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사웨이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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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5.08 12:18
최근연재일 :
2024.07.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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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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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에스텔 1장 (7)

DUMMY

3개월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 백랑 기사단은 자주 수도원을 드나들었다. 때로는 훈련을 명목으로 시설 곳곳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로트도 무슨 일인지 덩달아 바빠진 탓에 에스텔과 만나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다소 붕 뜬 분위기에서 시간은 흘러 어느덧 임명식 전날이 되었다.


에스텔은 오랜만에 로트의 호출을 받아 들뜬 마음으로 수도원 복도를 걷고 있었다.


오늘도 창밖으로 백랑 기사단의 모습이 보였고 수도자들도 바쁜 발걸음으로 어딘가를 오가고 있었다.


들은 소문에 의하면 6년간 수도원을 이끌어온 수도원장님이 조만간 퇴임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도원 전체가 어수선했다.


물론 그래봤자 한낱 견습 수녀가 하는 일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에스텔은 늘 하던 대로 주어진 과업을 마무리하고 로트를 만나러 갔다.


요즘은 뜸하긴 했어도 원래는 로트를 만나러 가는 일도 일과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에스텔은 3개월 만에 방문하는 로트의 집무실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에스텔은 늘 하던 대로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오시지요."


로트는 이제 누군지도 묻지 않았다.


"이번에는 꽤 오랜만이네요. 로트 씨."


"요즘 좀 바빠서 말입니다."


에스텔은 로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야위었다거나, 안색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전보다 전체적으로 생기가 없어 보였다. 마치 생명력을 일부 뽑힌 듯한 모습이었다.


"대체 3개월 동안 뭘 하고 다니신 건지···."


에스텔은 의심과 걱정이 섞인 눈으로 로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로트의 책상 중앙에 올려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에스텔은 자연스럽게 책 표지에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초능력의 이해와 활용에 관하여'


전에 보았던 익숙한 제목에 에스텔이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로트 씨도 저처럼 초능력이 있으신가요? 엄청 관심이 많아 보이시는데."


"후후. 그런 거 없습니다."


"거짓말은 아니겠죠?"


"사제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런가요? 뭐, 좋아요. 믿어드릴게요."


로트가 질색하였다.


"윽.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에스텔은 쌤통이라는 듯이 웃음 지었다.


"다 로트 씨가 만든 작품이에요."


"그렇게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인걸요? 후훗."


로트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하아··· 제가 어린양이 아니라 눈표범을 키웠군요."


에스텔은 쿡쿡거리며 웃다가 로트에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르신 거죠?"


"그야 당신이 내일 순례를 떠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로트는 책상 아래에서 손바닥만 한 상자를 하나 꺼냈다.


"기억하고 계셨네요. 요즘 자주 집무실을 비우시길래 완전히 잊으신 줄 알았어요."


"후훗.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로트는 상자를 열어 푸른 빛 장신구를 꺼냈다.


"제가 특별히 제작한 목걸이입니다."


로트는 그것을 그대로 에스텔의 손에 쥐여주었다. 에스텔은 눈을 반짝이며 목걸이 끝에 매달린 장식을 살펴보았다.


목걸이는 여신교의 상징인 순환하는 물결을 본뜬 형태였다. 특이하게도 원형의 물결 중앙에 보석으로 만든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매끈한 표면은 조명 빛에 번뜩이며 광채를 내뿜었고, 치밀하게 세공된 문양은 에스텔이 능력으로 보았던 푸른 빛보다 더 푸르게 반짝였다.


물결 장식은 실제 부서지는 파도처럼 생동감이 넘쳤고, 눈의 눈동자 부분은 어떤 보석인지 몰라도 보는 것만으로 차가움이 느껴질 만큼 신비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마치 푸른 색의 오로라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로트가 이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을지 차마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에스텔은 목걸이를 품속에 끌어안으며 활짝 웃었다.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로트 씨."


"초인인 당신을 위해 초능력을 써도 그 부작용을 조금 완화해 줄 수 있게끔 만들었습니다."


로트의 말에 에스텔은 다시금 책상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다.


'초능력의 이해와 활용에 관하여'


"설마 계속 저 책을 읽으셨던 것도 이걸 위해서였나요?"


"뭐, 책을 읽는 데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네요."


로트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능력을 너무 아끼지 마십시오. 당신의 가진 힘은 정말 대단하니까요."


"그런가요? 해빙 의식 때 말고는 쓸 일이 잘 없던데."


"여신님의 축복을 그렇게 썩혀두시면 안 되지요."


