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사웨이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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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5.08 12:18
최근연재일 :
2024.07.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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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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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에스텔 1장 (5)

DUMMY

어둠이 짙게 깔린 밤.


로트는 수도원 최상층에 있는 어떤 방의 문을 두드렸다.


"부르셨습니까. 아그리파 수도원장님."


안에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로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껏해야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 넓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수도원장이 아니라 평범한 수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은 외모였다.


물론 로트는 그녀의 실제 나이를 알기에 별달리 말은 하지 않았다.


"내내 작업실에 사람을 방치해 두시더니 꽤 오랜만에 호출하셨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그리파가 무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자네가 어떤 수녀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이 돌아서 말이야."


"아, 에스텔 견습 수녀 말이군요. 별 건 아니고 그냥 자그마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방만한 수도원 생활 중에 제가 유일하게 하고 있는 사제 노릇이지요."


"그런가? 그런 것 치고는 최근에 너무 역할에 심취하지 않았나?"


"그저 잠깐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


아그리파의 차가운 눈길이 로트의 얼굴에 꽂혔다. 속내를 낱낱이 파헤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로트는 태연히 그 눈빛을 마주 보았다.


두 시선이 맞닿으며 눈동자 사이로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아그리파는 로트의 의중을 알아내려는 듯 계속해서 눈을 굴렸고 로트는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아그리파는 책상에 놓인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1년간 눈감아 줬으면 알아서 잘 처신하게. 자네도 알지 않나.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건 사제 역할이 아니야."


그러면서 냉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시킨 일만 잘해준다면 나는 자네가 뭘 하고 다니든 전혀 상관이 없다네. 그러니 자네의 본분만큼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명심하겠습니다."


아그리파는 로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책상에 놓인 양피지 한 장을 집어 들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새하얀 봉우리 사이에 자리 잡은 거대한 암벽을 향하고 있었다.


"채굴은 거의 끝나가고 있다네. 그때가 되면 나도, 자네도 이런 외딴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어."


"얼마나 남았나요?"


"길어야 3개월 정도겠지."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군요."


"그러니 쓸데없는 논란거리를 만들지 말게. 대체 뭘 하면 다른 사제가 직접 찾아와서 자네를 제재해달라고 요청하냔 말이야."


로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주의하겠습니다."


"다음에는 결빙석 연성에 관련된 일로만 보고 받았으면 좋겠군. 이만 나가보게."


"알겠습니다."


아그리파는 말이 끝나고 로트는 나가려고 뒤돌아서며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반쯤 연 순간 등 뒤에서 아그리파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네의 원통함과 독기에 찬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네. 지금도 그 시절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군."


로트는 살짝 고개를 돌려 곁눈으로 아그리파를 바라보았다.


잠깐 시선이 교차했다.


"···."


그러나 대화가 더 이상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철컥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내려앉았다.


복도 유리창을 따라 달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로트는 발걸음 소리조차 없는 적막한 복도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수도원장님."


야심한 밤, 혼잣말이 연기처럼 흩어져갔다.


한편, 아그리파는 싸늘한 시선으로 로트가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여운 것. 너무나도 약해졌구나."


그녀는 서랍에서 양피지를 꺼내더니 맨 아래에 직인을 찍었다.


"내 나약한 너를 위해 좋은 거래를 준비해 두마."


희미한 달빛 속에서도 아그리파의 이름은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



아침 예배가 끝나고 해가 가장 높이 떠오르는 시간. 에스텔은 이 시간에도 얼음을 깨고 있었다.


얼음이 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탓에 오전에도 해빙 의식을 진행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나 에스텔은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오전이면 해빙 의식을 핑계로 구석진 제단에 숨어서 바쁘게 돌아가는 수도원의 일상을 관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에스텔은 제단 구석에 걸터앉아 기둥에 몸을 기댔다.


평소라면 경전을 들고 바쁘게 오가는 수도자들을 보며 잠깐의 여유를 만끽했겠지만, 오늘따라 수도원 앞 광장은 한산했다.


