.


벽은 극도로 얇고 유리처럼 투명했다. 표면에 은은한 무지갯빛이 감돌고 있어 경계를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에스텔은 지팡이로 방벽을 두드려 보았다.


얇아 보이는 외관과 별개로 전혀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받은 충격을 모조리 흡수하여 지워버리는 느낌이었다.


벽의 강도나 단단함 같은 굳기의 문제는 아니었다. 결계나 봉인 같은 주술적인 차원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마치 방벽은 절대 깨지지 않는다고 세상의 이치로 정해놓은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차라리 단단한 성벽 같은 질감이었다면 더 강한 타격으로 부숴볼 텐데 마치 허공에 헛손질하는 듯한 기분이라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에스텔은 방패 앞으로 돌아왔다.


슬쩍 곁눈으로 보니, 로트는 한 손을 내밀어 지팡이를 바로 앞에 둥둥 띄워둔 채로 여유롭게 바위에 기대 있었다. 반쯤 드러누운 모양새였다.


"벌써 포기하고 싶어졌나요? 원한다면 기믹을 취소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벌은 받아야겠지만요."


계속 보고 있자니 약이 올라 참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에스텔은 고개를 획 돌리며 쏘아붙였다.


"흥!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세요. 금방 끝낼 테니까요."


에스텔은 방패 너머로 보이는 시계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초침은 어느덧 한 바퀴를 돌기 직전이었다. 3분 주겠다고 했고 한 바퀴를 도는 데 1분이 걸렸으니, 이제 시간은 고작 2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나갔음을 암시하듯 방패의 고동도 약간 커진 느낌이었다.


에스텔은 방패를 둘러싼 막을 바라보며 눈을 쓸지 잠깐 고민했지만 일단 보류했다.


이 능력은 아직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없었으니, 로트가 능력 없이도 파훼가 가능한 기믹을 구성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능력을 남발하면 눈에 피로감이 느껴지고 시력이 떨어지는 등 반동이 꽤 심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에스텔은 일단 지팡이로 방패를 둘러싼 두 개의 막을 두드려보았다. 아까 방벽을 두드렸을 때와 비슷하게 미지의 힘이 충격을 흡수하는 느낌이 들었다.


단, 방벽처럼 모든 충격을 무효로 한다기보다는 일부만 상쇄하는 것 같았다. 정말 강력한 충격을 준다면 부술 수는 있어 보였다.


물론 이는 힘도 시간도 부족한 에스텔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스텔은 생각에 잠겼다.


방패에 접근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보호막을 무력화해야 한다.


만약 보호막이 곧 방패가 가진 능력이라고 가정한다면 그저 우직하게 힘으로 깨뜨릴 수밖에 없다. 보호막을 유지하는 근원이 내부에서 보호받고 있으니 외부에서 보호막을 부수고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그런 구조라면 보호막에 충격을 상쇄하는 힘이 있는 건 불합리하다. 보호막이 상쇄할 수 있는 한계를 넘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파훼할 수 없는 기믹인 셈이니까.


보호막에 충격을 상쇄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보호막을 힘으로 공략하는 방법이 정석은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또한 보호막을 유지하는 힘이 방패와 별개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꼭 파괴하지 않고도 보호막을 해제할 방법이 반드시 있을 거야. 아니면 보호막을 약화하는 요소가 어딘가 있을 수도 있고. 과연 단서는 어디 숨겨져 있을까?'


투명 방벽 내부의 공간을 둘러봐도 보호막을 유지하는 힘의 근원이라던가, 보호막을 해제하는 장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외부에서 힘을 보내오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에스텔은 주문을 외워 보았다.


"질서의 방패."


방패를 감싸는 또 다른 보호막이 만들어졌다. 에스텔이 견습 수녀로서 배운 신성 마법으로, 비록 강도는 약해도 물리력과 마력을 포함한 외부에서 가해지는 모든 힘을 막아내는 보호막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보호막을 세 겹으로 만들었으나 딱히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외부에서 힘을 공급받는 방식은 아닌 것 같았다.


에스텔은 세 겹이 된 보호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애초에 보호막이 외부에서 힘을 공급받고 있다면 보호막이 두 겹이 될 수가 없다. 은빛 보호막을 유지하는 힘이 외부의 동빛 보호막에 막혀 도달할 수 없을 테니까.


