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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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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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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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 정화야

DUMMY

1915년 11월 19일


관저에서 살게 된 지도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그 간 계절은 바뀌어 꽃이 피고 졌으며, 무더운 더위가 가시도 어느새 첫눈이 내릴 즈음이 되었다. 거의 한 해가 다 되어갈 즈음, 정화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독하게 마음을 먹은 눈동자는 하루가 다르게 짙어졌고, 웃음기도 점차 사라지는 듯 했다. 관영은 물론 유석에 대한 이야기도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기적으로 우정국에 다녀왔고, 그 때마다 좀처럼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았다. 걱정이 된 설이 주변인들의 시선을 피하여 몰래 2층으로 올라가 보았으나,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말수가 줄어들었기로서니 얼굴에서 밝은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허나 설의 눈에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가 너무도 자명하였다. 필경,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허나 정화가 히로유키와 거리를 둔 것은 아니었다. 관영의 일에 그의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정화는 늘 그와 식사를 함께 했다. 당연히 다른 여급들은 물론 설조차도 모르는 극비였다. 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느새 그에 대한 두려움은 조금 사라진 터였다. 여전히 그가 편안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이전처럼 벌벌 떨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알면 알수록, 그는 소문과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집 안에서의 히로유키와 집 밖에서의 히로유키를 다른 이로 생각하고 있었다. 바깥에서의 그의 모습이 어떻길래 이러한 소문이 퍼지는가 싶으면서도,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오늘도 정화에게 식사 대신 술상을 청한 히로유키가 여느 때처럼 묘한 눈빛으로 서탁 위에 놓인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이상하리만큼,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좋아했다. 그 가난하던 작가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지는 알 수 없었다.

벌컥, 하고 느닷없이 문이 열렸다. 여전히 제 방문에 노크하는 것조차 망설이는 정화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방에 들어올 이는 단 한 명 뿐이었다.


* “어쩐 일이십니까.”


* “아비가 아들의 방에 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더냐?”


후지와라 오사무가 조소 어린 어투로 쏘아붙이며 탁상 앞으로 다가갔다. 몸은 움직이지 않은 채, 히로유키의 시선이 서서히 오사무를 좇았다. 아비의 것도, 아들의 것도 결코 서로를 향해 내비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 “······ 다과상이라도 내어 오라 이르겠습니다.”


*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오사무의 말에 정화의 방 벽에 걸린 종을 울리려던 히로유키의 손이 멈칫했다.


* “그 무슨,”


* “넉 달 뒤 초하루 넉 점 반 (4시 반.)에 시간을 비워두거라. 네 약혼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눌 겸, 자리를 함께 할 예정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요,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절대 듣고 싶지 않은 한 마디였다. 약혼이라니. 인륜지대사요, 누구나 하는 일이었으나 자신에게만큼은 결단코 해당 사항이 없기를 바랐다. 허나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신한촌 출신인 자를 구태여 입양한 연유는 오로지 대를 잇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래. 그는 그저 수단으로서 이 곳 관저에 왔었던 것이다. 감히 주제넘게 이 중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 “약혼, 약혼 이라니요, 그 어찌······!”


* “허면 설마 그 나이에 혼인조차 아니 하고 살아가겠다는 게냐? 네 나이라면 이미 노총각이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히로유키의 탄식에도 오사무는 그의 말을 전혀 듣고자 하지 않았다.


* “상대는 아라요시 총경의 영애 (윗사람의 딸을 높여 이르는 말.) 이다. 아라요시가 네가 서대문 감옥에서 일하는 양을 보고 좋게 여겨 사위로 삼고 싶다 하더구나. 네놈도 눈과 귀가 제대로 달려 있다면 그 집안이 어떠한 위상을 지닌지는 알 게다. 그야말로 천금같은 기회이니, 내 얼굴에 먹칠할 생각 하지 말고 입 다물고 앉아만 있거라.”


* “허나 아직은 중위에 불과하며 제대로 자리를 잡지도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소인은 혼인을 할 생각이,”


* “조센징 핏줄은 본디 그리 잡소리가 많더냐?”


오사무의 말에 히로유키의 관자놀이에 있는 핏줄에 힘이 들어갔다.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두 눈이 시뻘겋게 물들며, 히로유키가 전에 없이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의 분노에 오사무는 일절 관심이 없었기에 다행히 상기된 얼굴을 들키지는 않았으나, 하얗게 물들어간 입술이 그의 심경을 대변해주었다.