로트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잘 들으십시오. 에스텔.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는 그렇게 넓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무지개의 빛깔 정도가 인간이 볼 수 있는 빛의 한계입니다. 너무 약한 빛도, 너무 강한 빛도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가요?"


"색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과를 보면서 붉은색이 사과의 고유한 성질이라고 간단히 받아들여 버립니다. 그저 우리의 눈에만 그렇게 인식될 뿐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알아차리지도 못하지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일까. 에스텔은 로트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이렇듯 우리는 감각이라는 작은 창살에 둘러싸여 인지라는 좁은 틈으로 밖을 바라보며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로트는 에스텔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하지만 당신의 눈이라면 그 창살에서 벗어나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갇힌 세계를 넘어 더 넓은 세상을 보는 힘. 이를 어찌 축복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에스텔은 집무실 뒤쪽 창문에 비친 자기 눈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는 바다와 닮아 있었다.


"여신님의 축복···."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은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뜻이니, 에스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당신의 눈은 단순히 핵을 보는 눈이 아니라 진실을 보는 눈이니까요."


에스텔은 쑥스러운 듯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뭐,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표현은 마음에 드네요."


로트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자! 이거 이야기가 길었군요. 설교는 여기까지 하고, 하나 더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로트는 양피지로 만든 지도를 건넸다. 노더니아 지역 전체를 그린 지도였는데 수십 개의 수도원과 성당이 이름과 함께 표기되어 있었다.


그중에 남쪽에 자리한 한 수도원에는 크게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에스텔은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표시는 뭐죠? 글로리아 수도원?"


"시간이 된다면 꼭 가보시라고 표시해 뒀습니다."


"왜죠?"


"그곳에는 과거 아버지를 잃고 힘들어하던 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수도원장님이 계십니다. 만약 당신이 끝까지 수녀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면 그분께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로트 씨가 그렇게 칭찬할 정도라니··· 정말 대단하신 분인가 보네요."


"저를 가장 많이 믿어주고 아껴주신 분이죠."


로트는 허공을 응시하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제게 누군가를 믿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전부 그 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가만히 미소를 머금은 그 모습에는 평소와 다르게 진심이 담겨 있었다. 행복에 겨운 얼굴에 에스텔은 왠지 샘이 났다.


"치. 저는 안 믿는다면서 그분은 믿으시는 건가요?"


에스텔은 아니꼬운 마음에 로트를 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군요."


예상외로 로트는 핑계조차 대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진지한 태도에 에스텔은 황망히 손을 저었다.


"뭐에요. 왜 로트 사제님답지 않게 순순히 사과하고 그래요. 갑자기 그러니까 기분이 이상하잖아요."


"그분을 생각하면 제가 좀 감성적으로 변하는지라···"


살짝 눈물을 글썽이는 로트를 보며 에스텔은 어쩐지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어 더 추궁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하아. 됐어요. 고개 들고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흥.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슬슬 저녁 기도 시간이네요."


로트는 방을 나서는 에스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에스텔. 내일 순례를 떠나면 당신이 마주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설령 굳게 믿고 있던 신념이 무너질지라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는 그만하겠다고 하셨으면서···"


에스텔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헤헤. 장난이고 꼭 명심할게요."


에스텔은 임명식 때 꼭 오라고 말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방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로트는 입을 꾹 다문 채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서랍을 열어 푸르게 빛나는 광석을 하나 꺼내 들었다.


광석은 마치 얼음을 극한까지 압축한 듯 투명하면서도 시리도록 푸른 빛을 내고 있었다.


로트는 광석을 든 채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절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에스텔."



**



이른 아침, 임명식이 끝나고 에스텔은 두꺼운 배낭을 멘 채로 수도원 입구에서 로트와 만났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로트 사제님."


"잘 다녀오십시오. 지금 가면 한 달 후에 보겠군요."


"그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계셔야 해요?"


"하하. 정식으로 수녀가 되신 분의 첫 부탁인데 들어드려야지요. 마음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로트의 과장된 미소에 에스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흘려듣고 계시네요··· 아무튼 한 달 후에 봬요. 꼭 마중 나와 계셔야 해요?"


"물론이죠. 약속하겠습니다."


짧은 담소가 끝나고 에스텔은 떠났다.


순례복이 하얀 탓일까. 에스텔은 녹아내리는 눈송이처럼 점점 작아지다가 이내 설경 속으로 사라져갔다.


로트는 수도원 입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로트는 마지막까지 에스텔을 배웅한 뒤 집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눈이 덮인 광장을 지나 수도원 건물 앞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누군가 정문을 거칠게 열고 뛰쳐나왔다.


