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사웨이 시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페이스트
작품등록일 :
2024.05.08 12:18
최근연재일 :
2024.07.18 20:40
연재수 :
53 회
조회수 :
820
추천수 :
52
글자수 :
380,628

작성
24.05.24 20:40
조회
11
추천
1
글자
28쪽

에스텔 1장 (13)

DUMMY

로트와 글로리아가 처음 만난 건 글로리아가 막 정식 수녀가 되었을 때였다.


언제부턴가 수녀들 사이에서 한 가지 소문이 돌았다.


수도원 개방 시간마다 혼자 찾아오는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아이는 특이하게도 예배 시간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예배가 끝나면 찾아와 조용히 책만 읽다가 돌아간다고 했다.


글로리아는 호기심에 예배당으로 가보았고 거기서 조용히 성전을 읽고 있는 한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글로리아는 속으로 몇 가지 다정한 인사말을 생각하며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 가 보니 아이는 턱을 괴고 마치 소설을 읽듯이 성전을 휙휙 넘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글로리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성전은 그렇게 읽는 게 아닌데요···"


그 말에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하죠?"


"여신님이 남긴 말씀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죠. 모든 구절을 곱씹어 보고 의미를 헤아리며 여신님의 거룩한 뜻을 일부나마 이해하고자 노력하여야 해요. 그래야 진정으로 성전을 읽었다고 할 수 있답니다."


"그렇게 읽으면 뭐가 좋나요?"


"여신님의 자애로움을 깨닫고 더 깊은 신앙심을 가질 수 있죠. 신앙심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세상에 갖고 태어난 사명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답니다."


아이는 사명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더니 조금 관심이 생긴 듯 글로리아와 제대로 눈을 맞추었다.


"그럼 수녀님의 사명은 뭔가요?"


"제 사명이요? 여신님을 믿고 교리를 실천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죠."


글로리아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지금처럼 어린양에게 조언을 건네 바른길로 인도하는 일도 제 사명이랍니다. 당신도 저와 함께 여신님이 안배하신 길을 함께 걷지 않으시겠어요?"


"수녀님이 말씀하시는 바른길이란 여신께 귀의하는 삶인가요?"


"그렇죠. 여신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세상 모든 이를 고통에서 구원하는 삶. 그보다 찬란한 삶은 없으리라 믿고 있답니다."


글로리아의 눈은 확신에 차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로 올곧은 사명이네요. 수녀님은 참으로 순수하고 무구하신 분이시군요."


아이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렇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는다면 조금은 편해질 수 있으려나..."


"네?"


아이는 대답 없이 책을 덮고는 일어나서 예배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글로리아가 급히 물었다.


"잠깐만요.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아이는 잠시 뒤돌아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트에요."


로트는 그 말을 끝으로 예배당 밖을 향해 점점 멀어져갔다.


어쩐지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로트는 그 후로도 꾸준히 예배당에 찾아왔다.


주로 혼자 구석에서 생각에 잠겨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그때마다 글로리아가 다가가 말을 걸곤 했다.


길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으나 글로리아는 아랑곳하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로트! 당신이 아무리 수도원 소속이 아니라지만 예배당에 왔으면 여신님께 기도는 드려야지요."


"아까 드렸는데요?"


"그냥 손을 모으고 있었을 뿐이잖아요. 시늉만 하지 말고 마음 깊이 여신님을 떠올리며 기도하세요."


"글쎄요. 믿지도 않으면서 기도를 올린다는 건 오히려 여신님을 모독하는 것 아닐까요? 차라리 경전이나 읽을래요."


"어차피 또 대충 읽을 거잖아요. 당신에겐 진심이 너무나도 부족해요."


"저는 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고 있는데요. 이게 진짜 진심이 아닐까요."


"그런 건 진심이 아니에요!"


"제 마음속 목소리가 진심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진심이죠?"


"그건 충동에 불과해요. 진정한 목소리는 교리를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답니다."