* “잊지 마라. 네가 진정으로 내 마음에 들었더라면 끼니를 굳이 2번 차리게 하는 헛짓거리는 하지 않았을 게다.”


오사무가 히로유키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뱉으며 비아냥거렸다. 히로유키의 눈썹이 살벌한 투로 꿈틀거렸다.


* “제아무리 꼴보기 싫어도 명색이 양자이거늘, 아들놈이 감히 아비의 체면을 깎고 앞길을 막아서서는 아니 되겠지, 건방지게. 허니 적당히 자리를 잡은 지금, 적당히 집안에 도움이 될 만한 가문에 가서 적당히 살거라. 피차 원치도 않는 낯짝을 서로에게 더 보일 연유가 무어 있겠느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히로유키를 향해 들으라는 투로 혀를 차며, 오사무가 몸을 돌려 나갔다. 저벅저벅 하는 군홧발 소리가 관저 전체에 울리는 듯 하였다. 서서히 작아져야 마땅한 소리는 짧게 이어지더니만, 이내 문 앞에서 멈추었다.


* “아, 감사하거라. 그 집 영애께서는 조센징 출신이라도 괜찮다 했다는구나. 네 주제에 어디 가서 또 그리도 그릇이 넓은 자를 마땅히 찾을 수 있겠느냐?”


한없이 그를 조롱하는 어투에도 히로유키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이 딱딱했다. 다만 한 층 더 사납게 물든 눈빛이 오사무의 심장을 뚫어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 “······ 하지 않겠습니다.”


* “뭐라?”


* “해서 득이 될 것이 없는 혼인입니다. 평생 일본인을 등에 업고 신분 상승을 꾀한 조선인이라는 멸칭을 얻고 싶지 않습니다. 전 오직 일본인이자, 후지와라 가문의 장자로서,”



짜악-



히로유키의 고개가 한 쪽으로 꺾였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나, 햇빛 아래서도 늘 하얗던 얼굴이 서서히 불그스름해졌다. 오사무가 올려붙인 따귀 때문인지, 분노가 서려 피가 거꾸로 솟았기 때문인지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 “고아 녀석이,”


짜악-


* “영특한 것이 쓸 만 하겠다 싶어 거두었더니,”


짜악-


* “도리어 주인을 무는구나. 감히 네놈 따위가,”


짜악-


* “건방지게,”


짜악-


* “이젠,”


짜악-


* “내 앞길까지,”


짜악-


* “망치려 드느냐?!”


몇 대나 맞았을까. 연거푸 얻어맞은 한 쪽 뺨은 부어올랐고, 입술 한 켠에서는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늙은이라지만 힘이 죽지 않았는가, 행여 나이가 어렸더라면 그만 휘청일 뻔 하였다. 매서운 소리가 방 안을 쉬지 않고 울릴 때조차, 히로유키의 표정에는 무서우리만치 아무런 빛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허하던 눈빛은 갈수록 살기가 어렸고, 그럴수록 일렁이고 번쩍였다. 얼굴을 쓰다듬지도, 피가 맺힌 입술을 쓸어보지도 않은 채 히로유키가 번뜩이는 두 눈으로 오사무를 똑바로 응시했다.


* “제가 얻게 될 멸칭입니다. 다른 이도 아닌, 이 가문의 장자인 제가 말입니다. 그 멸칭이 어찌 후지와라 가문의 멸칭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 구태여 장가보내시어 일본에서 제일 가는 명문가의 위상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신다면, 그때도 제 탓이라 역정을 내시겠습니까?”



통상 술을 마시더라도 안주 없이 마시는 히로유키였으나, 어쩐지 오늘은 안주를 가져오라 일렀다. 무엇을 가져오라 명확히 이야기한 바가 없었기에 의아해하면서도 주방에 내려가 주전부리를 데우는 정화였다. 한동안 주방 안에 들어간 일이 없어 오랜만에 맡는 음식 냄새에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잊지 않고 빈 잔도 챙겼다.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눈지도 꽤나 긴 시간이 흘렀기로서니 여전히 그와 겸상을 하는 것은 한없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히로유키는 늘 수저와 밥그릇도 2개씩 가져오라 일렀으며, 어쩌다 술상을 들이라 이를 때도 잔을 2개씩 준비하라 일렀다. 정화는 거의 한 입도 대지 않았으나, 그의 지시에는 늘 변화가 없었다. 늘 빈 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쩌다 잔이 채워져 있어도 정화의 입술이 잔에 닿는 일은 없었다. 연유야 알 수 없었으나, 정화는 그저 그의 지시에 따랐다. 술을 늘 어디에 두는지, 술상을 올릴 때면 늘 어딘가에서 새로운 병을 들고 나타났다. 단 한 번도 그는, 제게 술병을 가져오라 지시한 적이 없었다.

