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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완결

숲을보다
작품등록일 :
2024.05.08 12:45
최근연재일 :
2024.06.24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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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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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는 누구의 것인가?

DUMMY


폭격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이주성은 미술관인근에 쓰러져 있던 나와, 지하에 있는 미술품보관창고에 잡혀 있던 포로들을 무사히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로들 속에 심연영을 비롯한 장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이주성은 서둘러 포로로 잡혔던 이들에게 사라진 이들의 거취를 물었고, 포로로 잡힌 당일에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주성은 최성민에게 상황을 보고했고, 최성민은 적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기밀자료와 포로들의 심문을 통해 ‘치치하얼 시’ ‘간난 현(甘南县)’ 동북쪽외곽 7km지점에 포로수용소가 있으며, 그곳에 심연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연영의 위치는 알았지만··· 최성민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다. 기존 5200명이었던 여단병력은 2천명밖에 남지 않았고, 이 인원으로 하얼빈에서 올라온 적 2개 연대의 병력과 치치하얼시에서 남하한 8합성여단의 2개대대의 병력도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치치하얼시의 8,115합성여단은 아군 3사단의 공격을 받고 있음에도 다칭을 구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했던 것이다. 그만큼 다칭은 중요한 곳이었다.

최성민은 상관의 연인을 구하겠다고 병력을 뺏다가 다칭을 내어 주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은 물론, 여단전체가 죽거나 포로로 잡힐 수도 있기에 감히 구하러 가지 못했다. 대신 상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곳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근처에 있는 9공수특전여단에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들도 ‘설랑’부대를 견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나의 우유부단함으로 나오지 않을 희생자를 만든 것을 두 눈으로 본 9공수여단장은 우리 여단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최성민은 그래야만 했던 사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했으나 뼈속까지 군인이었던 그는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최성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이제 미련을 버리고 수비에 집중해야 했다. 우선 ‘두얼보터 진’에 1개 중화기소대와 보병1개중대를 배치하여 치치하얼에서 남하하는 적군을 막았다.

그리고 1개 중화기소대와 보병 2개 중대를 ‘랑후루 구’의 G301고속도로와 ‘중산 로’, ‘시양 로’가 교차하는 교차로에 배치하여 ‘두얼보터’의 아군이 고립되지 않도록 보급로를 지키며, 우회하여 시내로 들어오는 적을 막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또한 중심가 북쪽입구에 해당하는 ‘둥난 둔’에 1개 보병대대를 배치하여 ‘린덴 현’ 방면을 막았으며, 가장 많은 적이 몰려오는 동쪽과 동남쪽에 남은 전차 15대와 장갑차, 험비, 2개보병대대, 1개중화기소대, 박격포중대, 방공중대를 배치했다.

본부대대는 ‘룽펑 구’에 주둔시켜 예비대로 사용했으며, 경호중대에서 1개 소대만 여단 본부에 남기고 나머지 2개 소대는 시내 곳곳의 중요지점에 배치하여 혹시 모를 적군의 잠입과 소요에 대비했다.

공병들은 북쪽평야와 동남쪽평야에 대인지뢰와 대전차지뢰, 전차차단물을 설치하도록 하여 적의 진격속도를 늦추었다.

···

다칭시는 78집단군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다칭에서는 연료가 나왔고, 시내의 볼보 자동차공장에서는 전차엔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다칭을 되찾지 못하면 하얼빈과 흑룡강 성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국군의 신경이 다칭으로 쏠렸을 때, 아군도 하얼빈을 끝장내기 위한 강력한 한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8월 25일, 훈련을 마친 15개신병여단의 10만병력과 새로운 기술로 탄생한 신형 k3전차 200대와 k2전차 300대, 신형 k10자주포 100문과 k9자주포 150문, 각종 전투기와 폭격기, 무인전투기, 신형드론 등으로 무장한 기갑, 항공, 방공전력이 하얼빈에 이르렀다.

8월 26일, 기존의 병력과 더불어 총20만의 병력은 8방향에서 하얼빈에 공격을 개시했다. 하얼빈을 수비하던 중국군 30만도 강력히 저항했지만, 중앙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오로지 성내의 자원에 의존하던 78집단군은 다칭시를 수복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서서히 마르기 시작한 자원으로 인해 여름과 같은 강력한 저항을 하지는 못했다.

하얼빈에서 아군이 연일 승전보를 울릴 때··· 우리 여단은 죽을 맛이었다. 29일에 도착한 2공수여단의 지원으로 다칭의 서, 북쪽만 수비했지만, 여전히 적군은 아군의 5배였기에 쉽지 않았다.