"그럼 수녀님의 진심은 교리에서 오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긴, 그자도 수녀님처럼 진심이었죠."


로트는 어린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글로리아가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도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날의 대화를 전후로 로트가 수도원에 찾아오는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글로리아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싶어 초조한 마음에 수도원을 돌아다니며 로트에 대해 수소문했다.


그러나 수도원 내에서 로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탓에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수도원 생활을 이어 나가던 도중이었다.


어느 날 수도원을 찾아온 어떤 남자에게서 로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로트의 친척이라고 밝히며 로트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낯선 얼굴에 방만한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살면서 수도원을 처음으로 방문한 사람 같았다.


그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글로리아는 그의 말을 적당히 걸러 들으며 로트가 처한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로트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모종의 사고로 아버지까지 잃은 상태였다. 가까운 혈육인 삼촌도 방랑벽이 심해 아이를 맡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로트 주변에 믿을 만한 어른이 하나도 없었다.


남은 사람이라곤 죄다 상인이었던 아버지의 유산을 노리는 지인들뿐이었다. 그들은 죄다 아버지의 먼 친척이라고 주장하며 로트에게 접근했고 이 남자도 물론 그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매일 찾아와서 수상한 서류를 들이밀고, 달콤한 말로 로트를 속이려 들었다. 로트가 거부하자 은근히 협박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대놓고 상스러운 욕을 지껄이기도 했다.


전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환경이었다.


"그러니까 수녀님. 그 영악한 자식이 수도원으로 숨어들었지 뭡니까. 감히 신성한 장소를 제 몸을 보전하는 방패로 써먹다니 참으로 불경하지 않습니까."


그는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글로리아 앞에서 알랑거렸다.


"저런 신앙심도 없는 놈이 수도원을 기만하지 못하도록 출입을 금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언제 쥐새끼처럼 다시 숨어들지 모를 일이지 않습니까. 헤헤···."


글로리아는 로트가 지금껏 수도원에 찾아왔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예배당에 있는 동안은 잠시나마 저런 추악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놈의 집을 뒤져봤는데 아무도 없더군요. 분명히 수도원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찾으시면 꼭 밖으로 쫓아내 주십쇼. 제 앞으로 데려와 주시면 더 좋고요."


"로트가 오늘 집에 없었다는 정보 하나는 쓸만하네요. 덕분에 누굴 출입 금지해야 할지 확실히 알겠어요."


"역시 수녀님은 말이 잘 통하시는군요."


"기다리고 계시면 요청에 걸맞는 대우를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글로리아는 경비를 맡은 수도자에게 난동꾼이 들어왔으니 처리해달라 부탁한 다음 로트를 찾아 나섰다.


먼저 예배당부터 가보았으나 로트가 늘 앉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이후 수도원에서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은 다 돌아다녔지만, 로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주친 수녀들에게 물어보아도 전부 본 적 없다고 답할 뿐이었다.


몇 번을 허탕 친 끝에 글로리아는 로트의 성격상 이목을 끄는 장소에서 찾기는 어렵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때부터 그녀는 인적이 드문 공간을 위주로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수도원 전체를 누비는 긴 탐색이 이어졌고 마침내 성전을 보관하는 서고 구석에서 로트를 찾을 수 있었다.


"로트! 여기 있었군요."


로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름 깔끔했던 머리는 헝클어졌고 눈은 퀭해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다.


"지금까지 절 찾아다니신 건가요? 수녀님은 열정이 넘치시네요."


"이야기는 들었어요. 예배당으로 돌아오세요. 제가 아무도 당신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조치할 테니까요. 원한다면 하루 종일 수도원에 있어도 괜찮아요."


글로리아의 제안에도 로트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을 뿐이었다.


"수녀님은 왜 저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시나요?"


"교리에서 어린 양을 외면하지 말고 가르쳐 바른길로 이끌라는 말씀이 있었으니까요."


"그럼 수녀님은 교리에 따를 뿐인가요."


어쩐지 말에 가시가 돋친 듯했으나 글로리아는 평생 믿고 살아온 대로 대답하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떠올릴 수 없었다.


