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사웨이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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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5.08 12:18
최근연재일 :
2024.07.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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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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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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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에스텔 1장 (10)

DUMMY

야심한 시각.


에스텔은 비밀통로를 지나 급히 촌장의 집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촌장은 이불을 걷어차고 배를 드러낸 채 곤히 자고 있었다.


"촌장님! 일어나 보세요."


목소리에도 반응이 없어 흔들어 깨우려던 찰나였다.


촌장이 몸을 뒤척이더니 에스텔의 발목을 걷어찼다.


"윽!"


복사뼈를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에스텔은 발목을 부여잡았다.


한참 몸을 웅크리며 고통을 참고 있는 사이 촌장이 다시 대자로 누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에스텔은 괘씸한 마음에 가볍게 왼쪽 다리를 내리쳤다. 노인을 공경하는 차원에서 핵이 없는 곳을 노렸다.


그러나 그 순간 촌장이 또다시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지팡이가 오른쪽 정강이에 맞았다.


하필 핵이 있는 위치였다.


"으어어억!"


촌장은 괴성을 지르며 깨어나더니 오른발을 붙잡으며 방방 뛰었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에스텔의 윤곽을 보고 깜짝 놀라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크아악!"


아마 넘어진 곳이 푹신한 이불 위가 아니었다면 뼈 한두 군데는 부러졌을 것이다.


"헉! 괜찮으세요?"


에스텔은 우선 등불에 불을 붙여 방 안을 밝혔다.


촌장은 괴로운 듯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 위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분명 엉덩이 쪽도 꽤 충격이 심했을 텐데 다리만 붙잡고 있었다. 핵을 맞은 부위가 몹시 아팠던 모양이었다.


에스텔은 미안한 마음에 다리에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다.


촌장은 겨우 통증이 가라앉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신을 믿는 자들은 죄다 사람 잡는 귀신들이 맞는 것 같구먼. 내가 오른쪽 정강이에 상처가 있는 건 어떻게 알고 거길 정확하게 때린단 말인가."


"죄송해요. 거길 때리려던 게 아닌데···"


"아무튼 때리긴 때릴 생각이었구먼?"


"···"


에스텔은 귓불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뭐, 아무튼 이렇게 늦은 밤에 찾아와 난리를 피운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이며 촌장에게 광산에서 확인한 정보를 이야기했다.


수도원장이 모든 일을 주도했다는 사실부터 백랑 기사단의 소각 계획까지 전부 풀어놓았다.


"수도원장이 그 망할 놈들의 우두머리였다니···. 거기다 이제 다 뽑아 먹었으니, 마을째로 태워버리겠다고?"


촌장은 분노에 차 주먹을 바닥에 내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에스텔의 눈치를 살폈다.


"크흠! 수녀님 앞에서 말이 너무 험했나?"


에스텔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맞는 말이니 괜찮아요."


"허허. 수녀답지 않게 꽤 당차구먼. 아까 때려서 깨우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혹시 수도원에서도 누구 패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


"농담일세. 뭘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을 짓고 그러나. 사람 패는 수녀가 세상에 어딨겠는가! 허허허!"


촌장의 웃음소리가 커지는 만큼 에스텔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허허. 허··· 허···."


점점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잦아들었다. 빠르게 굴러가던 눈동자는 에스텔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향했다.


금속으로 된 지팡이는 어둠 속에서도 달빛을 받아 번뜩이고 있었다.


촌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


"···."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촌장이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빠르게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크흠!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럼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에스텔은 지팡이를 내려놓으며 말을 받았다.


"수도원장이 이단인 이상 수도원의 지원은 어려울 것 같아요. 혹시 마을을 감시하는 기사단은 대략 몇 명인가요?"


"사람이 많던 시절에는 50명 가까이 있었다만, 지금은 대충 20명 정도겠지."


촌장은 진지한 눈빛으로 만류했다.


"그렇다고 해서 맞서 싸울 생각이라면 그만두게. 이 마을에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있는 사람조차 몇 없다네."


에스텔은 이미 예상했던 상황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겠네요."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저들이 비록 마을 안까지 감시하러 들어오지는 않는다만, 바깥 울타리를 벗어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잡으러 온다네."


"그러니 마을 안에서 길을 찾아야죠. 제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겠어요?"


촌장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엇! 듣고 보니 그렇군."


