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베는 달빛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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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보이맨
작품등록일 :
2024.08.08 16:32
최근연재일 :
2024.09.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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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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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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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케빈

DUMMY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감쌌다.

마치 수면 위에 떠 있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잠시 후, 순간 밝은 빛이 점멸하더니, 곧바로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허억.. 뭐야, 나 살아 있는 건가?


분명 타이어에 머리가 으스러지는 감각을 느꼈는데.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나는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


'대체 어떻게..?'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감.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역겨움.

그 틈에서 피어오르는 일말의 안도감.


이 복잡한 감정 속에서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은 마치 본드로 붙인 듯 무겁게 굳어있었다.


'.. 왜 눈이 안 떠지.. 헉?!’


갑자기 무언가가 내 다리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나는 거꾸로 매달렸고, 곧이어 엉덩이에 따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찰싹, 찰싹.

누군가 내 엉덩이를 반복해서 때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공포감이 엄습한 나는 비명을 질렀다.


"응애!! 응애!!"

"마 델라쿠나다 사쿠마 벨트라도!!"


듣도 보도 못한 외국어가 귓가를 스쳤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뭐, 뭐야?!'


비명을 지른 내 목소리가 이상했다.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내가 낸 목소리는 분명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응애! 응애!!!”


한 번 터진 울음은 왜인지 멈출 수 없었고.

그렇게 비명같은 울음을 터뜨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거꾸로 매달려 있던 내 몸을 무언가가 자세를 바꾸어 부드럽게 감쌌다.

어머니의 품속에 안긴 듯한 포근함.

그 따뜻한 감각에 휩싸여,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케빈, 조심해서 다녀와!”

"네! 얼른 다녀올게요!"

"그래, 엄마가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릴게!"


소년은 손을 흔드는 어머니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숲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번에 먹었던 스튜 맛있던데.'


그는 이틀 전에 먹었던 멧돼지 고기 스튜를 떠올리며 숲으로 발을 내딛었다.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울창한 숲이었지만, 수없이 왕복한 듯 익숙한 발걸음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공터에 자리 잡은 공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소년의 외침에 공방 중앙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케빈! 내가 또 도시락을 잊고 갔구나,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

"마무리 작업 중이세요?"

"그래, 조금 있으면 끝날 것 같아."


사내는 손에 든 망치를 내려놓고 다가와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었다.


"그나저나 케빈, 오늘은 무엇을 배웠느냐?"

"오늘은 어머니께서 역사를 가르쳐 주셨어요!"

"에르델이 역사를?"

"네!"

"어떤 이야기를 듣다 왔고?"


소년은 들고 있던 도시락 통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다섯 왕국 이야기요!"

"음, 다섯 왕국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긴 하지."

"네,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사내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소년이 귀엽다는 듯 씩 웃었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거든, 케빈. 네가 그 이야기를 내게 직접 해다오."

"네, 꼭 그럴게요!"

"하하, 그래. 도시락은 잘 받았으니 얼른 조심해서 돌아가 보거라."

"네, 아버지도 얼른 마무리하시고 오셔야 해요!"


사내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소년 역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방 문을 열고 나갔다.


* * *


아버지께 도시락을 전달한 후, 나는 다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왔던 길을 따라 숲을 가로지르니, 상쾌한 바람이 몸을 스쳤고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햇살이 내 피부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따스한 빛 위로 평온함이 겹쳐지는 듯한 느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 고요한 순간을 만끽했다.


'평화롭네..'


나는 케빈이다.

하지만 또 성시우이기도 하다.

다중인격 같은 그런 시시한 것이 아니다.

성시우로 죽은 뒤 곧바로 케빈의 몸으로 태어난 거니까.


그래, 나는 환생했다.

놀랍게도 전생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로 말이다.

정확히는, 성시우의 마지막 순간과 케빈의 첫 기억이 하나의 필름처럼 이어져 있다.

지구의 여러 종교에서는 환생 시 전생의 기억을 잊고 새 삶을 시작한다고 했는데...

내 경우는 다른 모양이다.


그리고 환생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바로 지구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아스트라 대륙'이라 불리는 이 거대한 떵덩어리에는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모든 것들이 존재했다.