"네. 그게 제 사명이니까요."


"교리에 따른 결과 누군가가 불행해진다고 해도요?"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또한 여신님의 뜻이라고 믿어요. 고난을 겪고 더 신실한 자가 되기를 바라는 여신님의 뜻이겠죠."


로트는 글로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수녀님의 진심인가요."


어쩐지 마음속에 불안감이 차올랐으나 글로리아는 자신의 신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네. 여신님의 뜻이 곧 제 뜻이에요."


로트는 슬픈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군요... 수녀님도 결국 다르지 않으시네요."


로트는 글로리아를 지나쳐 터덜터덜 서고를 걸어 나갔다.


"잠깐만요! 어딜 가는 건가요, 로트!"


애타는 외침에도 로트는 대답 없이 회랑 사이로 멀어져갔다.


여전히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또 무엇인가 어긋난 걸까. 내가 가진 믿음으로 최대한의 진심을 보이려 했을 뿐인데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마음만 커질 뿐이었다.


결국 로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글로리아는 손을 뻗지 못했다.


그 후로 로트는 수도원에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로트가 사라진 후에도 욕망의 손길은 계속해서 뻗쳐 왔다.


로트가 언젠가 수도원에 나타날 거라고 믿는 것인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사람들이 개방 시간마다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배나 기도에 관심도 없으면서 예배당 주변을 기웃거리며 로트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수도원 입구에서 죽치고 앉아 하루 종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무뢰한들을 볼 때마다 호통쳐서 쫓아내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지독하고 광기에 찬 그들의 행태를 볼 때마다 글로리아는 애가 탔다. 로트가 밖에서 나쁜 짓을 당할까 봐 걱정되어 도저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도원에 묶인 수녀의 몸으로는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글로리아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던 어느 날이었다.


작업 시간이 되어 수도원 뒤편을 청소하고 있는데 입구 철문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로리아가 나가 보니 수도원 광장에 번쩍이는 황금을 비롯한 귀금속과 엄청난 양의 금화가 쌓여 있었다.


산더미 같은 재물 뒤편에는 커다란 짐마차가 있었고 로트는 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가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로트가 상속받은 재산을 모조리 수도원에 기부하겠다고 나선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로트는 이 재산을 잠시나마 도피처를 제공해 주었던 수도원에서 써 달라고 말했다.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지치고 생기 없는 말투였다.


글로리아는 인파를 뚫고 로트에게 다가가 물었다.


"로트. 이게 무슨 짓인가요?"


로트가 활짝 웃음 지었다.


"아. 글로리아 수녀님이시네요. 잘 지내셨나요?"


로트의 웃음은 해맑았으나 글로리아가 보기에는 조각나기 직전의 거울처럼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전혀요. 로트가 걱정돼서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어요."


"그랬다면 미안해요."


로트는 마차에서 번쩍이는 보석함을 꺼내 내밀었다.


"사죄의 의미로 제가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에요. 바른길을 가는 사람들을 위해 써주세요. 수녀님의 바라는 이상 자체는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럴 순 없어요. 이러면 당신에게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로트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수녀님. 저에게는 단 하루도 필요한 적이 없었던 것들이거든요."


아무런 욕심이 없어 보이는 로트를 보며 글로리아는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한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그녀는 숫제 애원하듯이 매달렸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이럴 거면 차라리 수도원에서 지내도록 하세요. 당신이 성인이 될 때까지 수도원에서 책임지고 돌봐드릴 테니까요."


"글쎄요."


로트가 글로리아를 쳐다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글로리아 수녀님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참으로 공허한 눈빛이었다.


마치 날카롭고 긴 가시로 가슴을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글로리아는 그제서야 로트가 매번 쓸쓸히 뒤돌아섰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평생 여신을 믿으며 교리에 따라 행동했지만,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매일 신의 이름을 빌려 믿음을 설파하는 수녀가 정작 남에게 믿음을 주는 방법은 전혀 모른다니.


