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천의 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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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eloukor
작품등록일 :
2024.08.19 21:30
최근연재일 :
2024.09.1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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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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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1. 우리는 그냥 포수임다.

DUMMY

함경도의 겨울이 사납기 짝이 없다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밤새 내린 눈이 포근하게 쌓이고 바람 한 점 없이 맑은 날, 오늘 같은 날은 추위는커녕 오히려 따뜻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사시가 지날 무렵 포수 박설은 사냥을 마치고 마을의 유일한 양반 양 생원, 제일 나이가 많은 장 노인과 함께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일 건장한 설이 사슴을 어깨에 들쳐메고, 양 생원은 토끼나 꿩 같은 작은 사냥감을 허리에 차고, 장 노인은 자신과 설의 조총을 들고 앞장서서 걸었다.


“오랜만에 괴기 맛 함 보겠습구마. 매양 짠지만 처먹었는데 인제 며칠으느 아이 먹겠슴다.”(오랜만에 고기 맛 한 번 보겠습니다. 매번 짠지만 먹었는데 이제 며칠은 안 먹어도 되겠네요.)


설의 신난 목소리에 장 노인은 피식 웃더니 입에 문 빈 곰방대를 빼며 말했다.


“설이 니 실력 많이 늘었디. 넷날마 가마히 서 있는 여스두 잡지 못하더니 즈쯤은 사심도 잡고.”(설이 너 실력 많이 늘었다. 예전엔 가만히 선 여우도 못 잡더니 이젠 사슴도 잡고.)

“무시기 소리르 또 그리함둥? 내 날 때부터 조총은 잘 쏘았소!”(무슨 소리를 또 그리 하십니까? 저 날때부터 조총은 잘 쐈다고요.)


신이 난 설은 사슴을 멘 어깨를 으스대며 말했다.


“오늘 사심으 잡았는디, 내일 호랭이르 못 잡을까.”(오늘 사슴을 잡았는데 내일은 호랑이도 못 잡을까.)

“아서라, 미치개 소리 그만하라.”(아서라, 미친 소리 그만해라.)

“글티. 그러다 창귀 되도 모르오.”


셋은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걸어갔다. 설은 돌아가자마자 사슴을 해체하고 고기를 잘라다가 다리를 통째로 구워 먹을 생각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산길을 지나가려는데, 어쩌다 가장 앞에 있던 장 노인이 멈춰섰다. 그는 한순간에 진중한 표정이 되어 나무 사이 아래쪽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먹잇감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재빠르게 앞으로 엄폐하며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설이, 생원 나리. 다 내려놓고 어시래 오라. 소리 죽이고.”(설이, 생원 나리. 다 내려놓고 얼른 오시오. 소리 내지 말고.)


설과 양 생원은 서로 잠깐 바라보곤 이내 장 노인의 말대로 사냥감을 내려놓고 노인의 옆에 가까이 붙었다. 양 생원이 활을 꺼내는 동안 장 노인은 들고 있던 조총 한 자루를 설에게 건넸다. 설은 조총을 받으며 기이한 광경에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거, 저거 되놈 아임둥?”(저거 청나라놈 아닙니까?)

“되놈만이 아이다. 저놈 보라. 저거 왜놈이다.”(청나라놈만 있는 게 아냐. 저놈 봐라. 저거 일본놈이다.)


그 말에 양 생원은 숨을 삼켰다.


“왜놈과 되놈이 한 자리에서 드잡이질으 아이 한다니?”(일본놈과 청나라놈이 한데 모여서 안 싸운다고?)

“그런데 조선 사름은 왜 같이 있슴까?”


세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일본 갑주를 갖춘 사람 뒤로 군졸이 다섯이었는데, 한 명은 제대로 된 두정갑을 입고 있어 무관으로 보였다. 그런데 조선 군졸은 그 무관이 아니라 일본 갑주를 입은 사람을 장수로 따르는 모양이었다. 앞에는 말을 타고 하얀 청나라식 갑옷을 입은 오랑캐가 있었고 그 뒤에는 청나라 병졸이 있었다. 이 기이한 광경을 보며 셋은 조총과 활로 두 오랑캐를 쏴야 할지, 아니면 그저 지켜봐야만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어찌함둥?”(어쩝니까?)

