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벽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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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좋아
작품등록일 :
2024.08.2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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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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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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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대질서(大秩序)

DUMMY

꺼지지 않을 것 같던 태양이 하늘에서 사라지고 달과 별이 대신 자리하는 밤이 찾아오자 수도자들은 대질서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 세상이 죽어가고 있었다. 대질서가 이루어지기에 앞서 대질서에 바쳐질 제물을 선발할 불의 전쟁과 꽃의 전쟁이 필요했다. 전쟁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같았으나 결계와 진법으로 구분되었다. 결계는 물리적으로 두 공간을 나누었고 진법은 이런 물리적인 경계를 참가자들이 느끼지 못하도록 감각을 속여 끝에 닿았다가 방향을 바꾼 것인데 바꾸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이러한 진법과 결계는 모두 구령경인 호령천사가 설계하고 펼친 것으로, 이 열도 안에서는 호령천사의 진법과 결계를 타파할 수단이 없었다. 전쟁터는 남녀로 나뉘고 경지에 따라 또 나뉘었다. 지형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평야 지대로 인공적인 것이었다. 본래대로라면 평야인데다 풀도 없어 시야를 확보하는 일에 어려움이 없어야 했으나 호령천사의 진법이 마치 장서각에서의 그것처럼 어둠 속에 있다가 바로 앞에서 만나야 서로가 보이도록 했다.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던 참가자들은 하나둘씩 마주쳐 신분을 밝힌 뒤 전쟁 감독들을 찾기 시작했다. 참가자가 감독을 찾는 이유는 하나였다.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감독이 철저하게 어둠 속을 감시하다가 결투의 증인이 되어주었다. 창정로도 힘을 쓸 방법을 찾자 축기경들의 불의 전쟁 감독 역할을 맡았다. 성별과 경지로 나뉜 전쟁 하나마다 감독 수백 명이 붙었다.


“사도 화봉파(火鳳派)의 제자 묵염! 도전하겠소!”

“정도 정명종(定命宗)의 제자 진려! 도전을 받아들이겠소!”


사도는 보통 자신들을 문파라 칭했으나 정도는 보통 자신들을 종파라 칭했다. 예외가 있긴 하나, 둘의 차이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질서 이후에 주어지는 자유 속에서 사도는 조금의 간섭도 원하지 않는 자들이었고 정도는 천축누각의 관료가 파견되어 조금 간섭해 주었다. 그러나 이런 간섭마저도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차이는 집단이 오래되면 보였다. 사도는 집단의 규율이 세대가 교체됨에 따라 제멋대로 바뀌었지만, 정도는 지축국에서 파견된 관료에 의해 장문인이 죽고 다른 이가 장문인이 되어도 규율이 변하지 않았다. 규율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처음 조직을 세운 조사뿐이었고 규율을 바꿀 수 있는 때는 오로지 조직을 세우기 직전뿐이었다. 물론 멸문전에는 지축국의 관료가 간섭하지 않았다. 창정로가 둘의 결투를 주관하며 자신에게 지급된 영패를 들어 주변의 어둠이 걷히게 한 뒤 외쳤다.


“상호동의하에 벌어지는 정정당당한 결투이니 여기에 반경 십 리만큼의 어둠을 거두어 시야와 청각을 제공하겠습니다. 제 말이 들리시는 분 중 결투에 참여하고자 하는 분은 앞으로 나와주시고 결투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분은 다시 진법 속으로 들어가 결투 상대를 찾아주십시오.”


화봉파의 위세가 대단한지라 화봉파에 서고자 하는 이가 많았으나 결투는 동수를 맞추어야 했기에 결국은 십오 대 십오가 되었다. 처음 결투를 붙은 둘과 동문인 자들도 있었으나 산문인 자들도 많았다. 산문의 경우 이렇게라도 승리를 챙겨 포로를 사로잡는다면 배경 없이 홀로 전쟁에 참가한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창정로가 결투에 앞서 규칙을 알렸다.


