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파 무한회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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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개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8.17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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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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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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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마지막 시작

DUMMY

아. 이번에도 실패했다.

다시. 다시. 다시.

다시 시작하자.

처음부터, 다시.


***


무하(無閜)는 눈을 떴다.


“······?”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익숙한 천장이 아니라, 오색빛깔로 물든 하늘이었다.

무하는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자신은 분명 숨이 끊어졌다. 그렇다면 다시 열다섯 살의 여름으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처소에서 눈을 떴어야 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꽃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고, 무지갯빛 구름이 사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오셨는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퍼득 몸을 돌리자, 흰 수염을 기른 인자한 표정의 노인이 그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무하는 그를 향해 포권을 하려다가, 한쪽 팔이 잘려 없는 것을 뒤늦게 인지하고 멈칫했다.

노인은 끌끌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떤가. 이번 생은 그럭저럭 만족스럽지 않았나?”

“만족이라 하셨습니까?”

“자네가 원수로 여겼던 그 마두를 결국 꺾어내지 않았는가. 그대는 결국 중원을 구해냈고, 그 무재는 이제 하늘에 닿아 가히 무신의 반열에 올랐다 할만하네.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진 다 이루었을진대,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단 말인가?”

“제가 무엇을 이루었단 말씀입니까?”


무하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그 안에는 형형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보기 흉한 흉터와 얼룩 가득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가 구하고 싶었던 것은 오직 저의 사문, 무당파의 안녕뿐이었습니다. 그 마두를 제 손으로 죽일 수만 있다면, 무당의 영화(榮華)는 계속되리라 여겼습니다.”

“한데?”

“하지만 돌아온 것은, 더한 굴욕이 아닙니까?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웠던 정파의, 구파일방의 배신으로 몰락하다니. 이것이 감히 정(正)을 표방하는 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일입니까?”


사람의 삶은 단 한 번만 살 수 있기에 일생(一生)인 것인데, 무하는 지금 자신이 몇 번째 삶을 살고 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무학에 재능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어, 그저 사문 안에서 도경을 연구하는 평범한 도인의 길을 걸었던 첫 번째 생.

그 생에서의 무당은, 어느 날 갑작스레 발호한 마교와 맞서 싸우다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멸문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죽어갔던 그 순간이 지독한 한이 되었기 때문인지. 숨이 끊어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무하는 열다섯 살의 여름으로 되돌아가 눈을 떴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무하는 그날부터 미친 듯이 무공을 연마하고, 수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재능의 차이는 그리 쉽게 매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공에 대한 이론과 심결은 어떻게든 통달할 수 있었으나, 그 성취는 항상 더뎠다.

그래도 첫 번째 생보다는 그럭저럭 사문의 인정을 받아, 두 번째 생에서는 전장에 나가 사형제들과 함께 싸우다 전사할 수 있었다.

무하는 그것만으로도 첫 번째 생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았노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바로 세 번째 생이 시작되며, 무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생을 살아갈 즈음엔 피로와 혼란이 간절함을 앞섰다.

삶을 거듭 반복할수록 무하의 성장세는 차츰 가팔라졌고, 어떤 삶에선 강호의 영웅이, 어떤 삶에선 천하제일인이 되기도 했다. 또 어떤 삶에선 파문당하고, 어떤 삶에선 무림공적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삶에선 주화입마에 빠져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생을 더 반복한 뒤, 무하는 더 이상 세상 그 무엇에도 의미를 두지 못할 만큼 마음이 닳고 닳아버렸다.

자신이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처음 자신의 목숨을 이 땅 위에 붙들어 두었던 그 막막한 절망은 어떤 느낌이었는지,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무당파의 온존과 완전한 안녕. 집념에 가까운 그 하나의 목표뿐이었다.


“허면, 자네는 무엇을 원하는가?”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띤 채 무하를 응시했다.


“자네는 역천의 존재를 베었고, 인세의 수많은 목숨들을 살려내었네. 자네의 깨달음이 옅지 않으니, 이대로 상천하면 선계에 들어 신선이······. 아니, 자네라면 신장(神將)이 될 수도 있을 걸세.”

“그렇습니까.”

“그런데도 자네는 다시 가려는가? 다시 한번 이 세상의 흐름을 거역하고, 자네 역시 역천의 존재가 되어 저 고통뿐인 인세로 내려갈 것인가?”


무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무하를 바라보던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시 다녀오시게나. 건승을 빌겠네.”


사위를 둘러싸고 있던 구름이 스멀스멀 밀려오며 무하를 감쌌다.