하나의 제국과 다섯 왕국,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이종족과 몬스터까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현실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끄아~"


깊게 숨을 들이쉬고 기지개를 폈다.

온몸의 근육이 쭉 펴지는 느낌이 좋았다.


"그럼 다시 가볼까."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빠르게 스치는 숲 속 주변 풍경을 보며 시원한 바람에 상쾌함을 느끼던 그때.


"윽!"


갑자기 날카로운 통증이 종아리를 관통했다.

나는 급하게 발걸음을 멈추고 종아리를 살폈다.

얕지 않은 상처가 나 있었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어떻게 저걸 못 봤지."


뒤돌아보니 유독 삐죽 튀어나온 뾰족한 나뭇가지 끝에 붉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어머니가 속상해하실 텐데.."


조심해서 다녀오라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고.

상처를 보고 안타까워하실 어머니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끙.. 어쩔 수 없네.“


나는 상처입은 종아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어서 원래대로 돌아오라는 생각과 함께, 손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직선을 그었다.


"으으윽.."


역시, 이 힘을 쓰면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잠깐일 테니까.


잠시후, 강렬했던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피를 흘리던 종아리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끔해져 있었다.


나는 원래대로 돌아온 종아리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아무런 통증도, 불편함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흘린 피는 여전히 다리에 말라붙어 있었고, 어머니가 이것을 보면 상처가 없어도 깜짝 놀라실 게 분명했다.


"분명 저쪽에.. 아!"


우측의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눈에 익은 작은 개울이 보였다.

이곳을 오가며 몇 번 본 적 있는 곳이었다.


나는 재빨리 개울가로 다가가 차가운 물로 다리를 씻어냈다.

시원한 물이 피부에 닿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됐다."


다리를 털어 물기를 털어낸 후, 다시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주변을 더욱 주의 깊게 살피며 발걸음을 옮겼고.

잠시 후, 집앞에 도착하자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멧돼지 고기 스튜다!'


이틀 전 스튜를 먹으면서 이식일찬(二食一讚: 두 입을 먹을 때마다 한 번씩 칭찬함)했던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기분 좋게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어요!"


보통 이렇게 외치면 어머니의 대답이 돌아와야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를 반긴 건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닌 낯익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여~ 케빈."


회백색의 머리카락.

창백할 정도의 흰 피부.

그리고 그와는 대조적인 능글맞은 말투.

하나뿐인 삼촌 마크였다.


"마크 삼촌?!"


이 양반이 왜 집 안에 있단 말인가?

밖에서 마차는 못 본 것 같은데..


"마차는 저~기 뒷마당에 세워놨어, 오늘은 자고 갈 예정이라."

"아.."


언제나 느끼지만.. 역시 눈치 하나는 끝내준다.

아니, 눈치라기 보다는 독심술에 가까울..


"떠돌이 보부상으로 입에 풀칠 하려면 이 정도 눈치는 기본이지."


말을 말자.


마크와 말을 주고 받던 그때, 부엌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빈, 다녀왔니?"

"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으면 손발부터 씻어야지~ 마크 씨도 이제 부엌으로 오세요. 음식 다 됐어요."


나는 마크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얼른 가보라는 듯 턱짓을 하더니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서둘러 화장실로 갔다.


아까부터 부엌에서 풍겨오는 스튜 냄새에 배가 꼬르륵거리고 있었기에,서둘러 손과 발을 빠르게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잠시 후, 준비를 마친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테이블에는 마크가 앉아있었고, 어머니는 스튜를 그릇에 옮겨담고 계셨다.

나는 마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곧바로 마크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수님, 요즘 케빈 말 잘 안 듣는다면서요?”

”에엑?“


마크의 말에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처음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어머니가 무언가 깨달은 듯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바뀌더니 말씀하셨다.


"마크 씨도 참... 케빈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제가 곤란해지잖아요."


음, 분명 나를 놀리려는 마크의 수작에 어머니께서 동참하신 상황이다.

이에 원래라면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쳤겠지만, 지금의 나는 10살 꼬맹이다.

