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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Y
작품등록일 :
2024.07.14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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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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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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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도(道)를 아십니까?

DUMMY

‘세력 대 실리 구도로 가면 안 돼.’


문제의 핵심은 내 실력 부족이다. 더 잘 두면 다 해결 될 문제다. 어떤 식으로 판이 짜이더라도 그걸 헤쳐 나갈 수 있는 실력이 뒷받침 된다면 아무 상관없다.


‘그런 상태를 기풍이 확립되었다고 하지. 그런데 아직은 그것에 미치지 못해,’


이건 나만이 아닌 대부분의 연구생이 다 가진 문제다. 그래서 맞춤형 대응 전략이라는 것이 동원되는 것이다.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상대하는 방식이다.


‘내가 스타일 변화를 너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


지난 겨울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체화된 세력 중시의 공격 바둑. 거기에 집착이 생겼다.


‘없이 살다가 좋은 걸 하나 얻으니까 무엇 하나 놓기가 싫어진 거지. 애정이 과하면 집착이 생기고··· 그러다 스토킹을 하게 되거나 기혼자의 경우 의부증을 일으키는··· 이건 비유가 좀 그런가?’


애초에 세력을 중시하는 형태로 판을 짜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일이었다. 굳이 상대 돌을 공격하면서 이겨야 하는 건 아니니까. 어느 순간부터 수단을 목적처럼 여기고 있었다. 상대가 내 세력 안에서 타개에 목숨 걸어야 할 필요 아니, 여지 자체를 주지 않으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 과정 중에 가지고 있던 일부 자원이 소모된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적인 판단이다. 그것을 준비라고 하든지 투자이라고 부르든 성과를 얻기 위해서 유무형의 그 무엇은 반드시 필요하다.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섰다고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고 거기서 벗어나기 싫어했던 게 문제였던 거지.’


가야 할 길이 아직 멀었는데 너무 일찍 안주해 젖어버렸다.


‘2조를 유지하는 게 끝이 아닌 거잖아. 그건 입단을 위한 과정일 뿐인데 그전에 스스로 약점 노출을 해버린 셈이네.’


스스로 시야를 좁혔다. 더 큰 보물을 찾아야 이 여로를 계속 걸어갈 수 있는데 손에 금화 몇 개 쥐었다고 그게 아까워 주먹 쥔 손을 풀어야 할 때 그러지 못했다.


‘그러네. 상대는 내가 손을 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난 죽어라고 주먹질만 했었지.’


손바닥과 주먹은 용도가 다르게 쓰인다. 난 날파리를 주먹으로 쳐서 떨어트릴 수 있는 절세고수가 아니다. 하지만 주먹을 고집하지 않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손바닥을 흔들어 날파리를 쫓을 수도 있고 손바닥으로 쳐서···


‘아! 비유가 계속··· 그렇게 벌레를 잡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날파리도 그런데 바퀴··· 음.’


어쨌든 고착화 되려는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으면 된다는 건 알았다.


3조로의 강급은 확정되었지만, 이달 리그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판 더 남았다.


리그전에서의 승점은 그 달이 지나간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연말 총점 계산의 일부로 계속 따라간다. 강급을 피할 길은 없지만 남은 두 판이라도 이겨서 승점을 챙겨야 한다.


깨달음의 길은 높고 험하지만 오르기만 하면 만병(萬病)이 사라진다. 아직 경지가 얕아 천안통(天眼通) 같은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한동안 따라붙던 편두통이 씻은 듯이 없어졌다.


개운해진 머리로 도장에서 내 스타일이 변화하기 전 기보를 놓아보며 감각을 다듬었다. 가끔 들러 주는 성훈이 형과 속기로 연습 대국을 하기도 했다.


방향성이 이렇게 중요하다. 기본적인 실력이 특별히 달라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생각에 유연성이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것만으로 바둑 실력이 좀 향상된 것 같은 느낌이다. 리그전 재개를 기다리는 한 주일이 너무 길었다.


흑번이다. 아직도 흑번이 좋다. 아니 편하다.


넓게 펼쳐진 평원을 기병이 달린다. 필마단기지만 바람이 나의 우군이다. 적이 진영을 미처 펼치기도 전에 돌격한 기병이 적진을 가른다.