“단체전이니 아군과 싸우고 있는 적군에게 하는 기습은 허용됩니다. 호령천사님의 진법과 선광존자님의 금제가 걸려 있어 여러분은 서로 죽이려고 해도 못 죽이니 걱정하지 말고 온 힘을 다하시면 됩니다. 아군의 과반수가 쓰러지면 도망이 허용되는데 제가 밝힌 공간을 벗어나 진법 속에 다시 들어가면 더 이상 추격해서는 안 됩니다. 특정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조롱이나 모욕은 허락되지 않으며 이를 행할 시 신성한 불의 전쟁을 더럽혔다고 판단하여 제가 공격할 것입니다. 감독관의 공격으로 사망한 자는 제물이 되지 않으며 시체를 훼손한 뒤 불에 태우고 가족이나 속한 문파에게 벌금을 청구할 겁니다.”


창정로가 안내하는 동안 서른 명의 수도자들은 법구나 부적을 만지며 초조함을 달랬다.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잘만 하면 경지를 올리는 일에 필요한 단약이나 강력한 법구를 받을 수 있었다. 좋은 일을 떠올리든 나쁜 일을 떠올리든 긴장할 이유는 충분했다. 창정로가 안내를 끝내고 낮은 목소리로 알렸다.


“준비.”


양측이 전부 순식간에 법구와 부적 등을 꺼내 들었다. 어떤 이들은 요수나 영물, 괴뢰도 꺼내었다. 이 준비 과정에서 괴뢰나 영물이 많은 쪽은 미소를 지었다. 괴뢰나 영물은 축기경이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러한 것을 축기경이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파나 가문의 후원을 뜻했다. 화봉파의 묵염은 허공에 부적들을 펼치고 손에는 부채를 들었다. 정명종의 진려는 수많은 검으로 검진을 펼치고 손에는 금강저(金剛杵)를 들었다.


“시작합니다.”


화봉파의 묵염은 자세를 잡고 기합을 넣더니 일순간에 모든 부적을 불태웠다. 부적들은 화봉파의 문파 영술인 봉화구가 되어 정명종의 진려를 향해 날아갔다. 묵염이 이에 그치지 않고 부채에 영력을 집중한 뒤 휘두르는데 놀랍게도 부채에서 풍인이 되기에는 모자란 바람이 불어 봉화구와 뒤섞이더니 봉화구의 화력이 더욱 강력해졌다. 묵염이 승리를 확신한 듯 웃었다.


“하하하, 장로님께서 이 풍영술이 담긴 법구를 내게 주시며 반드시 승리해 법구와 단약을 받아오라 하셨다. 너희를 나 혼자 일순간에 압도해 바로 기록을 세워주마!”


네 명만 쓰러트리거나 붙잡아도 최상위권에 속하는데 묵염은 그 이상을 바랐다. 기록을 높이 세울수록 문파의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동급의 수사를 다수 압도한다면 문파에서도 그를 밀어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대인 진려 역시 화봉파 제자의 도전을 받아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미 펼쳐진 검진으로 봉화구를 한차례 받아낸 다음 검들이 검기를 발하게 하고 정면을 찢어발기는 초식을 펼쳐 화기를 어지럽게 했다. 그러고는 금강저를 높이 들어 벼락 한 가닥을 뿜어내니 봉화구의 폭격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들은 전부 천축누각 일 층에서 구매한 것들이 분명했다. 하지만 모두에게 판매하는 만큼 실제 영근자들이 펼치는 영술에 비하면 허접했다. 만약 축기경 뇌영근자가 벼락으로 묵염의 공격을 흩으려 했다면 검진으로 받아내고 화기를 흩을 필요도 없었다. 풍영근자가 화영근자를 직접 도왔다면 벼락 한 줄기로는 떨쳐내지 못할 만큼의 화력이 나왔을 거였다.


한차례 힘겨루기가 끝나고 묵염은 다음 수를 생각하려는데 진려가 먼저 검진의 검을 하나 직접 들고 돌진했다. 묵염은 급하게 화영술을 펼쳐 불을 뿜어댔으나 진려는 침착하게 검 하나로 다급하게 형성된 화영술을 모두 흩어놓았다. 묵염이 당황하면서 외쳤다.


