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내가 1급이 된 이유
‘어휴! 그렇게 넓게 벌리기 있어요? 족보에도 없는 수를 두면···’
일립이전(一立二展, 세워진 돌이 하나일 때는 두 칸을 벌린다), 이립삼전(二立三展, 세워진 돌이 둘일 때는 세 칸을 벌린다)은 바둑을 조금만 알게 되어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게 되는 이야기다.
물론 진리도 때론 변한다. 바둑의 정석도 이론의 발전에 맞춰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일립이전(一立二展)이 바이블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지만 4.5집에서 출발한 덤이 상승함으로서 그런 식의 행마로는 5:5의 균형을 맞추기 어려워진 환경에 맞춰 예전만큼은 확실히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도 너무 심했다. 일립(一立) 삼전(三展)도 아니고 사전(四展)이라니 짜증이 치밀어 바둑판을 엎어버리고 싶다.
이건 분명히 괴수, 악수, 꼼수 무엇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해괴망칙한 수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응징이 안 된다. 한 수 한 수 두어질 때 마다 정말 열이 올라 돌아가실 지경이다.
과거의 진리나 상식이 현재에 잘 맞지 않는 여러 경우가 있다.
과거(일립이전이 바이블이던 시절)에는 상대에게 두 칸을 벌리게 하면 안정을 시켜준다고 해서 그런 모양에 대한 협공은 공격의 범주에도 넣지 않았었다.
그런 수는 검토조차 할 필요가 없었고 애초에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부분 보다는 전체의 균형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시대가 왔다. 때문에 부분적으로 상대에게 어떤 득을 주더라도 후자의 조건이 충족되면 구사하지 못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이 현대 바둑의 상식이다.
“그 놈의 AI가 문제야. 이젠 이런 아마추어들도 꺼리낌 없이 기존의 모양, 맥을 다 무시하는 것처럼 두잖아.”
키보드를 잡았다.
『아니 뭡니까. 요즘 컨셉이 메뚜기에요? 어디까지 뛰어야 만족 하실 겁니까?』
『흐흣. 명인이란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이라잖아. 내가 요즘 정석 공부를 다시 하고 있는데 어디서 보니까 이런 행마도 있더라고. 당신은 이런 거 모르지? 잘 한번 응수 해 봐.』
『이거 어디서 꼼수만 배워 와 하수를 괴롭히네.』
『하수는 무슨 다 같은 아마추어 끼리··· 안 둘 꺼야? 키보드 질 할 시간에 응수를 먼저 좀 생각하면 안 될까? 맨 날 자기는 멀티태스킹 안 된다고 하면서 이래 가지고 언제 이 판 끝나겠어?』
아! 들켰다. 어영부영 시간 좀 끌어보려고 했는데 나의 얄팍한 잔재주는 한평생 도산검림을 헤쳐 온 백전노장에겐 가소로운 장난질일 뿐인 것 같다.
『가만 보면··· 정말 젊으세요. 내가 이렇게 온라인상으로만 알고 지냈으면 어르신인 줄도 몰랐겠어요. 아! 생각해 보면 그때가 봄날이었는데 괜히 번개 같은 걸 나가 가지고.』
어쩌다 온라인에서 자주 바둑 두던 사람들끼리 즉석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때 이 어르신을 뵙고 어이가 없어 입만 딱 벌렸다.
『왜? 실체를 알고 나니까 말 편하게 하기가 힘들어? 뭐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그냥 말 놔도 돼. 오늘부터 어때?』
내가 나보다 스무 살도 더 많은 분과 낄낄 거리며 농담하는 모습을 잘 떠올리기 어렵다.
‘난 아직 머리도 검고 피부도 탱탱하다고. 물론 머리카락 숫자가 조금 모자라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중년이면 누구나··· 음.’
솔직히 누구나는 아닌 것 같지만 다수가 그렇다는 건 진실이다.
