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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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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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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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0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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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는 자유예요

DUMMY

이제 농부의 출혈을 막을 차례였다. 손과 손가락이 없으니 점혈이 극도로 어려워지긴 했어도, 박투가 아니라 치료가 목적이라면 그나마 대체 가능한 기관으로 혀가 있었다.


‘비위가 썩 좋은 그림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농부는 내게 은인이기도 하니까.’


내력을 동원해 광대뼈와 코 사이, 거료혈(居髎穴)을 자극하면 얼굴의 출혈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주옥은 혀를 내밀고 그 끝에 창천심결의 내력을 담아 찌르듯 농부의 거료혈을 눌러 주었다. 아직도 적잖이 흘러나오던 피가 즉시 멎었다.


“···우리를 도, 도와주는 거니?”


그 모습을 보며, 농부의 부인이 물었다. 짐승에게 말을 거는 날이 오다니, 아침에 이 말을 빗겨주며 건넸던 한탄 같은 독백과는 달리, 지금은 정말 대답을 바라는 물음이었다. 왠지 지금 눈앞에 있는 짐승이라면 대답해 줄 것만 같았다.


흑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사이에서 긍정으로 통용되는 몸짓을 짐승이 하고 있으니, 농부의 부인은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함을 느꼈다. 그래도, 돕는 자를 향한 예의는 잊지 않았다.


“···그렇구나. 고맙다.”


그 말에 주옥은 다시 한번 고개를 푹 숙여 겸양을 표한 뒤, 나머지 수습에 들어갔다. 우선은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었다. 두 마교인의 피가 뿌려진 흙바닥을 꼼꼼이 살피며 핏자국 위를 전부 말발굽으로 쓸어내니, 이내 핏자국이 있던 곳은 그렇지 않은 흙바닥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핏자국을 지운 주옥은 다시 그 큰 몸을 마교인들의 사체 앞으로 옮겨, 한 명의 옷깃을 입으로 물고 들어올렸다. 축 늘어진 몸뚱이가 쉽게 딸려 올라와, 허공에서 흔들렸다. 자신이 물어 올려 놓고도 약간은 놀랐다.


‘새끼줄을 씹을 때도 느꼈지만, 턱 힘이 예상보다 훨씬 강해. 이 몸이 유별난 걸까, 말이란 동물이 원래 그런 걸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둘 다였다. 짐승의 턱 힘 자체가 웬만하면 덩치에 비례하기에, 보통 크기의 말은 보통 크기의 늑대보다 턱 힘이 강했다. 그런 말 중에서도 군계일학으로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게 주옥의 몸이었으니, 턱 힘 역시 보통 말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강했다.


고개를 위로 휙 젖히며 입에 문 것을 허공으로 던져 올리자, 마교인의 사체가 붕 떠올랐다. 그리고는 포물선을 그리며 주옥의 등 위에 정확히 얹혔다. 이어 두 번째 주검을 똑같이 등 위에 올렸다.


“으윽··· 그 놈들은··· 그 놈들은 왜···?”


그 사이, 피가 멎은 농부는 몸을 일으켜 부인의 부축을 받고 서 있었다. 농부의 눈빛에는 경외심과 공포가 섞여 있었으나, 그럼에도 의문을 참지 못하고 질문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주옥이 사람을 던졌다 받는 광경은 어떤 광대놀음에서도 볼 수 없는 기예였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입장에선 심란한 일. 저렇게 질문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놈이 사라진 것을 알면, 마교 본대가 수색을 나설 것이고, 이곳을 발견할 겁니다. 당신들이 그 사이 이 두 놈의 사체를 깔끔히 처리하긴 어려울 테니, 제가 지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게 맞습니다.’


문제는, 몸짓으로는 이런 얘기를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주옥은 약간 안타까운 심정으로 농부 부부를 바라보다, 이내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제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 떠날 시간. 그것이 자신을 거둬 주고 먹여 준 농부 부부에게 보은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몸을 돌린 주옥의 뒤에서 농부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잠깐, 가려는 게냐?”


이번엔 몸짓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자신을 보는 농부의 모습이 보여 다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농부는 눈앞의 흑마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자, 비로소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그렇구나.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여기서 아주 험한 꼴을 당했을 거다. 어디 가든, 배불리 먹고 힘차게 달리거라.”