그럼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에요, 삼촌! 제가 얼마나 엄마 말을 잘 듣는데요!“

”확실해? 내가 들은 바로는 아닌 것 같던데?“

”아, 진짠데!”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자 어머니와 마크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케빈, 그렇게 삐치지 마. 장난이야."

"그래, 케빈. 네가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엄마가 제일 잘 알지."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삐쭉 내밀었던 입술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마크가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진짜.. 가끔 이렇게 와서 우리 조카 놀리는 게 내 유일한 낙이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마크의 손에서 벗어났다.


"아, 삼촌."

"하하, 알았어, 안 할게."


마크는 손을 거두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케빈, 형님이 언제쯤 오신다고 이야기는 안 해주셨어?"

"네, 근데 제가 갔을 때 마무리를 하고 계셨어요."

"그럼 조금 걸리시겠네. 뭐, 형님 작품은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지. 밖에는 형님의 작품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줄을 서 있으니까."


마크의 말이 맞았다.

아버지의 작품은 정말 뛰어났다. 주로 검을 든 검사를 조각하셨는데,

유려한 근육의 굴곡과 그 위에 섬세하게 표현된 힘줄.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과 갑옷의 정교한 무늬까지.

나무로 만든 조각상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세밀한 표현이 돋보였다.


창밖을 보던 마크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밖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케빈. 아직도 밖에 나가는 게 좀 힘들어?"


그의 말에 나는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환생한 지 어언 1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내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성시우 시절의 마지막 6개월이 여전히 망령처럼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

그래서인지 숲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마주하는 일은 아직도 버거웠다.


심지어 부모님과 마크조차 처음엔 눈을 마주치기 힘겹지 않았던가?

지금의 관계는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네, 아직은 조금 힘든 거 같아요."

"아.. 음.. 그렇구나. 하긴, 집이 최고지. 나가긴 어딜 나가. 우리 떠돌이 보부상들 사이에선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이 있거든. 그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 횡성수설대는 마크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핫.. 그렇죠?"

"그럼, 당연하지. 집만한 곳이 어디있겠어."


내 말에 대답한 건 마크가 아닌, 양손에 스튜가 담긴 그릇을 들고 오신 어머니였다.


"다들 식기 전에 얼른 먹어요."


어머니는 테이블에 그릇을 내려놓으시고는 내 옆자리에 앉으셨다.


"형수님은 안 드십니까?"

"저는 그이가 오면 함께 먹으려고요. 먼저 드세요."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을 드는 것으로 식사가 시작됐다.


"형수님, 여기에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역시 엄마의 스튜는 최고예요."


예상대로 어머니의 요리 실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마크와 나는 연신 찬사를 보냈다.

잠시 후, 우리의 칭찬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듯 그릇에 넉넉하게 담겼던 스튜는 금세 바닥을 보였다.


"형수님, 정말 잘 먹었습니다."


먼저 식사를 마친 마크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아직 식사를 하고 있는 내게 눈을 돌렸다.


"케빈?"

"느, 슴츤"

"다 먹고 나면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 번 확인해 볼까?"


나는 입안 가득 씹고 있던 고기 조각을 삼키며 말했다.


".. 곧 아버지가 오시지 않을까요?"

"하하, 다 먹고 와. 뒷마당에서 기다릴게."


내 의견은 애초에 들을 생각이 없었던 걸까.

마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를 돌리며 뒷마당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내 시선은 자연스레 뒷마당 가는 길 입구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작은 목검으로 향했다.


'아, 소화할 시간은 좀 주지.'


이러다 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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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노인과 문양 24.09.14 6 0 12쪽
12 강한 상대를 이기는 법. 24.09.11 13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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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주제 모르는 자의 말로 24.09.03 13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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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수박 파티 24.08.26 23 1 12쪽
7 어머니, 우리 어머니 24.08.23 31 0 12쪽
6 제국으로 24.08.22 30 1 11쪽
5 이별 24.08.20 28 1 14쪽
4 네? 뭐라고요? 24.08.16 36 1 13쪽
3 괴물은 누구? 24.08.14 30 1 13쪽
» 케빈 24.08.13 45 1 13쪽
1 프롤로그 24.08.09 68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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