주전부리를 데우고 접시에 고이 담아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멀리 떨어진 여급들의 처소에서는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더 이상 그 곳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도 넓게 사람을 사귀는 이는 아니었기에 설과 함께 지내는 것으로 족하였으나, 그럼에도 단희가 자기 돈을 훔쳐가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가 없지는 않았다. 괜히 처소를 옮겼나 싶어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잠든 적도 있었다. 어째서일까, 대체 무슨 연유로 이리 위안을 받은 것일까.

순간 제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당연히 히로유키인 줄 알고 고개를 숙였으나, 확연히 차이나는 신장이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스치듯 지나가도, 멀리서 보아도 한없이 큰 히로유키와 달리 이 자는 키가 별로 크지 않았다. 키가 작은 사내 중 2층에 올라올 수 있는 이는 이 곳 관저에 단 한 명 뿐이었다. 후지와라 오사무, 이 곳 관저의 주인이자 조선의 총독이다.

문득 이 관저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거의 1년만에 그의 얼굴을 처음 본다는 것을 정화는 깨달았다. 히로유키와 사이가 좋지 않아 겸상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했으나, 그런 것에 신경쓰고 살기에는 당장 제 앞에 놓인 일들이 막막하여 잊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히로유키가 관저의 주인이라 여겼던 셈일까.

다급히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의 곁으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못마땅한 듯한 눈길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정화를 바라보던 오사무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마침내 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정화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휴우,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린 다음, 정화는 원래 자신이 향해야 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도련님, 정화입니다. 술상 올리겠습니다.”


* “들어오너라.”


히로유키의 건조한 목소리가 멈추고 정화가 문을 열었다. 2층은 커녕 계단 근처에도 가지 않는 오사무가 제 발로 올라왔다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니, 앞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였다. 다만 그 정황을 알 길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은 히로유키와 더불어 주변에서 엿듣고 있을 지도 모르는 다른 귀들의 눈치를 보는 것 뿐이리라.

히로유키는 답지 않게 창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늦은 밤인지라 하늘에 보이는 것은 검은 보자기 위에 흩뿌려진 쌀알들과 금반지였다. 그가 보고자 했던 것은 새하얗게 쏟아지는 달빛일까, 아니면 산산이 부서지는 별빛일까.


“근처에 누가 있었느냐?”


“아무도 없었습니다. 허나 혹시 몰라······.”


“그래, 잘했다. 앞으로도 들어올 때는 늘 그리하거라.”


무엇이 바뀌었는지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분명 달라진 어투였다. 미묘하게 가라앉은 어조에 정화의 발이 떨어지지 않는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예, 이만 가보겠,”


“정화야.”


작가의말

공모전 분량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함께 달려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주부터는 주 2회 (화, 토) 연재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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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56화 - 과거 (5) : 또 다른 밀정 24.09.10 5 0 12쪽
56 55화 - 과거 (4) : 고진감래 24.09.07 6 0 15쪽
55 54화 - 과거 (3) : 밀정 24.09.03 9 0 13쪽
54 53화 - 과거 (2) : 물빛 안개 24.08.31 7 0 11쪽
53 52화 - 과거 (1) : 스친 인연 24.08.27 8 0 14쪽
52 51화 - 진실 24.08.24 11 0 11쪽
51 50화 - 칼 24.08.20 10 1 12쪽
50 49화 - 상처 24.08.17 9 1 11쪽
49 48화 - 무너진 탑 24.08.13 11 1 12쪽
48 47화 - 눈물 24.08.10 16 1 13쪽
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3 1 15쪽
46 45화 - 도시락 24.08.03 14 1 13쪽
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3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5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2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5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5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7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8 2 14쪽
38 37화 - 가책 24.07.06 13 1 12쪽
37 36화 - 야 류블류 찌뱌 +1 24.07.02 18 2 12쪽
36 35화 - 진퇴양난 24.06.29 16 1 12쪽
35 34화 - 독주 24.06.25 22 1 11쪽
34 33화 - 두려워하는 것 24.06.22 19 1 12쪽
33 32화 - 속내 24.06.18 18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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