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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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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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작성
24.05.14 13:00
조회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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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2쪽

4화 - 달빛 아래 어둠 속

DUMMY

* “아이고, 아버지! 어찌 또 이리 되셨습니까? 히로유키 위님, 이거 매번 죄송해서 어찌합니까?”


쿠사카베 준의 울분이 뒤섞인 목소리가 홍등으로 물든 유곽에 울려퍼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는 쿠사카베가 단 하루도 취하지 않은 날이 없을 리 만무하였다. 이미 총독부의 군인들 가운데는 그런 그를 어떻게든 귀택시키려 매번 얼굴을 비추는 아들 준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요,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지 않아 본 이가 없을 정도였다. 정작 함께 마신 이는 멀쩡하거늘, 술자리를 제안한 이는 술의 맛에 취하여 게이샤들에게는 손조차 대지 못하고 쓰러져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를 작렬했다.


* “죄송할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쿠사카베 중좌님께서 많이 취하시어 염치불구하고 늦은 시간에 연락을 드렸으니, 도리어 제가 사과드려야 마땅합니다.”


* “아닙니다, 아닙니다! 외려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리 사과드리겠습니다. 다음 번에 제가 꼭 좋은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 “괜찮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오늘도 어김없이 연락을 받은 준은 히로유키에게 허리를 절반으로 접어가며 사죄를 하다 간신히 제 아비를 차에 태워 달아났다. 주량을 넘어서면 술을 입에 댈 생각조차 않는 히로유키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져 그보다 조금 더 마셔서일까,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하였다. 제 상관이 사라지는 허공을 바라보는 눈길은 멍하였으나, 분명 고심에 잠겨 있었다. 머릿속에는 복잡한 생각들과 수많은 일들이 소용돌이쳤고, 결국 이렇다 할 묘안조차 고안하지 못한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연해주, 그가 자란 곳이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의 기억은 그 곳에 담겨 있었다. 얼어붙은 살갗을 파고드는 칼바람마저도 때때로는 그리운 고향과도 같은 곳인데다 저를 키워준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기에 이따금씩 그 곳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오기도 했다. 허나 이제 더 이상 그 곳에서 그는 환영받을 수 없었다. 대일본제국에 충성하는 중위 히로유키, 그는 신한촌에 거주하는 이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지극히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리운 곳이지만, 동시에 지워낼 수 없는 낙인이었다. ‘반쪽짜리 장교’, 다른 군인들은 저를 그리 불렀다. 조선인이었지만 일본인이 된, 불령선인 (일본 제국이 일제강점기 식민지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을 불온하고 불량한 인물로 지칭한 용어. 독립운동가들은 가장 대표적인 불령선인이었다.) 들의 품에서 자라난 친일파. 한 쪽에서는 버려졌으나, 한 쪽에서는 받아들여졌다. 다만 그 뿌리만큼은 변치 않으리라는 말을 지겨울 정도로 들어왔을 뿐이었다. 수 년 전,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 집안의 가주를 처음 만났던 날 간곡히 청하였던 부탁은 지금껏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지겨운 낙인은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반쪽짜리 장교가 아닌 온전한 일본인 장교가 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뿌리를 없앤다. 제 스스로가 살아왔던 터전을 토벌함과 동시에, 그는 남은 반쪽마저 검붉게 물들이게 되리라. 어스름한 달빛에 서늘한 눈동자가 비추어 번뜩였다.


* “히로유키 중위!”


익숙한,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그가 제법 놀란 듯 눈썹을 올렸다.


* “와타나베 중좌님.”


와타나베 신지로, 함께 총독부에서 일하는 또 다른 중좌. 히로유키가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이와 얼굴, 그리고 쿠사카베에게 받는 애정의 정도였다. 쿠사카베와는 견원지간이었음에도 저와 인사 정도는 가볍게 건넬 법한 사이였다. 쿠사카베가 없는 지금은 그와 제법 반가운 인사를 나누어도 무방한 순간이었다.


* “자네를 이 곳에서 보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알고 보니 이런 취미가 있었나 보군. 자네도 사내였나 보지?”


* “농이 지나치십니다. 다만 중좌님의 진급을 축하드릴 뿐입니다.”


* “그래 그래, 자네도 축하하네. 수고가 많았어.”


와타나베가 히로유키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 “중좌님께서는 홀로 오셨습니까?”


* “나야 은밀한 약속이 있어서 왔네만.”


* “진급하자마자 새 작전을 맡으신 모양입니다.”


