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벽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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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좋아
작품등록일 :
2024.08.25 14:54
최근연재일 :
2024.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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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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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대질서(大秩序)

DUMMY

창정로는 여느 때처럼 화신 후보에게 교리와 예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엄격하게 진행한 결과 화신 후보는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자신이 실수하면 고치게 되었고 그런 실수마저 점차 없어졌다. 화신 후보의 기품은 날로 더해갔다.


급한 일이 있어도 뛰지 않았다.

걷는다고 해도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친한 이를 만나도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면 비파 연주로 반겼다.

연회가 있으면 스스로 일어나지 않았다.

말을 거는 사람이 있으면 환대하지만, 절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거절의 의사 표시는 미소와 손짓을 동반한 채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다른 열도나 대륙에서 온 이에게는 부적 태운 물을 먹인 뒤 대화했다.

함께 춤을 추고자 하는 요청은 거절해선 안 되었다.


화신 후보가 이 모든 예법을 익히고 어기지 않자 창정로는 그의 앞에서 무릎 꿇고 존대했다. 화신 후보가 당황하며 창정로를 일으키려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창정로가 말했다.


“저는 가르침을 마치고 절을 올렸습니다. 다른 교육자들에게도 모두 절을 받는다면 그때는 화신 후보가 아니라 화신 그 자체로 여겨지실 겁니다. 절을 올린다는 것은 인정의 의미이지요.”


“아, 하지만 저는 아직 모자랍니다.”


“저는 이미 절을 올리고 교육을 마쳤으니 더 이상 존대하지 마십시오. 지축국의 모든 천축누각은 신을 모시기 위한 당신의 집입니다. 또한 이곳의 관료들은 전부 사제이기도 합니다. 사제는 신의 종입니다. 종에게 높임말을 쓰는 주인이 어디 있단 말씀입니까?”


창정로는 천마의 화신에게 옥팔찌를 채웠고 다리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방울을 달았다. 화신 후보는 이 징표를 모든 교육자로부터 받아야 했으나 단 한 명의 인정만으로도 화신 후보는 화신이 되었고 걸을 때마다 들리는 방울 소리가 화신의 행차를 알렸다. 그러니 예법에 따라 경박하게 뜀박질하지 않으며 조심스레 걷는 화신은 어디를 가도 방울 소리를 듣고 화신에게 예를 차리고 있는 관료와 다른 수도자들을 볼 수 있었다. 창정로가 절차에 따라 말했다.


“위대하신 창조주이자 지축국의 주인이시여, 이곳은 당신의 호령 열도입니다. 모두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경배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은하존자께서 제물이 될 이들 중에 선발하신 여덟 명의 전사 중 네 명이 천마님을 시중들고 경호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결정경 이상의 강자이며 실력이 좋아 은하존자께서 선발한 이들입니다.”


“아... 그렇구나.”


“만약 천마님께서 이 열도를 벗어나려 하신다거나 어디에 숨으려고 하신다면 불경스럽게도 그 전사들이 천마님을 올바른 윤회의 길로 올려놓을 것입니다.”


“...알겠다. 그런데 만약 도망에 성공하면 어떻게 되느냐?”


“경호에 실패한 네 명의 전사 중에서 화신을 선발하겠지요. 경호에 성공한다면 제물이 되지 않고 살아갈 기회를 얻습니다. 그러니 더욱더 철저하게 경호할 것입니다.”


“......그래, 알았다. 지금까지 예법을 가르쳐주느라 고생이 많았으니 오늘은 이만 나가서 쉬거라.”


“황송하옵니다.”


화신 후보에서 화신이 된 묵염은 그제야 무언가 실감이라도 난 듯이 경호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부터 허공만 주시하고 있었다. 창정로는 그런 묵염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채로 뒷걸음질 쳐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고는 일 층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젠가 금민이 알려주었던 금민의 가게가 있었다.