“일단 두고 보깁소.”(일단 두고 봅시다.)

“설이. 불.”


설이 팔에 매고 있던 화승을 살펴보았다. 불은 어느새 꺼져있었고 그 모습을 본 장 노인이 자기 화승을 건넸다. 노인의 노끈은 아직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설이 다급하게 화승에 입김을 불며 불씨를 살리는 동안 장 노인과 양 생원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시기라 하오?”(무어라 하오?)

“‘이 근처에 있다.’라는디.”

“무시기가?”(무엇이?)


그러는 동안 설은 빠르게 화승에 불을 붙이고 용두에 끼웠다. 그가 장 노인에게 불붙은 화승을 건네주며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그 순간, 그는 왜인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인의 깊고 깊은 검은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설은 숨을 크게 삼키며 얼어붙었다. 무언가 잘못됨을 느낀 장 노인이 재빠르게 설을 눈 바닥에 처박듯 끌어내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누구냐!”

“저기다!”


셋을 본 사람은 왜인만이 아니었는지, 조선 군졸과 청나라 병졸 모두 무기를 꺼내 들며 세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소리쳤다. 병졸들이 산을 타기 시작하자 몸을 숙인 셋은 서로 바라보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일났구마. 이제 어이함 둏슴까?”(큰일났구먼. 이제 어떡하면 좋습니까?)

“장전으느?”

“못 했슴다.”


장 노인이 양 생원을 돌아보았으나 양 생원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사실 들킨 순간부터 방법이라고는 없었다. 설령 두 사람의 조총이 미리 장전되어 있었더라도, 그리고 양 생원의 화살이 수십 개는 있었더라도 열은 되는 적을 쏴 죽이고 살아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 노인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방법이 없다. 도망가자.”


그러나 셋이 도망치려고 일어섰을 때는 이미 갑주 입은 왜인과 조선인 군관, 그리고 병졸들이 득달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셋을 둘러싸고 무기를 빼앗았다.

왜인은 허리춤에 찬 칼을 금방이라도 뽑을 듯이 잡고 설을 노려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게다가 얼굴을 가리는 면구 때문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추측할 수도 없었다.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이 왜인의 다음 행동에 달려있었다. 두정갑 입은 군관은 설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왜인에게 말했다.


“우리가 찾는 족속이 아니다.”


셋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군관을 바라보았다. 대치가 이어지자 설이 용기를 짜내 말했다.


“그, 봐주웁소. 우리는 그냥 포수임다.”


설은 턱짓으로 바닥에 내팽개친 사슴을 가리켰다. 사슴을 본 왜인이 다가와 군관에게 무어라 속삭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에게 물었다.


“뭐 하는 놈이냐? 정체가 뭐냐고.”

“말했듯이 포수임다! 포수! 짐승 잡는 포수!”


옆에 있던 양 생원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허리에 매달린 꿩과 토끼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군관이 설의 멱살을 잡았다.


“그럼 화승에 불을 붙인 연유가 무엇이냐? 우리를 쏘려고 한 것이 아니고서야!”

“아, 아니 그······.”


설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장 노인이 대신 대답했다.


“이봅서! 나으리가 잡은 아는 임진년에 클아바니 잃고 병자년에 아바니 잃은 아요! 나도 또 병자년에 심양으로 끌려간 적이 있소. 저런 되놈한테 잡혀서 말이디! 나으리도 조선 사름이면 오랑캐 니매에다 총 아이 쏘고 싶소?”(이보시오! 나으리가 잡은 아이는 임진년에 할아버지 잃고 병자년에 아버지 잃은 아이요! 나도 또 병자년에 심양에 끌려간 적이 있소. 저 청나라놈한테 잡혀서 말이지! 나으리도 조선 사람이면 오랑캐 이마에 총 안 쏘고 싶소?)


그 말에 설의 멱살을 잡은 군관도 차마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거칠게 설을 밀뿐이었다. 군관은 왜인의 눈치를 보았으나 정작 왜인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대신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군관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셋을 보며 말했다.


“너희, 기이한 무공을 쓰는 한인 무리를 못 보았느냐?”

“무, 무시기 소리임까?”