* “아무렴. 저기 실려가는 누구와는 달리 꽤나 중책을 맡게 되어서 말이야.”


쿠사카베를 향한 서늘한 기색을, 와타나베는 굳이 감추지 않았다. 저를 향해서도 눈빛이 번뜩이는 듯 하였으나, 그런 것에 신경을 세울 히로유키가 아니었다.


* “능력을 인정받으셨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 “그래. 자네와 이리 담소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라 보내고 싶지 않다만,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어서 말이지. 자네는 집으로 가는 길인가?”


* “그렇습니다.”


* “진급한 날 치고 너무 이른 시간이 아닌가? 뭐 자네가 술자리에 오래 남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서도.”


와타나베가 히로유키를 찬찬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다 언제 싸늘한 빛을 띄웠냐는 듯, 다시 그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 “경부 어른께 내 말 좀 잘 전해주시게. 비록 자네와 볼 일이 많지는 않지만, 내 경부 어른을 생각하는 마음이야 어찌 흐트러짐이 있겠는가?”


* “여부가 있겠습니까.”


히로유키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린 와타나베가 몸을 돌려 유곽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지도 못한 자를 마주치다니, 운이 없었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쿠사카베가 없을 때에 마주친 것이 다행이라 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와타나베를 향한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여러 장교들 중 하나에 불과할 뿐. 허나 후지와라 가문 이상으로 제 출세를 도운 쿠사카베의 얼굴을 보아 부러 그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다시 생각은 연해주로 돌아왔다. 반쪽짜리 장교의 틀을 벗음과 동시에 남아 있던 모든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순간. 앞으로 다시는 없을 찰나의 기회였다. 이번 작전을 성공시킨다면 아마 대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겠지. 하지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오늘 대체 내게 무슨 일들이 있었던가? 승진을 하고, 쿠사카베에게 이끌려 평소에는 걸음조차 않던 유곽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연해주를 토벌하라는 임무를 제안받은 후, 지금 이 곳에 서 있기까지, 하루 치고는 꽤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나하나 곱씹어보던 찰나, 히로유키의 머릿속에 불현듯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결심을 마친 그의 앞으로 종종걸음을 하며, 게이샤 하나가 달려갔다.


* “어이. 거기, 이리 와 보거라.”


* “네, 넷!”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저를 부르는 말인 것만은 분명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도 홍등은 밝게 빛났고, 그 너머로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엄청난 풍채를 향해 게이샤가 움츠러든 채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 “이 곳의 책임자가 누구냐?”


* “카오루 상이,”


* “내 앞으로 데리고 오너라.”


다급히 달려나갔던 게이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여인 한 명을 데려왔다. 앞선 여인보다는 연배가 있었으나,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자였다.


* “여기서 일하는 열네살 조선인 게이샤 하나코를 아느냐?”


* “네, 알고 있습니다.”


* “내가 사 가겠다.”


* “예?!”


* “값은 이 정도면 되겠지?”


느닷없는 제안에 놀란 여인이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히로유키가 품에서 제 주먹만 한 돈주머니를 꺼내어 던지듯이 건네었다. 한 눈에 봐도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 속에서 지폐가 푸석거리는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왔다. 눈치를 보며 주머니를 열어 본 그의 눈이 이계라도 본 양 휘둥그레졌다.


* “아, 아 저······ 알겠습니다! 나으리의 성함이······?”


* “와타나베 신지로다.”


그는 이 말을 하며 여인의 눈빛을 살폈다. 한밤중이라 빛도 없이 어두워 제 얼굴을 밝은 데서도 알아볼 일은 만무할 터. 게다가 이미 돈에 정신이 팔린 이는 제 얼굴을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괜한 소문이 퍼져나갔다가는 굳게 지켜 온 자신의 입지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 “아, 당연히 본 것은 전부 비밀로 해야겠지? 그 목을 조금이라도 오래 지키고 싶다면 오늘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잊는 편이 좋을 게다.”


어두워서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데다 워낙 키가 큰지라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온 몸으로 살기를 내뿜고 있다는 것은 모를 수가 없었다. 딸꾹, 하고 여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두려움의 소리가 나왔다.


* “허, 허면 어찌 말씀을······?”


* “내 그런 것까지 알려주랴?”


히로유키의 싸늘한 어투에서 한기를 느낀 여인이 어둠 뒤에 숨어 한 차례 몸을 떨었다.


* “아, 송구합니다······! 저, 허면, 아, 아이는 어떻게······?”


