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베는 달빛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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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보이맨
작품등록일 :
2024.08.08 16:32
최근연재일 :
2024.09.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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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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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프롤로그

DUMMY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였다.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함박눈은 어느새 세상을 새하얀 도화지로 바꿔놓았고.

나는 그 하얀 똥들을 피곤한 눈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대한민국 남자라면 설렐 수밖에 없는 날.

바로 군 제대날이었다.


'그나저나 아직도 눈이 많이 오네, 어디쯤 오셨으려나?'


부모님은 이른 새벽부터 5시간 거리를 운전해 오신다고 하셨다.

그냥 버스를 타고 가도 됐겠지만, 굳이 오신다는 것을 만류하지 않았다.

그냥.. 신이 났다.

휴가 때와는 달리 제대날은 편하게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났다.

아니, 그냥 제대날이어서 웃음이 나는 것일지도.


잠시 후, 제대 신고가 시작됐다.


"병장 성시우, 제대 신고합니다!"


이른 시간에 시작된 신고는 눈 깜짝할 새에 순식간에 끝이 났고.

나는 막사를 지나 부대 정문으로 향했다.


"시우 형! 나가면 연락할게요! 그때 술 한 잔 해요!"

"아 조기전역 진짜 개 부럽네, 나도 휴가 좀 아낄 걸.."


정문까지 따라나와 배웅하는 후임과 동기들.

그들의 목소리에는 시원섭섭한 감정이 묻어났다.


"그래, 다들 나오면 연락하고. 남은 군생활 파이팅 있게 좆뱅이까라~"


농담 섞인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정문을 나섰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부대원들이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괜히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근데 어디까지 오신 거지? 분명히 먼저 도착해서 기다린다고 하셨는데..'


내가 있던 부대는 바다를 앞에 두고 뒤로는 산을 끼고 있는 시골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해안가라 그런지 자대에서 보낸 두 번의 겨울은 항상 폭설에 길이 얼 정도로 혹독했다.

게다가 길이 험하고 버스 배차 간격도 길어서 휴가 한 번 나가려면 제법 고생이었다.

부모님이 오신다고 했을 때 만류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아, 차라리 상황실 안에서 기다릴 걸.. 괜히 나와서.'


섣부르게 나온 걸 후회하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추위에 어느새 붉어진 손으로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 전화를 받지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곧바로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아, 뭐야.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 제대일인데..'


재차 전화를 걸어봤지만 수화기 너머로는 같은 안내 음성만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기다리길 30분.

뼈가 시리는 추위에 어디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부대 근방에는 그럴만한 곳이 없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차라리 자대 안에서 기다려도 되는지 한 번 물어나 봐야겠다.'


나는 외투 주머니 속 차가워진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 지이잉, 지이잉.


전화를 알리는 진동.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화였다.


하지만 발신번호는 부모님의 것이 아닌, 제대 직전까지 전문하사 지원을 집요하게 권유하던 중대장님의 번호였다.

전화하려던 참에 먼저 연락이 오다니,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신보안, 병장 성시우입니다."

"어.. 시우야. 너 지금 어디냐?"


평소 장난기 넘치던 중대장님의 목소리가 왠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아직 자대 앞에서 부모님을 기다리는 중인데 추워서 동사할 것 같습니다. 혹시 자대 안에서 대기해도 되겠습니까?"


장난기 섞인 내 대답에 중대장님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무거운 한숨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시우야.. 먼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돼서 유감이다. 방금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부모님이.."


분명 수화기에서는 중대장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거O서 OOO고 데려O 줄.."


말이 뭉개져서 들린다.

동시에 시야는 점점 거멓게 물들어 간다.


그렇게 나는 잠에서 깼다.


* * *


잠에서 깨어나자 눈에 들어온 건 쓰레기로 가득 차 발 디딜 틈 없는 방이었다.


".. 씨발."


한동안 꾸지 않던 꿈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을 거라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그 기억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는 모양이다.


고개를 돌려 낮은 선반을 바라보았다.

쌓여있는 쓰레기들 사이로 한 장의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가 옹기종기 모여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 아빠.."


제대하던 날, 나를 데리러 오시던 부모님의 차가 산길에서 사고를 당했다.

폭설로 얼어붙은 도로가 빙판길이 되어, 차가 미끄러지면서 전복이 된 것.

구급 대원 말로는 가드레일도 있고 절벽도 낮아서 안전벨트만 매고 있었다면 살 수 있었을 텐데, 운이 없었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내 삶은 180도 달라졌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고, 낮에는 방 안에 틀어박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았다.