“말 그대로다. 기이한 무공! 날아다니고, 도술 같은 걸 쓰고 말이다!”

“도술?”


그때였다. 아래쪽, 청나라군이 있던 곳에서 기이한 바람 소리가 일더니 이내 청나라 병졸의 높은 비명이 들렸다. 그러더니 말이 울어대고는 이내 청나라군이 이래라저래라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그들을 구하러 갈 기회는 없었다.

여섯 명의 괴한이 왜인과 군졸들 앞에 착지하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수괴로 보이는 무사는 갑옷은 없고 회색 누비옷과 한족식 상투 차림에 청나라 칼도 명나라 칼도 아닌 구식 양날 한검을 들고 있었는데, 경박하게 칼을 휘휘 돌리더니 이내 왜인을 겨누며 검결지를 지었다.


“이거 참 재밌군. 아무리 해동의 무학이 끊긴 지 오래됐다지만, 아예 왜구를 데려다가 싸우라 내보낼 줄이야.”


왜인은 아무런 대답 없이 허리춤에서 천천히 왜검을 우아하게 뽑고 괴한에게 칼끝을 겨누었다. 다섯 군졸 역시 똑같이 투구를 고쳐 쓰고, 팔다리를 풀고는 왜검을 쳐들었다. 별 반응이 없자 한인 무사는 고개를 한번 까딱이고는 씩 웃어 보였다.


“대명이 다시 서기 위한 일이니 너희도 이 ‘검선’의 칼을 순순히 받아들여라. 쳐라!”


괴한들이 각자 검, 도, 창 따위의 무기를 쳐들고 날렵하게 달려들었다. 왜인과 조선군은 대열을 갖추고 상대의 공격을 받아냈다. 순식간에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내지르는 기합으로 산이 울렸다.

평생 한 번 보기도 쉽지 않은 생경한 광경이 순식간에 연달아 벌어지니 설 일행은 엉거주춤 주저앉으며 난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설은 눈밭에 머리를 박으며 기도했다.


“아이고, 공자님, 맹자님,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문수보살님······.”

“이, 이제 어쩌면 좋소!”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의 양 생원이 엎드리며 물었다. 다들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지금이 도망칠 절호의 기회일 터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괜한 오해를 사서 먼저 공격당하거나 아예 인질로 잡힐 수도 있었다.

설은 고개를 들어 싸우는 이들을 보았다. 한검을 든 무사, 검선이 놀라운 속도로 몰아치며 화려하게 움직이는 것과 반대로 왜인은 정적으로, 번잡한 움직임 없이 무시무시한 공격을 쳐내며 반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순간의 틈이 보이자 왜인이 칼을 번개처럼 빠르게 내질렀고, 검선은 몸을 크게 돌리며 가까스로 칼날을 피했다. 설은 눈을 돌려 다른 이들을 보았다. 진형은 어느새 무너졌고 다들 어지러이 서서 각자 적을 맡아 싸우고 있었다. 창을 든 무사는 창을 휘휘 돌리며 군졸의 시선을 빼앗더니 재빨리 창을 내질렀다. 군졸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굴이 찔리며 절명했다. 한편 유엽도를 든 무사는 힘을 실어 크게 칼을 휘두르는데, 조선 군졸이 왜검을 휘둘러 유엽도를 쳐내고 재빠르게 몸을 베니 이내 피를 뿜으며 비틀대다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때 설의 눈에 자기 조총이 보였다. 설은 눈치를 조금 보다가 이내 조총을 향해 기어갔다.


“설이 니 뭐하니!”


설은 조총을 쥐고서는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얼른 도망가읍소! 얼른!”


장 노인은 양 생원을 일으키고 비틀대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설은 먼저 팔에 묶은 화승에 입김을 호호 불었다. 천만다행으로 화승의 끝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죽어가던 불씨가 되살아났다. 하늘이 돕는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설은 가슴팍에 손을 가져가 화약통을 들었다. 그는 화약을 넣으면서 다시 앞을 보았다.