잔뜩 열이 오른 시몬 사제였다. 그는 로트를 보자마자 충혈된 눈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로트 사제!"


"무슨 일이죠? 시몬 사제."


"당신이 에스텔의 순례 요청을 승인한 겁니까?"


로트는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던 딱딱한 태도로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만?"


"누구 맘대로 그렇게 하신 겁니까! 원래 원칙대로면 순례는 임명식이 끝나고 6개월 후에 출발해야 합니다. 그것도 정식 수녀 업무에 적응하면서 틈틈이 순례 계획을 세운 후에야 떠날 수 있는 겁니다!"


시몬은 눈을 무섭게 희번덕거리며 따지고 들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순례를 취소시키려는 심산으로 보였다.


"그건 권고 사항이지 의무는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권고 사항이 괜히 있겠습니까?"


"권고 사항을 적용한다 해도 에스텔은 어린 시절부터 수도원에서 지낸 특별한 경우라 6개월이나 적응 기간을 거칠 필요는 없습니다. 순례 계획도 제 입회 하에 수십 번은 검토했기에 그대로 진행해도 무방하고요."


"그래도 다른 사제와 의논을 해야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해서 되겠습니까. 수도원장님께도 의견을 여쭙고···"


"그만."


로트가 시몬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당신의 추악한 속셈은 전부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6개월이 아니라 6년이 지나도 당신은 에스텔을 놓아줄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뭐, 뭐라..!"


"다 알면서 자기 욕심을 위해 억지를 부리지 마십시오. 보기 추합니다."


로트는 시몬을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가볍게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 음흉한 자식아."


사제가 된 이후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던 표현에 시몬은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가 이내 말에 담긴 담백한 의미를 파악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로트는 이미 복도를 지나서 사라진 후였다.


시몬은 분한 듯이 발을 구르며 벽을 탕탕 두드렸다.


"으으. 제기랄! 저 건방진 놈이!"


시몬은 울분을 토하며 로트가 걸어간 복도를 노려보았다.


"내 반드시 네놈을 여신의 이름 아래 무릎 꿇리고 말겠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증오로 가득 찬 눈동자 속에 광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



얼마쯤 걸었을까. 에스텔은 평원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었다. 새하얀 눈과 듬성듬성 드러난 땅. 짧고 질긴 초목만이 자리를 차지한 드넓은 평원의 끝.


그곳에서 에스텔은 어느덧 거대한 절벽을 마주했다.


그 이름은 얼어붙은 절벽. 어지간한 산봉우리에 필적할 정도로 높게 솟아 있는 이 절벽은 바깥 세계와 수도원을 갈라놓는 천혜의 요새였다.


1년 내내 항상 얼어 있어 타고 오를 수도 없고, 돌아가려고 해도 높은 설산이 주위를 가로막고 있었다.


오직 절벽 아래 뚫린 동굴만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에스텔은 복잡한 심경으로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절벽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커다란 동굴이 마치 담벼락에 뚫린 개구멍처럼 보였다.


'6년 전에 이곳에서 돌아섰었지.'


휘이잉.


동굴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에스텔은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발을 붙잡았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수녀님. 수녀님은 수도원에서 오신 분이지 않습니까? 저희 마을 사람들이 노예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간절한 눈빛으로 매달리는 남자. 곧이어 백랑 기사단이 나타나 몽둥이로 그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몸을 웅크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제발!"


“그만두세요!”


에스텔이 손을 뻗었지만, 그 앞을 한 사제가 가로막았다.


"에스텔. 교리는 곧 진리이니 교리를 따르는 기사단은 반드시 옳습니다. 불경한 짓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하지만 사람을 저렇게 가혹하게 다룰 필요는 없잖아요!"


"에스텔. 저 자는 죄인입니다. 기사단의 처벌을 받는 저 모습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순리대로 돌아가는 세상에 의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하, 하지만···"


"지금 여신님의 뜻을 대행하는 성기사들에게 의문을 가지시는 겁니까? 저 자는 여신의 인도를 따르지 않아 처벌을 받을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에스텔의 곁눈으로 남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남자는 밧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었다. 그 간절하며 처절한 눈빛이 에스텔을 향했다.


말하지 않아도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제발 도와달라고. 신을 믿는 이가 어찌 남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저··· 저는...."


"왜 대답하지 않습니까, 에스텔! 설마 여신의 인도에서 벗어나겠다는 그런 불손한 생각을 품은 건 아니겠지요?”


시몬 사제는 에스텔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는 당신을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게 말해보십시오. 흔들리지 않았다고, 당신의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해보십시오!"