적들은 돌격을 저지하려 멀리서 견제하고 때로는 가까이 몸을 던지지만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다. 멈추지 않는다. 적진을 쪼갠다. 틈이 벌어진 적진 사이로 후위가 따라 진격하며 간격을 넓히고 적을 견제한다. 적은 진영을 펼쳐지기도 전에 조각조각 나눠졌다.


전력의 집중과 견제. 이것이다.


적진에 난입해 적들을 견제하는 아군의 희생으로 기병의 돌진은 유지될 수 있다. 병력의 운용은 유기적이여야 한다.


다시 돌파 시도. 2회 차다. 저항이 완강하다.


살짝 우회하는 척 조각난 적의 전력을 유인한다. 적들의 연계를 방해한다.


이젠 각개격파의 차례다. 보병의 진군이다. 뒤이어 백병전이 벌어지지만 아군의 견제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어 적들의 연계는 여전히 어렵다. 말 머리를 돌려 보병의 전투를 지원한다.


이젠 학살의 시간이다.


난 강급이 확정된 상태지만 상대는 아직 미정이다. 잔류와 강급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배수진이라 후퇴는 불가능하다. 불굴의 정신으로 저항한다. 하지만 정신력만으로 이미 벌어진 전력의 격차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장에서 적은 산화했다. 장렬했지만 어떤 패배라도 패배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흑 불계승.


우여곡절 같은 것은 없었다. 특별한 기술적 발전이 없이 간단한 관점의 변화만으로도 이런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예전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뭔가 집중이 더 잘되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하네.’


가벼운 기분으로 상대들의 밥상에 고추 가루를 뿌리며 2연승으로 2조 생활을 마무리했다.


‘쩝! 얘들아! 다음 달에 보자고.’


한동안 멀어져 있었지만 3조는 익숙하다. 바로 승급해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한다.


이번 주도 도장에 들르지 않고 그냥 집으로 왔다.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다. 그러나 아직도 바둑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집밥은 맛있었다.



###


점점 힘들어지더니 지금은 최악이다.


‘부담감이란 것이 이렇게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일 줄이야.’


연구생 3조 리그전 정도를 치르면서 이런 기분이 가당치않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조절할 수 없을 때도 있는 법이다. 특히 나처럼 감성적인 사람에게는 매우 어렵다.


‘미안해. 농담인 거 알지? 이렇게라도 긴장을 풀려고 나름 노력하는 중이야.’


올 해 다섯 번째 리그전의 제18국을 두고 있다. 17국을 두는 동안 아직 패배가 없었다.


‘3조라서 그래. 2조에서 몇 달 놀았다고 눈이 달라진 것 같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원생으로 사오 년을 보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무심을 가장한 얼굴로 앉아있지만 상당히 흥분을 하고 있었나 보다. 스스로 못 느끼고 있었는데 중반에 일찍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날리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달디단 열매를 입에 넣고 씹으려다 떨어트려 버렸다. 원인은 뻔하다. 집중력 부족이다. 쓸데없는 자책의 시간이 남은 기력을 갉아먹었다.


끝내야 할 때 결정짓지 못한 대가를 후반에 치르고 있다. 끝내기 단계인데 넉넉하게 유리했던 시절을 잘못 보낸 덕분에 갖은 고생을 하며 겨우 반 집 승부까지 몰고 왔다.


그나마 끌어낼 기력이 있을 때 열심히 따라 붙어서 이 정도까지 판세를 만들었는데 정작 마지막에 와서 몰입이 안 된다. 수 읽기가 쉽지 않다.


‘그 바둑이 이 모양 이 꼴로 반 집을 다투게 된 건 어이가 없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무조건 이겨내고 말리라.’


다짐을 해봐도 의욕만으로 승리를 쟁취할 순 없다. 내가 가장 약한 부분이 이런 장면이다. 어렵다. 정밀한 계가가 안 된다. 반 집인 것 같은데 승리의 추가 흑과 백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질지 확신할 수 없다.


마지막 초읽기다.


[마지막입니다. 하나, 둘···]


정말 인정머리라곤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고약한 목소리다.