에스텔은 광산을 지나 얼어붙은 절벽까지 이어지는 비밀통로에 대해 촌장에게 이야기했다.


"두르카··· 성공했었구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서 광산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촌장은 결심한 듯이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지. 최후의 마을 회의를 열어야겠어."


촌장을 옆 방에서 자고 있던 로나를 깨웠다.


"로나야. 부탁 좀 하자꾸나. 지금 바로 회의가 있을 거라고 사람들한테 전해다오."


로나는 잠이 덜 깨 피곤한 눈으로도 금방 말을 알아듣고 밖으로 나갔다.


촌장은 그동안 집 안에 남은 생필품과 식량들을 모조리 긁어모았다. 얼마 안 되는 양이었지만 배낭에 집어넣고 보니 반 정도는 채워졌다.


잠시 후, 촌장과 에스텔은 어둠을 틈타 마을 내부에 우거진 작은 숲으로 향했다.


숲 중앙에 도착하니 커다란 판자가 옆으로 치워져 있었다.


다가가 보니 판자가 있던 자리에 땅 아래로 가는 계단이 보였다.


"마을에 비밀 공간이 많네요."


"이 비밀 지하실도 두르카가 만들어 줬었지..."


촌장과 말을 나누며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적당한 크기의 공간 안에 마을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새 로나가 다 불러모았는지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머릿수를 세어 보니 촌장을 포함해 노인이 열 명, 로나를 포함해 아이가 네 명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생기 없는 몰골로 촌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촌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기사단의 마을 소각 계획과 비밀통로의 존재를 전달하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분개하다가 곧 비탄에 잠겼다.


"사람을 죽을 때까지 부려 먹어놓고 이제는 마을까지 태워버린다니.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


"수도원마저 이단의 소굴이라니··· 그러면 대체 우린 누굴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무서워···."


눈앞에 다가온 절망에 마을 사람들은 촌장을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노인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밀 통로로 나간다 해도 갈 곳은 있는가?"


촌장을 수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여러 가지 방법은 있네만··· 어느 쪽이든 식량도 체력도 부족한 우리에게 가혹한 고난이겠지. 희생은 불가피할 게야."


"끄응···."


모인 사람들 모두가 비참한 현실을 곱씹으며 속앓이했다. 비관적인 분위기가 지하실을 감도는 가운데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유일한 외부인에게 향했다.


"이쯤에서 우리 수녀님에게 묻고 싶구먼. 혹시 비밀 통로를 빠져나가면 우리가 갈 만한 곳이 있나?"


촌장의 물음에 에스텔은 지도에 적혀 있던 순례 장소를 떠올렸다.


수녀의 입장과 자신이 아는 지식을 모두 고려했을 때,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해 줄 곳은 여신교를 따르는 수도원 혹은 성당뿐이었다.


하지만 수도원장이 빙화였던 노더니아 수도원의 경우를 생각하면 아무 곳에나 이들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만약 데려간 성당이나 수도원에 빙화가 침투해 있고 만약 그자가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다면 도리어 변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믿을 만한 수도원이 없을까? 조금이라도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 곳이···. '


에스텔은 문득 지도에 그려져 있던 붉은 동그라미를 떠올렸다. 로트가 신뢰하는 수도원장이 있다는 글로리아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장이 깨끗한 사람이라면 혹시 수도원에 빙화가 숨어 있다 해도 마을 사람들을 지켜줄 것 같았다.


다만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한 가지 진실이 마음에 걸렸다. 로트가 빙화 소속의 이단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로트의 말을 믿고 글로리아 수도원으로 가야 할까? 그를 믿어도 괜찮은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치 로트가 묻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고.


에스텔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생각해야 했다. 로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지금 로트는 어떤 사람인지, 그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사람인지.


로트를 믿을 수 있다고 결론지으려면 자신이 아는 그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했다. 진실을 알아보는 주관으로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면 알게 될 겁니다. 누군가를 믿는 데에 믿음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걸요.


로트의 말을 떠올리며 에스텔은 글로리아 수도원을 추천하던 로트의 모습을 돌이켜 보았다.


힘들어하던 로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줬다는 수도원장님의 이야기.


그녀를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던 로트의 얼굴.


누군가를 믿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전부 그분께 드리고 싶다고 말하던, 아주 조금은... 질투 나는 한 마디.


당장 로트가 했던 모든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말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알아버렸으니까.


