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사웨이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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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8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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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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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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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1장 (11)

DUMMY

에스텔은 아이들과 얼어붙은 절벽을 지나 눈밭을 걸어가고 있었다.


당장 가까운 도시까지 못해도 사흘은 꼬박 걸어야 했기에 시작부터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가는 길에 눈송이가 빽빽하게 내려 시야를 가렸고, 수시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온기를 빼앗아 갔다.


이에 에스텔은 질서의 방패로 아이들에게 덮쳐 오는 추위를 막아내며 나아갔다. 수도원에서도 같은 용도로 유용하게 써먹었기에 제법 숙련도가 높았다.


그런 연유로 아이들에게 마법을 전부 걸어줘도 무리가 없었다.


다만 오래 유지하기에는 마나가 부족해서 하루의 대부분은 추위를 맨몸으로 버텨야 했다.


아이들은 간혹 기침을 내뱉긴 했지만 애초에 추운 지역에서 자라서 그런지 뒤처지는 일 없이 잘 따라왔다.


계속 걷다 보니 슬슬 밤이 되어 더 이상 움직이기 어려워졌다.


에스텔은 야숙할 만한 장소를 찾아 주변을 탐색했다.


평지를 벗어나 산 중턱을 뒤지다 보니 땅이 적당히 파여 있는 구덩이를 찾을 수 있었다. 바위와 나무에 둘러싸여 바람이 덜 불어서 제법 아늑해 보였다.


근처에 동굴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당장 이보다 나은 장소를 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에스텔은 망설임 없이 아이들과 잠자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이들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다 보니 역할 분배가 어려울 줄 알았으나 의외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에스텔은 견습 수녀로서 수도원 내 작업에 자주 참여하였기에 요리나 불 피우기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아이들도 열악한 마을 생활에 찌들어서 그런지 알아서 장작을 구해 오거나 돌부리를 솎아내어 잠자리를 직접 만드는 등 요령 있게 제 몫을 해냈다.


오히려 의견 충돌이 있었던 부분은 주변 정리를 끝내고 식사를 할 때였다.


에스텔이 커다란 솥에 스튜를 끓이고 나서 아이들을 불렀다.


"여러분. 저녁 먹으러 오세요."


우가 말했다.


"또 먹는다고? 수녀 누나는 돼지야?"


"우! 그게 무슨···!"


밥을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라던 우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더 충격적이었다.


옆에서 쿠가 거들었다.


"사람이 어떻게 매일 세 끼를 챙겨 먹어? 그렇게 자주 챙겨 먹으면 식량이 모자라서 굶어 죽을 거야."


"수녀 언니가 우리들한테 마법을 쓴다고 고생했잖아. 배가 많이 고프겠지. 너무 그러지 마."


타이르듯이 말하는 로나의 말에 실라가 방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도 이렇게 하루 세 끼를 먹는 건 처음이야. 난 좋을지도?"


에스텔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지금 우리는 열흘간 쉬지 않고 걸어야 한답니다. 밥을 안 챙겨 먹으면 걸을 힘이 안 나서 매일 걷는 거리도 짧아지겠죠. 그러면 도시까지 도착하는 시간도 늦어져서 모두가 힘들어져요. 그러니 무조건 세끼를 챙겨 먹고 많이 걷는 편이 낫답니다. 아시겠어요?"


"···."


긴 열변에도 우와 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실라는 말하지 않아도 다 이해한다는 듯이 싱글거리고 있었다.


에스텔은 울분에 차 소리를 빽 질렀다.


"제가 돼지인 게 아니라 다 깊은 뜻이 있는 거예요!"


우가 물었다.


"수녀 누나. 방금 화낸 거야?"


"화 안 났어요. 하지만···"


에스텔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한 번 더 돼지라고 말하면 참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불 옆에서도 느껴지는 한기에 아이들은 몸을 떨었다.


"우와··· 수녀 언니. 방금 완전 마귀할멈 같았어."


"진짜 동화가 따로 없네."


"수틀리면 스튜에 넣어버릴지도 몰라."


로나가 말했다.


"너희들 자꾸 그러다가 혼난다?"


에스텔이 짐짓 울상을 지었다.


"흑. 역시 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로나뿐이에요. 특별히 스튜를 더 많이 드리죠."


로나는 살며시 웃으며 그릇을 받아들었다.


"헤헤. 감사합니다."


