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급 용기사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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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도 아카데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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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30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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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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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비행(1)

DUMMY

#01



“멜빌 경! 일어나셔야 합니다!”


멜빌이 눈을 떴다. 희뿌연 서광이 커튼 너머에서 스며들고 있었다.

다급한 목소리가 침대 맞은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으···빌어먹을.”


멜빌은 머리를 쥐어싸맨 채 상체를 일으켰다.

못된 난쟁이가 두개골 안쪽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 같았다.

간밤에 후작가의 쌍둥이 영애가 놀러와서 과음을 한 탓이었다.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넘기자,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병사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복장을 보아하니 전령이었다. 멜빌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전령은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걸 보니 유쾌한 소식을 전해주러 온 것은 아닌 듯했다.


“으헉! 죄송합니다!”


문득, 멜빌을 위아래로 훑은 전령이 허둥지둥 차렷 자세를 취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엉?”


멜빌이 갸웃거렸다. 전령의 시선은 천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왜 저러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본 멜빌은 금새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았다. 맹수처럼 다부진 육신이 아침햇살 아래 빛나고 있었다.


“아, 이런.”


게다가 양 옆에는 두 여인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자신과 같은 나신으로. 이불을 덮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멜빌은 자매의 이불을 더 깊게 덮어준 뒤 몸을 일으켰다.


“미안. 바로 준비할테니까 브리핑 좀 해 줘.”

“네, 넵! 다카르 대공국에서 사육하는 마수 무리가 국경을 침략했습니다. 대기조가 출격했지만 수가 워낙 많아서 격퇴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또 다카르야? 그 자식들은 질리지도 않나.”


멜빌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카르는 그가 사는 하텐 왕국의 인접국이었다. 지도부의 성향이 호전적이고, 유일하게 하텐의 적수가 되는 강대국이라 크고 작은 분쟁이 자주 발생하고는 했다.

멜빌은 주섬주섬 조종복을 차려입었다.

용기사 전용으로 제작된 가죽옷은 어지간한 플레이트 메일보다 방어력이 뛰어났다.


“다카르 측에서는 사고였다며 유감을 표했습니다. 하지만 대처가 미적지근한 걸로 봐서는···”

“당연히 일부러 한 거지. 실수는 지랄이 실수야.”


개새끼들이 거짓말을 할 거면 성의라도 있던가.

멜빌은 그리 중얼거리며 외갑의 지퍼를 올렸다.


“내가 실수가 뭔지 보여줘야겠군. 바르바로스는?”

“아, 바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멜빌이 창 밖을 슬쩍 내다봤다.

황소도 한 입에 삼킬 만큼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왕궁의 첨탑에 앉아 있었다.

붉은 비늘은 피를 펴바른 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와 계약한 용 바르바로스였다. 목울대가 꿀렁거리는 꼬낙서니를 보아하니 벌써부터 불을 토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성격 한번 급한 용이라니까. 가보자고.”

“네, 넵!”


적당히 준비를 마친 멜빌이 숙소를 나섰다. 면도는 못 했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쓸만했다.

어젯밤에 땀을 잔뜩 흘려서 그런지 몸도 개운하고.

전령이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간만의 휴가신데···사령관께서도 면목이 없다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됐어. 내가 잘난 탓이지. 옷도 갈아입은 김에 공주님 교습도 다녀와야겠군.”

“어라, 원래 일정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여왕이 되실 분이 용을 그따위로 타면 웃음거리가 되잖아.”

“아, 아하하···.”


전령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멜빌은 몇 년 전부터 왕가의 스승 노릇을 겸하고 있었다.

범재의 기준에 맞춰서 가르치는 것은 구역질이 날 만큼 어려웠지만 나름 열심히 수업에 임하고 있었다.

왕가보다는 용을 위해서. 형편없는 기수는 그 아름다운 맹수를 망칠 뿐이니까.


“어쨌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아가씨들 본 건 비밀로 해 줘. 높은 확률로 저쪽이 자랑하고 다니겠지만···혹시 난처해 할 수도 있으니까.”


함께 걷던 멜빌이 전령에게 금화 한 닢을 건넸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사령부에서 여기까지 뛰어온 수고비라기에는 너무 큰 돈이었다.


