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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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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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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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로 환생하고 싶냐.

DUMMY

점창파의 칠대 장로 중 하나인 주옥(周玉)은 천하에서 가장 자유로운 자에 의해 죽었다.


흉수는 그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인식조차 못 했을 지 모른다. 점창파(點蒼派) 멸문전이 개전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으니, 내공 한 줌 없는 주옥이 누군가의 이목을 끌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삶을 앗아간 것은 무공이라 이름 붙이기도 어려운, 그저 손짓 한 번이었다. 그 손짓은 마치 자신이 개미나 날파리가 된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자 앞에서 주옥은 미물에 불과했다. 공력을 수십 년씩 쌓은 사형제들도 그 손짓 한 번에 쓸려 나갔으니, 한 올의 내공도 없는 주옥은 개미보다도 하찮게 사망했다.


죽음이 다가온 순간, 주옥은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상대는 인간의 형체를 빌렸을 뿐, 자연재해 같은 불가해(不可解)한 대상이었다. 그를 원망하고 저주해 봐야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천마 곽처하(郭凄河). 예순이 넘은 노고수였지만, 그의 얼굴은 불혹이 안 된 주옥 자신과 동년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천하에서 가장 자유로운 자는, 어쩌면 노화라는 숙명으로부터도 자유로울지 모르는 일이었다.


바로 그 자의 눈이, 아주 잠깐 주옥에게 머물렀다. 아름다워 보였다. 마지막 순간에 남은 것은, 생이 끝나는 순간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 * *


“이거 이상한 놈일세. 무공이라고는 전혀 못 쓰면서 장로까지 올라간 거냐?”


낯선 목소리에 겨우 눈이 떠졌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 것보다도,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상반신, 하반신, 팔다리, 손발가락. 전부 다 붙어 있는 걸 확인한 뒤, 주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분명 자신의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말을 건 상대방의 생김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늙은 동시에 젊어 보였고, 선한 동시에 악해 보였다. 사람은 저렇게 생길 수도 없고, 분명한 죽음을 맞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을 걸 수도 없으니, 사람이 아닌 건 분명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 눈 앞에 있는 수수께끼의 인물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거 참, 열에 아홉은 그걸 묻는단 말이야. 좋다. 그럼 네녀석이 물을 질문에 미리 답해 주겠다.”


그러더니, 수수께끼의 인물이 말을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없다. 하지만 무림인이란 놈들은 꼭 이름을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지, 나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 부르더군. 한때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다. 뭐, 그 점은 너와 같지. 여기 있는 이유는, 네놈에게 한 가지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무슨 기회입니까?”


주옥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숨이 끊어지던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했다. 그런데 다시 온전한 몸으로 멀쩡히 대화를 하고 있으니, 이곳은 내세(來世), 혹은 내세로 가는 기착지가 분명하리라.


그렇다면 당황할 것도, 서둘러야 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무림인으로서 자신의 삶은 끝났으니,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눈 앞에 있는 이 자가 알려줄 것이다. 주옥은 지금 자신이 이상하리만치 침착함을 깨달았다. 생전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이 정도로 담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호, 이제는 또 침착하군. 생각보다 웃긴 놈이로다. 그래, 기회란 것은, 흠흠.”


자신을 태상노군이라 소개한 자는 능청스레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뭘로 태어나고 싶으냐? 그 선택권을 주려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간만에 눈치가 빤한 놈이 들어왔다 했는데, 여기까진 못 알아듣는군.”


태상노군은 적잖이 실망한 표정으로 주옥을 바라봤다. 설명은 하나도 안 해놓고 못 알아듣는다 핀잔을 하니 약간 억울했지만, 역시 살아있을 때에 비하면 감정이 약했다. 죽음이 어떻게든 자신을 바꿔 놓은 것이라 짐작했다. 그 사이 태상노군이 부연했다.


“네놈이 죽은 건 네놈 스스로도 잘 알지 않냐. 그럼 환생을 해야지. 뭘로 환생하고 싶냐는 말이다. 또 미리 답해 주자면, 그래, 내가 환생을 주관한다. 재밌어 보이는 놈들 한정이긴 하지만.”