“네놈 술사가 아니라 역사였냐! 젠장 진법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만 아니었어도!”


신체 단련을 주로 하는 역사들도 결국은 영기를 힘의 근본으로 삼는 자들이라 법구나 부적은 사용할 수 있었다. 술사들이 법구와 부적을 더 많이, 강하게 다룰 수 있었고 자신의 진법을 펼쳐 역사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화력을 내뿜는 게 가능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근접하면 역사가 유리했다. 더군다나 무작위로 정해지는 전장이었다. 이번 전장은 경지가 더 높은 술사인 호령천사의 진법 안이었다. 그러니 새로운 술사들이 이전처럼 진법을 펼쳐 전장의 요새화를 진행할 수 없었다. 진려는 순식간에 다가가 검의 손잡이로 묵염의 머리를 쳐 기절시킨 뒤 저물대에서 금으로 된 고리를 꺼내 던졌다. 고리는 크기가 자유자재로 늘어났다가 줄어들어 묵염을 속박했다. 이러한 광경에 나머지 스물여덟 명은 넋을 놓은 채 보고 있었다. 묵염의 편에 섰던 이들은 말이 없어졌다. 창정로가 적막한 전장에 말 한마디를 얹었다.


“도주는 과반수가 쓰러져야 가능합니다.”


묵염과 한편이었던 열네 명이 창정로의 말에 침을 삼킬 때였다. 그중 한 명이 나머지 열세 명에게 말했다.


“내 별호인 일발역사만큼 나에게 확실한 한 방이 있으니 저들의 발만 묶어주게.”


그는 산문 출신의 역사로 몸집이 거대하고 왼쪽 팔이 화포로 개조되어 있었다. 그런 모습의 그가 자신 있게 말하자 나머지 열세 명도 다시 투쟁심을 불태웠다. 그 뒤로 벌어진 광경은 아수라장이었다. 무기 형태도 아닌 법구가 뒤엉켜 힘을 겨루고, 부적들이 서로 가까이서 발동되다가 둘 다 실패하여 영기가 폭발해 터져나갔다. 다만 수에서 밀려 수도자 두 명 정도가 화포를 준비 중인 산문 수도자에게 달려들었는데 갑자기 근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달려들던 수도자 두 명은 흔적도 없었고 폭발에 옷가지가 전부 날아간 역사만이 화포를 겨눈 채 남아 있었다. 그가 옷 밑에 폭약을 숨겨두고 있었다가 터트려 역사인 본인은 견디고 술사들은 못 견디게 했다. 창정로가 말했다.


“사라진 두 명은 죽을 위험이라 금제에 의해 보호되고 진법에 의해 이송된 겁니다. 일발역사가 두 명을 잡았습니다. 계속하십시오.”


일발역사의 선전에 감탄한 아군은 더욱 격렬하게 싸우며 일발역사가 화포를 쏘길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화포는 조용했다. 결국 아군의 과반수가 당하자 일발역사는 도망쳤다. 그 모습에 나머지 아군들도 도망치거나 도망치다 잡혔다. 창정로가 영패를 높이 들었다. 영패에서 빛이 쏘아지고 구름을 탄 소년 모습의 수도자 한 명이 다가왔다. 창정로가 그에게 말했다.


“운청동자(雲淸童子), 여기 전투는 끝났습니다. 제가 작성한 목록대로 정산해 주시지요.”


창정로의 말에 운영근자인 운청동자는 창정로로부터 목록을 받아 구름을 여기저기 움직이더니 참가자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그다음에 승자와 패자를 나누었다. 정종명 진려의 편에 섰음에도 사로잡혀 패자 측에 선 이들도 있었고 화봉파 묵염의 편에 섰음에도 승자의 편에 선 이들도 있었다. 묵염을 포함해 총 세 명을 사로잡은 진려와 두 명을 쓰러트린 일발역사, 그 외에도 사소하게 한 명씩 잡은 이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운청동자는 구름으로 패자들을 감싸 구름에 태웠다. 창정로가 규율대로 기도문을 읊었다.


