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천의 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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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eloukor
작품등록일 :
2024.08.1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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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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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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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8. 이제 님재도 체탐군이야!

DUMMY

진시가 되자 파랑은 관아 출입구 앞에 섰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기침이 나왔다. 두꺼운 누비 철릭에다가 남바위와 볼끼로 완전무장했음에도 추위로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육진의 겨울은 참으로 냉혹했다. 하지만 파랑은 추위에 떨고 훌쩍이면서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대문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서성대며 추위를 떨쳐내던 그녀에게 홍 만호가 다가왔다. 파랑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홍 만호는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시간 됐다. 문 열라우.”


파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빗장을 풀고 문을 열었다. 관아 대문 앞에는 헌칠한 사내가 쪼그려 앉아있었다. 파랑이 기다렸던 그 사람, 설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설이 고개를 돌렸다. 그와 파랑의 눈이 마주쳤다. 빨갛게 물든 파랑의 얼굴이 더 붉어지지는 않았다. 설은 몸을 일으키고는 파랑에게, 그리고 뒤에 있던 홍 만호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홍 만호는 그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 설의 두꺼운 솜옷은 빛바랜 잿빛이었는데 군데군데 덧댄 자국이 있었다. 그 위에는 대나무 화약통을 담은 허리띠를 둘렀고, 어깨에는 가죽끈을 엮은 조총을 맸다. 두 손은 많은 육진 사람이 그렇듯이 팔짱을 끼듯 소매에 넣었다. 완벽했다. 하나만 제외하고.

홍 만호는 설에게 부족한 하나를,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전립을 건넸다.


“마지막으로 묻갓어.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하면서도 녹봉은 쥐새끼 불알만큼 받는 두만강 체탐군에 들어오간?”


설은 대답 대신 전립을 받으며 머리에 걸쳤다. 낡은 전립에서 옅은 피비린내가 흘러나왔다. 홍 만호는 미소지으며 설의 어깨를 툭 쳤다.


“잘 왔다.”


홍 만호는 뒤돌아 안으로 향했다. 말없이 옆에 있던 파랑은 깊게 숨을 내뱉었다. 하얗게 얼어붙은 숨결이 후욱 튀어나왔다. 그녀는 설의 팔을 툭툭 건드리며 빨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곧 다른 분들이 올 겁니다.”

“아, 알겠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문 바깥에서 수많은 발걸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각자 무장을 챙긴 체탐군 병졸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무질서하게 관아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던 그들은 나란히 선 설과 파랑을 보자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들어오는 와중에 삼동이와 석남이가 설과 마주쳤다. 둘은 파랑에게 인사하고는 설을 툭 치면서 말했다.


“한 서방 벙거지 썼구마.”


석남이는 전립을 올려 쓰면서 말했다. 묘하게 슬퍼 보이는 눈빛이었다.


“한 서방 되놈 말 잘하구 칼두 잘 썻디. 궈래이가 한 서방 몫꺼지 해야 해.”

“잘할 거야. 파랑이 눈에 들었으므 보통내기 아니디.”


파랑을 돌아보니 그녀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슬쩍 돌렸다. 설 역시 얼굴이 화끈해지는 감각에 공연히 얼굴을 문질렀다. 그 모습에 체탐군 병졸 하나가 외쳤다.


“칼잽이두 선스나 앞에선 그저 안깐이구마!”


그 농담에 병졸들은 다들 크게 웃었다.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홍 만호도 웃음을 터트렸다. 설과 파랑 두 사람만 웃지 못하고 멋쩍은 표정만 지었다.

그렇게 하나 둘 체탐군이 관아 안으로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심 종사가 들어왔다. 수수하지만 멋들어진 철릭을 입고 꿩 깃털을 단 갓을 쓴 모습은 허리에 찬 왜검이 아니었더라면 무관이 아니라 선비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심 종사는 홍 만호에게 묵례하고 입을 열었다.


“분부대로 파발을 띄워 육진 곳곳에 방을 붙이도록 했습니다.”

“장계는?”

“종성 행영에 올렸고, 조정에도 올렸습니다.”

“잘했네.”


심 종사는 파랑과 설을 돌아보았다. 심 종사는 파랑이 허리 숙여 인사하자 묵례하며 받았다. 그리고 설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체탐군에 들어온 것이냐?”