그 원인을 찾아 에스텔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수도원 중앙에 자리한 여신상 앞 넓은 광장. 그 눈 덮인 대지 위에 한 기사단이 도열 중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제식에서 수도원 소속다운 정결함이 느껴졌다. 동시에 흰 옷 아래로 보이는 근육에서 감출 수 없는 폭력성이 엿보였다.


보통의 기사단이라면 햇빛 아래 갑옷을 번쩍이며 말을 탄 채로 위용을 뽐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번지르르한 장식 없이 눈 속에 몸을 숨길 수 있는 하얀 위장복만 입고 있었다.


허리춤에도 화려한 장검 대신 다루기 편한 단도나 간단한 투척형 무기들이 매달려 있었다. 아마 진짜 위험한 무기는 옷 안쪽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고 있으리라.


마치 기사단이 아니라 이빨을 숨긴 하얀 늑대 무리 같았다.


"으으···."


그 냉혹한 기세에 에스텔은 묻어 두었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참혹했던 광경이 뇌리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6년이 지났어도 두려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결국 에스텔이 참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려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랑 기사단이 웬일로 수도원에 돌아왔군요. 목표로 삼은 대상을 단 한 명도 놓치지 않았다는 대단한 기사들이죠."


"···언제부터 와 계셨던 거죠?"


"방금 왔습니다."


고개를 들자, 로트가 싱글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깐족대는 말투. 여우 같은 얼굴.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너무 무서웠던 탓일까.


지금은 왜 이렇게 반가운 건지.


보고 있으니 어쩐지 안심이 되어 두려웠던 마음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런 속내가 얼굴에 드러날까 봐 부끄러워 에스텔은 일부러 새침하게 굴었다.


"로트 사제님은 할 일이 없으신가요? 다른 사제님들이 한창 바쁜 시간에도 찾아오시네요."


뼈 있는 말에 로트가 웃으며 답했다.


"사제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군요. 게으름은 영혼의 적입니다. 성실한 사제를 태만한 사람으로 몰아가지 마시죠."


"노동은 곧 금욕의 수단이라고 배웠는데 제가 로트 사제님의 금욕적인 모습을 통 보질 못해서요."


"저에게도 맡은 일이 있습니다. 다만 일반 사제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할 뿐이죠. 저기 저 기사단처럼 말입니다."


로트가 광장을 가리켰으나 별로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에스텔은 샐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사제님은 수도원장님 추천으로 들어온 특별한 경우니까 그렇다 쳐도 기사단은 뭐죠? 사제님들만 있어도 경비는 충분하지 않나요? 저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맞습니다. 그래서 백랑 기사단은 수도원에 주둔하지 않죠. 애초에 수도원과 별개로 움직이는 집단이기도 하고요."


"그럼 다행이네요. 백랑 기사단이 수도원 소속이면 소름 끼칠 것 같았는데 말이에요."


"왜죠?"


에스텔은 몸을 웅크리며 덜덜 떨었다.


"제가 6년 전에 봤는데 사람을 막 때리고 끌고 가고··· 으으. 하여튼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그런가요? 백랑기사단이 굳이 수도원 근처에서 그런 일을 벌일 리가 없을 텐데... 6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 그건···"


에스텔은 로트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말해도 괜찮은 걸까.


아직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과거였다.


에스텔이 생각하기에 이 이야기는 고해성사에서나 꺼낼 법한 비밀이었기에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아마 로트가 아니라면 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수도원 내에 아무도 없을 터였다. 만약 로트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으려면 참을 수도 있었고 1년 전이라면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로트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했다. 또 한편으로 관계가 계속되면 언젠가는 하게 될 이야기라고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에스텔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6년 전 중앙 교구의 다른 수도원으로 견학을 가던 날이었어요...."


수도원 간 교류였던가. 구실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에스텔은 처음으로 수도원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본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눈 없이 푸른 들판이 펼쳐진 초원이라던가, 올려다보면 끝이 있는 산봉우리와 달리 아무리 멀리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너머 수평선이라던가.


