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사웨이 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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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5.08 12:18
최근연재일 :
2024.07.18 20:40
연재수 :
5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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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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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에스텔 1장 (16)

DUMMY

네 개의 고드름은 특이하게도 천장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에스텔을 따라서 차례대로 움직였다.


일렬로 늘어선 모습이 마치 떨어질 순서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쿠궁!


얼음벽이 다가오며 땅이 뒤흔들렸다. 충격의 여파로 첫 번째 고드름의 윗부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에스텔은 그 광경을 보며 빠르게 생각했다.


고드름이 자신을 따라다닌다면 그건 낙하 위치를 유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 낙하 위치를 어디로 정해야 할까?


에스텔은 시선을 돌려 정사각형의 발판을 바라보았다.


네 개의 고드름과 상하좌우 네 개의 발판.


떨어뜨릴 곳이 있다면 저곳뿐이었다.


쿵!


첫 번째 고드름의 균열이 더 크게 벌어지며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이어서 두 번째 고드름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고드름이 떨어지는 시간 간격이 널널하지는 않을 듯했다.


에스텔은 중앙 정사각형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는 발판 위로 자리 잡았다.


발판 중앙에 자리 잡자마자 쩌적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고드름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에스텔은 바로 오른쪽 발판을 향해 뛰었다.


얼음이 발판과 충돌하며 요란한 파열음을 냈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아래쪽 발판 중앙에 도착해 위를 올려다보니 바로 두 번째 고드름이 떨어져 내렸다.


바로 다음 왼쪽 발판을 향해서 뛰었다.


이번에는 고드름과 제법 거리가 가까웠던지 바로 뒤에서 굉음이 들리며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얼음조각이 등을 때리며 시야 근처에서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날아다녔다.


왼쪽 발판 중앙에 도달하자 같은 간격으로 세 번째 고드름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위쪽 발판을 향해 뛰려던 순간 에스텔은 망연자실했다. 아까 두께를 확인한다고 올려 두었던 발판이 그대로 수직으로 우뚝 서 있었다.


"이런!"


하는 수 없이 에스텔은 사각형 밖으로 몸을 피했다. 네 번째 고드름은 바닥에 부딪혀 그대로 조각나더니 잠시 후에 입자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에스텔은 쓴 입맛을 다시며 열심히 뛴 결과물을 되돌아보았다.


발판은 중앙을 뚫고 들어간 고드름에 의해 꽝꽝 얼어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실패한 부분은 제외하고 나머지 세 방향의 발판을 수직으로 세워 보았다.


그러자 고드름의 날카로운 부분이 벽 쪽을 향하며 훌륭한 얼음 공성추가 완성되었다.


이제 벽은 크게 줄어들어 발판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에스텔은 불안한 눈빛으로 실패한 왼쪽 발판을 살피며 기다렸다.


이윽고 얼음벽이 고드름에 맞닿았다.


충돌과 동시에 파편이 비산했다. 벽은 멈추지 않고 전진하며 계속해서 얼음 파편을 흩뿌렸다.


고드름과 맞닿은 부분이 깎여 나가고 있음에도 그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결국 고드름이 조금씩 벽을 파고들며 견고해 보이던 얼음벽에 금이 갔다.


벽이 점점 좁혀들수록 고드름이 파고드는 틈새도 점점 넓어졌다. 그럼에도 벽은 멈추지 않았고 틈은 점점 더 벌어졌다.


계속 퍼져나간 균열이 벽 가장자리까지 닿은 순간 고드름이 얼음벽을 꿰뚫으며 반대편까지 뚫고 나왔다.


벽은 고드름에 뚫린 지점을 중심으로 점차 균열이 커지더니 산산조각이 나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총 세 방향의 벽이 같은 방식으로 부서졌다.


반면 위쪽 벽은 같은 속도를 유지하며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고드름 없는 발판은 힘없이 뒤로 젖혀졌고 벽은 그대로 원에 도달했다.


그 순간 얼음벽이 폭발하며 냉기가 에스텔을 덮쳤다.


"크윽!"


살을 에는 한기에 절로 몸이 웅크려졌다. 냉기가 폐까지 파고들어 기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쿨럭! 쿨럭!"