쿠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촌장님 손녀 아니랄까 봐 그새 수녀님의 환심을 사다니··· 대단한 수완이네."


"로나··· 음흉해."


"저저! 배신자!"


에스텔이 은근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압박했다.


"그쪽도 스튜를 받고 싶으면 말을 가려서 하는 편이 좋을 거랍니다?"


우가 부당한 대우에 분개하여 소리쳤다.


"크윽. 먹을 걸로 협박하다니. 비겁하다!"


"그래서 안 먹을 거예요?"


에스텔이 손을 뻗어 아이들 앞에 스튜를 내밀었다. 채소만 들어갔으면 몰라도 에스텔이 아껴 놓은 소시지까지 넣은 스튜였다.


하얀 김과 함께 구수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왔다. 고기 특유의 풍미 가득한 향이 코를 찔렀다.


아이들은 절로 군침을 꿀꺽 삼켰다. 오랫동안 기아에 시달렸던 배고픈 어린이들에게 고기 스튜는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우는 그대로 그릇을 받아들며 헤실헤실 웃음 지었다.


"제 소원이 뭔지 아시면서 헤헤···."


쿠가 약삭빠르게 태도를 바꾸며 거들었다.


"사실 여행은 식후경이지."


"뭐야! 나도 소원 바꿀래!"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먼저 먹겠다며 달려들었고 스튜가 깔끔하게 비워지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저녁을 달라며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3일째가 되자 확실히 아이들의 체력이 좋아져서 첫날에 비해 훨씬 많이 걸을 수 있었다.


그만큼 배낭이 가벼워졌으나 최선의 선택이었으니 후회는 없었다.


다만 촌장이 열흘을 아슬아슬하게 버틸 수 있을 거라며 건네준 식량이 하루 두 끼를 기준으로 한 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살짝 후회하긴 했다.


에스텔은 도시에 도착하면 다른 물품보다 식량을 위주로 구매하기로 마음먹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식량이 다 떨어지기 전, 4일 차 저녁에 목표로 했던 도시 엘타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르티아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 중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 엘타페.


노더니아 수도원도 엘타페를 통해 물품을 공급받기 때문에 그 이름만큼은 익숙했다.


척박한 환경을 고려하면 꽤 큰 도시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훨씬 더 거대했다.


하늘 높이 솟은 성당의 첨탑, 이름 모를 가문의 대저택 등 건물들이 하나 같이 노더니아 수도원보다 크고 화려했다.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도시의 전경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특히 쿠가 눈빛을 반짝이며 거리를 구경하느라 툭하면 뒤처지곤 했다.


이에 에스텔은 직접 아이들의 손을 잡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에스텔은 먼저 여관으로 가 방을 잡았다. 가진 돈을 생각하면 방 하나조차 사치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도시까지 와서 아이들을 밖에다 재울 수는 없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아이들은 많이 피곤했는지 금방 잠들었다.


에스텔은 숨소리만 남은 조용한 방 안에서 돈 꾸러미를 꺼냈다. 거기서 다섯 명 분의 식량 구입에 필요한 돈을 계산해서 밖으로 빼냈다.


그러자 나름 두둑했던 돈 꾸러미가 바닥을 보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애초에 순례 자금이 에스텔 한 명을 위해 책정한 금액이다 보니 5명의 입을 충당하기에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닷새에서 엿새는 걸어야 하는데 걱정이 들었다. 세 끼를 먹였던 게 최선의 판단이긴 했으나 부족한 자금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에스텔은 고민 끝에 시장을 돌면서 보았던 큰 성당을 떠올렸다.


'만약 아이들을 여기 성당에 맡긴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한다면 에스텔은 남은 순례 자금으로 몇 군데를 더 여유롭게 순례한 다음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돈도 꽤 남을 것 같았다.


반면 아이들을 글로리아 수도원까지 데려가기로 한다면 노더니아로 돌아갈 때 써야 할 여유자금조차 모조리 아이들에게 투자해야 했다. 그러고도 모자랄 가능성이 높았다.


에스텔은 심란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이 떠오르며 점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일단 성당에 한 번 가볼까···."


에스텔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여관을 나섰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니 성당까지 그리 오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에스텔은 닫힌 철문 앞에 서서 성당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첨탑 중간에 새겨진 커다란 글귀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바다는 얼지 않는다.'


여신교에 전해지는 오랜 격언이었다.