에스텔은 황급히 만들었던 보호막을 지워버리고 남은 가능성을 생각했다.


보호막을 유지하는 근원은 반드시 내부 혹은 그 근처에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방패가 보호막의 근원이 아니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상태는 단 하나. 보호막을 유지하는 핵심 장치가 보호막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경우였다.


'그러고 보니 방패가 생각보다 크네....'


로트가 소환한 방패는 기사가 아니라 방패병이 써도 좋을 만큼 컸다.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도 전혀 보이지 않을 만한 크기였다.


"설마!"


에스텔은 급히 방패 뒤로 돌아가 보았다.


방패 뒤에는 동색의 보호막에 같은 색깔의 둥근 보석이 박혀 반짝이고 있었다. 동빛 보호막 너머로 비치는 은색의 보호막도 마찬가지였다.


'예상한 대로네.'


에스텔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깥에 자리한 동빛 보석부터 지팡이로 내려쳤다.


그러자 보석에 금이 가면서 보호막에도 똑같은 형태로 균열이 생겨났다. 에스텔이 계속해서 내리치자, 보석이 부서지면서 보호막도 유리창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조각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같은 방식으로 은빛 보호막도 파괴하자 방패는 이제 무방비로 완전히 노출되었다.


"해냈어!"


에스텔은 어느새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어느새 1분이 더 흘러 초침은 마지막 한 바퀴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방패가 고동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공간 내에 퍼지는 진동은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해졌다.


"대단하군요, 에스텔! 이제 방패를 부수기만 하면 끝입니다. 다만 방패는 보호막처럼 쉽게 부술 수는 없을 겁니다."


로트는 충분한 타격을 가해야 방패가 부서지게끔 만들었다며 보호막을 빨리 해제해서 시간을 벌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1분밖에 안 남았다면 이미 늦었다고 봐야겠죠. 훗."


"으윽!"


로트는 여전히 아까와 똑같이 바위에 기대고 서서 손을 뻗은 상태로 공중에 지팡이를 띄워 두고 있었다.


나머지 한 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여유롭게 누운 모습이 상당히 밉살스러웠다.


저 깐죽거리는 얼굴이 찌푸려지는 모습을 보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나서 에스텔은 급히 방패를 지팡이로 두들겼다.


지팡이가 방패를 타격할 때마다 흠집이 생겨나고 부서지며 파편이 흩날렸다. 유의미한 타격이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로트의 말대로 1분 내로 부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에스텔은 아무래도 능력을 쓸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로트가 그저 재밌는 놀이라고 했을 뿐인 기믹이었지만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에스터는 잠시 심호흡하며 눈을 꼭 감았다.


검은 세상에 연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푸른 빛은 검은 바탕 위에 물감처럼 흩뿌려져 조금씩 차올랐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눈이 부셔 간질거렸다.


푸른 빛은 점점 어둠을 빛으로 채우며 크기를 키웠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처럼 찬란한 별빛이 에스텔의 시야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순간 에스텔은 눈을 번쩍 뜨고 방패를 바라보았다.


세상이 연푸른빛 아래로 겹쳐지며 방패의 중앙에서 살짝 오른쪽 위에 자리 잡은 핵이 보였다.


핵과 이어진 실금은 방패 전체로 퍼져나가 핵을 타격당한 방패가 어떻게 될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약 40초. 에스텔은 지팡이를 꽉 쥐며 핵을 정확히 내리쳤다.


처음 내리쳤을 때는 일견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지팡이를 타고 되돌아오는 묵직한 타격감은 에스텔에게 충분히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에스텔은 더욱 힘을 주어 계속해서 내리쳤다.


두 번째 내리쳤을 때는 핵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실금이 모습을 드러냈다. 희미한 별이 점점 별자리의 형태를 이루며 조금씩 이어졌다.