에스텔은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급히 회복 마법으로 상처를 치유하려 했으나 이미 냉기에 노출되어 둔해진 몸에는 소용이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에스텔을 보며 시몬 사제는 만족스러운 듯이 조소를 흘렸다.


"기믹을 온전히 파훼하지 못하면 질서의 권능은 소모되지 않습니다. 좀 더 분발하셔야겠군요."


"으윽!"


시몬이 다시 앙 팔을 펼쳤다가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또다시 벽이 생성되어 에스텔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스텔은 망연히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더 이상의 실패는 용납되지 않을 것 같았다.


발판이 다시 생성되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고드름도 다시 자라나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스텔은 오른쪽 발판 위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떨어지는 간격은 기억하고 있었다. 몸이 조금 느려졌어도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면 가능해 보였다.


쿠쿵! 첫 번째 고드름의 윗부분에 생긴 균열이 크게 벌어졌다. 아마 다음 충격이 온다면 버티지 못하리라.


에스텔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쿵! 아까보다 더 강렬한 진동이 왔다.


에스텔은 즉시 다음 발판을 향해 같은 동선으로 뛰었다. 위를 올려다보지 않고 그저 자신이 기억하는 시간 감각에 몸을 맡기고 달려 나갔다.


쾅!


등 뒤로 얼음이 발판을 파고드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쾅!


비록 느려졌어도 고드름을 유도하고 빠져나갈 시간은 충분했다.


쾅!


총 세 개의 고드름을 무사히 떨어뜨린 후 에스텔은 마지막 위쪽 발판을 밟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발판을 애초에 올리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사각형 밖으로 벗어나 돌아보니 네 번째 고드름이 발판 바닥을 꿰뚫고 있었다.


곧 발판들은 고드름에서 퍼져 나오는 냉기에 의해 얼어붙어 단단한 장판으로 변했다.


에스텔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벽을 하나하나 올려세웠다. 원을 둘러싸는 네 방향 공성추가 완성되었다.


"이럴수가!"


시몬은 당황했으나 이미 움직이는 벽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일단 기믹이 시작되면 주관자라고 해도 자신이 만든 규칙을 따라야 했다.


벽은 그대로 지축을 울리며 고드름을 들이받았다. 충돌한 지점에서 점점 실금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벽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고드름에 벽이 꿰뚫리는 순간 네 방향 벽에 생긴 모든 실금이 얼음벽 전체로 이어지며 균열은 더 크게 벌어졌다.


쩌저저적!


얼음에도 생명이 있다면 아마 저 소리는 숨이 끊어지는 단말마일 것이다. 벽 전체에 벌어진 균열을 버티지 못한 얼음벽은 일제히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크헉! 끄아아아악!"


시몬은 땅에 드러누워 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갑자기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온몸을 뒤틀더니 식은땀을 흘리며 헛구역질했다.


"크으윽! 대체 저를 얼마나 괴롭게 해야 만족할 겁니까, 에스텔 수녀!"


에스텔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로 하얀 입김을 뱉어냈다.


"그러니까 기믹은 이제 그만두세요.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아뇨. 아직입니다···. 쿨럭!"


고개를 든 시몬의 얼굴은 생기가 빠져나간 듯 수척했다. 창백한 피부에 움푹 들어간 눈은 척 보기에도 쇠약해 보였다.


하지만 눈빛에 들어찬 집념만큼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당신을 교화하기 전까지 저는 절대 쓰러질 수 없습니다!"


시몬은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으며 일갈했다.


"제게 남은 모든 권능을 동원해 이번 한 번으로 끝을 보겠습니다. 어디 한 번 버텨 보십시오!"


쿠궁!


시몬이 팔을 활짝 펼치자 잔해 아래에서 얼음벽이 다시 솟아올랐다.


시몬은 그 자세 그대로 주문을 외우더니 몸속에서 푸른 기운을 뽑아내 몸에 둘렀다.


"흐읍!"


시몬이 그대로 팔을 접어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자 또다시 얼음벽이 축소되며 중앙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몸에 두른 기운 탓인지 벽이 줄어드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에스텔은 빠르게 다가오는 벽을 올려다보며 각오를 다졌다.