천축누각의 관료들은 기본적으로 금제에 걸려 있고 대질서의 운영도 맡지만, 대질서 때가 아니라면 천축누각에서 정식으로 관료를 정도 문파에 배정하는 파견 의뢰만 하면 되었다. 이 파견 의뢰도 한 사람이 계속 맡는 게 아니라 돌아가면서 하므로 관료들에게 시간은 넘쳐났다. 천축누각에서 관료들을 대상으로 매달 급여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일 층에서 다양한 가게를 열고 공연을 하거나 물건 파는 일을 하는 관료들이 많았으나 생계를 위한 일은 아니었고 대다수의 관료는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는 걸 우아하다고 여겼다. 그러니 금민이 자신의 가게를 차리고 그곳에서 범인들을 부려 술과 음식을 나르게 한 뒤 자신은 무대 위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타인에게 금민의 일은 그저 금민의 별난 취미에 불과했다. 금민은 무대 위에서 攏(롱: 손가락으로 현을 누르는 기법), 撚(연: 손가락으로 현을 비비는 기법), 抹(말: 아래로 마음껏 퉁기는 기법), 挑(조: 반대로 뜯는 기법)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비파행(琵琶行: 백거이가 지은 칠언의 시)의 일부를 읊조렸다.


大絃嘈嘈如急雨(대현조조여급우)

굵은 줄 두둥 울리니 소낙비 같고


小絃切切如私語(소현절절여사어)

가는 줄 절절하니 속삭이는 듯하네.


嘈嘈切切錯雜彈(조조절절착잡탄)

두둥거림과 절절함 섞어서 타니


大珠小珠落玉盤(대주소주락옥반)

큰 구슬과 작은 구슬 옥쟁반에 떨어지는 듯


間關鶯語花底滑(간관앵어화저활)

꾀꼴꾀꼴 노랫소리 꽃 아래서 매끄럽게 흐르다가


幽咽泉流水下灘(유열천류수하탄)

얼음 아래 샘물이 목메어 흐느끼는 듯


水泉冷澁絃凝絶(수천냉삽현응절)

얼음물이 차갑게 얼어붙어 현이 엉겨 끊어지니


凝絶不通聲暫歇(응절불통성잠헐)

끊겨 통하지 않음에 소리 잠시 그쳤다네.


別有幽愁暗恨生(별유유수암한생)

따로 그윽한 시름 있어 남모르는 한(恨)이 생겨나니


此時無聲勝有聲(차시무성승유성)

이때의 소리 없음이 소리 있는 것보다 낫다네.


銀甁乍破水漿迸(은병사파수장병)

은병이 갑자기 깨져 담겼던 물 쏟아지듯


鐵騎突出刀鎗鳴(철기돌출도쟁명)

철기(鐵騎)가 돌진하여 칼과 창 울리는 듯


曲終抽撥當心畫(곡종추발당심화)

곡이 끝나자 줄을 잡고 그으니


四絃一聲如裂帛(사현일성여열백)

네 줄을 한 번에 긋는 소리 비단을 찢는 듯하네.


東船西舫悄無言(동선서방초무언)

동쪽 배와 서쪽 배는 고요하여 말이 없고


唯見江心秋月白(유견강심추월백)

보이는 건 오직 강물 속 밝은 가을 달뿐


무대는 각광이 비치는 곳까지 진한 녹색 비단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푹신한 이끼 더미에 꽂힌 소나무 관목들과 난초는 무대 위 금민의 주변으로 모여 있는 투구꽃과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금민은 소복단장을 하고서 자색 비단 띠를 두른 자색 짧은 치마에 금실로 자신의 이름이 박힌 검은 저물대를 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채에는 네 개의 은비녀가 꽂혀 있었지만, 머리는 길게 풀어져 있었다. 그녀는 양쪽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늘어트리며 그녀의 노래를 들으러 온 손님들이 보내는 열렬한 구애에 귀를 기울였다. 손님들이 외쳤다.


“천현낭랑의 비파 솜씨는 호령 열도 제일일세!”


금민이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비파는 상고 시대에도 있었다고 하지요. 사마님들께서 모두 즐기시는 악기인데 천축누각의 관료인 제가 당연히 다뤄야지요.”


“언니! 언니는 자색이 제일 잘 어울려요!”


“후후, 고마워요.”


천현낭랑, 금민은 작지 않은 가게에서 남녀노소를 아우르며 범계의 음악을 노래했다. 비파행 다음으로는 장한가(長恨歌: 양귀비를 그리워하는 현종을 그린 노래), 장한가 다음으로는 추천을 받았으나 손님들은 백사가(白蛇歌)를 요청하는 이와 양축가(梁祝歌)를 요청하는 이로 나누어졌다. 창정로가 가게에서 일하는 사내 범인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이보게 나는 금민 사저와 동문인 창정로라고 하는데 누님께 들은 게 있는가?”