서서히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하는 그제서야 노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았다.

마치 갓난아이처럼 맑은 눈빛과 빛을 발하는 듯 밝은 안색이, 참으로 신비롭고 보기 좋은 노인이었다.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허허허! 그게 이제서야 궁금하던가? 나는 그저 태상노군의 말씀을 전하러 온 이름 없는 필부일 뿐이니 신경 쓸 것 없네.”


구름으로 완전히 시야가 가려지고, 노인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하나 이것만은 기억해 두게. 자네는 이미 세상의 흐름을 너무도 많이 거슬렀어. 자네의 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업이 쌓였단 말이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네······.”


***


무하는 눈을 떴다.


“······.”


이번에는 제대로 익숙한 천장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곳 무당산에 세워진 모든 처소들을 통틀어 가장 외딴곳에 세워진 낡은 처소.

무하의 스승 역시 무학에는 조금의 재능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첫 번째 생에서 무하와 그의 사형제들은 평생을 이 낡고 외진 처소에서 살아갔다.

그땐 별다른 불만이 없었지만······.


‘아니. 이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고······. 일단 생각부터 정리해 보자.’


기억이 흐려지기 전, 무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낯선 노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했지.’


무엇이 마지막이라는 지는 뻔했다. 아마도 이 영문 모를 반복이 드디어 끝난다는 뜻이리라.

무하는 두려움이나 막막함보다, 홀가분함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달리기가 드디어 끝나고, 가까스로 도착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그럼, 이번 생에서 해야 할 것은······.’


천마와의 결전은 더 이상 걱정되지 않았다. 그를 죽이는 것은 이미 한 번 해보았으니까.

이미 한 번 도달했던 경지에 올라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어쩌면 이번엔 그보다도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니, 싸움 자체는 더욱 쉬워질지도 모른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마교대전이 끝난 뒤에 찾아올 지난한 분열과 지지부진한 눈치싸움이다.

마교와의 결전은 모든 힘을 쏟아부으며 임해야 하는 처절한 싸움이기에, 합심한 구파일방의 견제와 방해를 견뎌낼 만한 여력을 남길 수 없을 테니까.


“무당을 천하제일문으로.”


무하는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직 앳된 자신의 목소리가 익숙한지 낯선지 헷갈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권모술수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무당파를 명실상부한 천하제일문으로 올려놓는 것.

이번에는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볼 요량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무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을 정리하고, 침의를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구석에서 사용한 흔적도 거의 없는 목검을 꺼내어 허리춤에 찼다.

그의 모든 생은 언제나 다사다난하고 다양하게 뻗어나갔지만, 이 열다섯 여름의 첫날만큼은 항상 똑같이 반복됐다.

아마도 이제 곧······.


“야, 무하! 당장 튀어나와!”


무하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 창문 밖에서 잔뜩 성난 아이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무하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무당파 삼대제자의 무복을 입은 몇몇 아이들이 잔뜩 몰려와 씩씩대며 창문을 포위하듯 지키고 서 있었다.

무하는 그들을 천천히 훑어본 뒤, 지금껏 수십 번 반복했던 대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왜?”


무하의 덤덤한 대꾸에 당황한 아이들이 멈칫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만 조금 부라려도 흠칫거리며 움츠러들던 녀석이, 갑자기 당당하게 나오니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죽음조차 불사하는 흉포한 광신도들과 전장에서 뒤엉켜 뒹굴던 기억이 생생한 무하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투기는 장난조차 되지 못했다.


“왜, 왜라니! 너, 어제 빨래를 도대체 어떻게 해놓은 거야? 너 때문에 괜히 나만 사부님께 혼났잖아!”

“빨래?”


이제 와 새삼스럽게 얼굴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들이 누구인지, 이다음엔 무슨 말이 이어질지, 모조리 외우고 있었으므로.

좌측부터 차례대로 무영, 무호, 무현.

개중 가운데 서 있는 무호는 무자배 중에서도 가장 무재가 두드러지는 제자였고, 훗날 무당제일검이 되네 마네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인재였다.


“왜 모르는 척이야? 우리 사부님의 장포 말이야, 내가 깨끗하게 빨아놓으라고 시켰잖아! 그런데 그거 하나를 못 해서.”


무당파에 입문한 삼대제자, 특히 아직 약관이 되지 않은 어린 제자들의 일과는 대부분 사부나 사숙들의 수발로 채워져 있다.

식사를 차려 올리고, 처소를 쓸고 닦고, 옷가지를 빨고, 심부름을 한다.