배불리 먹고 힘차게 달려라. 말에게 이보다 큰 덕담이 또 있을까. 인간의 얼굴을 했다면 분명 미소를 지었을 것인데, 이 얼굴로는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얼마 되지 않아 짙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한 가지 더, 너는 말이 맞는 게냐? 혹 둔갑한 영물(靈物)이나 술사는 아닌 거겠지?”


농부가 한 마디 덧붙였다. 주옥은 질문을 듣는 즉시 고개를 저으려다 멈칫, 주저했다. 그리고는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인간 사이에서는 ‘나도 모르겠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몸짓. 농부 부부가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주옥은 그들을 등지고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흑마의 걸음에는 점점 속도가 붙더니, 기어코 달리기 시작했다. 말이 발을 격렬하게 구르는데도 등 위에 얹혀 있는 시신 두 구는 안정적이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농부 부부는 경탄에 빠져 서로를 마주보았다. 농부의 부인이 말했다.


“분명 귀신이나 신령일 거예요. 어느 쪽이든 우릴 구해주고 사라졌으니, 앞으로 꾸준히 치성 드리도록 해요.”


* * *


발걸음에 붙는 속도에 비례해, 주옥의 머릿속은 온통 흥분으로 가득찼다. 구결로만 알고 있던 신법을 지금 네 발로 펼치고 있었으니, 평생, 아니 전생의 소원이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말은 원래부터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강인했다. 거기 내력이 더해졌으니, 주옥은 지상에 자신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없을 거라 확신했다. 바람조차도 자유롭게 내달리는 주옥을 질투하여, 그의 귓가를 공연히 때렸다.


‘무림의 누구보다도 빠르다. 상대가 천마나 무림맹주라 해도 자신 있어.’


이 점은 물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린 오판이었다. 하지만, 신법에 한해서는 초일류 고수의 수준에 올라선 것이 확실했다. 더욱이, 이렇게 질주하는 동안에도 등 뒤에 얹힌 두 사람은 약간 들썩일 뿐, 등에서 떨어질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미 절명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몸의 균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점이 더 컸다. 몸을 통과해 나가는 진기를 느끼며, 주옥은 생각했다.


‘인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효율적인 방식이다. 양맥으로 내력을 보내면, 자철석처럼 외부의 진기를 빨아들여 적재적소에 분배하고는 요혈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어. 이런 방식이라면 굳이 내공을 일 갑자씩 모으지 않아도 돼.’


그 말대로였다. 호흡기를 통해 들어온 진기가 곧장 단전을 향해 흘러들어왔고, 그 단전은 스스로 자리를 옮기며 그 진기를 임독양맥의 요혈로 보냈다. 발출된 진기는 몸을 가볍게 하고, 몸을 단단하게 하는 등 그 주인의 의지에 따라 역할을 하고는 다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체내에 일부 잔존한 진기는, 단전에 모여들어 축적되었다.


반면 인간은 단전에서 내력을 일으켜, 다시 반대쪽 단전으로 밀어넣기를 무수히 반복해서 내력을 쌓은 다음, 효과적인 발출 방법, 즉 무공까지 연마해야 했다. 인간의 운공을 경험해본 적 없긴 했어도, 연구는 숱하게 많이 해 온 주옥일진대도, 이런 방식은 인간의 방식보다 훨씬 우월해 보였다. 주옥은 쉼 없이 발을 놀리며 생각했다.


‘짐승의 특징일까, 말의 특징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만의 특징일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자기가 인간이 아니라 진짜 짐승이었다면 어땠을까. 운공이라는 개념도 몰랐을 테고, 심법서를 읽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한 번 양맥을 뚫기만 한다면 어떤 인간보다도 빠르게 강해졌겠지만, 짐승의 지능이었다면 그 한 번의 타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때 농부의 질문이 떠올랐다.


‘둔갑한 영물이나 술사는 아닌 거겠지?’


영물이라. 영물, 귀물, 요괴, 요수 등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전부 엄청나게 강력하고 이능(異能)까지 지닌 짐승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금의 무림에서 환수(幻獸) 이야기는 검증되지 않는 전설 취급을 받았지만, 각종 문헌과 구전 전설에 의하면 과거엔 인간과 접점을 맺고 살았던 게 분명했다. 적어도 주옥은 그렇게 믿었다.


‘혹시 영물이 되어 가는 과정이 이런 건가?’