세 번째 내리쳤을 때는 푸른 빛을 따라 방패 전체에 금이 갔다. 고동이 점점 불규칙해지며 붕괴할 조짐이 보였다. 방패를 둘러싼 금색의 광휘도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다섯 번째 내려쳤을 때는 금이 점점 벌어져 커다란 균열이 되었다. 진동은 거의 멎었으며 단단해 보였던 표면은 어지러이 갈라져 모든 실금이 저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일곱 번째 내리쳤을 때는 퍼져나간 균열이 마침내 가장자리에 닿았다.


쩌저적.


방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이 갈라져 비산하면서 방패는 여러 갈래로 쪼개져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방패가 부서져 떨어지자 막혀 있던 시야가 열리면서 시계가 보였다.


이제 막 6시를 지난 초침은 시간이 아직 30초나 남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쾌락에 가까운 성취감과 온몸에 느껴지는 해방감에 에스텔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헉헉···. 제 승리에요!"


"결국 성공하셨군요. 평범한 수녀의 근력으로는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숨겨둔 수가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뭐,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헉헉.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흐음··· 글쎄요?"


기믹이 파훼 당한 사람치고 로트의 목소리는 아주 또렷했다.


생명력을 끌어다 쓴다느니 잘못하면 죽는다느니 별 호들갑은 다 떨어놓고 저렇게 멀쩡하니 왠지 속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야 승자로서 나중에 추궁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며 에스텔은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검은 바탕 위에 푸른 잔상만이 남은 세상 속에서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째깍. 째깍.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가만히 초침이 가는 소리를 듣고 있던 에스텔은 문득 의문을 가졌다. 기믹이 끝났으면 시계도 멈춰야 하는 거 아닌가? 시계는 기믹과 별개로 그냥 시간만 알려주는 편리한 요소인 건가?


궁금해진 에스텔은 로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트는 여전히 손을 뻗은 상태로 지팡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기, 로트 씨? 시계가...."


에스텔은 불현듯 느껴지는 위화감에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기믹이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로트는 쭉 같은 자세였다. 이미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말이다.


이미 방패는 깨졌는데 왜 저러고 있을까.


마음속에 의혹이 차올랐다. 덩달아 에스텔의 눈초리도 가늘어졌다.


풋.


로트가 곁눈질로 에스텔을 보더니 피식 웃음 지었다.


순간 벼락처럼 불안한 가정이 머리를 스쳤다. 에스텔은 즉시 능력을 쓰고 로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로트가 뻗은 손에서 빠져나온 짙푸른 기운이 지팡이로 모여들고 있는 광경을.


기운이 모여든 지팡이의 끝부분에 커다란 핵이 있었고 가느다란 실금이 지팡이 아래쪽까지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설마!"


에스텔은 급히 몸을 일으켜 로트를 향해 달려갔다.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당장 저 불길한 지팡이를 부숴서라도 멈추어야 했다.


로트와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기에 타격할 수 있는 위치까지 다가가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트의 지팡이까지 약 세 걸음 정도를 남겨둔 위치에서 에스텔은 도약하며 지팡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철컥.


그 순간, 에스텔의 등 뒤에서 초침 소리가 완전히 멎었다.


"안타깝군요. 기믹은 실패입니다."


로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팡이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에스텔을 뒤로 날려 보냈다.


"꺄악!"


로트의 지팡이는 공중으로 높이 날아올라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봐도 닿지 않는 높은 곳에서 고고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에스텔은 그대로 주저앉아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찬란한 광휘를 보며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걸.


지팡이 끝이 하얗게 타오르며 곧 터질 듯이 거대한 빛이 모여들었다. 로트가 말했던 강력한 타격이란 게 저걸 말하는 걸까.


강렬한 빛이 점점 모여들고 귀를 때리는 소음이 점점 심해짐에 따라 에스텔의 얼굴도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안돼!"


에스텔은 빛이 터지기 직전, 그만 눈을 꼭 감아버렸다.


툭.


"아야!"


꿀밤을 때리는 듯한 가벼운 타격에 에스텔은 슬며시 눈을 떴다. 아까까지 터질 듯이 빛나던 지팡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바로 앞에 떨어져 있었다.


쓰린 이마를 매만지며 혼란스러워하는 에스텔에게 로트가 다가왔다.


"이게 제가 내리는 벌입니다."