하지만 글로리아 수도원을 추천하던 그날의 로트 사제님은 믿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에스텔이 결심을 굳히고 말을 꺼냈다.


"글로리아 수도원이 있어요. 그곳이라면 안전할 거예요."


"흐음··· 그런가. 거리는 여기서 대충 어느 정도 되나?"


에스텔은 지도를 보며 거리를 대충 가늠해 보았다.


"약 열흘 정도는 걸어가야 해요."


에스텔에 대답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열흘이나 걸린다면 글렀구먼."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져 죽을지도 모르겠군."


"불가능해···"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만!"


이에 촌장이 큰 목소리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좋은 의견을 줘서 고맙네, 에스텔 수녀. 이제부터는 마을 사람들끼리 의논해도 되겠나?"


"네. 알겠어요."


"아이들을 좀 부탁함세."


노인들은 한쪽에 모여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스텔은 옹기종기 앉아 있는 4명의 아이에게 다가갔다. 남자애 둘에 여자애 둘이었다.


남자애 한 명이 에스텔을 보자마자 외쳤다.


"앗! 어제 봤던 수녀 누나다!"


"반가워요. 노더니아 수도원에서 온 에스텔 수녀에요. 혹시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우!"


"쿠."


"실라라고 해~"


로나는 이미 면식이 있기에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4명이 전부군요."


네 아이들은 전부 로나와 비슷한 낡고 변색된 털옷을 입고 있었으며 하나같이 마른 체형이었다.


우가 물었다.


"수녀 누나는 무슨 일로 왔어? 여긴 먹을 것도 없는데."


쿠가 말을 받았다.


"여행하다 길을 잘못 든 거 아냐?"


"아냐. 사실 수녀님은 마귀할멈이라 우릴 잡아먹으러 온 거야."


로나가 말했다.


"동화 좀 그만 봐. 실라."


어려운 환경에서도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을 보며 에스텔은 싱긋 미소 지었다. 할 수 있다면 이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에스텔이 우의 말에 답했다.


"저는 여러분들을 도우러 왔답니다."


"어떻게?"


"뭐든지요. 혹시 원하는 게 있나요?"


우, 쿠, 실라가 순서대로 자그마한 소망을 꺼내놓았다.


"나는 그냥 밥만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좋겠어."


"이 마을을 나가서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


"따뜻한 이불 속에서 푹 잠들고 싶어. 옆에 동화 읽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더 좋고."


"로나는요?"


로나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나는 할아버지만 있으면 상관없어."


순수한 아이들의 꿈을 듣고 있다 보니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어느덧 촌장이 회의를 끝내고 에스텔과 아이들을 불렀다.


"지금부터 잘 듣게. 계속해서 의논해 봤지만, 열흘 동안 노인과 아이 14명이 식량과 체력 문제를 극복하고 살아남을 방법은 없더군. 그래서 결정했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슬그머니 에스텔을 향했다.


촌장은 간절한 얼굴로 호소했다.


"에스텔 수녀. 자네가 아이들만 데리고 글로리아 수도원으로 가 줄 수 있겠는가?"


에스텔은 놀라 되물었다.


"아이들만요? 그럼 여러분들은 어쩌고요?"


"우리만 아는 길이 따로 있다네. 다만 하나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어서 아이들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더군. 기왕이면 아이들은 가장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나."


촌장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결의에 차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촌장의 결론에 아이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로나가 그 정도가 가장 심했다.


"안 돼요! 할아버지도 같이 가요. 아빠도 엄마도 사라졌는데 할아버지까지 없으면 난 어떡해요?"


"걱정 말거라. 수도원에서 잘 지내고 있으면 할아버지가 찾으러 가마."


촌장은 훌쩍이는 로나를 타이르고 나서 에스텔에게 묵직한 배낭을 건넸다.


"부탁하겠네. 여기 모아둔 식량일세. 이 정도면 열흘 정도는 아슬아슬하지만 버틸 수 있을 걸세."


어른들은 아이들에게도 배낭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에스텔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제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저를 믿으셔도 괜찮나요?"


"오늘 만난 사람을 어찌 온전히 믿는다고 하겠나.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내린 결과인 게지."


촌장은 에스텔의 손을 꼭 붙잡았다.