단 10흘 만에 아름답던 다칭시는 적, 아의 포격과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었으며, 하늘의 별이 흐르던 호수들은 피로 물들었다. 상쾌했던 대기는 먼지와 화약냄새로 매캐하게 변질되었으며, 푸르던 생태공원과 습지는 화염과 연기에 그을려 지옥에서나 볼법한 음산한 기운을 뿜었다.

8월 31일, 죽지 않은 나는 다시 일어서야 했고··· 전장에 나가야 했다. 다칭에는 중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훌륭한 의료시스템을 갖춘 병원들이 있었기에 나는 후방으로 이송되지 않았다. 여단내에는 뛰어난 군의관들이 있었고(평시와는 대비도 안 되는 실전경험으로,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환경이 갖추어졌기에 충분히 나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신적피로와 출혈로 많이 피폐해졌지만, 최성민에게만 짐을 지을 수 없었기에 병실을 나와 여단본부로 향했다. 최성민은 더 쉴 것을 권고했지만, 나는 지휘봉을 잡았다. 하루 1,2 시간을 자면서 여단을 지휘한 최성민은 총상을 당한 나보다 더 힘들어 보였다.

9월 1일, 나는 사령부에 2개대대의 보충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부관은 최성민도 여러 차례 요구를 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부관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사령부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9월 2일 20시까지 보충병력이 도착하지 않으면, 여단을 이끌고 철수하겠다고 했다. 이국정장군은 만약 그렇게 되면 나를 비롯한 여단전체를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했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한번 더 보충병력을 요구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나서 2공수여단에 연락하여 9월 2일 20시까지 보충병력이 오지 않으면 우리 여단은 철수할 생각이니, 인수인계를 받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2공수여단장은 ‘뭔 개소리냐?’ 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해명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할 기력도 없었기에 내 할말만 하고 바로 끊어버렸다.

이후, 3시간동안 사령부와 2공수여단에서 수없이 전화와 전문이 왔지만 받지도, 답장하지도 않았다. 병사들은 나의 결정을 환영했으나, 불안했던 일부 장교들은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허나 눈에 뵈는 게 없던 나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뭐, 그렇다고 내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다. 다칭수비 초기 2천의 우리 여단은 천명으로 줄었지만, 적들은 초기 5천에서 지금은 2만이 넘는 병력으로 우리와 3공수여단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3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고, 우리 여단만이 아닌, 모두가 죽을 수도 있었다. 차라리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죽으면 죽었지, 대형참사를 일으키게 둘 수는 없었다.

9월 2일 18시, 하늘은 눈송이로 뒤덮였고, 3공수여단이 우리 여단을 지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떨어졌다. 지나치게 많은 병력에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나는 최성민을 본부 밖으로 내보내 만약을 대비하도록 했다. 나보다 계급이 높았던 3공수여단장 준장 황일국은 본부에 들어서자마자 내 견장을 잡아 뜯어버리며 총살형을 선고하는 즉석재판을 열었다.

본부를 벗어나 있던 최성민은 여단방어선의 모든 병력을 뒤로 물렸고, 적들은 물밀듯이 다칭시내로 들어왔다. 적을 막지 못하면 황일국도 그 책임을 면할 방법은 없었기에 나에 대한 재판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만약 황일국이 인수인계를 먼저 받고 나와 참모진의 죄?를 심판하려고 했다면 꼼짝 없이 죽어야 했지만, 우리 여단이 ‘쿠테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신속히 내 머리를 자르려고 한 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

2개 대대정도의 병력밖에 남지 않았던 우리 여단은 3공수여단에 배속되어 싸워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고, 공식적으로 나는 해임되었기에 최성민이 지휘를 맡아야 했으나 최성민도 배째라는 식으로 대처했다.

나도 생각 같아서는 혼란을 틈타 황일국을 죽여버리고, 사령부로 쳐들어가 이국정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아무 죄도 없는 병사들도 역적으로 만들 수는 없었기에 참았다.