“아! 언질을 주셨었습니다. 일에 대해 상담을 원하신다지요.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계실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천현낭랑께서는 공연이 끝나면 그 방으로 가실 겁니다.”


“그나저나 내가 범계에 대해 박식한 편인데 장한가와 비파행은 들어봤어도 백사가와 양축가는 처음 들어봤네. 무슨 노래인가?”


“그건 모르실 만도 합니다. 사생계에서 만들어진 노래이니까요. 다만 배경은 범계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백사가는 천 년을 수행한 백사, 백소정과 인간 허선의 사랑 이야기인 백사전을 기반으로, 양축가는 양산백과 축영대 이야기를 기반으로 합니다.”


“아 그거였나. 내 생각보다도 범계의 문물이 인기가 많군.”


“여기서 나고 자란 분들이야 사생계가 고향이니 관심이 덜하지만, 어릴 적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상태로 구출되어 사생계로 보내졌거나 수행을 통해 머리가 맑아져 어릴 적 기억이 깨어난 경우에는 범계에 관심이 쏠리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어릴 적 기억을 일깨울 정도의 수행이라면 원영경 이상은 되어야 할 텐데?”


“맞습니다. 그래서 더욱 인기가 있지요. 윗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고자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 아닙니까?”


“범인들은 범계에 관심이 있나?”


“환상을 가지는 범인들은 아무래도 많습니다. 사생계에 있는 범인이란 결국 수도자들이 낳고 버린 자식들이니까요. 버림당하지 않았다면 부모가 자신의 동부에다 숨겨놓았겠지요. 기억이 지워져 부모도 모르는 이가 태반입니다. 그러니 어찌 자신이 태어났어야 됐다고 생각되는 범계에 관심이 없겠습니까? 다만 이런 장소에서 일하는 것 말고는 범계의 문물을 접할 만큼의 여유가 없는 까닭도 있습니다. 어떤 천치는 범인이 범계에 가면 영술을 쓸 수 있을거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건...”


“웃긴 소리지요. 초한지나 삼국지를 읽어 천하의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의 면모를 봐도 사생계의 수도자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장에 범계가 영기를 소멸하는 특성만 가지고 있지 않았어도 범계는 원영경 몇 명만 가면 점령되겠지요.”


“범인이 범계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긴 하지 않느냐?”


“영석을 많이 바치면 되지만, 그만큼의 영석을 가지고 있다면 그냥 여기서 사는 게 더 편합니다. 더군다나 범계의 무엇을 안다고 먹고 살 걱정을 새로 한답니까? 나으리께서 저를 범계로 데려가 준다고 하셔도 저는 어떻게 해야 수도자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호의를 거절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할 것입니다.”


“그렇구나. 잘 들었다.”


“어르신으로부터 나으리의 성정을 미리 들었기에 저도 이리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언제 이렇게 수도자에게 속내를 털어보겠습니까? 제가 더 감사합니다.”


“아니다, 나에 대해 좋게 말해준 사저께 내가 감사해야지. 너에게 또한 고맙구나. 좋은 공부가 되었다.”


창정로가 진지한 말로 감사를 표하자, 범인은 잠시 고개를 돌려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느새 방 앞이었다.


“이곳은 어르신께서 잔업을 하는 방입니다. 곧 공연이 끝나니 어르신을 모시고 올 동안 이곳에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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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질서(大秩序) 24.09.08 21 2 15쪽
» 대질서(大秩序) 24.09.04 21 2 11쪽
12 대질서(大秩序) 24.09.02 21 3 12쪽
11 대질서(大秩序) 24.08.28 22 3 17쪽
10 대질서(大秩序) 24.08.25 21 3 16쪽
9 대질서(大秩序) 24.08.25 36 3 13쪽
8 입문(入門) +1 24.08.25 33 5 16쪽
7 입문(入門) +1 24.08.25 27 5 12쪽
6 입문(入門) +1 24.08.25 32 5 11쪽
5 입문(入門) +1 24.08.25 29 5 11쪽
4 입문(入門) +1 24.08.25 33 5 12쪽
3 입문(入門) +1 24.08.25 48 6 12쪽
2 입문(入門) +1 24.08.25 51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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