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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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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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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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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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족

DUMMY

솔직히 서양인들도 북경 약탈이 부끄러운 짓이라는건 다 알았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학살과 약탈의 책임을 떠넘기면서 아득바득 니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우긴거고.


하지만 러시아 제국에는 그런 추잡한 눈 가리고 아웅 대신, 아주 간편히 국뽕을 빨 수 있는 재료가 있었다.


[문명의 수호자 러시아군, 북경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구하다!]


[궁중의 보석을 지킨 러시아의 기사!]


[타락한 북경에서 홀로 양심을 지킨 어린 생도!]


[혼돈 속의 순수! 전쟁의 참화 속에서 피어난 두 어린이의 우정!]


여름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갔다가 사악한 중국인들의 횡포에 분연히 입대한 애국소년.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중국 응징이라는 대의를 잊어버린 어른들과 달리 끝까지 인간의 마음을 지킨 생도.


어린이와 국뽕, 신비한 동방에 대한 환상까지 결합되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섬세하고 감성이 풍부한 러시아인들이 여기에 휩쓸리지 않기란 무리였다.


- 이게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뭐? 러시아가 감수성이 풍부해?


앗.

삐졌던 춘명이가 다시 튀어나왔다.


근데 맞는 말이잖아. 한국에 톨스토이 있냐고.


- ······.


그건 그렇고 자꾸 그렇게 파업할래? 네가 없는 상태에서 청나라 친왕을 둘이나 상대해야 했잖아.


- 죽이 척척 맞던데 뭘. 누가 보면 아빠와 아들인줄 알겠던데.


그런 간신배와 나를 같게 보면 섭하지.


경친왕은 몰라도 나는 애국적 참전과 인도주의적 행위로 훈장까지 받은 인물인데 말이다.


내게 훈장 표창을 건의하겠다던 바실레프스키는 약속을 지켰다.


일단 내가 받은 훈장은 두 개.


엄밀히 말하면 하나는 ‘훈장’은 아니었고 ‘메달’이긴 했지만.


하나는 의화단 전쟁 참전자를 위해 특별히 제정된 중국 원정 메달(За поход в Китай).


은메달과 청동 메달로 나뉘어 있는데, 내가 받은건 좀 더 높은 등급인 은메달이다.


근데 북경 근처도 못 와보고 블라고베셴스크에서 청군이나 상대하던 생도 놈들도 이거 받았다던데.


- 걔네는 전쟁터에서 싸웠는데 넌 뭐했냐?


어허. 전투는 나도 겪었다고.


내 귀에 난 흉터만 봐도 몰라?


- 티도 안나는구만 뭘.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하급 군인들을 위한 “군사 훈장 표장” 1등급.


일명 ‘병사들의 게오르기’로, 병사나 부사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의 훈장이다. 소장 목숨을 구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바실레프스키는 이걸 주면서 매우 미안해했다.


“네가 장교였다면 이런 표장이 아니라 정식으로 성 게오르기 훈장이 주어졌겠지만, 너는 사병으로 자원했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뭐, 훈장이야 아무래도 상관 없긴 했다.


내가 장교로 임관하고 나면 이런 사병용 군사훈장은 다시 받을 일이 없으니 오히려 유니크하다고 볼 수 있겠지.


어쨌든 자교 생도가 훈장을 타고 언론에 대서특필까지 됐으니, 교장부터가 나를 맞이하기 위해 성대한 환영식을 열었다. 유급 걱정은 덜었군.


금십자가 훈장을 가슴에 달고 위풍당당하게 귀환한 나는 곧 열성적인 환호에 휩쓸렸다.


“루슬란! 루슬란!”


“킴 생도! 그대는 제1생도군단의 자랑이다! 군단의 위엄을 저 중국의 야만인들에게까지 떨치고 왔구나!”


성격 좋은 노인네였던 전 교장 베르홉스키 장군이 물러나고 새로 취임한 교장은 포코틸로 장군.


그는 깐깐해보이는 배불뚝이 아저씨였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훈장까지 받은 나를 박대할 수는 없었는지 팔을 벌리고 그렇게 외쳤다.


전 생도들이 강당에 정렬한 가운데, 포코틸로가 나를 전열 앞으로 데리고 가서 감동적인 연설까지 한 곡조 뽑고 나서야 나는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어깨가 좀 으쓱해지긴 했지만.


문제는 그 뒤로 귀찮은 일이 줄줄이 이어졌다는거다.


바깥에서야 나에 대한 뉴스가 한때 크게 떠들썩하다가 잠잠해졌지만, 이 좁은 생도군단에서 끝도 없는 메들리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젊은 영웅 루슬란이 북경의 마법사를 물리치고 류드밀라 공주를 구해냈다네!”


“그 중국 공주랑은 어떻게 됐냐?”


“예쁘냐?”


“사귀냐?”


어허, 아직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들이 그런 말을 어디서 배워가지고.


게다가 중국은 이 로판 제국 러시아랑 달라서 괜히 애먼 소문 났다간 그 여자애 시집도 못가요.


“하지만 매주 편지 쓴다면서?”