오직 책에서만 보았던 풍경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순간만큼 순수하게 즐거웠던 기억은 인생을 통틀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근 1년 사이에 그런 기억이 꽤 생겼던 것 같지만... 에스텔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골짜기를 지나 얼어붙은 절벽 아래 동굴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그 동굴이 유일하게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였거든요."


나이 든 사제나 수녀들이 먼저 동굴로 들어가고 뒤따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에스텔의 발목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추레한 옷차림에 피골이 상접한 한 남자가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분이 애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제발 살려주십시오, 수녀님. 수녀님은 수도원에서 오신 분이지 않습니까? 저희 마을 사람들이 노예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라고."


로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에스텔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당시 저는 14살에 불과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일단 그분이 너무 절박해 보여서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며 말했죠."


에스텔은 들은 이야기를 쭉 로트에게 풀어 놓았다.


남자는 자신이 절벽 근처 산간 마을에 모여 살던 토착민이라고 밝혔다.


먼 옛날부터 이곳에 자리 잡아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기사단이 찾아와 거래를 요청했다. 돈을 줄 테니 자기들을 따라와서 광산에서 채굴을 좀 해달라는 제안이었다.


처음에는 수도원에서 나온 기사단이라고 하니 존중하는 차원에서 말을 듣고 따라갔다.


그런데 불가능한 할당량을 요구하거나 해가 져도 계속해서 일을 시키는 등 노예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고 했다.


일의 강도가 높다 보니 다치는 청년들도 생기고 심지어 받는 돈도 너무 적어 점점 불만이 쌓여갔다.


이에 마을에서 회의를 거친 끝에 더 이상 협조하지 않기로 했다. 그랬더니 기사단이 사람들을 협박해 강제로 광산에 끌고 가 노역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쥐꼬리만 한 돈도 떼어먹으며 사실상 착취에 가깝게 사람을 부려먹었다.


저항하고 싶었으나 기사단의 무력을 거스를 만한 힘이 마을에 없었고 도망가지도 못하게 수시로 인원을 확인하며 순찰까지 하였다. 이에 결국 마을 전체가 기사단이 통제하는 노예수용소나 다름없게 되었다는 게 남자가 전한 이야기의 전말이었다.


남자는 여신교가 이런 악행을 저지를 리 없다고 믿었기에 이를 기사단의 일탈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수도원에 상황을 알리고자 수도자들이 수도원 밖으로 나오는 때를 노려 이렇게 찾아온 것이었다.


로트가 이야기를 듣던 중에 물었다.


"흠··· 그 기사단이 백랑 기사단이 맞습니까? 혹시 노더니아로 흘러든 떠돌이 용병들이 기사 행세를 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로트의 물음에 에스텔은 위화감을 느꼈다. 얼핏 질문만 들으면 백랑 기사단이 그럴 리 없다며 옹호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그의 말투나 표정에서 감출 수 없는 무심함이 묻어나왔다.


의구심보다는 이미 답을 어느 정도 정해놓고서 상대의 답변을 기다리는 듯한 태도였다. 에스텔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그저 감에 불과했기에 따로 묻지는 않았다.


"뭐, 저도 그다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합리화하며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백랑 기사단이 그분을 끌고 가는 모습을요."


"···"


"그것도 제가 보는 앞에서 무자비하게 구타한 다음 그대로 끌고 갔어요. 저는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어느샌가 앞서갔던 시몬 사제님이 돌아오셔서 저를 떼어놓으며 훈계하셨어요."


로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시몬 사제··· 그자는 왜···"


"뭐라고 하셨나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시몬 사제가 뭐라고 하던가요?"


"교리의 가르침은 반드시 옳으며 교리를 따르는 기사단은 절대 틀릴 리 없으니 불경한 짓을 저지르지 말라고 하셨죠. 그 사이 그 불쌍한 분은 기사단이 끌고 가버렸고요."


에스텔은 망연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저와 시몬 사제님만 견학이 취소되어 그대로 수도원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로 저는 이 수도원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죠. 생각해 보니 시몬 사제님의 특별 수업이 시작된 시기도 그쯤이었네요."