“이 세상은 갈증의 본거지이고, 굶주림의 모태이며, 고통의 둥지다. 즐거움의 황무지이며, 기쁨의 만리타국이다. 원래대로라면 고향인 범계에서 바로 죽었을 우리 수도자들을 살려준 것은 온전히 사생계를 창조하신 신들의 은혜다. 그분들은 우리의 찰나를 위해 희생하셨고, 우리의 기쁨을 위해 헌신하셨다. 그러니 너희 수도자들은 듣거라. 우리는 그분들에게 보답할 의무가 있다. 삶이 고달파도 견디고 수행을 통해 수명을 연장할 의무가 있으며, 때로는 연장한 수명마저도 버리고 신께 귀의해야 할 의무가 있다. 슬퍼도 극복하고 미소 짓거라. 삶을 비교하는 행위는 긴 뱀과 짧은 뱀을 맞대어 어느 쪽이 더 뱀처럼 살았는지를 겨루는 것처럼 어리석다. 때가 되면 너희 모두는 전장에 나아가 사내는 불처럼, 여인은 꽃처럼 쓰러지리라. 네 피와 살을 창조주께 돌려드릴 것이다. 그러나 슬퍼하지 말거라. 지축국 호령 열도의 천축누각 제일 관료 호령천사의 치세 아래 지축국의 관료이자 사제인 우리가 너희의 희생을 기억하고 이름을 기록하리라. 제사장이신 천사와 세 분 존자마저도 너희의 이름을 암기할 것이다. 세상을 위해 희생한다면 너희 또한 신이 되어 그분들과 함께하는 것이니 이는 이치에 맞으며 신을 모시는 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장생의 도를 넘어선 영생의 도이니라.”


창정로가 기도문을 모두 읊자 패자들은 승자들을 향해 절하며 이렇게 외쳤다.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생명을 주심에 감사하고 이에 보답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했으나 대부분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몇몇은 눈물을 머금었다. 패자의 외침에 승자들이 답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죽어서도 영원히!”


패자들은 순순히 운청동자의 인솔에 따라 전장을 떠났다. 창정로와 승자들은 전장에 남았는데 이후의 일은 창정로가 안내했다.


“한 차례 승리했으니 나가실 수 있습니다. 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더 싸우시겠습니까?”


“저는 비장의 수를 소모했으니 나가겠습니다.”


일발역사가 승자 중에서는 가장 먼저 전장을 떠났다. 진려 역시 몸이 만신창이라 법구와 단약을 받을 기회는 다음을 기약하였다. 다음 대질서에서 한 명만 더 잡으면 되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비교적 멀쩡한 몇 사람만이 남고 모두 떠났다. 그 몇 사람들은 다시 진법 속으로 들어갔으며 창정로는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영패가 땅을 떠나자 어둠이 다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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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대질서(大秩序) 24.09.16 8 2 8쪽
15 대질서(大秩序) 24.09.10 10 2 13쪽
14 대질서(大秩序) 24.09.08 21 2 15쪽
13 대질서(大秩序) 24.09.04 20 2 11쪽
12 대질서(大秩序) 24.09.02 21 3 12쪽
11 대질서(大秩序) 24.08.28 21 3 17쪽
10 대질서(大秩序) 24.08.25 20 3 16쪽
» 대질서(大秩序) 24.08.25 35 3 13쪽
8 입문(入門) +1 24.08.25 32 5 16쪽
7 입문(入門) +1 24.08.25 24 5 12쪽
6 입문(入門) +1 24.08.25 31 5 11쪽
5 입문(入門) +1 24.08.25 28 5 11쪽
4 입문(入門) +1 24.08.25 33 5 12쪽
3 입문(入門) +1 24.08.25 47 6 12쪽
2 입문(入門) +1 24.08.25 50 5 12쪽
1 입문(入門) +2 24.08.25 103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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