“맙소사, 경!”

“그냥 받아. 날도 더운데 이런 낙은 있어야지.”


멜빌은 그리 말하며 바르바로스에 올라탔다.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는 아름다운 여인 다음으로 그가 좋아하는 부류였다.

감격한 표정으로 금화를 만지작거리던 전령이 입을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별 거 아닌 보답이지만, 제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앞으로의 일?”


멜빌이 눈썹을 으쓱였다.


“네. 이번 사태는 출격 한 시간 내에 결판이 납니다. 마수들은 모조리 바르바로스의 화염에 잿더미가 되고, 음모의 주체인 다카르의 남부 요새 역시 경이 일으킨 사소한 ‘사고’로 인해 완전 전소되어 버리죠. 참으로 통쾌한 복수였습니다.”


전령이 웃었다. 너무나도 구체적인 짜임새에 멜빌이 당황했다.

실수인 척 하면서 요새를 태워 버리는 것은 정말로 자신이 하려던 짓이었다.


“제법인데. 요즘 유행하는 농담이야?”

“아닙니다.”

“재밌네. 혹시 그 뒷부분도 들을 수 있나? 가능한 자극적인 걸로.”

“물론입니다. 가장 끔찍했던 건 3년 뒤와 40년 뒤에 벌어질 사건입니다.”

“3년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다카르에서 대량 살상 마법을 개발합니다. 우리 쪽으로 사용할 게 자명했지요. 도시 하나는 능히 날려버릴 규모였습니다.”

“거 큰일이군. 그래서 어떻게 됐지?”

“다행히도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멜빌 경을 필두로 나선 용기사들이 선제 타격에 성공했거든요. 마법은 완성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역류해 버렸고, 당시의 다카르 대공도 그때 사망했습니다.”

“오호.”


멜빌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그는 이 새로운 농담이 좋아지려 하고 있었다.


“그건 기쁜 소식이네. 하텐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겠어.”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작전은 성공했지만 사고가 났습니다. 아주 큰 사고가.”


갑자기 전령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멜빌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무슨 사고였는데?”

“멜빌 경이 다시는 용을 탈 수 없게 됩니다.”

“···뭣이라?”

“심장을 다치거든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아닌 밤중의 날벼락이었다.

멜빌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전령은 개의치 않고 우울한 예언을 이어 나갔다.

멜빌은 다카르에 결정타를 날리는데 성공하지만 폭발에 휘말려서 심장을 크게 다친다.

마나와 감응력을 주관하는, 용기사의 생명과도 같은 기관을.

듣다 못한 멜빌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슬슬 재미없어지는군. 여기까지만 하지.”

“개국 이래 최악의 비극이었습니다. 폐하는 혼절하고, 하텐에 살아가는 모두가 비탄에 빠졌지요. 전설의 용기사 멜빌의 전설은 다카르에서 끝났습니다.”

“그만 하라니까.”

“후배 용기사들이 분전에 나서지만 누구도 경에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텐과 다카르의 알력다툼은 한층 더 치열해집니다. 기수를 잃은 바르바로스는 그 날부터 홀로 전장에 나섭···”


전령이 말을 잇던 차였다. 멜빌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소리보다 빠르게 반원을 그린 칼날이 그의 목울대 앞에서 멈춰섰다.


“이봐. 내 말이 안 들려?”


촤악! 뒤늦은 파공음이 울렸다.

칼날과 전령의 목 사이에는 종이 한 장 만큼의 간격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농담 집어치우라 했잖나.”

“멜빌 경.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그럼 뭔데?”

“경이 직접 겪은 일이지요. 저는 당신의 기억입니다.”

“······뭐?”


멜빌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령은 슬픈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새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멜빌이 눈을 깜빡이자, 전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게···무슨.”


멜빌은 다시 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번에는 바르바로스가 앙상한 해골로 변해 있었다. 갈빗대 사이로 바람이 불 때마다 섬뜩한 풍절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


멜빌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모든 것이 스러지고 있었다. 화려했던 왕도는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폐허로 전락한 채였다. 부서진 포석 틈새로 자라난 잡초가 종아리에 스치고 있었다.