“그거 시켜서 쓰는건데.”


바실레프스키를 비롯한 러시아군 지휘부는 내게 현산과의 연락을 계속해줄 것을 당부했다.


내 기사를 흥미롭게 읽은 몇몇 높으신 분들이 그걸 바란다나 뭐라나.


남들 관심이 다 떨어질 때까지만 편지를 써달라는 부탁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게 러시아에서 중국까지의 장거리 편지까지 보낼 일인가.


매우 귀찮은 일이긴 했으나, 내친김에 나는 이 편지를 숙친왕 선기와의 소식통으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좀 있으면 망할 청나라 커넥션이라고 해도 소홀히 할 수는 없지.


특히 극동에 세운 투자 계획이 슬슬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니 더더욱.


최재형은 편지를 보내서 나에게 현지의 상황을 보고했다.


[지금 연해주는 북경에서 돈을 벌어온 동포들로 북적거린다. 우리 연추 마을에선 개도 엽전을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구나.

다 네 혜안 덕분이긴 하나, 애써 번 돈을 어찌 써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술이나 도박으로 헛되이 써버리지 않도록 나와 뜻있는 한인 실업가들이 힘을 모아 극동에 조그마한 은행을 세우려고 하는데 혹 네 돈도 거기에······.]


이름하여 극동 상업 금고.


말이 은행이지 나나 최재형 말고도 지신허의 한익성이나 블라디보스토크의 최봉준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이번에 돈 좀 만진 한인들이 대거 출자한 일종의 조합이다.


한인들의 돈을 맡아서 불려주고, 한인 사업체에 자금도 지원하면서 동포들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설립되긴 했는데······.


‘좋아. 나중에 급전 들어갈 일이 있으면 그쪽 돈을 갖다쓰면 되겠군.’


금산분리? 19세기(아직 1900년이다) 러시아에서 그런 소리가 통할 리가.


금고 열쇠는 최재형이 갖고 있으니 내 개인금고나 다름없지 뭐.


애초에 나 아니었으면 못 벌 돈이기도 했고.


헌데 극동 상업 금고의 가용 자금 중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건 내 돈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최재형이나 다른 한인 사업가들의 출자금도 아니었다.


나는 현산에게 보내는 편지인 척하며 열심히 그 아버지인 숙친왕 선기를 꼬시고 있었지만, 반응이 온 쪽은 오히려 경친왕 혁광.


- 러시아군이 북경에서 학살을 벌이고 돈까지 뜯어갔는데 저 인간은 러시아에 돈을 맡긴다고?


그런거 신경쓰면 그게 어디 탐관오리겠냐.


경친왕은 어디까지나 나는 심부름꾼이고, 바실레프스키를 포함한 러시아 장군들이 본체인줄 알고 있었다.


내가 북경에 있을 때부터 일부러 그렇게 착각하도록 유도하기도 했고.


아마 연해주의 극동 상업 금고도 그들이 관여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터.


청나라를 주무르는 경친왕에게는 자기 용돈 중 일부를 맡긴 것에 불과하겠지만, 이름은 거창해도 아직 지역 새마을금고 수준인 극동 상업 금고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어마어마한 예치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원정으로 실리 하나는 톡톡히 챙긴거긴 한데.’


“선배, 사인해주세요, 사인!”


“훠이훠이, 저리가. 어디 남자 놈들이 징그럽게.”


생도군단은 가을에 입학해서 가을에 진급한다.


그래서 나는 돌아오고 나니 2학년이 되었고, 동시에 갓 입학한 코흘리개 후배들도 아는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이놈의 인기는 골치 아프기 그지 없군.


- 사실 좋으면서 기만질하기는.


아니 진짜 골치 아프다.


학교 안에는 귀족들도 많고, 장군 자제들도 많지만 그들도 딱히 신분이나 지위를 내세우지 못한다. 분위기가 딱 그렇거든.

내가 퇴물 예비역 비류코프 장군을 들이밀었으면 큰일날뻔했다.


그래서 딱히 차별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건 좋은데.


다만 내가 이렇게 ‘튀게’ 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고.


들어보니까 몇 년 전에 어느 동네 두마(의회) 의원 아들이 재수없게 굴다가 왕따 당하고 자살 소동 벌인 적도 있다더만.


그렇게 주위에서 찍혀 버리면 앞으로의 생도생활이 고달프다.


지금은 나를 영웅 대접하고 있지만 분명히 이걸 고깝게 보는 인간도 있을텐데······.


“괜찮아. 웬만한건 우리 형한테 가서 말하면 되니까.”


그래서 베틀리츠의 말은 고마웠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쟤네 형 좀 놀거든.


나중에 담배라도 한 갑 갖다드려야겠네.


그러나.


“어이 2학년!”


“예?”


한창 친구들과 랍타(러시아 전통 스포츠)를 즐기고 있는데, 4학년 생도 하나가 나를 찾았다.


“네가 킴이구나. 그렇지?”


- 그거야 네 피부색만 봐도 알 수 있는거 아니냐?


아니지, 중앙아시아에서 온 타타르 귀족들도 있으니까.