“예.”


심 종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멱살을 잡은 건 내 사과하겠다.”

“일없슴다.”


설은 심 종사의 언행에서 그와 자신 사이에는 절대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고 느꼈다. 설이 아는 양반이라고는 양 생원 하나뿐이었는데, 두 사람이 같은 양반이라 생각하니 어색하고, 기이하기까지 했다.

심 종사는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열을 이루고 선 병졸들에게로 향했다. 그의 호령과 함께 떠들썩하던 병졸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병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대로 자세를 갖추고는 앞을 보았다. 그때 홍 만호는 멍청하게 서 있는 설을 돌아보며 불벼락 같은 호통을 쳤다.


“이제 님재도 체탐군이야! 당장 열에 서라!”


설은 깜짝 놀라서는 급하게 대열에 합류했다. 그가 대열 맨 뒤에 서자 심 종사는 목청을 한 번 가다듬고 점고를 시작했다. 체탐군 만호 홍영록, 체탐군 종사관 심경응. 다음부터는 온갖 다채로운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성씨가 없는 천출의 이름도 많았다. 파랑과 심 종사를 처음 만났을 때 눈 덮인 산길에서 보았던 왜검수의 이름도, 청나라 상인을 형신할 때 옆에 있었던 세 사람의 이름도 불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심 종사가 설을 보고는 말했다.


“조총수 박설.”

“예.”


설은 점고가 다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파랑의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파랑을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심 종사가 파랑의 이름을 불렀다.


“소파랑.”

“네.”


파랑이 대답했다. 설은 그녀가 관직이 있어서 체탐군을 따라다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심 종사는 홍 만호를 돌아보았다.


“전부 모였습니다, 나리.”

“좋다. 심 종사, 님재는 어제 하던 형신을 마저 하라우. 나머지는 강변 따라 순찰을 한다. 내 서쪽으로 가고, 파랑은 동쪽으로 경원 방향 따라서 간다. 다들 준비하라.”


홍 만호의 말에 체탐군은 쩌렁쩌렁한 소리로 대답했다. 어느새 창을 열고 체탐군을 바라보고 있던 온성부사는 그들의 군율 잡힌 모습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각자 무장을 갖추는 가운데, 심 종사는 설을 불렀다. 당연히 통역 역이었다. 그 뒤로 심 종사는 이름을 셋 정도 더 부르고는 호명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심 종사가 신문을 준비하라 명하니 각자 알아서 거적을 깔고 안 쓰고 남은 기왓조각을 한곳에 모아왔다.

그렇게 준비를 다 마치는 가운데, 갑자기 요란한 청나라 말과 함께 대문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얼마간의 실랑이 끝에 대문을 열라는 조선말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홍 만호와 온성부사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열어주게.”


온성부사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손짓했다. 관아의 나졸들이 빗장을 열고 문을 열어주자, 청나라인 여럿이 관아 안으로 들어왔다. 청나라인들이 당당한 자세로 으스대는 꼴이 퍽 우스웠다. 맨 앞에서 특유의 밥그릇 모양 관모를 쓰고 하얀 청나라식 두정갑을 입은 무사들을 이끄는 청나라인은 다름 아닌 어선이었다. 거만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꼿꼿이 서서 들어와 온성부사와 체탐군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체탐군 역시 날 선 눈으로 대응했다.

잠깐의 서슬 퍼런 대립은 온성부사가 어선 일행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났다. 온성부사가 과할 정도로 반가운 척을 하며 먼저 인사를 건네니, 어선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온성부사에게 인사했다. 설은 마을에서 보았던 어선의 모습을 떠올렸다. 잡초처럼 사방으로 억세고 마구잡이로 자라난 머리와 지저분했던 수염을 말끔히 정리한 모습은 오히려 우스웠다.


“그래, 야 대인께서는 무슨 연유로 오셨소이까?”


온성부사의 물음에 어선은 홍 만호를 슬쩍 돌아보고는 다시 청나라 역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청나라 사람이 온성에 하옥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소. 그들을 데리러 왔소이다.”


역관의 입을 통해 어선의 말을 듣자 홍 만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는 노기 띤 얼굴을 하며 어선에게 다가가 으르렁거렸다.