『전 어르신 공경하면서 잘 지내고 싶은 아직은 젊은 사람입니다. 청춘의 끝자락이긴 해도 아직은 좀 남았죠. 별로 어르신과 트고 싶지 않은데요.』
『ㅎㅎ 자네도 이제 다 되었어. 거울은 보고 살아야지. 자네 보면서 누가 청춘을 떠올리겠나. 자네나 나나 제3자가 보면 형님 아우님이라고, 집에 거울 없어? 하나 사줄까?』
『본인은 아직 젊다 이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지금 난 자네가 다음 수를 빨리 좀 뒀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뿐이야. 어제 둘 건가? 해 다 넘어갔어.』
정말 인터넷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한 단어들의 향연이다. 가슴이 답답하다. 조금 더 큰 문제는 착수를 더 이상 늦출 수가 없다는 점이다.
“에라이!”
어떻게 두어도 한판의 바둑이다. 넓고 넓은 상대가 벌린 그곳을 바로 갈라 쳐들어갔다.
『오호! 용기가 가상하군, 다음 수순은 알고 들어온 건가? 모르면 많이 곤란해질 텐데』
이 놈의 영감은 남 보고는 빨리 두라고 온갖 성화를 다 부리더니 정작 두고 나니 자신은 늦장을 부린다.
『본인이 아직 정석 숙지가 잘 안된 거 아니에요? 잘 모르는데 일단 함 들이댄 거죠? 딱 걸렸어.』
『ㅎㅎ 몸조심 하게나. 원래 잘 모르는 길은 가는 게 아니라고.』
붙이고 젖히고 쥐고 돌리고 갖가지 형태가 모니터의 한 구석에서 반짝이며 나타났다.
‘별 것도 아닌 거 하나 가지고 노인네가 별 유세를 다 떨더니··· 아무것도 아니었네.’
찜찜함을 내재한 채 불굴의 정신으로 들이받았는데 생각보다는 너무 잘 풀렸다.
『이런 걸 무리수 응징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르신 공부 좀 더 하셔야겠어요.』
『쯧쯧. 그렇게 수가 짧으니 늘 세상사가 힘든 거지. ㅎㅎ 눈앞만 보지 말고 좀 멀리보고 살아.』
‘그게 무슨 말? 상대의 진영을 갈라서 일부분을 절단 냈는데 이게 나뻐?’
따악-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착수음이 유독 크게 들리며 모니터가 순간적으로 확대된다. 어느 순간 한 부분이 아닌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이건 환각이야.’
『ㅎㅎ 이젠 보이나? 언제나 부분보다 전체가 중요하다네.』
부분적인 전투에선 내가 확실히 득을 보았지만 그 과정에서 외부로 진출할 통로가 막혔다. 상대는 나의 급습을 유도해 작게 뜯어주고 대세를 장악해버린 것이다.
‘어허!’
입맛이 아주 쓰다. 전투에선 이겼으나 전쟁은 졌다. 딱 그 상황이 나와 버렸다.
『이런 게 AI식 책략이란 거야. 당하고 나니까 머리가 띵하지? 기존의 행마와는 많이 다를 거야. 어디서든 최신 정보에 빨라야 살아남는 거라고.』
도저히 더 이상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잘 배웠습니다. 이번 판은 졌네요. 한 판 더···』
『젊은 사람에겐 언제나 자극이 필요하지. 얼마든지』
그날 하루는 너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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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큰 자극을 받았는데 반응하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난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 어르신을 날려버리고 싶었지. 아니 그보다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꿈을 꿨어.’
바둑 동네에 오래 전 부터 구전되는 속설이 있다. 명국 10국만 외우면 1급이 된다.
실제로 이 방법을 통해 쾌 많은 1급들이 탄생했다고 한다. 원래 암기는 오래전부터 과목에 상관없이 해오던 공부법이다. 심지어 조선시대 과거의 공부법도 암기고 그 시작은 천자문 외우기부터였다.
이 방법은 오늘날에 와서 전근대적 방법이라고 외면당하기도 했지만 효과 하나만큼은 아주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확실한 방법이다. 바둑이라고 별 다르겠는가!