"여기까지 왔으면 한쪽이 쓰러지기 전까지 끝나지 않겠네요··· 한 번 해보자고요. 시몬 사제님."


금세 진동이 일어나더니 고드름이 빠르게 생성되었다.


에스텔은 고드름의 상태를 살피며 다시 아래쪽 발판으로 돌아갔다.


기믹을 수행할 준비는 끝났다. 시간이 흘러 몸이 약간이나마 녹았기에 빠른 속도에도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쿠궁!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자세를 잡았다. 위에서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지금!'


에스텔은 바로 아래쪽 발판으로 뛰었다.


쾅!


걸음을 얼마 떼어놓지도 않았는데 얼음이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 얼음조각이 등을 때렸다.


이 정도로 떨어지는 간격이 빠르다면 멈춰 설 여유는 없었다.


에스텔은 즉시 아래쪽 발판 중앙에 도달한 후 그대로 몸을 돌려 왼쪽으로 향했다.


쾅!


왼쪽 발판 중앙까지 무사히 도달하고 나니 이제 위쪽 발판만 남아 있었다.


에스텔은 바로 마지막 발판으로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쾅!


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제 막 발판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발에 미끄러운 무언가가 밟히며 한순간에 세상이 뒤집어졌다.


에스텔은 땅에 닿기 전 하늘 높이 떠오르는 자기 발과 저 멀리 날아가는 얼음조각을 보았다.


퍽! 등과 허리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며 에스텔은 그대로 위를 향해 드러누웠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천장을 향했다.


높이 매달린 고드름이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경우 낙하지점이 어디일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아.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서 피해야 하는데.


에스텔의 바람과 달리 얼어붙어 둔한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거기에 뒤늦게 통증이 몰려와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할 수 없었다.


이윽고 뚝하는 소리와 함께 고드름이 떨어져 내렸다.


점처럼 조그맣던 고드름이 가까워지며 뾰족한 창끝을 들이밀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정신이 눈앞에 다가온 죽음이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일까.


무서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감각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꿈을 꾸듯 몸과 정신이 유리된 감각을 느끼며 눈앞에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수도원 사람들과 사제의 집무실. 기다란 복도와 로트 사제님.


얼어붙은 절벽과 백랑 기사단. 오이미야 마을과 귀여운 아이들.


글로리아 수도원과 글로리아 수녀.


얼음감옥과 다시 떠오르는 로트 사제님의 얼굴.


아직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데.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하지만 고드름은 더 이상 에스텔이 현실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투명한 푸른 빛으로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 로트 씨. 아직 아무것도 묻지 못했는데...'


에스텔은 눈물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차가운 냉기가 에스텔의 얼굴을 덮쳤다.


"케엑!"


무방비한 맨살을 파고드는 냉기에 에스텔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감싸안으며 기침을 내뱉었다.


"쿨럭쿨럭!"


그러자 냉기가 들숨을 파고들며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에스텔은 일단 냉기에서 벗어나자는 생각에 허리의 통증도 잊고 옆으로 몸을 굴렀다.


몇 바퀴쯤 굴러 겨우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점차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점점 다가오는 얼음벽과 완성된 세 개의 얼음 장판이 보였다.


다음으로 방금 누워있던 자리를 보니 고드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고 차가운 냉기만 안개처럼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어떻게 살았는지, 고드름은 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유령에 홀린 기분이었다.


멍청한 표정을 짓는 에스텔에게 시몬이 해답을 알려 주었다.


"하하! 제게 감사하십시오! 만약 제가 벌로 당신의 죽음을 원했다면 방금 정말로 죽었을 겁니다. 기믹 속에서 주어지는 벌은 모조리 차가운 냉기가 되도록 했으니 제 자비심에 경외를 표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성배를 잘못 부쉈을 때도 냉기가 되돌아왔다. 막지 못했던 얼음벽도 냉기로 변해 몸을 덮쳤다.


마음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고통이 무엇인지 느껴보라던 시몬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시몬은 광소를 터트리며 덧붙였다.


"하하하! 뭐, 이미 발판 하나는 날아갔고 냉기까지 여러 차례 맞았으니, 기믹은 실패나 다름없지만요."