이 위대한 가르침에 따라 엘타페 성당은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크고 웅장하게 지어졌다. 그 덕에 중앙 교구에 자리한 성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가 컸다.


울타리 밖에서 바라보니 아이들을 재울만한 숙소도 노더니아 수도원보다 크고 깔끔해 보였고 자체적으로 큰 식당도 갖추고 있었다.


창문 너머 불빛 아래로 꽤 많은 수녀와 사제들이 지나다니는 것으로 보아 아이들을 교육할 인력도 충분해 보였다.


에스텔은 벽 틈새로 파고드는 추위만 빼면 노더니아 수도원의 시설에 딱히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외딴곳에 있는 수도원치고 꽤 괜찮다고 생각하며 지금껏 지내왔다.


그런 자족감을 깨부수듯 엘타페 성당은 모든 면에서 노더니아 수도원보다 뛰어났다. 시설, 인력, 규모 등 어떤 요소를 비교해도 감히 노더니아 수도원이 낫다고 말할 부분이 없었다.


차라리 이곳에 버려졌으면 더 생활이 윤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웅장한 성당을 보았음에도 에스텔은 아이들을 맡기겠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니까.


저 안에 빙화가 잠입해 있는 건 아닌지, 아이들을 해코지하려는 악한 사제는 없는지, 출신이 불분명한 아이라도 환영해 주는 곳인지.


그 무엇도 그저 밖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신을 모시는 사람들이니 괜찮을 것이라는 얄팍한 믿음만 가지고 아이들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저 덮어놓고 믿는다고 말하기에 에스텔이 짊어진 책임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1년 전, 로트에게 사제니까 믿는다고 말하던 때에는 설령 노예상에 팔려나가더라도 신념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 당시 교리는 에스텔에게 하나뿐인 진리였으니까.


하지만 아이들을 인도해야 하는 지금은 상대가 수도자라는 이유만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이 알아버린 현재의 에스텔은 도저히 아이들의 삶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신념을 시험할 자신이 없었다.


쉽게 내뱉었던 믿음이란 단어가 이렇게 무거웠던가.


"누군가를 믿는다는 결정은 알지 못하면 쉽게 내릴 수 없는 거구나···."


에스텔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여관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 날 아침, 수녀 한 명과 아이 네 명이 두툼한 배낭을 둘러매고 엘타페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떠난 여관방 안에는 텅 빈 돈 꾸러미만 한 자루 남아 있었다.



**


엘타페에서 식량을 보충했음에도 불구하고 배낭은 마을에서 떠나던 시점보다 다소 가벼웠다.


덕분에 발걸음은 빨랐으나 먹는 양이 줄어든 탓에 체력이 줄어 매일 걷는 거리는 비슷했다.


처음 떠날 때처럼 여유롭게 먹이고 싶었으나 이제부터는 도시에 들르는 일 없이 글로리아 수도원까지 쭉 가야 했다. 먹는 양을 함부로 늘렸다간 나중엔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두 끼만 먹는 방안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걸어야 했기에 세 끼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세 끼를 먹되 먹는 양을 줄이는 것뿐이었다.


아이들이 굶주림에 익숙한 탓인지 이 정도는 견뎌 주었다. 다만 아직 어려서 그런지 힘들어하는 모습이 조금씩 티가 났다.


에스텔은 아이들이 굶주림을 잊을 수 있도록 집중할 무언가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는데 그중 하나가 밤에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평소 잠을 잘 못 자던 실라가 에스텔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잠들고 싶다고 부탁한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 실라의 요청을 받은 날, 에스텔은 자신이 아는 이야기인 영류성전 창세기의 내용을 풀어 놓았다.


"태초에 엘리야께서 오르티아를 창조하셨느니라. 여신께서 가라사대 질서가 있으라 하심에 온 세상 혼돈이 인과와 규칙으로 화하였으니···"


약 10분쯤 떠들었을까. 효과가 있었는지 아이들이 평소보다 훨씬 빨리 잠들긴 했다.


에스텔은 뿌듯한 마음에 아예 성전을 꺼내 이틀에 걸쳐 아이들에게 그 내용을 들려주었고 매일 일찍 잠드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이상하게도 그 이틀간 아이들이 유독 피곤해하고 걸음걸이도 느렸지만 에스텔은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의 피로가 누적되었을 뿐이라 여기고 아이들을 더 일찍 재워야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그렇게 엘타페를 출발한 지 4일째 되는 날 밤이었다. 에스텔은 또다시 배낭에서 두꺼운 성전을 꺼내 들었다.


