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입원한 지 삼 일째 되던 날.
병원을 나섰다.
오늘 오후 1시에 한국 균열 관리국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과 대책 회의가 열리는데 출석하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의지도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리암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아야 했기에.
화상을 입었던 부위는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당연히 이건 정상이 아니다.
그래서 긴소매와 정장 바지로 상처 부위를 가렸다. 화범일의 조언대로 남들에게 의심을 받을 만한 일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장인어른은?”
“출발하셨답니다.”
병원 입구에는 이미 이 비서가 마중 나와 있었다.
원래는 화승 길드 부대장을 맡고 있는 화용제가 함께 출석해야 했지만, 해외에 나가 있는 관계로 장인어른이 대신 나섰다.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여기 있습니다.”
뒷좌석에 올라타며 묻자 이 비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데이비드 가의 자료가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데이비드 가. 본적은 위치는 미국 일라노이 주. 시카고이며 3대째 헌터 재벌가를 잇고 있습니다. 세계에 있는 헌터 재벌 중에 황보 그룹과 함께 가장 부유하며 현재의 회장인 ‘에반스 데이비드’는 대선후보에도 오르는 영향력이 강한 인물입니다.”
“내가 아는 거 말고. 리암은 좀 어때?”
난 손을 내저으며 말을 돌렸다.
“나이 28세.”
“뭐야, 나보다 두 살 어리잖아? 겉늙었네.”
“에반스 데이비드의 손자로 능력은 SS급 염동력과 신체강화 능력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거 말고. 라고 말하지 않았나?”
살짝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이 비서가 고개를 돌리며 궁시렁거렸다.
“오늘따라 되게 민감하시네······.”
“뭐라고?”
“아닙니다! 아마 이건 모르실 겁니다. 리암 데이비스에겐 두 가지 각성 능력 말고도 히든 특성이 한 가지 더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그게 뭔데?”
“그건 저도 모르죠.”
나는 곧장 이 비서를 쏘아봤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걸 느낀 그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을 이었다.
“소문으로는 정신계 계열인데 간파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건 뭐 정확한건 아니고요.”
“약점이나 구린 점은?”
“약점은 거의 없는데 구린 게 많네요. 워낙 잘난 놈이다 보니까.”
“잘나기는······ 뭔데?”
난 한차례 콧방귀를 낀 뒤 물었다. 그러자 이 비서가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먼저 은근히 여자관계가 복잡합니다. 암암리에 상당히 많은 여성들을 만났는데, 중요한 건 만났던 여성들의 절반 이상이 행방불명됐다는 점입니다.”
행방불명?
요즘 들어 행방불명이란 단어를 자주 듣게 된다.
“행방불명됐다는 여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각성자인데 대부분 어린 나이에 A급 이상 능력을 각성한 인물들입니다.”
“역시 뭔가 구린내가 나는데······.”
난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팔짱을 꼈다.
겉모습은 번지르르해 보이지만 속이 시커먼 놈이다. 물론 난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지만.
“또 있습니다.”
“뭔데?”
“칠성 그룹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첩보입니다.”
“칠성 그룹?”
순간 왠지 모를 불쾌감이 치솟았다. 여기서 왜 갑자기 칠성 그룹이 나오는 거지?
“예. 이유는 모르겠으나 칠성 쪽에서 리암에게 계속 접근을 시도한 모양인데 분명히 좋은 일로 연락을 주고받진 않았을 겁니다.”
이 비서는 슬쩍 나의 눈치를 살폈다.
리암과 화가람의 관계. 칠성 그룹의 접촉. 이건 누가 봐도 나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거슬리는 놈이군. 가람이에게 절대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겠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놈이야.”
“다른 이유가 있으신 거 같은데······.”
“그런 거 없으니 넘어가.”
이 비서가 슬쩍 말하자 난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이번에 한국에 입국한 데이비드 가는 누구누구지?”
“여기 보시면······.”
이 비서의 설명을 들으며 머릿속에 데이비드 가에 대한 정보를 각인시키는 사이 차는 대책 회의가 열리는 국가 균열 관리국에 도착했다.
정문 쪽에는 이미 수많은 취재진들이 빈틈없이 포진되어 있었는데 어느 한 곳을 향해 집중적으로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었다.
가까이 도착해보니 그곳엔 장인어른과 뜻밖의 인물이 함께 서 있었다.