9월 3일, 아침 10시 황일국은 어제 못한 재판을 다시 열려고 했지만, 우리 여단은 이미 ‘두얼보터’에 있었다. 3공수여단의 1개소대가 나의 신병을 인도하기 위해 ‘두얼보터’에 왔으나 살벌한 분위기에 그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황일국은 나를 비호하는 우리 여단을 공격해서 죽여도 되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살아남은 937명은 우리 여단의 최정예들이었으며, 전쟁초기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나와 함께 생사를 같이한 이들이었기에 뛰어난 장군인 황일국에게도, 특수훈련을 받은 3공수여단 장병들에게도 우리와 싸우는 것은 부담이 컸다. 나와 최성민은 아군내에서도 알아주는 지장(智將)들이었고, 호랑이 같은 용맹함을 가진 이주성과 그의 수하들도 늑대와 같았기에 우리와 싸우려면 3공수여단 또한 모든 것을 걸어야 했고, 어중간한 병력으로는 우리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전차대대장 강민석에게 ‘두얼보터’의 자동차정비소에서 고장난전차와 차량을 수리하도록 했으며, 정찰소대장에게는 3공수여단의 보급품창고의 위치를 알아오라고 했다. 급하게 도망쳤기에 탄약과 무기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녁 23시 30분, 3공수여단에 비해 다칭시의 지리에 밝았던 우리는 은밀히 빈 차량을 이끌고 3공수여단의 보급창고로 이동했다. 보급창고는 2008베이징하계올림픽 당시에 건설한 올림픽경기장에 있었고, 그 주위는 탁 트인 공지였기에 누가 접근하는지 잘 감시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해서 나는 당당하게 훔치기로 했다. 우선 보급창고와 3공수여단본부로 이어지는 유선통신선을 절단했고, 통신소대의 괴짜 소대장(전쟁 전 LG전자에 다녔던 그는 손재주가 기가 막혔다.) 김영호는 자작한 전파교란장치(기존의 것은 폭격에 박살이 났기에 쓸 수가 없었다.)를 작동시켜 보급기지와 외부와의 통신을 단절시켰다.

나는 3공수여단 행보관에게 보급품을 나눠 받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통신이 두절되어 진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행보관은 사람을 보냈지만, 우리가 중간에서 납치했기에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연락병은 돌아오지 않고, 다시 시작된 적의 공격과 때를 틈탄 나의 불 같은 독촉에 못 이겨 무기와 탄약을 내주었다.

···

9월 5일, 우리 여단과 전면전을 할 수 없었던 황일국은 나를 납치하기 위해 최정예부대 ‘브라보’중대를 ‘두얼보터’에 은밀히 침투시켰지만, 그럴 줄 알고 대비하고 있던 우리 여단에 역으로 포위되고 말았다.

나는 무기를 버리고 물러나면 불상사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 했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브라보’중대는 순순히 물러났다. 덕분에 우리는 일반 보급품보다 성능이 좋은 최신형 무기와 장비들을 얻을 수 있었다.

9월 10일, 하얼빈을 공격한 아군은 적의 3차방어선인 ‘헤싱 로’에 이르렀으며, 다급해진 중국군은 영혼까지 끌어 모은 5만의 병력을 다칭으로 보냈다.

9월 13일, 2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전투지경선인 ‘베이강 촌’이 적에게 돌파 당했으며, 중국군은 물밀듯이 다칭시내로 밀려들었다. 2,3 공수여단은 분단되어 각개격파 당할 위기에 놓였으며,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10일동안 배불리 먹고, 자면서 체력을 비축한 우리 여단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여단을 이끌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시내로 들어가 들어온 적을 막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동북쪽으로 우회하여 적의 뒤를 급습했다. 우리 여단은 기동전에 익숙했기에 적군의 혼을 빼놓았으며, 우리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던 적군은 후방을 경계하지 않았기에 몰래 보낸 전차소대(10일동안 재정비하면서 우리 여단은 12대의 전차를 자력으로 수리할 수 있었으며, 이 당시 총 19대의 전차가 있었다.)와 중화기중대는 손쉽게 적 전초기지를 공격할 수 있었다.

우리 여단은 밤새 다칭의 동북쪽 평야를 휘젓고 다녔으며, 전초기지가 날라가 탄약과 연료가 충분치 않았던 적들은 50km뒤에 떨어진 ‘밍수이 현’으로 물러났다.

적들이 물러간 후, 3공수여단장 황일국은 미리 ‘두얼보터’에 병력을 보내 되돌아오는 우리 여단을 포위했다. 최성민은 나에게 ‘두얼보터’에 들어가지 말 것을 건의했으나 나는 도망친다고 해도 미래가 없음을 알았기에 나를 죽이려는 자들을 향해 당당히 나아갔다.