혹 주옥이 따져 물을까 하여, 태상노군은 자신이 환생을 주관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주옥의 입장에서야, 죽음이니 환생이니, 지금 상황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이야기는 없었다. 그리 하여 대답했다.


“제가 재밌어 보이는 이유는, 역시 무공을 못 쓰면서 점창의 장로까지 올라갔기 때문입니까?”


“그래. 오호라, 지금 보니 방향만 잡아 주면 금방금방 이해하는구나. 역시 재밌는 놈이야.”


태상노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다시 주옥에게 만족한 것 같았다. 그가 짓는 미소는 간악(奸惡)한 동시에 순선(純善)했다. 그런 태상노군의 얼굴이 눈앞에 있으니, 환생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왠지 거짓이 아닐 것만 같았다.


‘저런 얼굴이 존재하는 곳이니, 어떤 허무맹랑한 얘기도 사실일 수 있지.’


생각을 정리한 주옥은 태상노군을 똑바로 보았다. 생글거리는지, 이죽거리는지 알 수 없는 그의 미소가 여전했다. 내세에 나는 무엇으로 태어놓고 싶은가. 그런 것은 평생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생각은 질리도록 해 봤다.


주옥은 선천적으로 무공을 쓸 수 없었다. 아무리 운공을 하고, 내력을 일으켜 보려 해도 한 푼의 진기조차 반응하지 않았다. 대리국 불교과 도가의 가르침이 어우러진 점창의 심후(深厚)한 의술로도 주옥을 치료할 수 없었다.


그가 타고난 절맥지체(絶脈之體)란, 극복할 수 없는 선천적 한계였다. 자신의 사형제들이 기초 무공을 대성하고 심화 과정으로 넘어가는 동안, 주옥은 연무장에서 쏟지 못하는 열정을 장경각(藏經閣)에 쏟았다. 그것이 돌파구가 되어 주었다.


직접 무공을 펼칠 수 없는 그에게 각종 비급을 독파하고 암기하며 머릿속으로 그 움직임을 상상하는 일은, 현실을 잊게 해 줄 만큼 즐거웠다. 암기 능력이 비상하고 의욕이 넘치는 주옥은, 여러 비급을 수도 없이 읽고 외웠다. 그렇게 외운 무공 구결이 백을 넘고, 천을 넘자 눈이 따라 트였다.


그의 재능은 무공을 펼치는 게 아니라, 무공을 알아보는 데 있었다. 그 재능을 살려, 주옥은 점창의 장로 자리까지 올랐다. 무공이 없는 몸으로 장로가 된 것은 점창은 물론, 구파 전체를 통틀어도 초유의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엄연히 구파의 장로였던 주옥은, 여러 모로 ‘특별 대우’를 받았다. 우선 비무대회 인솔, 무림맹의 회동, 논검 참석 의무에서 열외되었다. 직전 제자도 거둘 수 없었다.


장로와 대장로, 장문인으로 구성된 수뇌부가 내세운 명분은, 무공이 없는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수뇌부의 진심을 모르는 이 없었다. 무공이 없는 장로를 타 문파와의 회동 자리에 내놓기 부끄러웠던 것이다.


대신, 문파 내부에서 그의 중요성은 높았다. 그가 무공을 봐 준 제자들은 대부분 빠른 성취를 보였으니, 주옥은 점창 후기지수 육성에 큰 역할을 했다. 점창의 수뇌부는 그가 직전제자 1인에게 온 신경을 쏟기보다, 최대한 많은 제자들을 손봐 주어 전반적인 수준을 끌어올리기를 바랐으니, 직전제자를 거두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 고로, 점창의 평화진인(平和眞人) 주옥은 반쪽짜리 장로가 되었다. 무인의 도호가 평화진인이니, 그 이름도 자조적인 데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읽은 자들은 그를 더욱 업신여겼다. 물론 무공 없이 장로가 된 주옥을 존경하는 무리도 생겨났지만, 커져 가는 주옥의 공허함을 달랠 방법은 없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신법을 밟고 권장을 뻗으며, 도검에 내력을 실어보고 싶은 갈망은 커져만 갔다. 몸을 가볍게 하고, 원기를 충만하게 하는 진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이것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무공은 무엇이었는가. 이 물음에 주옥은 속으로 되뇌었다.