누구보다 믿음을 필요로 하는 아이에게 자신 있게 나를 믿으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꼴이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무언가 말을 꺼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여신님의 말씀을 떠올려봐도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가슴에 무언가가 차오르고 있는데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어 답답함만 쌓여갔다.


로트는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처음 예배당에서 보았던 때와 같은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그때 글로리아는 느꼈다. 지금 이 아이를 보내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드니 도저히 로트를 보낼 수가 없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작은 몸이 마치 꺼져가는 촛불같이 너무나 위태롭고 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터질 듯한 마음에 글로리아는 저도 모르게 로트를 쫓아가 끌어안아 버렸다.


로트가 휘둥그런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저는 평생 수녀로 살아와 믿음을 보내는 건 익숙하지만 믿음을 받는 방법은 잘 몰라요. 제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글로리아가 로트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하지만 이런 제가 확신을 담아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당신에게 믿음을 주고 싶다는 마음만은 진심이라는 거예요."


말하다 보니 어쩐지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니 흑... 저를 믿지 말고... 그냥 지켜봐 주시면 안 될까요? 잠깐이라도 좋아요. 제 옆에서 제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그 눈으로 지켜봐 주세요. 언젠가... 당신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면 그때는 떠나도 말리지 않을테니까... 지금은 부디 이곳에 남아 주세요."


마음속으로 로트를 보며 느끼는 안타까움과 한 아이의 구원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글로리아는 그만 참지 못하고 펑펑 울어버렸다.


"흐윽··· 흑···."


울고 싶지 않았는데.


한 아이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자신의 무심함이 부끄러웠다.


한 아이의 믿음조차 얻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가슴 아팠다.


꼭 끌어안은 두 손에서 느껴지는 로트의 연약함이 전부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옷을 적셨다.


로트는 놀란 눈으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몇 번을 훔쳐내도 눈물이 그치지 않아 손수건이 푹 젖을 때까지 계속 닦아 주어야 했다.


정말 누가 아이인지 모를 광경이었다. 수치심에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더 이상 나올 눈물조차 없어지자, 글로리아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로트는 눈물 자국이 남지 않도록 정성스레 눈가를 닦아주었다. 글로리아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수녀님."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자 로트가 나지막이 물었다.


"방금 하신 말씀이 수녀님의 진심인가요."


글로리아는 몸을 떨며 힘겹게 답했다.


"네···"


로트가 미소 지었다.


"알겠어요. 그럼, 여기 남을게요."


참으로 희미한 미소였지만 글로리아가 본 그 어떤 표정보다 밝았다.


글로리아는 정말 기뻤다. 그녀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로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만 글로리아가 생각했던 최선이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의욕만 넘쳤다는 뜻이나 다름없어서 로트 앞에서 실수를 많이 했다.


"분명 정원에 색깔별로 꽃씨를 심자고 하시지 않았나요?"


"네... 그렇죠."


"바구니를 엎어서 씨앗을 죄다 섞어버리시면 어떻게 심죠?"


"다시 분류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정원 전체에 심어야 해서 양이 만만치 않은데요. 게다가 씨앗 종류만 해도 10가지가 넘잖아요."


"그래도 해야죠···. 어쩌겠어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제가 엎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수녀장님께 들키면 혼난단 말이에요."


"아잇, 정말!"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씨앗 고르기만 했었다던가.


"수녀님. 이거 수녀님이 직접 가져온 카드 아닌가요?"


"그렇죠. 몰래 들여온다고 고생 좀 했어요."


"저한테 규칙을 알려주신다면서요. 분명 재밌을 거라고 했잖아요."


"네···. 맞아요."


"그런데 첫판부터 지시면 어떡해요?"


"뭔가 이상해요! 너무 운이 없었다니까요."


"아무리 봐도 그냥 못하시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한 판만 더해요."


"이미 10판이나 했는데 한 번도 못 이기셨잖아요."