그렇게 스승을 공경하는 마음과 태도를 뼛속 깊이 새기면서, 기본공을 수련하며 기초를 다진다.


그러나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그런 허드렛일을 하기보다, 목검 휘두르고 저들끼리 와와 몰려다니며 노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무호를 필두로 한 몇몇 아이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무하에게 자주 떠넘겼고, 언제나 주눅 들어 있던 어린 무하는 감히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른들은 자신의 제자가 당하는 일이 아니기에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서도 모른척했고, 무하의 사부는 그들에게 항의하기엔 힘이 없었다.

무하의 어린 시절은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찬물에 손을 담그는 기억으로 가득했다.

그것이 한이 되어, 첫 생의 무하는 나이를 먹고 제자를 받은 뒤에도 아이에게 차마 허드렛일을 시키지 못했다.


“그럼 사숙께 그렇게 말씀드리지 그랬어. 그 빨래는 네가 한 게 아니라 무하가 한 것이니, 무하를 잡아다 혼내시라고.”

“뭐, 뭐?”


하지만 그것도 다 옛말.

무하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당황한 아이들이 입을 쩍 벌린 채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눈조차 제대로 못 마주치던 반푼이가 갑자기 왜 이렇게 당당히 군단 말인가? 뭘 잘못 주워 처먹었기에?


“할 말은 그게 다야? 그럼 나는 이만 가봐도 될까? 사부님 방을 청소해야 해서.”

“야, 너······!”


무하가 창문을 닫으려 하자, 무호가 당황하여 소리를 빽 내질렀다.

고작 무하 따위를 상대하며 당황씩이나 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무호는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으르렁거렸다.


“너. 당장 따라와. 얌전히 따라오지 않으면 앞으로 남은 평생 후회할 줄 알아. 네 발로 하산하고 싶게 만들어 줄 테니까.”

“······.”


무하는 세 사람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대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봐야 삼대제자 애송이들이······.’


지금은 몸도 무공도 무엇 하나 준비되지 않은 백지상태였지만, 고작 이런 아이들에게 애를 먹을 무하가 아니었다.

다만 사문 안에서 저들을 때려눕혔다가 다른 어른들에게 들키기라도 했다간 곤란해질 터였으므로, 지금은 저들을 도발하여 밖으로 유인할 필요가 있었다.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무하의 태도에, 세 사람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알았어. 기다려.”


무하는 짧게 대답한 뒤 탁 소리가 나도록 창문을 닫았다.


‘저 녀석들의 방해로 고생깨나 했던 적이 많았지.’


무하가 자신들의 경쟁자조차 되지 않을 때에는 그저 어설픈 괴롭힘으로 끝나고 말지만, 무하가 두각을 드러내고 당당한 무당파의 제자로 인정받는 그 순간부턴 저 악의가 모두 지난한 견제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지난 몇몇 생에서, 무하는 저들의 견제와 방해 공작에 떠밀려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심할 때에는 누명을 쓰고 파문을 당하거나, 하지도 않은 잘못으로 몇 년씩이나 참회동에 갇힐 때도 있었다.


‘비무대회 전까지 우선 서열 정리를······. 이 짓을 또 해야 하는군.’


무하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몇몇 행사들의 순서를 속으로 복기하며, 처소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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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실수 (2) 24.09.14 95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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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동호의 작은 영웅 24.09.12 106 2 11쪽
20 동호에서 (4) 24.09.11 118 1 14쪽
19 동호에서 (3) 24.09.10 106 3 14쪽
18 동호에서 (2) 24.09.09 132 4 13쪽
17 동호에서 24.09.08 142 3 13쪽
16 무한으로 (4) 24.09.07 138 5 14쪽
15 무한으로 (3) 24.09.06 131 5 14쪽
14 무한으로 (2) 24.09.05 134 5 14쪽
13 무한으로 24.09.04 166 5 14쪽
12 연습은 미리미리 24.09.03 164 3 13쪽
11 금와상단 (3) 24.09.02 159 4 16쪽
10 금와상단 (2) 24.09.01 159 5 13쪽
9 금와상단 24.08.31 189 4 15쪽
8 극현검(2) 24.08.30 191 5 15쪽
7 극현검 24.08.29 195 4 13쪽
6 무극동 24.08.28 202 4 15쪽
5 비무회(2) 24.08.27 200 4 14쪽
4 비무회 24.08.26 200 4 15쪽
3 사부님 24.08.25 215 6 12쪽
2 우선은 심공부터 +2 24.08.24 249 6 14쪽
» 마지막 시작 +1 24.08.23 339 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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