‘심신에 자유를 부여하는 수단.’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는 비로소 한 가지, 바로 자신이 생전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고 난 뒤에야 깨닫기에는 너무나 가혹하여, 이곳에서 눈을 뜬 이래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던 그의 심경도 요동쳤다. 감정으로 치자면, 억울함이었다.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내가, 가장 자유로운 자에게 죽다니. 이렇게 비참할 수가 있나.’


마지막 순간에 봤던 곽처하의 눈빛이 떠올랐다. 자신을 끝내 버린, 어쩌면 자신이 죽어있는 사이 점창 전체를 끝내 버렸을 지도 모르는 흉수의 눈이었다. 그럼에도 그 눈빛은 아름다웠다. 죽는 그 순간에 왜 그런 모순된 감정이 불쑥 들었는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주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뭘로 환생하고 싶은가. 이제 보니 답이 뻔한 질문이었다.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번질 지경이었다. 그의 열린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천마로 태어나 볼까 합니다.”


* * *


자연은 항상 인간사를 바꿔 놓는다. 흔치 않은 경우지만, 인간사가 충분히 이어지면 반대로 자연을 바꿔 놓기도 한다. 점창산이 그러했다. 점창파가 그곳 깊숙이 자리잡은 것은, 후예(后羿)가 아홉 개의 해를 떨어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절이라 일컬어졌다.


인간이 그 기슭에 자리잡은 수천년간, 점창산은 점창파를 닮아 갔다. 깎아지른 산세는 사일검법(射日劍法)을 닮아 더욱 매서워졌고, 봉우리의 만년설은 유운신법(流雲身法)을 닮아 구름을 밟았다.


-라는 역사가, 점창 제자들이 사부에게 배우는 본파의 역사였다. 하지만 제자들의 머리가 조금만 굵어져 무림의 정세를 파악할 줄 알게 되면, 이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된지도 자연스럽게 깨닫는 게 수순이었다.


“우리 파의 개파조사는 당대 최고의 검수(劍手)로 이름을 날리던 분이시다. 성은 후(后), 함자는 극영(극영). 너희들도 후예사일의 전설을 알고 있겠다. 후 조사님은 다름아닌 그 후예의 후예(後裔)이시다.”


주옥이 스스로 무공을 쓸 수 없다는 사실마저 모르던 코흘리개 외문제자 시절, 당시 제자 교육을 담당하던 젊은 사부는 이렇게 가르쳤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날, 사부가 돌아가자마자 주옥은 동기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봐. 후예사일의 신화가 몇 년 전 일일까? 천 년? 만 년?"


그러자, 모여 있던 동기 중 주옥과 가장 친했던 합명(闔明)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냐. 허무맹랑한 얘기라면 관둬.”


그 말에 주옥은 되려 웃음을 지었다. 합명은 그런 친구였다. 자신과 가장 친했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머리가 빨리 트인 녀석. 하지만 자신에 비하면 사문에 대한 충심(忠心)이 가득해 벌써 정도(正道)를 걸으려 하는 녀석. 그러면서도 유독 자신에게만은 융통성을 넓게 발휘해 주어, 결코 말문을 막는 일이 없는 것도 잘 알았다. 합명에게는 가볍게 대꾸했다.


“아니, 중요한 얘기야. 다 같이 생각해 볼만 한 일이라고.”


역시, 합명은 더이상 대꾸하지 않고 약간 우려스런 눈빛으로 주옥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사분(史賁)이라는 이름의 동기가 물어 왔다. 당시 주옥에게 사분은, 자신과 합명에 비하면 아무래도 머리는 좀 모자랐지만 수더분하니 착한 녀석 정도였다.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뭔데? 후예사일이라면 최소 수천 년은 된 거 아니야?"