“그 쳐죽일 종간나새끼들은 우리 백성을 잡아다 팔아먹으려 했다. 그런 씹어먹을 놈들을 감히 너이가 데려가겠다는 말이네?”


홍 만호의 말을 역관을 통해 들은 어선의 얼굴에서 조금씩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질수록 홍 만호의 얼굴은 반대로 점점 분노로 일그러져갔다. 어선은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칭 구룬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다이칭 구룬의 백성을 구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너희이가 잡아간 우리 백성에게도 그렇게 말해보라우.”

“네놈들이 멍청해서 치른 대가인데, 왜 우리 탓을 하지? 조선 놈들은 이래서 문제야. 항상 남 탓이나 하지.”


홍 만호의 손이 점점 칼자루로 향했다. 그의 손길을 본 청나라 병사들 역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청나라 병사의 움직임을 본 파랑과 심 종사 역시 칼자루에 손을 댔고, 체탐군은 각자 무기에 힘을 꽉 쥐며 어선 일행을 노려보았다. 어선은 홍 만호의 손을 보고는 말했다.


“감히 다이칭 구룬의 신하를 향해 칼부림을 할 생각이냐?”

“다음에 꺼낼 말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기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되놈 새끼야.”


어선은 비웃으며 조선말로 말했다.


“입만 살아서는.”


두 장수가 대치하는 온성 관아는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듯 위태로웠다. 이윽고 홍 만호의 손이 칼에 닿았다. 어선과 홍 만호의 눈이 마주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칼자루에 매달린 띠돈이 동시에 핑그르르 돌았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모두 각자의 무기를 뽑았다.


“영록이!”


홍 만호의 오른손이 칼자루를 쥐는 그 순간 온성부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온성부사는 홍 만호를 보며 말했다.


“손님 앞에서 이 무슨 망신인가, 홍 만호!”


온성부사는 짐짓 훈계하는 어투로, 그러나 홍 만호를 달래는 눈빛으로 말했다. 홍 만호는 칼을 뽑지 못하고는 어선과 청나라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어선 역시 칼을 뽑지는 않았지만, 뒤에서는 팔기군 무사들이 칼을 손에 쥐고는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치가 이어졌다. 모두가 모두를 노려보았고 모두가 모두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왜검을 든 심 종사가 말했다.


“안타깝지만, 저 오랑캐 놈을 죽이면 필시 후환이 따를 겁니다.”

“사실 지금도 후환을 걱정해야겠지만요.”


잠깐의 침묵 끝에 결국 홍 만호가 먼저 손을 놓았다. 오른손이 칼자루에서 멀어지자 띠돈이 다시 돌아갔다. 홍 만호가 두 손을 들고 뒤로 조금씩 물러서니 어선 역시 칼자루에서 손을 떼고 허리를 폈다. 병졸들도 하나둘씩 무기를 거두었다.

어선은 한 번 목청을 가다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일을 황부섭정왕께 전한다면 너희 모두 목이 잘릴 것이다. 하지만 우린 같이 힘을 합쳐 싸워야 할 적이 있으니, 큰 아량을 베풀도록 하마.”


역관의 말을 들은 온성부사는 억지로 웃으며 어선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역시 대인께서는 배포가 크시구려! 다음엔 이런 일이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걸세. 홍 만호에게도 단단히 일러두겠네.”


온성부사는 홍 만호를 돌아보았다. 그가 재촉하니 홍 만호는 한숨을 길게 쉬고는 어선에게 허리를 숙였다. 동시에 체탐군 병졸들은 코웃음을 치거나 일부러 큰 소리가 나게 가래침을 뱉어댔다.

홍 만호는 심 종사에게 말했다.


“심 종사. 되놈들을 인계하라우. 도호부사 나리 도와서 손님 대접도 해드리고.”

“분부 받들겠습니다.”


심 종사는 어선 일행을 한 번 노려보고는 옥으로 향했다. 그리고 홍 만호는 체탐군 병졸들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계획이 바뀌었다. 파랑 님재는 아새끼들 반절 데리고 두만강 강변 따라 동쪽으로 순찰을 나가라우. 나머지 절반은 내하고 서쪽으로 가디.”

“알겠습니다.”