‘처남이 여긴 무슨 일로.’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화범이었다. 머리 스타일까지 제법 신경을 쓴 걸 봐선 뭔가 벼루고 나온 듯한데.
내가 차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걸어가자 모든 이목이 나에게 쏠렸다.
“판결하다!”
“판결하 씨! 이번 균열 사태에 대해 할 말이 있으십니까!?”
“화승 길드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화가람 양이 많이 다쳤다는데 맞습니까?”
“화가람 양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데 사실입니까?”
“균열에서 몬스터 나왔다는 게 사실입니까!”
끝없는 질문 공세가 이어졌지만, 화승 길드의 가드들 덕분에 무사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어떻게 해서든 자극적인 내용을 담고 싶겠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와 있어야 했는데.”
“아직 몸도 성하지 않으면서 무슨. 됐네. 들어가세나.”
“예. 그런데 처남은······?”
내가 말끝을 흐리자 장인어른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자네가 부르지 않았나?”
순간 화범이 눈을 부릅뜨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쩔 수 있나. 맞장구를 쳐줘야지.
“아, 예. 형님께서 안 계시니 미리 경험 삼으라고 연락했습니다. 가시죠.”
내가 회의장으로 안내하자 장인어른이 먼저 앞장섰다. 그리고 바로 뒤를 따르는데 옆에서 화범이 나에게 소곤거렸다.
“한 번만 눈감아 줘요. 나도 급해서 그런 거니까.”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런······.”
그때였다,
“아이고, 형님! 오셨습니까!!”
“오! 동생! 오랜만이야!”
앞쪽에서 익숙하고도 지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복을 입고 장인어른과 가벼운 포옹을 하며 활짝 웃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헌터부 장관 이승태였다.
여전히 야생 곰 같은 위압적인 체격을 지녔지만, 장인어른 앞에선 길들여진 곰이나 마찬가지.
둘은 같은 군부대 출신으로 장인어른이 전역하고도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장교 한 명이 있었는데 이승태 장관의 딸이자 헌터 홍보부 장교였던 이하정 대위였다.
최근 장관의 부관으로 임명됐다고 한다.
살짝 날카로운 눈매와 적당히 그을린 피부. 군복과 어울리는 늘씬하고 다부진 몸. 상당히 귀인 있으면서도 멋져 보였다.
“안녕하세요. 판 실장님.”
“오랜만이네요. 이하정 대위.”
난 그녀와 악수를 나눴다.
과거 몇 차례 화승 길드와 대한민국 육군과의 협력으로 여러 가지 행사를 진행했었기에 나름 안면을 튼 사이였다. 똑똑한데다 성격도 시원시원하니 나와 말이 잘 통했다.
“마, 만나서 바, 반갑습니다. 이, 이하정 대위!”
그때 옆에 있던 화범이 말을 더듬으며 마치 목석이 된 듯 뻣뻣한 자세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응?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설마······?’
“만나서 반가워요. 화범 씨.”
“헉! 제, 제 이름을!”
화범이 화들짝 놀라자 이하정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대한민국에서 화범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드물지 않을까요? 워낙 매스컴에 자주 나오시니.”
“하핫! 그렇군요.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화범은 멋쩍은 듯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바본가.’
이하정의 말이 좋은 뜻이 아님을 누구나 알 법도 한데 화범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온갖 매스컴에 ‘악동’으로 등장하는데 본인만 모르는 모양이다.
저벅! 저벅!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반대편 통로에서 나타났다. 난 그들을 보는 순간 단번에 누군지 알아봤다.
바로 칠성 길드의 길드장이자 차가은의 오빠인 차윤호와 김성태 이사. 그리고 똘마니들.
다행이 장인어른은 헌터부 장관과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복도 반대편이라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차윤호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과거라면 저 시선을 두려워했겠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도 많이 변했네.’
***
균열에 관한 대책 회의는 심각하면서도 지루하게 이어졌다.
이번 회의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헌터부 대표들도 참석했는데 그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관심사는 균열 내부의 몬스터들이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느냐였다.
회의 중간쯤 내가 증언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겪은 그때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는데 딱 두 가지만 말하지 않았다.
내가 몬스터를 테이밍한 사실과 리암이 나에게 염동력을 쓴 일. 물론 리암의 염동력은 확실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난 별다른 질문 없이 증언석에서 내려갔다.