고수들은 수순 외우는 것을 생각보다 쉽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외우는 대상은 수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 계단 오르고 나면 다음 계단이 자연스럽게 보이는데 그것을 다시 오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아마추어들이다. 이들은 고수들이 편안하게 해내는 그 능력이 심하게 떨어진다. 계단을 오르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짧게는 100여수 길게는 300수에 달하는 기보를 자연스럽게 외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일단은 초반만 외운다. 스스로의 수준을 감안해 처음엔 초반 30수 정도로 시작한다. 좀 익수해지면 50수, 70수··· 양을 늘이면 된다.
기보를 외울 때 단순히 수순만을 외우는 건 별다른 효과가 없다. 한 수 한 수 의미를 되집어 보며 깨달아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정리된 자료가 머릿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곳에서 막혔다.
최신 흐름에 맞춰 AI 끼리 대국한 음미할만한 20국을 인터넷에서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단순히 외우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면 그것만이여서는 곤란하다.
바둑에 지출을 하는 것을 피해온 나였지만 어쩔 수 없이 해설서들을 사들였다. 완성되어 있는 형태를 보고 인간이 역순으로 하나하나 뜯어낸 후 수 나누기 형식으로 풀이한 내용이 주를 이룬 책들이었다.
‘처음엔 안 들어오더니 자꾸 보다 보니까 조금씩 알게 되는 부분이 생기더라고,’
소위 말하는 체화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사람은 취향이란 것을 타게 된다. 과거 명인들은 기풍이라고 불리는 뚜렷한 특징을 가졌다. 우주류의 호쾌한 기풍, 돌부처의 형세판단 이런 걸 열심히 따라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그 스타일을 닮아가게 된다. 그 대상이 AI라면 어떨 것 같은가?
‘그런데 모니터에 찍어서 외우는 건 왠지 잘 안 외워지는 느낌이더라. 외우는 것 자체가 오래된 방법인데 모니터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은 느낌이었어.’
그래서 바둑판을 사들였다. 이쯤 되니까 예전 문구점에서 팔았던 접이식 바둑판은 마음에 차지 않아 제법 비용을 들여 다리도 붙어있는 모양새 나는 놈으로 하나 들여왔다.
바둑판을 앞에 놓고 앉아 딱딱 돌을 두드려가며 수를 음미하는 맛이 특별했다. 더구나 실전에서 수읽기를 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나가는 실수를 방지하는 훈련이 된다는 건 덤이었다.
그렇게 한판을 놓아보고 나면 끝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도 복기가 가능하다. 일단 어설프게라도 기보를 하나 외웠으면 다시 되돌려 놓아봐야 한다. 보통은 기보를 외우다 보면 주체가 되는 순서가 있다. 내가 흑번이냐 백번이냐를 정하게 된다. 그렇게 외우가가 끝났다면 이번엔 상대의 입장이 되어 다시 기보를 놓아보는 것이다.
이렇게 기보를 외우면 한 수 한 수에 대한 의미 분석이 깊어져 또 다른 체화가 이루어진다. 그때서야 비로소 암기가 자기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말만 들어도 엄청나게 지루해 보이는 일인데 그 때 난 무슨 정신으로 그걸 했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그렇게 했는데도 마음만 즐겁고 능률은 오르지 않았다. 처음 마음엔 사나흘 늦어도 일주일이면 1국이 외워질 것 같았다. 그런데 머리에 들어가는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느렸다.
하지만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뚫는 것은 그 힘이 아니라 잦음이었다. 특별히 다른 할 일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재미를 놓칠 순 없었다. 하루 종일 기보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심지어 화장실에서의 자투리 시간에도 기보를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 첫 기보가 외워졌다.
한번 외운 기보는 그냥 두면 쉽게 잊어버린다.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머릿속으로 놓아보고 그려본다.
‘이 정도 하니까 예전엔 어림없다고 시도조차 못했던 일이 자연스럽게 되더라고. 그 동안은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성의가 없었던 거였어.’
암기는 어느 순간부터 가속도가 붙었다.
‘한 달에 1국이면 일 년이면 12국이 되어야 하지만 20국이 되더군.’
이렇게 난 늦은 나이에 어설프게나마 1급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난 그렇게 스스로 개미지옥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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