에스텔은 눈앞의 시몬과 멀어지는 남자를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워했다. 시몬은 에스텔의 어깨가 아플 정도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당신의 믿음을 신 앞에 맹세하란 말입니다!"


"저··· 저는...."


에스텔은 윽박지르는 시몬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고 말을 더듬으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시몬 사제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절규하듯 소리쳤다.


"에스텔!!!"


에스텔은 결국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의 믿음에 흔들림이 없음을 신 앞에 맹세합니다!"


그 순간 에스텔은 몸 안의 유리 조각이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눈에서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으흑··· 으흐흐흑···."


울먹이는 에스텔을 시몬 사제는 황홀한 듯이 바라보았다.


"오오··· 훌륭합니다."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중에 시몬 사제가 복귀하자마자 수도원장에게 직접 찾아갔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교화를 명목으로 한 1대1 특별 수업이 열렸던 건 그다음 날부터였다.


마음이란 혼란스럽고 정의하기 힘든 것. 하지만 그날 에스텔은 알았다. 그날 자신이 마음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아픈 기억을 되새기니 지금도 마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이대로 과오에 눈을 돌리고 유유히 순례나 떠날 수는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남자가 왔다던 마을로 가야만 했다.


에스텔은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마을로 갈 수 있을까?


위치는 6년 전에 들어서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냥 걸어서 갔다가 백랑기사단과 마주치면 상황이 꽤 곤란해질 수 있었다.


정말 그 사람 말대로 기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다면, 수녀가 들어와 그 실상을 파헤치는 일은 기사단 입장에서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막무가내인 자들이라면 비밀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강제로 쫓아낼 수도 있고 재수가 없으면 해코지할 가능성도 높았다.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고 마을에 몰래 들어가야 했다.


'기사단과 마주치지 않고 마을로 들어갈 방법이라···'


기사단과 마주치지 않는다. 이 조건을 생각하다 보니 에스텔은 문득 그것을 실제로 성공했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분은 기사단을 따돌리고 나와 접촉했었지.'


기사단이 뒤쫓아 왔을 때는 이미 그가 에스텔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하고 난 시점이었다. 아마 그가 에스텔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아예 들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기사단에게 들키지 않고 마을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으니, 그가 했던 방법만 알아내면 역으로 기사단에게 들키지 않고 마을로 들어갈 수도 있으리라.


에스텔은 그가 나타났던 곳이 어디였는지 떠올려 보았다.


그 남자는 동굴을 향해 걸어가는 에스텔의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나 발목을 붙잡았었다.


에스텔은 6년 전 그 순간의 기억을 되새기며 눈을 떴다. 눈동자에 시린 기운이 차오르며 에스텔이 보는 세상 위로 푸른 빛이 덧씌워졌다.


에스텔은 그대로 뒤쪽을 바라보았다.


땅이 푸르게 물들고 얇은 실금이 각자 연결되어 대지를 가득 메웠다.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하자 실금들이 마치 식물의 뿌리처럼 아래를 파고드는 모습이 보였다.


푸른 빛의 뿌리는 계속 뻗어나가다 한 구간에서 일제히 끊겼다. 그러고는 잠깐의 공백 후에 다시 이어져 내려갔다.


실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곳에 흙을 포함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라는 의미였다.


에스텔은 비어 있는 구간을 넓은 시야로 살폈다.


그러자 푸른 빛줄기 사이로 원통형의 검고 길쭉한 통로가 보였다. 누가 봐도 인위적인 형태였다.


"찾았다!"


에스텔은 통로를 눈으로 좇아 입구를 찾아갔다.


뛰어가 도착한 입구는 절벽 아래 그늘진 곳으로,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림자가 짙은 곳이라 아마 이곳의 눈은 봄이 와도 전혀 녹지 않을 것 같았다.


눈만 쌓아놓는다면 사계절 내내 절대 들키지 않을 법한 영리한 위장이었다.


지팡이로 눈을 흩어내자 숨겨진 비밀통로가 드러났다. 성인 남성이 지나다녔던 만큼 입구가 꽤 넓었다.


에스텔은 침을 꿀꺽 삼키며 짙은 암흑 속을 바라보았다. 캄캄한 어둠이 입을 벌린 채로 냉기를 뱉어내고 있었다.


절로 몸이 떨렸다. 추위는 예전에 적응했을 텐데 왜 이러는 걸까.


설마 이제 와서 무서운 걸까.


그래도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로트와 약속했기에. 적어도 로트 앞에서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에스텔은 땅 아래로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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