쟤가 내 얼굴 알아본건 내가 그냥 유명인사라서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나보다 더한 유명인이었다.


“요안 콘스탄티노비치 공작 전하께서 부르신다.”


- 요안······. 뭐? 러시아 이름 한번 더럽게 어렵네. 근데 유명인이라며?


그건 다 무식한 박춘명 씨가 러문학을 익숙히 하지 않은 탓이지. 누구를 탓하리오.


그리고 박춘명의 기억 속에도 없다는건 딱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지, 지금 내 입장에서 보면 유명인 맞다.


나는 중간에 들어가는 부칭(父稱)과 작위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요안 콘스탄티노비치 로마노프.


바로 이 러시아 제국의 황족이었다.



* * *



생도군단으로 돌아오고 나서 황족 하나가 올해 우리 생도군단 4학년으로 편입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좋았던 옛날’에는 황족이 아니라 황태자가 제1생도군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니.


“야, 루슬란. 황족이 선배라니 멋지지 않냐?”


“선배는 무슨 선배야. 학교는 내가 먼저 들어왔는데.”


그렇게 호기롭게 외치던 나였지만, 막상 공작의 부름을 받으니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뭐 잘못한게 있나?


- 쫄보 자식.


닥쳐봐.


요안 콘스탄티노비치는 보통 황족이 아니란 말이다.


그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육촌동생이라는건 그렇다 치자.


이 나라에 황족은 한둘이 아니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건 이거였다.


요안 콘스탄티노비치의 아버지,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은 러시아 군사교육기관의 총책임자.


즉, 현대로 따지면 대통령 육촌에 교육감 아들이 우리 학교에 들어온 것이다.


그야말로 숨만 쉬어도 교장이 자지러지고 교관들이 기겁하는 제1생도군단의 백두혈통.


그런 그가 왜 나를 부른 것일까.


원래 엄마가 학부모위원인 일진이 제일 날뛰는 법이라고, ‘이제부터 우리 서클 아닌데 설치는 놈들 다 잡는다’ 같은거면 앞으로 내 학교생활이 무척 고달파지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4학년이 어느덧 근엄히 앉아있던 요안에게로 나를 인솔했다.


“전하, 데려왔습니다.”


나를 인솔하던 4학년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을 들은 요안 콘스탄티노비치는 고개를 휙휙 돌리더니,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면서 외쳤다.


“그냥 요안이라고 부르라니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더니 그는 나를 보고 후다닥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바, 반갑네.”


“······?”


“팬이야······!”


요안 콘스탄티노비치는 감동적인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

내일부터 오전 8시 10분에 연재됩니다!



1.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러시아의 대문호인 푸시킨이 지은 영웅 서사시입니다. 난쟁이 마법사에게 납치당한 약혼자 류드밀라 공주(블라디미르 대공의 딸)를 구하기 위해 루슬란이 겪는 모험을 다룬 이야기죠.

참고로 이 서사시의 원형이 된 러시아의 민담은 따로 있는데, 이 민담의 주인공 예르슬란 라자레비치는 공주 하나가 아니라 아름다운 자매 공주, 인도 황제의 딸, 태양 도시의 공주 등등 많이도 구했습니다.


2.

경친왕 혁광은 매우 선진적인 투자안을 갖고 있어 중국 은행에 절대 돈을 맡기지 않았으며, 무조건 외국 은행들을 선호했습니다. 더 타임스는 경친왕이 홍콩상하이은행에 무려 712.5만 파운드를 예치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아직 의화단 전쟁의 상흔이 사라지지 않아 외국인들과 거래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중국인의 은행이나 전당포에 돈을 맡기던 시점이었습니다. 하준이 바실레프스키를 팔아 받은 예치금은 그 중 일부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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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혈서 +22 24.09.15 4,696 312 12쪽
21 전야 +13 24.09.14 4,799 311 12쪽
20 반응 +13 24.09.13 4,628 306 11쪽
19 이륙 +37 24.09.12 5,107 350 14쪽
18 이륙 준비 +17 24.09.11 4,946 273 12쪽
17 발전 +14 24.09.10 5,100 299 12쪽
16 착수 +15 24.09.09 5,271 316 12쪽
15 내기 +18 24.09.08 5,268 287 12쪽
14 파티 +12 24.09.08 5,706 295 14쪽
» 황족 +21 24.09.07 5,858 317 13쪽
12 귀환 +19 24.09.06 5,788 351 12쪽
11 제안 +27 24.09.05 5,928 330 10쪽
10 호의 +22 24.09.04 6,018 314 14쪽
9 경매 +25 24.09.03 6,057 329 13쪽
8 수확 +27 24.09.02 6,111 331 12쪽
7 시작 +13 24.09.01 6,215 310 11쪽
6 참전 +10 24.08.31 6,726 317 14쪽
5 귀신 +21 24.08.30 6,870 320 12쪽
4 입학 +30 24.08.29 7,096 361 12쪽
3 연줄 +20 24.08.28 7,330 363 11쪽
2 스타팅이 왜 이래 +24 24.08.27 8,301 398 12쪽
1 프롤로그 +41 24.08.26 9,451 389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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