"부디 자네 안에 다른 이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있기를 바랄 뿐이라네."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덜덜 떨리는 손에서 촌장의 마음이 느껴졌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소중한 아이들을 맡기는 불안감. 그러면서 그것이 최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무력함. 극한 상황에 아이들을 내몰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까지.


에스텔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제가 꼭 무사히 수도원까지 데려갈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네. 정말 고마워..."


에스텔은 촌장의 주름진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렇게 회의를 마무리하고 나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날이 밝을 것 같았다.


에스텔은 받은 식량을 배낭에 합쳐 넣고 짐을 싸면서 물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살아남을 방법이 있으신가요?"


"물론이지. 우리 노인들도 가만히 앉아서 죽지는 않겠네."


"거짓말은 아니겠죠?"


촌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수녀란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왜 이렇게 의심이 많은가?"


에스텔은 로트에게 농락당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 이유가 있는걸요···'


거기다 마을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더더욱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이 맨 가방에 식량을 최대한 쑤셔 넣고 있었다.


에스텔이 가늠해 보았을 때 식량은 저렇게 가방을 가득 채워도 좋을 만큼 넉넉하지 않았다. 저렇게 아이들에게 다 몰아주고 나면 남은 사람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촌장에게 아무리 대단한 꾀가 있다 한들 사람은 먹지 못하면 굶어 죽는다.


심지어 몸조차 성치 않은 노인 열 명이 식량 없이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눈으로 둘러싸인 노더니아의 혹한 속에서.


무슨 수를 써도 살아날 길은 없어 보였다.


에스텔은 마을 사람들은 이미 결심을 내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나는 이미 짐 정리를 끝내고 촌장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로나가 촌장의 옷자락을 붙잡고 물었다.


"진짜 찾으러 오는 거죠? 거짓말 아니죠?"


"그럼, 그럼. 이 할애비가 꼭 찾으러 가마."


에스텔은 촌장과 로나를 보며 문득 로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촌장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믿고 싶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기대고 싶었다.


수녀란 의심보다는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믿으면 마음이 너무나도 편하니까.


하지만 눈으로 직접 보고 추론한 진실이 촌장의 말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잔혹할지라도 진짜 현실이란 어떠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촌장을 올려다보는 로나를 보며 에스텔은 침묵했다.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아이들은 각자 제법 묵직한 배낭을 멘 채로 지하실 입구에 모였다.


무거운 배낭을 멘 아이들과 빈손으로 버티고 선 노인들이 마주 서서 포옹을 나누었다.


로나는 할아버지의 감촉을 기억하려는 듯 한참 동안 품에 안긴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에스텔과 아이들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서 길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을 마지막까지 눈에 담으려는 듯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비밀 통로를 향해 걷는 내내 아이들은 울상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른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침묵에 빠진 마을에서 훌쩍이는 소리만이 텅 빈 길목을 가득 채웠다.


점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햇살이 비쳐 드는 아그리파의 집무실. 그곳에서 한 기사단원이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지시하신 대로 광산은 폐광 처리하였고 마을도 소각 완료하였습니다."


"그렇군. 탈주자가 있었다고 하던데 잘 처리했나?"


단원은 고개를 숙여 보인 후에 말했다.


"총 14명의 탈주자가 발생하여 추적한 결과, 북부 산맥에서 아사한 노인 10명을 발견하여 처리하였습니다. 나머지 아이 4명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아그리파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북부 산맥이라··· 그쪽으로 올라가봤자 아무것도 없을 텐데 왜 간 거지?"


"교란책으로 판단됩니다. 북부 산맥 수색이 끝난 후 마을을 재탐색한 결과 비밀통로를 발견했는데 출구가 절벽 동굴 근처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아이 4명은 남쪽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북쪽으로 향하여 기사단을 유인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흠. 고분고분한 놈들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엔 제법 머리를 썼군."


기사단원이 물었다.


"남부까지 수색을 확대할까요?"


"됐네. 북쪽으로 퍼트려진 흔적 때문에 수색 범위를 넓게 잡았다고 하지 않았나. 인력 소모가 너무 컸어. 거기까지만 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아이 4명은 실종으로 종결 처리합니까?"


"아이 넷이 뭘 할 수 있겠나. 보나 마나 도시까지 못 가고 얼어 죽겠지."


아그리파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 수도원으로 복귀하도록. 추후에 빙화가 잠입한 수도원이나 성당 중에 아이 4명을 보호한 곳이 있는지만 확인해 두게."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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