* “아무것도 내오지 말고 이곳에서 가장 은밀한 방으로 데려오너라. 근방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어야 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리를 반으로 접다시피 하여 인사를 건넨 게이샤가 종종걸음을 치며 그를 이끌었다. 익숙한 듯 따라간 그곳은 그 옛날 연해주에 살 적 보았던 이야기 책 속에 나오는 미로마냥 복잡하였다. 걸음의 속도를 다소 높여 다다른 방은 유곽의 제일 외진 건물 속, 제일 외진 곳에 놓여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도망치듯 종종걸음을 치며 자취를 감춘 게이샤가 사라진 허공을, 그가 알 수 없는 빛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늘상 차갑지만 눈빛만큼은 가끔씩 따뜻하던 그의 얼굴에서 온기가 전부 사라질 때 즈음에 당도한 게이샤의 손끝에는 어딘지 낯이 익은 앳된 얼굴을 한 소녀의 어깨가 붙잡히다시피 쥐어져 있었다. 송아지같이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이 아이입······”


* “살려주세요, 나으리······.”


애써 울음을 참는 아이의 목소리에 게이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마치 아이의 그것처럼,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 “소, 송구합니다! 이 아이가 아직 어려서, 뭐를 몰라서······!”


* “두고 나가거라.”


히로유키가 싸늘한 얼굴로 말허리를 잘랐다.


* “날이 밝을 때까지 아무도 이 곳에 걸음하지 못하도록 하거라. 만일 내 눈에 사람 그림자가 비칠 시, 그날로 이 유곽에 있는 이들은 전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게이샤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방을 나섰다. 소름끼칠 정도로 고요한 방 안에는 단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그리 넓지도 않았으나 아이가 워낙 작은지라 한없이 크게 느껴지는 그 공간 속, 공포에 질린 아이의 눈물이 떨어져 다다미를 적시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 “어찌 우느냐?”


* “살려주세요······.”


두려움에 눈물이 흘렀으나, 행여라도 내는 소리가 저를 해칠까 가엾은 아이는 마음 놓고 울지도, 무서움을 표하지도 못하였다.


* “걱정 마라. 난 결코 널 해치지 않는다.”


* “저를, 저를 사셨다 들었습니다······. 전 이제 이 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나요? 어디로 갑니까······?”


아이가 조금은 어설픈 국어로 더듬더듬 물었다. 이윽고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자, 제 앞에는 사뭇 다른 표정을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 “가까이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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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0화 - 부탕도화 +1 24.06.16 19 3 16쪽
30 29화 - 볼가 강 24.06.15 19 2 13쪽
29 28화 - 이야기 24.06.15 18 2 11쪽
28 27화 - 죄와 벌 24.06.13 22 2 12쪽
27 26화 - 대화 24.06.13 22 2 11쪽
26 25화 - 겸상 24.06.11 22 2 14쪽
25 24화 - 반성 24.06.11 22 1 11쪽
24 23화 - 재회 +2 24.06.09 26 4 12쪽
23 22화 - 복수 24.06.09 24 2 15쪽
22 21화 - 안개가 걷히다 24.06.08 26 2 12쪽
21 20화 - 용기, 그리고 기회 +1 24.06.08 24 3 12쪽
20 19화 - 잔인한 운명 +1 24.06.06 21 2 12쪽
19 18화 - 진흙 속의 꽃 24.06.06 22 2 14쪽
18 17화 - 행복과 불행 24.06.04 24 2 12쪽
17 16화 - 악연, 헝클어진 실 24.06.02 25 2 11쪽
16 15화 - 편지 (1) 24.06.01 28 2 11쪽
15 14화 - 불가사의 +1 24.06.01 28 2 15쪽
14 13화 - 목격 24.05.30 28 2 12쪽
13 12화 - 홀로서기 (2) +1 24.05.28 34 2 13쪽
12 11화 - 홀로서기 (1) +1 24.05.26 34 2 11쪽
11 10화 - 비밀, 그리고 갈등 24.05.25 34 2 14쪽
10 9화 - 제안 24.05.23 37 2 12쪽
9 8화 - 발각 24.05.21 32 2 10쪽
8 7화 - 기회 +2 24.05.19 34 4 12쪽
7 6화 - 수렁 속의 빛 24.05.18 35 3 13쪽
6 5화 - 안개 속 흐르는 물 24.05.16 37 3 12쪽
» 4화 - 달빛 아래 어둠 속 +1 24.05.14 41 4 12쪽
4 3화 - 후지와라 히로유키 24.05.12 45 3 14쪽
3 2화 - 도련님 24.05.11 49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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