“그래. 바로 그 얘기야. 너희들, 천년소림이란 말 들어 봤지?”


주옥 앞에 모인 동기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아마 들어본 녀석, 안 들어본 녀석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엔 이름을 모르는 동기 하나가 주옥에게 되물었다.


“말 그대로 천 년 역사를 가진 소림파라는 뜻이잖아? 그게 왜?”


오호라, 저 놈은 그래도 무림사(江湖史)에 관심이 있나 보군. 주옥은 이렇게 여기며 대꾸했다.


“웬만한 참사를 당하는 게 아니라면, 문파의 역사와 그 힘은 비례하지 않겠어? 그럼 소림이 무림의 태산북두로 떠받들어질 동안, 몇 배나 역사가 긴 우리 점창은 뭘 했길래 꼴랑 구파일방의 말석에 머무르고 있겠냐는 얘기야.”


주옥의 말이 끝나자마자, 군중 속에서 동기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성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뭐야, 그럼 우리 문파의 대선배들이 수천 년을 허송세월 했다는 거야?”


저놈의 이름은 운릉(雲凌)이었던가. 사문에 대한 애정이 좀 과한 놈이었다. 합명보다도 점창을 더 사랑하는 주제에, 생각은 그리 깊지 않아 정이 가는 놈은 아니었다. 주옥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겠지. 난 그런 생각 한 적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네가 그렇게 믿는 거 아니냐?”


“이...이 자식! 무슨 망발을 하고 있어!”


운릉은 정곡을 찔린 듯 발끈해서 성큼 주옥 앞으로 다가섰다. 어차피 무공을 배우지도 익히지도 못한 어린 나이였으니, 주옥도 겁낼 것 없이 다가섰다. 그 때, 합명이 나서서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 이 녀석 얘기는, 점창의 역사가 사실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그렇게 열낼 일이 아니야, 운릉."


차분한 목소리가 격해지는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운릉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사부님이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잖아! 그것도 불경이야!"


씩씩대는 운릉을 앞에 두고도, 합명은 냉정을 잃지 않고 대꾸했다.


"그 정도 거짓말은 어느 문파에서나 다 한다. 너처럼 충실한 어린 제자를 키워내기 위해서지. 못 믿겠으면 사부님한테 따로 찾아가서 물어봐라. 주옥의 말이 틀렸다면, 나도 네가 이놈과 싸우는 걸 막지 않겠어."


"그래, 여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라!"


이렇게 말한 뒤, 운릉은 쿵쾅대며 사부를 찾으러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한참 지켜본 뒤, 합명은 한숨을 내쉬며 주옥에게 말했다.


"네놈의 취미는 왜 이리 고약한 거냐. 사문이 역사를 강조하는 게 그리 못마땅해?"


어린 주옥은 생글대며 웃었다. 사문의 교육 방식이 못마땅한 건 아니었다. 단지 제자라고 해서 사부의 맹신하는 것이 이상했을 뿐이고, 어린 그의 눈에는 허울로밖에 보이지 않는 역사에 그토록 집착하는 모습이 유치해 보였을 뿐이었다.


이 기억을 떠올리는 그 순간, 이제는 장성한 주옥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완전히 폐허가 된 점창파의 장원, 그 중에서도 연무장이었다. 연무장 바닥을 지탱하던 거대한 기반암이,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산산조각난 채 움푹 패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 핏자국, 부러진 병장기 따위가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한 주옥은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나. 이 정도 피해라면... 점창의 역사 따위 어찌 되든 상관 없어졌군.’


그 함의인 즉, 멸문(滅門)을 직감한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더욱 끔찍한 것들, 이를테면 잘려나간 사형제들의 신체 일부가 보였다. 작게는 손가락 한 마디, 크게는 다리 한 짝, 심지어 일부는 생전 누구 것이었는지조차 알아볼 수 있었다.