"로트, 딱 한 판만 해줘요. 이대로 끝내면 저 억울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요. 흑흑."


"으으, 뭐 이런 수녀님이 다 있는지···"


그야말로 창피한 기억뿐이었다.


심지어 나중에 로트가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울지 않겠다는 다짐조차 지키지 못했다.


"으흑··· 정말 미안해요, 로트. 전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 앞에서 무슨 소리를···"


"괜찮아요. 수녀님은 아무것도 모르셨잖아요."


"그래도 로트가 제 말을 듣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흑흑. 당신께 믿음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매번 이런 식이네요...."


"괜찮아요. 수녀님이 절 위해 울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흐윽···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이제 뚝 그치세요. 안 그러면 울보 수녀님이라 놀릴 거예요."


"울보 아니에요. 흑흑···."


그만큼 당시 글로리아는 미숙한 수녀였기에 그녀가 로트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건 단 하나.


그저 둘이서 자주 이야기하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는 노력뿐이었다.


그마저도 잘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로트는 그런 글로리아도 잘 따라와 주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속을 썩이거나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었다.


말도 점차 많아졌고 또래 아이들과 잘 지내며 맡은 일도 성실히 잘했다. 가끔 뺀질거리긴 했지만, 글로리아가 진심으로 부탁하면 꼭 들어주었다.


물론 예배 시간만 되면 사라지는 버릇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자 로트는 글로리아에게 성당으로 가서 사제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글로리아는 보기에 로트가 진정으로 사제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껴 결정한 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응원해 주었다.


무엇을 하든 글로리아는 항상 로트를 믿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로트를 떠나보내고 얼마 안 있어 편지가 왔다. 중부 지역에 있는 성당에서 사제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로도 로트가 꾸준히 편지를 보내와서 지금까지 계속 근황을 듣고 있었다는 게 지금까지의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가 두 달 전이었어요. 수도원장이 맡긴 작업 때문에 바빠서 당분간 편지를 보내기 어렵다는 내용이었죠."


글로리아가 이야기를 마치고 싱긋 웃었다.


"어떤가요. 거기서는 잘 지내고 있나요?"


"그 누구보다 잘 지내고 있죠. 물론 예배 시간은 지금도 빼먹어요."


"후훗, 역시 로트답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글로리아는 빙그레 웃음 지으며 달을 바라보았다.


로트를 생각하는 것일까.


에스텔도 같이 달을 올려다보았다.


휘영청 밝은 달 아래에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글로리아가 물었다.


"에스텔 수녀님."


"네."


"아까 아이들이 수녀님 이야기를 할 때 표정을 봤어요. 순수하게 반짝이던 그 눈망울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이미 수녀님을 마음 깊이 믿고 있더군요."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던데... 헤헤."


에스텔이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글로리아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달로 시선을 돌렸다.


"···내심 많이 부러웠답니다."


달빛이 글로리아를 마주 보듯이 비추었다.


"저는 로트에게서 그런 표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어쩐지 쓸쓸한 옆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에 수도원장에 오른 대단한 수녀님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한 명의 평범한 여성이 수심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수녀님."


"...네."


"저는요. 지금도 그 아이를 생각하면 공허한 눈으로 제게 묻던 그 순간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요. 로트가 저에게 믿음을 주었던 만큼 제가 로트에게 믿음을 주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글로리아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저는 과연 그 아이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초조하고 애달픈 목소리였다.


얼핏 자신을 되돌아보는 질문 같았으나 그 밑바탕은 로트를 향한 변함없는 고민으로 가득했다.


이미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했음에도.


한 아이가 어른이 될 만큼 긴 시간이 흘렀어도.


글로리아는 로트에게 믿음을 주고 싶다는 진심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며 에스텔은 남을 믿지 말고 지켜보며 알아가라던 로트의 말을 떠올렸다.


그가 해줬던 조언은 책에 담긴 차가운 통찰이 아니라, 글로리아 수녀와 함께한 따뜻한 추억에서 나왔던 게 아니었을까.