검선은 옆에 있던 동료의 허벅지를 밟고 날아오르더니 왜인을 향해 칼을 내려쳤다. 왜인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격을 막고는 코등이로 걷어내고 칼을 휘두르며 일어섰다. 무사는 다시 땅을 박차며 찌르기를 시도했고 왜인은 옆으로 움직이며 피했다. 무사가 칼을 가로로 휘둘러 왜인을 후려쳤으나 왜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 갑옷으로 칼날을 받아내고는 다시 자세를 잡고 반격을 시작했다.

설은 다시 자기 조총으로 시선을 옮겼다. 먼저 총알과 종이를 총구에 넣고, 삭장을 쑤셔 넣고는 바닥에 총을 여러 번 찧었다. 세심하게 누르고 다져야 한다는 건 알지만 지금은 그런 번잡한 짓을 할 시간이 없었다. 간단하게 다지기를 끝낸 설은 화문을 열고 화약을 부으며 앞을 보았다.

군졸 하나가 팔이 잘려나가며 크게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한족 무사 한 명도 역시 칼날에 목이 꿰뚫리며 비명을 달리했다. 싸움은 점점 절정으로 달하고 있었다. 그때 여자로 보이는 한족 무사 하나가 장 노인과 양 생원을 향해 날 듯이 가볍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양 생원이 다급하게 ‘살려주웁소, 살려주웁소!’하고 소리쳤고 이어 악 비명을 질렀다.


“새, 생원 나리! 큰아바니!”


설의 다급한 목소리에 왜인은 손가락을 비명이 들린 곳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쫓아가라! 우리 백성을 지켜라!”


그 목소리에 두 명의 군졸이 양 생원과 장 노인을 구하러 달려갔다. 백성을 지키라는 왜인의 목소리는 어딘가 높고 가늘었다.

쓰러진 군졸이 둘, 이탈한 군졸이 둘. 왜인과 설의 멱살을 잡았던 군관이 검선과 일행 셋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때 왜인이 설을 돌아보며 외쳤다.


“공께서는 우릴 도와주십시오!”


왜인은 능숙한 조선말로 외쳤다. 그 순간 검선이 왜인에게 덤벼들었다. 왜인은 공격을 피하고는 칼을 잡으며 유술로 무사를 뒤집어 쓰러트렸다. 검선은 바닥에 손을 짚으며 간단히 몸을 뒤집어 왜인의 뒤로 돌아갔다. 그 순간, 검선과 설의 두 눈이 마주쳤다.

설은 미처 장전을 끝내지 못한 조총으로 검선을 겨누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달려온 그가 발차기를 날려 총을 걷어내고는 두 손가락으로 설의 목덜미와 가슴팍을 찔렀다. 설은 순식간에 메스꺼움을 느끼며 무너져내렸다. 왜인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다른 적을 상대하느라 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무사는 오만하게 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북방에 사는 조선인은 기골이 장대하다는 말이 사실이군. 건장한 게 노비로 써먹으면 딱 좋겠어.”


중국말을 모르는 설은 무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알아들었어도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있지도 않았겠지만.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해동무림맹의 일원이 되어 대명의 부활에 일조하는 영광을 곧 누리게 해주마.“


검선은 한검으로 설의 머리를 툭 치고는 뒤돌았다. 한편 왜인은 군관과 함께 등을 맞대고 적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창을 든 한족 무사는 조금 전 군졸을 죽일 때처럼 창을 빙글빙글 돌리며 눈을 현혹하다 찌르기를 반복했다. 왜인은 처음엔 피하고, 두 번째는 쳐내더니, 가슴팍으로 날아온 세 번째 찌르기에는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창끝이 왜인의 흉갑에 콱 박히는가 싶더니, 그가 살짝 몸을 비틀자 창날이 그대로 갑옷을 타고 미끄러졌다. 왜인은 재빠르게 칼을 휘둘러 창대를 잘랐다. 그리고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왼손으로 칼날을 잡으며 무사의 어깻죽지에 칼끝을 박았다. 창 든 무사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자 검선이 바로 왜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는 동안 설은 힘겹게 숨을 토해내려 애를 썼다. 설은 부들대는 손을 힘겹게 움직여 자기 가슴팍을 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째로 가슴을 치는 순간 설은 앞으로 숙이며 구토를 쏟아냈다. 아침에 먹은 게 거의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설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모든 공격을 쳐내던 왜인도 이제는 지쳤는지 비틀대고 있었다. 검선은 그러나 아무런 피로도 없어 보였다. 검선은 한 번 더 검을 돌리면서 칼끝을 겨누고 검결지를 지었다. 검선은 그 검을 내지르는 듯 손을 뻗다가, 갑작스레 칼끝을 눈밭에 처박았다. 그러더니 강하게 칼을 위로 휘두르며 흙과 눈덩이를 왜인의 얼굴로 뿌렸다. 반사적으로 왜인이 고개를 돌리며 움찔했다.