그때, 날카로운 통증이 멜빌의 가슴께에서 번득였다.


“윽.”


시선을 내린 멜빌이 얼어붙었다.

가슴 한복판에 수박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덩쿨 같은 혈관이 몸 밖으로 늘어진 채였다.

발치에는 그의 심장과 더불어 전령의 머리가 나뒹굴고 있었다.

전령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올해가 40년 째다.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위엄 서린 음성이 귀에 익었다.

세로 방향으로 좁혀진 동공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멜빌과 눈을 맞춘 전령이 낮게 읊조렸다.


【일어나라. 멜빌.】

.

.

.


“커어억!!”


멜빌이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드높은 석조 천장이었다. 타는 냄새가 사방에 자욱했다.


“여기는.”


그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좀 아팠지만 팔다리는 그럭저럭 움직였다.

바라본 자신의 손은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꿈이었나.”


멜빌이 혀를 찼다.

그는 뒤늦게 자신이 악몽을 꿨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40년 전으로 돌아가는 꿈을.

불현듯, 처절한 비명이 귀를 찔렀다.


“살 수 있어! 씨발, 눈 좀 떠!”

“아아아악! 아아악!”

“누가 붕대 좀 가져와! 피가 안 멈춘다!”


비명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멜빌이 고개를 들었다. 넓은 홀은 부상당한 군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병상이 부족해서 깔아 놓은 이불은 모조리 피로 물든 채였다. 어떤 위생병은 울먹거리며 내장을 손으로 주워 담고 있었다. 벌어진 배를 움켜쥔 병사가 실성한 듯 웃어제끼고 있었다.


“엄마···제발···제발···신이시여.”

“이히, 이히히히.”


멜빌은 비틀거리며 창가로 걸어갔다.

밤하늘 아래 지옥의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커먼 갑옷으로 무장한 군대가 들판을 뒤덮으며 몰려오고 있었다. 검은 안개가 그들을 휘감은 채였다. 열 중 하나는 토막 난 시체를 꽂은 장대를 치켜들고 있었다.


“다카르.”


멜빌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다카르 대공국의 군대였다. 장대에 꽂힌 시체들은 하텐의 병사나 백성이 분명했다.

군대로 이루어진 물결 사이사이에 반투명한 거인들이 합장을 취하며 서 있었다.

양쪽 뺨에 난 입에서는 사악한 주문이 쉴새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 죽었는지, 후퇴 명령이 내려졌는지는 몰라도 전선에서 맞서 싸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 멜빌 경!”


별안간 멀지 않은 곳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멜빌이 등을 돌렸다. 갑옷을 입은 소년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를 알아본 멜빌이 눈썹을 치켜떴다.


“왕자님.”

“정신이 드십니까? 저, 저는 경이 깨어나지 못하는 줄 알고···!”


하텐의 왕자 하텐 테메르였다.

멜빌의 앞에 멈춰선 그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은실처럼 하얀 머리카락은 피로 얼룩진 채였다.


“절 알아보겠습니까? 경은 하루 내내 혼수 상태였어요. 그러게 전방은 피하라 했는데....”


멜빌은 그제야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만용을 부린 대가였다. 용을 타지 못하게 된 그는 말을 타고 최전선으로 나섰고, 폭발에 휩쓸려 의식을 잃었다.

멜빌이 주억거렸다.


“괜찮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왕자님.”

“······저는 이제 왕자가 아닙니다.”

“예?”


왕자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뜻을 눈치챈 멜빌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폐하께서.”

“네. 어머님께서는 오늘 새벽에 전사하셨습니다. 엑셀리온과 함께.”

“······그렇습니까.”


멜빌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텐의 여왕. 이제 전 여왕은 멜빌이 어릴 적부터 가르쳤던 공주였다. 오늘도 기습 수업이냐며 절규하던 소녀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하루아침에 왕이 된 테메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경의 잘못이 아닙니다.”

“왕자님···아니, 폐하.”

“이 사단이 벌어진 것은 오롯이 왕가의 죄입니다. 기라성 같은 인재를 데리고도 적의 흉계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건···방심의 대가입니다.”