‘단단한 근육, 길지도 짧지도 않은 평균 크기의 팔, 흰 편인 피부색, 손목의 작은 흉터, 무엇보다 주먹에 쥐고 있는 한청검(寒淸劍). 저 왼팔의 주인은···’


바로 합명이었다. 합명은 이립 줄에 접어들어 점창의 절기인 철응검(鐵鷹劍)을 대성한 뒤, 독립하여 자신의 일파 철응회(鐵鷹會)를 일구었다. 달리 말하자면, 합명 역시 사일검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가 당대 후기지수 중 손꼽히는 기재(奇才)였음에도 불구하고.


합명은 한청검이라 이름붙여진 자신의 보검을 앞세워 협을 행했다. 그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합명의 사부이자 육검장로 중 1인, 금선붕(金旋朋)의 자부심도 커졌다. 금선붕과 합명의 각별한 관계 덕에, 철응회는 점창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번에도 사문의 위기를 좌시하지 못하고 점창을 지원하러 온 합명의 말로(末路)는 바로 저것이었다.


문제의 왼팔은 어깻죽지까지 반쯤은 깔끔하게 잘리고, 나머지 반은 우악스럽게 뜯겨나가 있었다. 그 절단부에서는 한참 피가 쏟아졌는지, 연무장 바닥을 적시고도 남아 덩어리를 이루었다. 반짝이는 한청검날의 푸른 빛이 허망했다.


합명의 수준은 익히 알았다. 저런 상처를 입고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합명은 입문할 때부터 죽이 잘 맞았던 친구였으니, 알고 지낸 지 족히 30년이 된 죽마고우였다. 그런 친구를 잃었음에도 의외로 감정이 크게 요동치지 않아, 되려 본인이 당황할 지경이었다.


‘죽었나··· 합명도 태상노군을 만난 게 아니라면 다시 깨어날 일은 없겠지.’


그래도 친구의 마지막을 더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30년 친구가 이승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흔적이 저 고깃덩이 같은 팔 한 짝이어서는 안 됐다. 드디어, 주옥이 몸을 일으켰다.


털썩.


그리고, 곧장 다시 쓰러졌다. 몸을 쓰는 게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무공이 없는 몸으로 험한 점창의 산세를 헤치다 보면 간혹 실족하는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실족이 아니었다. 발걸음이 무딘 정도가 아니라, 전혀 써본 적 없는 몸에 주옥의 정신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진 주옥은 그제야 자신의 팔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고개를 조금 내렸을 뿐인데 어느새 코가 연무장 돌바닥에 닿았다.


그것도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지만, 더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분명 자신의 팔다리가 분명한 그것을 내려다 봤음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팔다리가 아니었다.


대신 붙어있는 것은, 검고 긴 몽둥이 같이 생긴 것 네 개. 게다가, 가장 충격적인 것은, 손끝, 발끝이어야 할 위치에 달려있는 둥글고 단단한 무언가였다. 그 정체는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발굽? 그것도 손발 네 짝에 전부 다?’


말이나 소의 발톱은 길고 단단하게 자라 발굽을 이룬다. 그것이 팔다리 네 짝에 모두 달려 있었다. 저런 게 왜 자기 손발 대신 달려있는 것일까? 발굽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니, 그 뒤에 팔다리 대신 달린 검은 몽둥이 같은 무언가의 정체도 당연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럼 끝에 발굽을 달고 있는 저 검은 몽둥이는 말 다리? 그리고, 다리가 네 개?’


문제는 그 유추한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였다. 자신에게 말의 다리 네 개가 달려 있었고, 대신 두 팔은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고개를 약간 움직였을 뿐인데 바닥에 코를 긁기도 했다.


그 순간을 되짚어 보면, 도저히 인간의 얼굴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보통의 인간 얼굴이라면 닿아도 코가 아니라 턱이 닿아야 했다. 슬슬 주옥에게 불안감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태상노군 그 노괴, 날 천마(天馬)로 환생시켜 버린 거야?’


작가의말

2화부터는 축소된 분량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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