처음엔 홀로 남은 나를 찾아오며 위로하던 친척들도 사정을 알게 되자 더 이상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친구들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괴로워 연락을 피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과도 멀어졌다.


그렇게 죄책감과 자책감에 시달리며 6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소위 말하는 '폐인'이 되어 있었다.

자살을 시도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시도에서 그쳤다.

꼴에 죽는 건 무서웠으니까.


- 꼬르륵.. 꼬륵.


배에서 영양분을 내놓으라 아우성을 친다.

이제는 살려고 음식을 먹는 나 자신의 역겨움에 토하지는 않게 됐지만, 그래도 아직은 먹는 행위 자체는 힘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없네..'


선반을 열어보니 텅 빈 공간만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이틀 전에 먹은 통조림이 마지막이었다.

이대로 굶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본능적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깔린 새벽, 자동차 라이트만 간간이 지나다니는 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집 앞 횡단보도 맞은편에 있는 슈퍼가 눈에 들어왔다.


"..."


나는 슈퍼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후드티를 주워 입었다.

탁자 위에 놓인 까맣게 때 낀 마스크도 집어 썼다.

부모님 사고 이후 대인 기피증이 생겨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밖에 나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세탁하지 않아 냄새나는 후드티와 때 묻은 마스크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통조림만.. 사서 들어오는 거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음식을 사러 나가는 자신에게 다시 한번 역겨움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혹시나 사람을 마주칠까 곯은 몸을 이끌고 조심조심 건물 밖을 나섰다.


"후.."


늦은 새벽이라 그런가 다행히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부터 식은땀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밖으로 나오자 더욱 강하게 치밀어 오르는 자기혐오 때문인 듯했다.


"빨리.. 빨리.."


건너편의 마트와 신호등을 번갈아보았다.

얼른 신호가 바뀌었으면 했다.

그렇게 안절부절하며 신호를 기다리던 중.


- 찌지직, 찌지지직.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마치 칠판을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에 나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저게.. 뭐지?"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기괴하게 생긴 흰 가면이 흰 허공에 떠 있었다.

이제는 헛것까지 보이는 걸까.

공포와 혼란이 온몸을 휘감았다.


"집.. 집에 가야해.."


통조림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머릿속엔 오직 내 방, 그 좁고 지저분한 공간이 간절했다.


나는 떨리는 다리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리는 순간.


"어..억?"


무언가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횡단보도의 차가운 아스팔트가 등에 맞닿자, 충격으로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끄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왜인지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짓눌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두 눈을 깜빡이며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잠시 후, 어두운 밤하늘 위로 점점 밝아지는 빛이 느껴졌다.

소리를 들어보니 차가 가까워지는 듯했다.


'차라리.. 잘 된 건가.'


몸은 여전히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누워 있다면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하다.


부모님을 떠나보낸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겁이 많아 자살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끝을 맺게 되니 안도감이 든다.


'그곳에 가면.. 부모님을 만날 수 있겠지? 그때는 정말 죄송했다고.. 꼭 말씀드려야겠어.'


그때, 갑자기 내 시야에 그 흰색 가면이 들어왔다.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보았던 그 기괴한 모습 그대로, 가면은 밤하늘을 배경삼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가까이서 보니 가면의 표정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 퍼걱


자동차 바퀴가 내 머리를 짓이기는 감각과 함께, 나는 의식을 잃었다.


* * *


- 오늘 새벽 4시경 관악구의 한 주택가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 사망자는 23세 성 모 씨로, 현장 CCTV와 사고에 연루된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 분석 결과 자살로 추정됩니다.

- 주변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성 씨는 부모님 사망 이후 심각한 우울증을 앓아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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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노인과 문양 24.09.14 6 0 12쪽
12 강한 상대를 이기는 법. 24.09.11 13 0 13쪽
11 변상각 24.09.06 13 0 12쪽
10 주제 모르는 자의 말로 24.09.03 14 1 13쪽
9 시험 시작? 24.08.29 28 1 11쪽
8 수박 파티 24.08.26 24 1 12쪽
7 어머니, 우리 어머니 24.08.23 32 0 12쪽
6 제국으로 24.08.22 30 1 11쪽
5 이별 24.08.20 29 1 14쪽
4 네? 뭐라고요? 24.08.16 37 1 13쪽
3 괴물은 누구? 24.08.14 31 1 13쪽
2 케빈 24.08.13 45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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