운공이 이렇게 쉽고 효율적이라면, 어떤 짐승은 우연히라도 양맥 타통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다 몸 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단전에 모여드는 진기까지. 이건 요괴들이 몸 속에 품고 다닌다는 힘의 근원, 마정(魔晶)의 성격과 같았다. 단전이 체내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그저 신체 부위인 줄만 알았던 단전이란 단어 뜻을 재정의해야 할 지경. 바로 이 점이 마정과 주옥의 단전 간 유사성을 더했다. 요괴들의 체내에서 발견되는 마정의 위치 역시 어떤 법칙도 없이, 완전한 무작위였다. 지금 누군가 주옥의 단전을 취하고 싶어한다면, 환수에게서 마정을 취하는 것과 같은 방식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 예상이 맞다면, 이러다 내가 환수가 될 수도 있다는 뜻?’


환수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였다. 강력한 힘, 이능(異能), 그리고 소재지 일대에 행사하는 영향력. 그 영향력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면 영물, 아니라면 마물로 불렸다.


‘짐승이 되었으니 그런 기준은 무의미하겠지만 말이야.’


이 순간은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어차피 인간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은 보이지 않았으니 한참을 말로 살아야 한다.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이 몸이라면 무공을 익히는 것도 가능했고, 한 번 익혀 놓은 무공은 인간의 몸보다 훨씬 강하게 발출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불만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주옥은 말로써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설이 맞다면 짐승을 초월한 무언가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 때부터 열리는 가능성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사람으로 둔갑하는 요괴 전설은 고금에 차고 넘쳤으니 그런 능력을 갖게 될 수도 있고, 아예 사람의 몸이 필요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이능을 얻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환수가 된다는 건 엄밀히 단순한 추측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주옥은 평생 원하던 무공을 얻은 직후, 게다가 그 무공의 공능 역시 기대를 훨씬 상회한다는 것을 확인한 직후였으니, 그 정도로 냉정해지는 건 무리였다. 지금 어둠을 힘차게 가르고 있는 흑마의 머릿속은 새로운 목표 하나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자유로운 자. 그게 내가 된다.’


* * *


질주는 밤새 멈추지 않았다. 달이 넘어가고 해가 슬쩍 동쪽 하늘에 얼굴을 비추자, 흑마는 허리를 가볍게 털어 지고 다니던 마교인의 사체 둘을 떨어뜨렸다. 모래와 돌 투성이였던 바닥은 어느새 무성한 잔디밭으로 바뀌어, 털썩이는 소리로 숨이 멎은 두 마교인을 받았다.


그리 무거운 짐은 아니었지만, 덜어내고 나니 더욱 신이 났다. 해가 동쪽 하늘에 확고히 자신의 자리를 못박은 뒤에도, 주옥은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목적지가 어디든 단 일각도 쉬지 않고 달려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주옥의 걸음이 멈춘 것은, 해가 중천에 뜬 이후였다. 달빛이 어스름할 때쯤 농부의 집을 떠나왔으니, 반나절은 족히 달린 것이다. 이쯤 되니 땀도 제법 났고, 다리가 꽤나 뻐근해 왔다. 더 못 달릴 것도 없었지만, 주변 환경이 많이 바뀌어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달려온 것인지 확인할 마음이 동했다.


커다란 말 눈이 주변을 훑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에 초록빛 잔디가 깔린 모습, 익숙한 운남의 점창산과는 식생(植生)부터가 달랐다. 운남이라고 잔디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밟히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지금 이곳의 잔디는 운남의 잔디보다 억세고 키도 컸다. 넓은 중원 대륙에서 이런 식생의 차이는 현 위치를 알려주는 단서였으니, 주옥은 생각했다.


‘점창산 일대보단 식물이 좀 더 잘 자라는군. 기온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럼 남북으로는 많이 이동하지 않은 대신, 비가 더 많이 오는 곳이겠군.’


그리고, 발치의 잔디를 한 입 뜯어 우물거리며 가장 중요한 평가를 마쳤다.


‘맛도 좋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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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야생마(3) +1 24.08.13 70 6 13쪽
9 야생마(2) +1 24.08.12 75 5 12쪽
8 야생마 +1 24.08.11 78 4 13쪽
» 천마는 자유예요 +1 24.08.10 90 4 13쪽
6 진정한 마공 24.08.09 86 5 17쪽
5 적당히를 모르는 놈들 24.08.08 87 4 13쪽
4 그럼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1 24.08.07 108 5 13쪽
3 맛있다 +1 24.08.06 149 5 12쪽
2 천마와 흑마 +1 24.08.05 212 6 14쪽
1 뭘로 환생하고 싶냐. +1 24.08.05 321 1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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