에스텔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현실감이 돌아오지 않아 어지러웠다. 고드름이 눈앞까지 다가왔던 장면이 뇌리에 남아 정신이 혼미했다.


그 상태로 천천히 자기 몸을 더듬어보았다.


추위 때문에 감각이 너무 둔했다. 자기 몸이 아니라 인형을 조종하는 느낌이었다.


귀도 먹먹하고 눈으로 보아도 인지가 느렸다. 어쩐지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만신창이였다.


"그래도 나···"


에스텔은 지팡이를 땅에 박고 몸을 기댔다.


"아직 살아 있구나."


여전히 눈을 뜨고 볼 수 있었다. 귀를 열어 들을 수 있었다.


등과 허리에서 통증을 느꼈으나 여전히 어깨를 펼 수 있었으며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버티고 설 수 있었다.


숨소리는 가냘팠지만 숨은 쉬고 있었으며 맥박은 미약했지만 심장은 뛰고 있었다.


이 모든 명백한 증거 속에서 에스텔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이제 포기하시지요! 그러면 제가 따뜻한 손길로 당신을 보듬어···"


멀리서 시몬 사제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으나 한 귀로 흘려넘겼다.


"아직 안 죽었다면···"


에스텔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로트 씨를 만나러 갈 수 있어···!"


에스텔은 마치 언데드처럼 비척비척 장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한 손길을 따라 얼음 장판이 차례차례 얼음벽을 향해 세워졌다.


하나둘 거대한 고드름이 벽을 향했고 세 방향을 둘러싸는 날카로운 공성추가 완성되었다.


마지막 장판을 세우고 나니 텅 빈 위쪽 발판만이 남았다.


에스텔은 그쪽으로 다가오는 얼음벽을 바라보았다.


마침 시몬과 정확히 마주 보는 방향이었다.


벽 너머로 그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에스텔은 발판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발판을 세우려면 밟아야 하는 가장자리를 지나치더니 발판 정중앙에 굳건히 버티고 섰다.


시몬이 조소를 보냈다.


"발판조차 포기하다니 완전히 마음이 꺾인 모양이군요. 이번 기믹이 끝나면 다음에 완전히 끝내드리겠습니다. 아니지, 어쩌면 이번에 끝날지도 모르겠군요."


에스텔은 시몬을 무시하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뭉툭한 윗부분을 자신에게 향하면서 벽을 향해 아랫부분을 내밀었다.


마치 벽을 향해 창을 찌르는 듯한 자세였다.


시몬이 그 모습을 보며 폭소했다.


"푸하하! 겨우 그 정도로 제 얼음벽을 막겠다니 용기가 가상하군요."


시몬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며 세차게 양팔을 접었다.


"어디 한 번 해보시지요!"


얼음벽이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스텔은 눈을 떠 벽을 바라보았다. 체력이 다 떨어진 탓에 눈앞이 흐릿했지만, 로트가 준 목걸이가 빛나며 시야를 다시 밝혀 주었다.


푸르게 빛나는 세계에서 벽 정중앙에 핵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에스텔은 양손으로 지팡이를 붙잡으며 끝부분을 핵에 정확히 조준했다. 몸이 얼어붙어서 그런지 같은 자세를 유지하기가 오히려 더 쉬웠다.


에스텔은 그 자세 그대로 벽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위쪽을 제외한 벽은 고드름에 도달하자 금방 꿰뚫리며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벽은 곧 발판의 경계를 넘었다.


에스텔은 숨을 들이쉬며 팔에 힘을 주었다. 얼음벽이 지팡이 끝과 맞부딪혔다.


쿵! 육중한 충돌음과 함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에스텔은 굳은 석상처럼 우뚝 서서 벽을 뚫으려 하고 있었고 시몬은 벽을 밀어붙이며 그대로 에스텔을 밀어버리려 하고 있었다.


버티고 선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에스텔의 몸이 점점 원의 경계 안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지팡이도 조금씩 얼음 안으로 파고들었다. 눈으로 보았던 실금이 현실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서로가 목표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어째서 저항하는 겁니까, 에스텔! 저의 인도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러기엔 저는 너무 많이 알아버렸어요. 저에겐 더 이상 교리가 전부가 아니에요."