설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조총에 손을 뻗었다. 그는 용두에서 빠진 화승을 다시 물리고는 조총을 겨누었다. 검선은 설이 일어난 것을 모르는 듯 왜인의 목덜미를 향해 칼을 뻗는 중이었다. 설은 재빠르게 화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용두가 화문을 향해 고개를 처박자 화약이 연기를 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를 날카롭게 찌르는, 매캐한 냄새가 퍼졌다. 이윽고 화약이 큰 빛을 발했다. 그리고 터지는 천둥과도 같은 소리.

조총이 불을 뿜자 동시에 검선이 놀라운 속도로 팔을 돌려 한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한검이 두 동강 나며 부러진 칼날이 설의 앞으로 날아왔다. 검선은 그대로 멈춰섰다. 이윽고 끔찍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그의 입, 아니, 목에서 피와 함께 흘러나왔다. 그의 손에서 부러진 한검이 힘없이 떨어지고, 검선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비틀거리며 설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하얀 눈밭이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천지를 뒤흔드는 총성에 철편 든 무사는 얼어붙었고 군관은 그 틈에 무사를 붙잡아 바닥에 쓰러트리고는 그대로 가슴팍에 칼날을 찔러넣으며 싸움을 끝냈다. 그 광경을 본, 상처만 입고 아직 살아있던 무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빠른 속도로 도망쳤다.

왜인은 도망치는 적을 쫓지 않았다. 그는 칼등을 한번 가볍게 치고 칼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무릎에 손을 얹고 상체를 숙였다. 조선군관 역시 투구 끈을 풀고 내팽개치듯 벗어던지며 날숨을 크게 뱉었다. 얼마 뒤에 양 생원과 장 노인을 구하러 간 군졸들이 상처 입은 둘을 부축하며 왜인에게로 돌아왔고, 그 모습에 설은 안도하며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었다.

몸을 숙였던 왜인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가 투구를 벗으니 말려있던 땋은 머리가 모락모락 김을 내며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인은 손으로 얼굴을 한 번 훑고는 무관을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왜인은 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단아한 용모와 갸름한 뺨, 수염 자국 하나 없는 입가와 턱. 설은 왜인의 얼굴에서 격렬히 싸우던 모습을 전혀 연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넋을 잃고 바라보는 설에게 그, 아니 그녀는 다가와서는 허리를 숙였다.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옅게 미소지으며 설에게 손을 뻗었다.


”소인은 소씨 가문의 파랑이라고 합니다. 공께서는?“

”거, 희한한 이름입꾸마. 쇤네는 박설임다.“


설은 파랑의 조그마한, 하지만 강인한 손을 잡으며 일어섰다.


작가의말

사시(巳時): 09:00~11:00시

어시래: 얼른

클아바니, 큰아바니: 할아버지

사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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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 어명이오! NEW 16시간 전 10 0 14쪽
25 25. 온성 싸움 다 끝났슴다. 24.09.16 13 1 15쪽
24 24. 그래, 큰일을 했지. 24.09.13 17 1 13쪽
23 23. 그대의 희생을 기억하겠다. 24.09.12 21 4 15쪽
22 22. 절대 살려 보내지 말라우. 24.09.11 24 4 14쪽
21 21. 만호 나리가 위험함둥. 24.09.10 24 4 18쪽
20 20. 칼에는 눈이 없으니, 원망치 말지어다. 24.09.09 24 4 15쪽
19 19. 자기연민에 빠진 그 새끼들만의 감상 24.09.06 26 4 15쪽
18 18.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1 24.09.05 33 4 14쪽
17 17. 우리가 공을 믿을 수 있습니까? 24.09.04 28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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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5. 깨어나셨네요. +1 24.09.02 33 5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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