로트는 글로리아를 떠올리며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그녀를 지켜본 끝에 뭐라고 말했던가.


"로트 사제님이 제가 순례를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에스텔은 기억 속에서 로트의 진심을 꺼내놓았다.


"만일 제게 누군가를 믿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전부 수녀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글로리아 수녀가 놀란 얼굴로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이내 사슴 같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런가요···? 로트가... 정말 그렇게 말했나요?"


"네. 열흘 전에 직접 들은 이야기예요."


"아아··· 그랬군요."


글로리아 수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죄송해요. 그 솔직하지 못한 아이가 그렇게 말해줬다니 왠지 눈물이 나서··· 흑흑."


에스텔은 눈물짓는 글로리아 수녀를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으흑! 으흐흐흑···"


글로리아 수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고요한 정원을 채웠다. 오늘따라 눈물이 많은 밤이었다.



**



다음 날, 에스텔은 아침에 수도원장실을 방문했다.


"원장님. 에스텔이에요."


들어오라는 말에 문을 열자, 글로리아가 퉁퉁 부은 눈으로 맞이했다.


글로리아가 물었다.


"잠은 잘 주무셨나요?"


"네. 저는 아주 잘 잤답니다. 그런데..."에스텔은 검게 물든 글로리아의 눈 밑을 바라보며 머뭇머뭇 말했다.


"글로리아 수녀님은 잘 주무셨는지···"


"후훗.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잠들긴 했어요."


글로리아는 눈을 슬쩍 비비며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제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글로리아는 에스텔의 손수건이 푹 젖을 때까지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에스텔은 그 기억을 잠시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하하··· 아니에요. 다 우리 로트 사제님 잘못이죠. 좀 솔직하면 어디 덧나나."


"후후. 그래도 착한 아이니 너무 미워하진 말아요."


글로리아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보다 이제 수녀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로리아의 물음에 에스텔은 남은 순례 기간을 생각했다.


글로리아 수도원까지 온다고 시간을 많이 쓰긴 했어도 한 달이라는 기한은 꽤 길었다.


마음만 먹으면 한 일주일 정도는 다른 기관에 순례하러 다닐 시간은 충분했다.


다만 이대로 수도원을 돌며 견문을 넓히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마 당장 찾아가 묻지 않는다면 순례 기간 내내 그 사람을 떠올릴 것 같았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미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노더니아 수도원으로 돌아가려고요."


글로리아 수녀는 알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로트를 만난다면 안부 전해주세요. 혹시 위험한 짓 하지 않는지 잘 지켜봐 주시고요."


에스텔은 지팡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물론이죠. 걸리면 아주 혼쭐을 내놓을게요."


에스텔의 말에 글로리아는 입을 가리며 쿡쿡거리며 웃음 지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글로리아가 말했다.


"다른 수녀분들께 순례 자금이랑 식량을 부탁해 두었으니 가시기 전에 꼭 챙겨가세요."


에스텔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도원장님."


"다음에도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흐름이 그대를 인도하기를."


글로리아는 창문으로 비쳐 드는 햇빛 아래에서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흐름이 그대를 인도하기를."


에스텔은 작별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왔다.


숙소로 가서 머문 자리를 정리하고 배낭을 둘러맸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수도원 입구로 나가니 아이들이 어제 만났던 수녀와 함께 에스텔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녀는 에스텔에게 수도원장이 부탁한 식량과 순례 자금을 넘겨주었다.


받고 보니 무게가 아주 묵직했다.


"뭘 이렇게 많이 주시는지···"


"수도원장님의 성의랍니다. 부디 받아주세요."


"감사합니다! 수도원장님께 꼭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물론이죠."


"그리고···"


에스텔은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은 하루 동안 잘 먹고 푹 쉬었는지 얼굴이 제법 밝아 보였다. 한층 말끔해진 모습을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아이들을 잘 부탁드릴게요."


에스텔의 말에 아이들이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에스텔 누나! 잘 가!"


"다음에 만나면 더 재밌는 데로 놀러 가자!"