"오늘도 이야기를 이어서 해볼까요?"


쿠가 에스텔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탄식했다.


"여신님. 저희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차라리 하루 종일 굶는 게 나을지도 몰라..."


로나가 실라의 등을 떠밀며 채근했다.


"네가 시작했잖아. 어떻게 좀 해봐."


"흑흑. 미안해, 얘들아. 내가 잘못했어···."


실라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이 불상사를 해결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듯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나는 열심히 책장을 넘기는 에스텔에게 다가가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언니. 오늘은 성전 낭독 말고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해 주면 안 될까? 수도원 생활 중에 재미있었던 일이라던가···"


"음··· 지금까지가 제가 아는 가장 재밌는 이야기였는데요. 매일 성전을 외우는 게 제 일과였거든요."


로나와 뒤에서 듣고 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일시에 딱딱하게 굳었다.


우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젠 틀렸어."


"여신님. 제발 저희를 용서해 주세요···."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여기까진가···."


아이들이 절망감을 맛보는 사이 에스텔은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약 두 달 전에 재밌는 놀이를 하긴 했었다.


"재밌는 일이라···. 생각해 보니 있긴 하네요."


순간 로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대략 2개월 전에 로트 사제님이 저에게 기믹이란 걸 알려주셨는데···"


아이들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당장 알려주세요!"


"사실 예전부터 기믹에 관심이 많았어요!"


"살려주세요!"


"야! 본심을 말하면 어떡해!"


에스텔은 아이들의 관심에 눈물을 훔쳤다.


"왜 갑자기 존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제 이야기에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시다니 수녀로서 정말 기쁘네요."


에스텔은 성전을 배낭에 집어넣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로트 씨가 재밌는 걸 알려주겠다며 저를 불러냈는데···"


에스텔의 이야기는 새벽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이들은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로트 씨야!"


"기믹은 위대한 질서의 산물이 틀림없어."


"사제님··· 최고···."


"이게... 사랑일까?"


에스텔은 황홀경에 빠진 아이들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재미있었나?


에스텔은 그날부터 로트와의 추억을 아이들에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원래는 일찍 재우려는 의도로 시작한 이야기는 점점 더 이목을 끌어 아이들이 늦게 잠드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그러고도 성전을 읽어줬을 때보다 다음 날에 더 쌩쌩한 점이 의문스럽긴 했지만 좋은 현상이었으므로 그냥 넘어갔다.


그렇게 순조로운 사흘을 보낸 후 엘타페에서 출발한 지 7일째 되는 밤이었다.


한창 즐겁게 로트와 만난 이야기를 하던 도중 로나가 물었다.


"수녀 언니 이야기에는 매번 로트 사제님이 나오네. 혹시 로트 사제님을 좋아해?"


에스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좋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우가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녀 누나는 그것도 몰라? 수도원에서만 살았다더니 진짜 숙맥이네."


"누나 보기보다 순수하구나."


"동화에 나오는 공주님도 저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아이들의 말에 에스텔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수도원에서 그런 표현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가르쳐 주실래요?"


로나가 말했다.


"음···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에게 가지는 애정 같은 거라 해야 하나."


"그런가요. 특별한 의미라..."


에스텔은 말꼬리를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로트 씨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는 교리밖에 모르던 나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준 선구자였다. 시몬 사제의 세뇌 교육에서 나를 구원한 성자이기도 했다. 나에게 진실을 바라볼 용기를 주었으며 믿음이란 말의 무게를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했다.


에스텔은 생각했다. 어쩌면 내게 진정한 지혜를 주었던 사람은 로트 씨가 아니었을까 하고.


적어도 로트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람임은 분명했다.


다만 그에게 애정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로트에게는 지금껏 보여준 모든 진의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단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으니까.


로트 씨. 왜 당신은 이단인 건가요. 매번 거짓으로 나를 속일 거라면 차라리 이단이라고 말해주지 그랬나요. 그럼, 그것도 거짓말이라고 믿었을 텐데.


에스텔은 빨리 로트에게 돌아가 묻고 싶었다.


그가 거짓이라는 껍질 속에 품은 알맹이가 무엇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를 온전히 바라보았을 때 자신이 가지는 감정이 무엇일지 확인하고 싶었다.


에스텔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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