로트는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터질 것처럼 겁주다가 마지막에 맥없이 떨어지는 게 마무리였는데 그냥 눈을 감아버리시는군요. 기믹 수행이 안되면 관람이라도 제대로 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에스텔은 로트가 지팡이를 주워 들어 흙을 털어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농락당했음을 깨닫고 목소리를 높였다.


"절 속였군요! 처음부터 지팡이를 깨는 게 파훼법일 줄이야."


"맞습니다. 와서 한 대만 때리셨으면 됐는데 꽤 멀리 돌아가시더군요."


기믹을 구현하는 데에 물 한두 잔 분량의 생명력만 사용했다더니 정말로 어이없으면서도 간단한 해법이었다.


"정말 로트 사제님다운 기만적인 파훼법이네요. 방패가 수상해 보이지 않냐고 해놓고 본체는 지팡이라니··· 이게 뭐예요!"


에스텔은 씩씩거리며 쏘아붙였다.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데 뭐가 수호의 방패인가요! 정말이지 짜증 나서 한 대 때려주고 싶네요!"


"주관자는 기믹을 파훼 당하지 않아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 사람의 말을 함부로 믿으시면 안 되죠. 애초에 제가 1년 전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를 믿지 말라고요."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사람을 멋대로 속여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딱히 속이진 않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중요한 정보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로트가 씨익 웃었다.


"예컨대 에스텔 수녀님의 푸른 눈처럼 말입니다."


에스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그건···!"


생각해 보니 아까 능력을 쓴 채로 대놓고 쳐다봤으니 들키지 않으면 이상한 상황이었다.


"뭐, 그런 능력이 있으리라 추측은 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힘이 약해 보이는데 얼음을 잘 깨시길래 봤더니 특정한 지점을 여러 번 반복해서 타격하시더군요?"


"보고 계셨군요···"


매일 하는 해빙 의식이니 따지고 보면 로트의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이상하리라.


"여러 번 두드리며 약한 부분을 찾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계속 같은 부분을 때려서 깨는 걸 보고 촉각보다는 시각에 관련된 능력이라 생각은 했었지요. 이를테면 사물의 약점을 보는 눈이라던가 말이죠."


"···!"


저렇게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줄이야. 괜히 밝혔다가 무슨 이상한 짓을 시킬지 몰라 숨겼던 건데 이미 알고 있었다니.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에스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로트 사제님의 눈을 못 속이겠네요. 이미 들켰을 줄이야."


"세상에 간혹 다른 사람보다 더 강력한 질서의 권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특별한 초능력을 발현할 수 있기에 세간에서 초인이라고 일컫는다고 하더군요."


"초인이라···. 엄청 거창한 표현이네요."


"초능력은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거나 잠재력을 개방해 새로운 힘을 이끌어내는 식으로 발현됩니다. 에스텔 씨는 전자에 해당하는 것 같군요."


로트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기뻐하셔도 좋습니다. 에스텔 수녀님은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대단한 사람인 셈이니까요."


"그, 그런가요? 하하, 로트 씨가 저를 칭찬하시다니 별일이 다 있네요."


에스텔은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이에 로트가 슬쩍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도 저한테 지셨군요?"


"···."


"능력 없이도 파훼할 수 있는 쉬운 기믹이었는데 그걸 가장 적합한 능력을 갖추고도 실패했다? 이건 다른 의미로 에스텔 수녀님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증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거 놀랍군요. 다음에는 소꿉놀이나 다름없는 정말 간단한 기믹을 준비하던가 해야···."


쿵.


에스텔이 지팡이를 내려찍으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후후후. 로트 사제님.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신 것 같네요?"


푸르게 반짝이는 눈이 로트를 향했다. 그 시선의 끝은 로트의 정수리에 닿아 있었다.


"크흠. 그러면 기믹은 다 보여드렸으니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슬슬 예배 시간이거든요.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저보다 발이 느리시면서 괜찮으시겠어요?"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만!"


로트는 그대로 수도원 안으로 뛰어 들어가 긴 복도를 따라 달아났다. 에스텔이 그 뒤를 쫓았다. 지팡이를 치켜들고 사제를 뒤쫓는 수녀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 떨어진 죄인을 쫓는 악귀와 같았다.


그 모든 불경한 광경을 눈 덮인 여신상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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