그의 시선은 창 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재앙의 시발점은 다카르와의 평화 협정이었다.

회담장은 폭발했고, 절반 이상의 용기사가 다카르의 대공과 함께 공멸했다.

왕의 자책을 들은 멜빌이 혀를 찼다.


“그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설마 대공을 미끼로 쓸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다카르의 1공녀가 범상치 않은 자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제 아비와 중진을 제물 삼아 용기사를 제거한 그녀는 대공으로 등극하자마자 하텐의 침략을 감행했다.

전력을 상실한 하텐은 다카르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노도처럼 들이닥친 적군이 왕도에 들이닥치까지는 채 보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군요.”


테메르가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를 살려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몇 번이고 전령을 보내 봤지만 모두 돌아오지 못했지요.”

“폐하.”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조아려진 원수의 머리통을 보면 그들의 얼어붙은 심장에 자비심이 싹틀 수도 있겠죠. 용의 나라 오백 년 역사가 제 대에서 끝나는군요.”


테메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멜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냉정하고 정확한 분석이라 더 고통스러웠다.

부모를 잃은 소년은 이제 나라까지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

심지어 머리를 조아리고 발등을 핥더라도 그 미친 계집이 항복을 수락해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무능함의 극치로다. 어쩌다 이 꼴이 됐을까.’


멜빌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뱃속에서 역청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용기사로 활동하고 있었다면 이따위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전쟁에 ‘만약’ 따위는 의미가 없지만서도.

무력감을 참다 못한 멜빌이 다시 말을 내놓으라고 외치려던 차였다.


‘이건.’


차가운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맙소사.”

“경? 왜 그러십니까?”


멜빌이 얼어붙었다.

의아하게 여긴 테메르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마나의 기척이 요새 바깥에서 느껴졌다.

꿈에서 전령이 했던 말이 귓가를 웅웅 맴돌고 있었다.

5년? 10년? 아니, 더 됐던가?

그런 꿈을 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직···.”


심호흡을 반복하던 멜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폐하.”

“예?”


테메르가 갸웃거렸다. 갑자기 멜빌이 갑옷을 벗었다.

판금 흉갑을 아래로 가죽 재킷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많이 입어서 헤졌지만 충분히 쓸만해 보였다.

그것이 용기사의 조종복이라는 것을 눈치챈 테메르가 흠칫거렸다.


“경. 그 옷은 설마.”

“부끄럽지만 전역한 뒤로도 늘 입고 다녔지요. 제가 시간을 벌 테니 폐하께서는 생존자들과 함께 피신하십시오. 저만큼 늙은 신하들은 수로와 이어진 비밀 통로를 알고 있을 겁니다.”

“설마 지금 용을 타겠다는 건가요? 경의 심장은. 아니, 애초에 남은 용이 없지 않습니까!”

“조금 전까지는 그랬지요. 저도 무척이나 당황스럽습니다.”

“그게 무슨···.”

“제 심장도 잠깐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늙은 피주머니에 근성이 남아 있기를 빌어야지요.”


테메르가 뭐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멜빌이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백발 성성한 머리를 숙인 그가 쏟아내듯 말했다.


“지금까지 복에 겨운 삶을 살았습니다. 하늘에서 죽는다는 용기사의 마지막 기쁨을 누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신 멜빌은 여기서 폐하께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경, 도대체-”

“왕가의 핏줄이 남아 있는 한 용의 나라는 멸망한 게 아닙니다. 현명하게 백성들을 이끄시리라 믿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 말투도 이제 쓸 필요가 없군요. 여왕께서 자신이 재임할 동안에라도 품위를 지키라 부탁한 것이었으니.”


멜빌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시간을 벌겠다.”


어린 왕의 어깨를 움켜쥔 그가 히죽 웃었다.


“반드시 살아남아라. 테메르.”

“······!!”


그리고 등을 돌렸다.

테메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도약한 멜빌이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제비를 넘으며 착지한 그는 요새 안뜰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멜빌! 멜빌!”