심 종사가 먼저 자신을 도울 병졸 둘을 뽑았다. 그러자 파랑이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큰 목소리로 그녀를 따라갈 병졸을 호명했다. 당연하게도, 설의 이름이 불렸다.

파랑에게 호명된 병졸들은 관아 무기고 앞으로 모였다. 파랑이 먼저 주섬주섬 갑주를 갖추기 시작했다. 체탐군 병졸들은 익숙하게 파랑의 옆에서 갑옷의 각 부위를 순서대로 건네주었다. 절그럭대는 소리와 함께 조선식 철릭 위로 일본식 당세구족이 착착 올라가는 모습은 묘했다. 그렇게 갑주를 갖추며 파랑이 말했다.


“두만강을 순찰할 겁니다. 강변을 따라가면서 미전진에 들르고, 다음에 황척파보로 갑시다.”


설은 잠깐이나마 토병으로 입번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하는 일이라고는 조총이나 활을 들고 파수처에 서서 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는지 온종일 감시하다가, 새벽 오경이 되면 강변을 따라 순찰하는 것이 전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나날이었다. 진절머리 날 정도로 싫어했던 파수역을 다시, 그것도 자청해서 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설이 그렇게 과거 회상에 젖어있던 동안 파랑은 투구와 면구를 제외한 한 벌의 갑주를 완전하게 차려입었다. 검푸른 당세구족은 은은하게 윤이 났다. 파랑은 면구를 얼굴에 썼다. 그리고는 아무 장식도 없는 투구를 쓰고 끈을 조이며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허리춤에 두 자루의 왜검을 찼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랬듯이, 파랑은 다시금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뽐내었다.


“고마워요. 여러분도 이제 무장하세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체탐군은 각자 가져온 무구를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투구와 함께 엄심갑이니 지갑이니 찰갑이니 하는 갑옷을 걸친 병졸이 있는가 하면 설처럼 갑옷은커녕 투구도 없이 두꺼운 누비옷이나 장옷에 벙거지 하나 걸친 병졸도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병졸은 전립 한 번 똑바로 쓰고는 무기를 살펴볼 뿐이었다.

갖춘 게 조총 한 자루밖에 없는 설 역시 쪼그려 앉아 화승에 불을 붙이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스산하게 부는 바람에 불씨가 잘 붙지 않았다. 그렇게 구시렁대며 부시를 긁어대는데, 그 앞에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파랑이 설 앞에 서 있었다.

설이 일어서니, 그녀는 두 손으로 환도를 설에게 건넸다.


“이번엔 저한테 휘두르지 마세요. 알겠습니까?”


자기 딴에는 농담으로 한 소리였겠지만, 무시무시한 모습의 면구를 쓴 채 그런 말을 하니 오히려 일종의 경고로 들렸다. 설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살짝 긴장한 모습으로 칼을 받아들었다. 설은 주춤대다 허리띠에 적당히 칼을 쑤셔 끼웠다. 그러자 파랑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설에게 면구 아래의 미소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부산스레 무장을 끝마치고, 체탐군은 다시 열을 지어 섰다. 파랑은 체탐군 병졸들을 한 번 쓱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랑을 앞에 두고 여덟 명의 체탐군은 관아 대문 앞에 섰다.

그렇게 관아를 나서려는데, 문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요란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소리에 홍 만호와 파랑 일행이 대문을 열었다. 소란을 피우던 사람은 다름 아닌 회령댁이었다.


“형수님?”


설의 목소리에 회령댁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설을 보고, 체탐군 병졸을 보고, 파랑을 보고는 홍 만호의 두정갑을 붙들었다.


“나, 나두 가갯소! 나두 박 도령처럼 체탐군 시켜주오!”

“아, 아이 그, 그만하압소. 그만!”


다른 마을 사람이 회령댁을 붙들며 말리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회령댁은 어딘가 홀린 듯 빛바랜 눈으로 토해내듯 말하고 있었다.


“내 칼 휘두르고 활 당기고 총 쏘고 다 할 수 있소!”


그러더니 대뜸 파랑을 손찌검하며 말을 내뱉었다.


“저 왜년도 잘만 칼 들고 놈들으르 써는데 왜 내 못한다느 말이오!”