균열에 빨려들어 가서 정신을 잃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화가람이 곧바로 들어와 몬스터를 처리해 줬기에 더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회의가 진행될수록 뭔가 이상한 흐름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3급 이상의 균열은 군부대와 길드들이 합동으로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언제 몬스터들이 넘어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너무 한 길드에 몰아주는 식이었던지라······.”
“뭐 그들인 우리나라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함께 성장해야지요.”
이것들 봐라.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화승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게 아닌가.
한두 명이 슬쩍 포문을 열자 이제는 떼창을 부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욕심날 수밖에 없겠지.
2급 이상 균열에서 채취되는 마석 값 만해도 천문학적인 숫자니까.
마석은 균열의 심장 주위로 산더미로 쌓여 있는데 주먹 크기의 순도 높은 마석 하나가 50억에 다다르니 균열 하나의 값어치를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화승 그룹은 그런 균열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고 당연히 엄청난 재력으로 세계 정상급의 기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반대편에 앉아 있는 칠성 길드장에게 향했다.
사람들을 이렇게 단합시키려면 칠성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역시나 차윤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간에 끼어 입장이 난처해진 건 헌터부 장관 쪽이었다.
‘하, 참. 기가 막히는군. 저놈들이 기어코.’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장인어른을 바라봤다.
그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묵묵히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흥분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용하다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타이밍인 듯싶다.
“다들 입이 근지러운 모양인데 그냥 화승의 이권을 빼앗고 싶다고 대놓고 말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험······ 그 무슨 말을······.”
나의 말에 시선을 회피하는 각 길드장들.
난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자리는 예기치 못한 균열의 변화를 조사하고 그 대처방안을 모색하고자 모인 겁니다. 사사로운 이익을 따지자고 모인 게 아니란 말입니다.”
“사사로운 이익이라니! 우리가 자기 배나 채우려고 이러는 게 아니지 않소.”
“그렇소. 판 실장은 헌터가 아니라 모르겠지만 우린 목숨을 걸고 균열을 막아내고 있소. 이제는 모두 공평하게 나눠야 이치에 맞지 않겠소!”
사람들은 대화의 주제를 교묘하게 벗어나며 화승의 독점에 대해 계속 비난을 퍼부었다.
고유 특성인 무한한 신뢰도 잘 먹히질 않는 걸 봐선 아예 작정을 하고 온 모양이다.
그렇게 약 10분가량 대화가 오갔을까?
툭툭.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장인어른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판 서방. 그만하면 됐네.”
내 어깨를 두드리며 가볍게 미소 짓던 장인어른은 돌연 진중한 표정을 한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워낙 몸집이 컸기에 눈에 띄는 건 당연했다.
그 순간 모든 말들이 멈추고 모든 이목이 장인어른에게 집중됐다.
“좋소. 당신들 뜻대로 하시오.”
“장인어른!”
그의 말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단!”
쩌렁쩌렁한 목소리.
다시 좌중은 조용해졌다.
“앞으로 우리 화승 길드는 1급 균열 토벌에 참여하지 않겠소!”
“아니, 그건!”
“그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장인어른의 말에 모두들 기겁을 하며 한마디씩 던졌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화승 없이는 1급 균열을 토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들이 점점 큰소리로 불만을 내비치자 장인어른은 힘껏 숨을 들이켠 뒤 크게 외쳤다.
“모두 닥쳐! 정작 내주면 토벌하지도 못할 것들이! 감히 화승을 우습게 봐?!”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목소리에 온몸이 떨려왔다. 마치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기분이다. 다른 길드장들 역시 점점 얼굴이 새파래지고 있었다.
“우리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떨어지는 콩고물 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 길드가 좀 커지니까 아주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아니, 저희의 말은 그게 아니라······.”
“닥치고 들어라! 한 번만 더 개수작 부리면 길드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 주마! 할 말 있으면 당당하게 내 앞에 와서 말해!”
마력을 전혀 쓰지 않았지만 마치 마력 파동이 덮친 듯 사람들은 정신의 끈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만큼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 실로 엄청났다는 뜻이었다.
난 당당하게 서 있는 장인어른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잊고 있었다. 우리 장인어른이 엄청 강하다는 사실을.’
“판 서방, 가세!”
“예! 장인어른!”
호탕하게 출입구로 향하는 장인어른을 빠르게 뒤쫓으며 뒤를 돌아보니 망연자실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길드장들의 모습이 보였다.
특히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려치는 차윤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실로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선호작과 추천은 저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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