"나중에 꼭 보러 와야 해~"


"...정말 고마웠어."


에스텔은 말없이 아이들을 꼭 안아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마음속까지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꼭 다시 만나러 올게요. 약속이에요."


그렇게 작별 인사를 끝내고 에스텔이 떠나려던 순간이었다.


"에스텔 수녀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여러분도 열심히 해봅시다. 어제 푹 쉬었으니, 오늘부터 교리 수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수녀가 해맑게 웃음 지었다.


"영류성전 창세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아이들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영류성전 창세기···?"


우가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으윽···! 머리가···!"


아이들이 굉장한 힘으로 에스텔을 잡아끌었다.


"에스텔 누나. 같이 가자!"


"나 여행 가고 싶어졌어!"


"언니! 우리도 데리고 가!"


"이제 다리도 안 아파!"


에스텔이 타이르듯이 말했다.


"미안해요. 여러분. 저와 헤어지기 싫은 마음은 알겠지만 저는 이제 노더니아로 돌아가야 한답니다. 여러분은 굳이 그곳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잖아요?"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생각해 보니 돌아가는 길도 꽤 즐거울 것 같아."


"성전 낭독은··· 이제... 그만...."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에스텔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껏 먼 수도원까지 왔는데 그런 말 하면 못써요. 수녀님, 부탁드릴게요."


수녀는 에스텔에게 달라붙은 아이들을 한 명씩 떼어냈다.


안 떨어지려고 버티는 아이들이었으나 연약한 아이의 힘으로 성인의 억척스러운 손아귀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자유의 몸이 된 에스텔은 덫에 걸린 사냥감처럼 넋 나간 표정을 짓는 아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잘 있어요. 여러분! 전 이만 노더니아로 돌아갈게요. 여러분도 행복해야 해요!"


"가면 안 돼!"


"제발 우릴 버리지 마!"


"착한 아이가 될게. 부탁이야!"


"이건 꿈이야···"


에스텔은 울부짖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손을 흔들며 수도원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능선을 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돌아보니 아이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수녀들 손에 붙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헤어짐이란 저렇게나 슬픈 일인 걸까.


에스텔은 먹먹한 가슴을 끌어안고 길을 나섰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헥사웨이 시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 시그윈 1장 (3) 24.06.07 9 1 11쪽
23 시그윈 1장 (2) 24.06.06 12 1 13쪽
22 시그윈 1장 (1) 24.06.05 9 1 18쪽
21 에스텔 1장 (20) 24.06.04 12 1 15쪽
20 에스텔 1장 (19) 24.06.03 11 2 12쪽
19 에스텔 1장 (18) 24.05.31 13 1 12쪽
18 에스텔 1장 (17) 24.05.30 15 1 14쪽
17 에스텔 1장 (16) 24.05.29 16 1 19쪽
16 에스텔 1장 (15) 24.05.28 9 1 15쪽
15 에스텔 1장 (14) 24.05.27 10 1 17쪽
» 에스텔 1장 (13) 24.05.24 12 1 28쪽
13 에스텔 1장 (12) 24.05.23 12 1 14쪽
12 에스텔 1장 (11) 24.05.22 12 1 18쪽
11 에스텔 1장 (10) 24.05.21 12 1 18쪽
10 에스텔 1장 (9) 24.05.20 14 2 18쪽
9 에스텔 1장 (8) 24.05.17 18 2 14쪽
8 에스텔 1장 (7) 24.05.16 19 2 19쪽
7 에스텔 1장 (6) 24.05.15 15 1 11쪽
6 에스텔 1장 (5) 24.05.14 25 1 18쪽
5 에스텔 1장 (4) 24.05.13 30 2 22쪽
4 에스텔 1장 (3) 24.05.11 31 2 20쪽
3 에스텔 1장 (2) 24.05.10 48 2 20쪽
2 에스텔 1장 (1) 24.05.08 82 1 23쪽
1 프롤로그 24.05.08 122 2 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