졸지에 왜년 소리를 들은 파랑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허리춤에 손을 짚었다. 홍 만호는 파랑에게 손을 내밀며 진정시키고는 회령댁을,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회령댁은 미치광이처럼 계속 말을 뱉어냈다.


“그놈들. 내 남편으르 목 잘라서 죽였소! 내 손에 있던 모든 게, 다 빼앗겼소! 내 이리 살지 못하오! 이 손으로 보복하지 않으문 제명에 죽지 못하오!”


회령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홍 만호는 그녀의 눈물 젖은 눈동자를 말없이 계속 뚫어지도록 노려보았다. 이내 홍 만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설의 눈동자에서 보았던 그 타오름을, 그 불꽃을 홍 만호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도 찾아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부인, 하나 묻갓어. 체탐군 일이래 보통 힘든 일이 아이다. 중간에 힘들다고 때려치울 수도 없고, 언제 죽을지도 몰라. 그래도 체탐군 하겠소?”

“예!”


그러자 홍 만호는 옆으로 비키며 관아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그러자 회령댁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이내 홍 만호의 손을 잡고 흔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을 고맙다고 반복하는 회령댁을 달랜 끝에 안으로 보낸 홍 만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고 애미나이 성질머리하고는. 함경도 애미나이 성질 더럽다더니 진짜였구먼기래.”


그러고는 파랑을 돌아보았다.


“괜찮나? 고저 개소리니끼니, 너무 괘념치 말라.”

“괜찮습니다.”

“기래, 다행이군. 이제 미전진으로 가디? 살아서 돌아오라우.”


파랑은 홍 만호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뒤에 있던 체탐군 병졸들 역시 따라서 고개를 숙이고는 파랑을 따라 관아를 나섰다. 체탐군은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며 두만강으로 향했다.


작가의말

진시: 0700~090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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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 어명이오! NEW 16시간 전 10 0 14쪽
25 25. 온성 싸움 다 끝났슴다. 24.09.16 13 1 15쪽
24 24. 그래, 큰일을 했지. 24.09.13 17 1 13쪽
23 23. 그대의 희생을 기억하겠다. 24.09.12 21 4 15쪽
22 22. 절대 살려 보내지 말라우. 24.09.11 24 4 14쪽
21 21. 만호 나리가 위험함둥. 24.09.10 24 4 18쪽
20 20. 칼에는 눈이 없으니, 원망치 말지어다. 24.09.09 24 4 15쪽
19 19. 자기연민에 빠진 그 새끼들만의 감상 24.09.06 26 4 15쪽
18 18.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1 24.09.05 33 4 14쪽
17 17. 우리가 공을 믿을 수 있습니까? 24.09.04 28 5 13쪽
16 16. 다시, 다시 하세요. 다시. 24.09.03 29 5 14쪽
15 15. 깨어나셨네요. +1 24.09.02 33 5 14쪽
14 14. 저 하늘과도 같은 힘으로 24.08.30 32 5 14쪽
13 13. 최대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줘. 24.08.29 32 5 14쪽
12 12. 내 구해야 할 사름이 있소. +1 24.08.28 35 5 15쪽
11 11. 우린 너희 손에 죽은 내 나라와 사형제의 복수를 하러 온 거야. 24.08.27 41 5 16쪽
10 10. 산동 태산의 제자 '적수련' 24.08.26 43 5 15쪽
9 9. 조선말 쓰구 조선 깃발 아래서 싸우문 조선 사름이오. 24.08.25 48 5 15쪽
» 8. 이제 님재도 체탐군이야! 24.08.24 53 5 18쪽
7 7. 똑바로 대답을 안 하면 앉은뱅이 병신이 되기 전까지 관아 문을 못 나간다. 24.08.23 55 5 14쪽
6 6. 하늘은 우리 편이 아이야. 24.08.22 57 5 13쪽
5 5. 조선은 두 번 다시 패하지 않는다! 24.08.21 60 6 14쪽
4 4. 죽음을 각오했다. 24.08.21 63 6 15쪽
3 3. 그 칼잡이 따라가문 니도 이 나라께 잡아먹히는 거다. 24.08.20 67 6 19쪽
2 2. 놈들은 한때 '무림맹'이라 불렸지. +1 24.08.19 87 6 15쪽
1 1. 우리는 그냥 포수임다. 24.08.19 130 9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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