"에스텔 씨에게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


"끌려가기 직전에 저를 바라보던 그 분의 절실한 눈빛을 아직 잊지 못해요. 저는 신 앞에 믿음을 맹세하라는 시몬 사제님의 다그침에 겁먹어 그분의 간절한 마음을 외면했어요.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죠."


에스텔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제가 입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거짓말을 했던 적은."


로트가 두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마음으로 하는 거짓말이라··· 그게 무엇이죠?"


"옛날에 길을 헤매다 서고에 들어갔을 때 본 책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신에 봉사하는 수도자라는 사람들도 살면서 거짓말을 하잖아요?"


에스텔은 산꼭대기에 있는 피정(避靜)의 집에 가면서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거의 다 왔다고 말하는 사제님의 이야기나, 어린 시절에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지어냈던 수녀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었다.


로트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딜 가나 평범하게 있는 일이네요."


"그렇게 일상적으로 특별히 나쁜 의도 없이 하는 거짓말은 다 입으로 하는 거짓말이에요. 로트 씨는 거짓말쟁이니까 쉽게 이해가 되죠?"


"아뇨. 이해가 잘 안 됩니다만."


"그런 게 바로 입으로 하는 거짓말이에요."


로트는 멍한 얼굴로 굳어 있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 이제 이해가 되는군요."


"어휴···."


에스텔은 로트를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그런 입으로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내 안에서 메아리치는 진짜 외침을 억눌러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가요? 어떤..."


"사실은 그분을 때리지 말라고,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한 견습 수녀처럼 말이죠."


"···"


"진심을 감추는 거짓말. 그게 바로 마음으로 하는 거짓말이에요."


에스텔은 씁쓸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저는 입 하나 뻥긋하지 않았지만 거짓말쟁이였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때 어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어쩔 수 없었다고 넘어가기엔 그분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요. 마치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제 몸 이곳저곳을 막 찌르고 다니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에스텔은 허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후로 마음으로 하는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요. 그런다고 제 죄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요···."


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잠시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로트는 곁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에스텔은 고개를 들고 싱긋 미소 지었다.


"그래도 고마워요. 로트 사제님. 사제님이 제게 해준 여러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그때 제가 왜 마음이 아팠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천만에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에스텔 씨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상대를 믿지 말고 알아가라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저는 에스텔 씨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당신을 조금 알아갈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에스텔은 부끄러운 마음에 로트를 툭 가볍게 때렸다.


"후훗. 웬일로 낯간지러운 말을 다 하시네요."


"하하, 솔직한 어린양에게 주는 포상입니다."


포상이란 말에 에스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지그시 웃음을 지었다.


"칭찬말고 다른 포상은 안 되나요?"


로트가 오히려 궁금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뭔가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로트 사제님도 옛날이야기 해 주세요. 생각해 보니 저도 사제님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요."


지난 1년간 로트는 에스텔이 물으면 뭐든 대답해 주었으나 과거를 물으면 제대로 답하지 않고 말을 돌리곤 했다. 에스텔은 지금껏 로트가 보여준 진심으로도 그를 믿기에 충분했지만 그럼에도 그를 더 깊이 알고 싶었다.


정말로 로트 사제라는 한 사람을 알아가다 보면 더 이상 그 사람을 믿는 데에 믿음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 오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에스텔의 말에 로트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로트가 고민에 잠기자, 에스터는 바로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으며 치근거렸다.


"에이, 이제 와서 빼지 마시고요. 솔직히 저만 이야기하는 건 불공평하잖아요."


로트는 따가운 시선을 피해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스텔이 집요하게 눈 맞춤을 시도하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두 손을 들었다.


"그래요. 에스텔 씨가 괴로운 기억을 이야기하셨으니, 저도 제 기억 속에 깊이 묻어 둔 과거를 하나 꺼내도록 하겠습니다."


"헤헤. 진작에 그러셨어야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는 에스텔에게 로트는 덧붙였다.


"다만 조금 우울한 이야기일 텐데 괜찮을까요?"


에스텔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트 씨가 괜찮다면야, 얼마든지요."


이에 로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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