‘누군지 모르지만 미안해요. 대국 시계에 녹음 된 목소리일 뿐인데 이렇게 반응하다니··· 내가 경황이 없어··· 정신도 없고···’


등에 진땀이 멍울 지어 흐르기 시작했다. 머리 끝에서 솟아나 등과 가슴을 타고 흐른다. 갑자기 시력을 잃었는데 지팡이조차 없다. 괴롭다. 한 발짝 잘못 내디디면 그대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운수소관에 맡겨야 하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건 과정일 뿐이잖아. 입단을 위한 수련 과정, 그 과정을 그렇게 넘기겠다고?’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 하나가 터져 나왔다.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기보가 저절로 그려진다. 불덩이가 솟아올라 기보를 타고 돌았다.


‘이건 뭐지? 열 받아서 심장발작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건가?’


비슷한 것조차 경험한 적 없는 일이다. 이윽고 마치 마음이 나눠진 듯 관조의 시간이 찾아왔다. 두 개의 시선이 사물을 바라본다.


알고 있는 지식과 눈앞에 놓여진 기보 간에 괴리감이 있었다. 나름 수가 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의 수순은 엉터리에 가까웠다. 답안지를 들고 있는 데도 내용을 이해할 능력이 안 되어 일어난 일이다. 답답하다.


농익은 음악과 같은 돌의 소리를 들으며 가느다랗게 내 음성을 더해보려 했지만 목에서는 아무 울림이 없었다. 뭔가 알듯 말듯 이질적인 느낌과 함께 기억 속 AI의 기보들과 엉킨 그 무엇에서 홀연히 가지가 돋아났다.


이상하다. 그러나 이 역시 무엇이 이상한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이런 생경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따름이었다.


짜릿하고 조바심도 난다. 휘몰아치는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순간 순간 어떤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난잡하게 들리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무엇인가 알 것 같은데 정리가 되지 않는다.


‘조그만 더···’


애가 탄다. 저만치 서서 무심하게 나를 보고 있는 무엇인가가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시 다가온다.


‘아! 하아아!’


이윽고 법열(法悅)의 순간이 왔다. 수유(須臾)와 겁(劫) 사이의 광활한 공간에서 나는 부유했다. 마치 내가 여러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있는 듯 동시에 공존하는 수많은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현실의 세계로 의식이 돌아왔다.


미망(彌望)은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일곱에 돌을 잡고 여덟에 위치를 확인하고 아홉에 놓았다, 열이 카운터 되기 전 깔끔하게 대국시계의 버튼도 눌렀다. 어느새 진땀은 마르고 있었다.


‘이겼어. 확실히 반 집이네. 헉! 내가 어떻게 이런 계산을···’


눈에 들어오는 반상은 변함이 없는데 내 머리 속의 바둑판에는 내가 반 집을 이겨나가는 수순이 그려진다. 진짜 살다 보니 정말 별일이 다 생긴다.


‘잠깐 바둑신이라도 강림했었던 거야?’


아주 피곤했는데 이전 피로감조차 없다. 쾌조의 컨디션이었다. 어느 생을 통틀어서도 이런 느낌을 주는 몸 상태는 처음이다.


이 상태라면 수 읽기든 끝내기든 그 무엇이든 안 될 게 없을 것 같다. 뇌에서 연산할 때 걸리는 부하가 사라졌다.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빌어먹을··· 바둑 다 끝날 때가 되어서··· 처음부터 이랬으면 오죽 좋았겠냐고.’


바둑판 건너편 고뇌에 젖은 상대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보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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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78 화린어
    작성일
    24.08.12 17:48
    No. 1

    드디어 고비를 넘나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1 OXY
    작성일
    24.08.12 19:29
    No. 2

    앞으로도 많은 난관이 있겠죠. 절정고수가 되었다고 그 위가 없는 건 아닐 테니까요. 아직 현경에 도달하지는...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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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준비 완료 24.08.15 140 3 12쪽
40 지음(知音) 24.08.14 151 4 14쪽
39 가오가 정신을 지배할 때 24.08.13 143 4 13쪽
» 도(道)를 아십니까? +2 24.08.12 148 3 12쪽
37 실마리 24.08.11 151 2 12쪽
36 우울한 날 보험 증서를 꺼내다. +2 24.08.10 154 2 12쪽
35 위기 관리 24.08.09 156 3 12쪽
34 변화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24.08.08 166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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