머리 위에서 테메르의 비명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불티가 뒤섞인 열풍이 성벽 너머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머지않아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 꿈에서 본 전령이 안뜰 한복판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제자리에 멈춰선 멜빌이 숨을 골랐다.


“허억···늙다리 용아···헉, 이 몸이 오셨다.”

“늙은 건 네놈이겠지. 멜빌.”

“도대체 어디 갔던 거냐. 내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고 10년 씩이나···휴가 치고는 너무 길지 않았나?”

“12년이다. 네가 몰라도 되는 일이었지.”

“고블린 노예보다 못한 싹수는 여전하군. 흐흐, 그래도 만나서 기쁘다.”


멜빌이 이마의 땀을 훔쳤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사내와 마주보고 선 그가 벗의 이름을 불렀다.


“바르바로스.”

“흥. 이래서 필멸자가 싫다니까.”


12년 만에 보는 바르바로스는 예전 그대로였다.

용의 수명은 인간보다 훨씬 길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만.

그가 멜빌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고작 그따위 폭발로 기절하다니···네놈을 깨우느라 얼마나 귀찮았는지 알기는 하나?”

“역시 그건 네 짓이였구나. 참 기괴한 꿈이었지.”


꿈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용은 계약을 맺은 자의 머릿속에 직접 말을 걸 수 있었다.

혼수 상태에 빠졌던 자신을 깨운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왕국으로 돌아온 바르바로스였다.

멜빌이 말했다.


“그래서, 왜 돌아온 거냐. 개인적인 용무가 끝난 건가?”

“아니. 네놈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뭐라고?”

“먼 땅에서 너의 수명이 머지않은 것을 감지했다. 내키지는 않다만 일단은 계약을 맺은 사이니 임종을 지켜볼 의무가 있지. 그뿐이다.”

“하하···너는 정말 달라진 게 없구나.”


멜빌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십 년이 넘도록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이 갑자기 왜 돌아왔나 했는데, 그런 이유였나.

앞머리를 쓸어 넘긴 멜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키는 대로 해. 대신 묏자리는 내가 골라야겠다.”

“무슨 의미지.”

“나는 네 등 위에서 죽을 거다. 마지막으로 다카르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줄 생각이니 한 번만 더 같이 날아 보자꾸나.”

“······진심인가?”


바르바로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멜빌은 대답하는 대신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바르바로스가, 한숨을 내쉬듯이 읊조렸다.


“어리석은 놈.”


파아아아앗!

별안간 바르바로스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인간의 형체가 일그러지나 싶더니 섬광이 잦아들었다.전신이 피처럼 붉은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텐의 마룡, 바르바로스의 본모습이었다.


【후회하지 마라.】

“못보던 새 아주 상냥해지셨군. 내가 후회하는 거 봤냐?”

【오 분도 못 버틸 거다. 네 심장은 못 본새 더 망가졌어.】

“그거면 충분해.”


멜빌이 그의 목으로 뛰어올랐다. 바르바로스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애초에 계약을 맺은 용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설명이나 합의도 필요 없었다.

퍼어어어엉!

바르바로스의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그들은 붉은 유성이 되어 밤하늘로 솟구쳤다.

등가시를 움켜쥔 멜빌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기다려라, 다카르 돼지들아! 늙은 멜빌이 간다!”


추정되는 적의 수는 삼만.

맞서는 이는 한 명의 노기사와 한 마리의 용.


멸망을 앞둔 왕국의 수도에서, 멜빌의 마지막 비행이 시작됐다.


작가의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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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 알카르(3) +1 24.09.11 356 12 14쪽
9 9. 알카르(2) +1 24.09.10 398 15 15쪽
8 8. 알카르(1) +3 24.09.09 503 20 20쪽
7 7. 제3캠프 +3 24.09.08 624 16 19쪽
6 6. 감응 +1 24.09.06 622 23 14쪽
5 5. 꿈 따위가 아니다 24.09.05 634 19 14쪽
4 4. 조우 +3 24.09.04 702 26 18쪽
3 3. 불시착 +1 24.09.03 811 25 13쪽
2 2. 마지막 비행(2) +3 24.09.02 1,014 31 28쪽
» 1. 마지막 비행(1) +2 24.09.02 1,323 4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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