"그럴 리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발언을 철회하고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을 구원하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시몬은 굳건히 버티는 에스텔을 보며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처럼 딱 한 마디면 됩니다!"


슬슬 몸도 마음도 한계에 달한 듯 완전히 쉰 목소리였다.


"제게 말해보십시오! 흔들리지 않았다고. 당신의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해보십시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6년의 시간을 넘어서 지금 에스텔의 귀를 파고들었다.


"당신의 믿음을 신 앞에 맹세하란 말입니다!"


에스텔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손을 뻗은 시몬의 모습은 6년 전 어깨를 붙잡고 윽박지르던 모습과 기막히게 닮아 있었다.


"에스텔!!!"


그때도 그는 지금처럼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절규하듯 소리치고 있었다.


에스텔은 생각했다.


그때 나는 사실 뭐라고 말하고 싶었던가.


마음으로 거짓말을 하는 대신 입으로 꺼내야 했던 진심은 무엇이었는가.


이제는 알고 있었다. 6년이 지나서야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에스텔은 더 이상 버티지 않기로 했다.


발을 오히려 앞으로 내밀고 팔은 굽혀 가슴에 붙였다.


뻗은 팔을 거둔 만큼 얼음벽이 다가와 원의 경계에 닿기 직전까지 도달했다. 대신 자세가 바뀌어 상체 전체의 힘으로 지팡이를 밀어넣을 수 있었다.


에스텔은 온 몸으로 힘을 주어 지팡이를 찔러 넣었다.


"저는···"


쩌적. 벽에 실금이 생겨났다.


"당신을···!"


쩌저적. 실금이 푸른 빛을 따라 점점 퍼져나갔다.


"믿지 않아요!"


쩌저저적. 실금이 벽 가장자리에 닿는 동시에 지팡이가 얼음벽을 뚫고 나왔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얼음 조각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얼음 감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새하얀 결정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눈으로 본 그 광경은 마치 밤하늘에 퍼진 별무리 같았다.


부서진 벽 너머로 충격에 빠진 시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흰자위가 뒤집힌 채로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모습이 처절하면서도 처참해 보였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크헉!"


한참 비틀거리며 괴로워하던 시몬은 그대로 동공에 힘이 풀리며 썩은 나무가 쓰러지듯 뒤로 넘어갔다.


그가 쓰러지면서 무너진 얼음벽과 고드름이 모두 푸른 기운이 되어 에스텔에게 몰려들었다. 손을 뻗어 막으려 했으나 기운은 그대로 에스텔의 몸에 파고들었다.


당황하여 몸을 더듬는데 갑자기 상처가 사라지고 한기가 일순간에 소멸하며 온몸이 따뜻해졌다. 조금 있으니, 몸에 활력이 돌아오며 통증도 잦아들었다.


치유보다는 복구에 가까운 과정이었다. 기믹이 끝나면 승자를 기믹을 시작하기 전 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것 같았다.


어느새 공동을 둘러쌌던 투명한 벽도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시몬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니 쇼크로 인해 기절하긴 했으나 맥박은 뛰고 있었다.


에스텔은 그의 품에서 열쇠를 꺼낸 후에 왼쪽 굴로 끌고 가 대충 던져두었다. 널브러진 모습을 보니 조금 성의가 없어 보여서 얇은 천으로 가려두는 정성까지 발휘했다.


뒤처리를 끝내고, 에스텔은 다시 공동으로 돌아와 시몬이 막고 있던 정면 통로를 응시했다.


"이제야 당신은 만날 수 있겠네요. 로트 사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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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에스텔 1장 (17) 24.05.30 15 1 14쪽
» 에스텔 1장 (16) 24.05.29 17 1 19쪽
16 에스텔 1장 (15) 24.05.28 9 1 15쪽
15 에스텔 1장 (14) 24.05.27 10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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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에스텔 1장 (12) 24.05.23 12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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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에스텔 1장 (5) 24.05.14 25 1 18쪽
5 에스텔 1장 (4) 24.05.13 30 2 22쪽
4 에스텔 1장 (3) 24.05.11 31 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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