나는 지휘차량에서 내려 황일국 앞으로 나아갔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3공수여단의 장병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3공수여단은 생명의 은인들을 이렇게 대하나? 전우애 같은 것은 없는가?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내가 진정 죄인이라고 생각하나?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상관의 명령에 불복한 내가 나쁜 놈인가? 응? 부당한 상관의 명령에 따르다가 모두 죽어야만 애국자고, 살아남으면 역적이냐? 너희들 특전여단 2천명도 막지 못한 저놈들을 천명도 남지 않은 우리 여단이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

오늘은 내가 너희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지만, 내일은 너희들이 전장에서 죽을 것이다. 후방의 안락하고, 따뜻한 방에 앉아서··· 권위와 체면만을 중시하는, 저! 살찐 돼지들에 의해서 말이다.

···

혹시 누구든지 살아서 돼지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이렇게 전해주라.

‘ㅈ까! ㅆㅂ놈들아!’

···

너희 에게도 양심이 있다면 나만 죽여라! 내 병사들은, 내 명령을 따른 것뿐이니까···’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황일국은 마침내 내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허나 황일국은 쉽게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다. 뒤에서 동요하는 병사들 때문이었다. 우리 여단의 장병들은 다 같이 죽자는 각오를 하고 포위되어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3공수여단을 향해 발포할 준비를 했고, 3공수여단의 장병들도 총은 들었지만, 우리만큼 각오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나는 최성민을 비롯한 여단장병들에게 총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나는 정말로 죽을 생각이었고,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았다. 6년의 전쟁, 포로로 잡혔을 때 얻은 병과 잦은 부상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고통, 매일매일 마주하는 죽음의 공포로 인해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고,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고, 회의감이 생겼으며, 나를 지탱하던 마지막 고삐도 떨어져 나갔기에 삶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황일국은 나를 죽이지 못했고, 나는 황일국의 손을 잡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당황한 황일국은 나를 뿌리쳤고, 팔이 하나밖에 없었던 나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

9월 18일, 3사단에 의해 치치하얼시가 점령되었고, 9월 19일 ‘간난 현’의 포로수용소는 해방되었다. 많은 포로들이 귀환했고, 그 중에는 심연영도 있었다. 심연영은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포로로 잡힌 내내 고통을 받았으나,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강인한 정신력으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버텼다.

9월 21일, 하얼빈의 78집단군이 항복을 했다. ‘설랑’부대는 ‘쑤이화 시’를 버리고 ‘이춘 시’로 물러 났으나 끈질기게 따라붙은 9공수특전여단에 의해 대부분이 전사하고 소수의 병력만이 아무르강 유역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동부전선군은 러-중국경과 중-몽국경으로 병력을 보내 국경수비대와 78집단군의 잔여세력을 소탕했다.

9월 25일, 나는 창춘시로 이송되어 군사재판을 받았으며, 증인으로 재판에 참여한 황일국과 2공수여단장 김성태, 최성민, 이주성 등의 증언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10월 1일 휴가를 즐기고 있는 우리 여단으로 복귀했다.

10월 3일, 우리 여단은 사단으로 승격하였으며, 다칭에서 살아남은 937명에 영감을 받아 제937보병사단이라 명명되었다.

나는 소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최성민은 준장으로, 이주성은 대령으로 승진하여 연대장이 되었다. 기타 장병들도 1계급 승진하였으며 전사자 중 124명, 살아남은 이들 중 절반이 무공훈장을 받았다.

2030년 10월 28일, 나와 심연영은 ‘지린 시’에서 사단장병들의 축하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내 생애 가장 행복하고, 힘든(?) 하루였다.

11월 1일, 동북3성과 내몽고자치구의 절반은 완벽히 아군의 점령지가 되었으며, 우리나라는 핵무기와 유전, 1억 3천만의 인구, 150만㎢의 영토를 가진 강대국이 되었다.

11월 11일, 베이징에서 중부전구에 의한 ‘쿠테타’가 일어났고, 11월 13일, 시주석의 정권은 몰락했다. 비호를 받던 북한의 김x은은 도주를 시도하다가 베이징공항에서 잡혀 시민들 손에 맞아 죽었다. (동북3성을 빼앗긴 한을 그에게 풀었던 것이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히 짓밟힌 몸뚱이는 길가에 버려졌고, 침과 오물로 뒤덮였다.

언제나 그렇듯 독재자의 말로는 비참했다.

11월 23일, 새로운 중국정부는 미국과 정전협정을 맺었으며, 71,72,73집단군은 대만에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미국이 정전을 받아들인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는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른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극한으로 몰린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작가의말

세상은 늘 불공평하며 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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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가장 더러운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24.06.05 36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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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교활한 여우, 우직한 곰! +2 24.05.29 43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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