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급 용기사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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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도 아카데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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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30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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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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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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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알카르(1)

DUMMY

#08



“살아 있었나.”


멜빌이 혼잣말했다.

넋 나간 시선은 오 분째 석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다 못한 레기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멜빌. 괜찮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슬쩍 소매를 당겨 봐도 마찬가지였다.

십 분이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래. 괜찮다.”


불현듯, 멜빌의 입가에 균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고 말고.”

“······!”


레기아가 움찔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한 발자국을 물러난 그녀가 침을 꼴깍 삼켰다.

멜빌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광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대로였다.


“반갑다. 잉그리드.”


그는 진심으로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잉그리드를 향한 분노는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실제로는 수백 년이 흘렀다지만, 멜빌에게는 고작 이틀 전의 일이었다.


“잘 봐둬라 레기아. 이 여자가 바르바로스를 죽인 자다.”

“아빠를 죽인 게 다카르의 황제였다고?”

“그래. 원래는 대공이었지만.”

“멜빌은 과거에서 왔다며. 어떻게 지금 황제랑 그때 황제가 같은 사람이야?”

“나야 모르지. 괴물의 사정 따위는.”


장수의 비결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애초에 목이 잘려도 다시 되살아나는 괴물이었으니.

그제야 석상에서 시선을 뗀 멜빌이 레기아를 마주보았다.


“레기아. 나는 황제를 죽일 거다.”

“응. 그럴 거 같았어.”

“미리 말하지만 내 복수에 억지로 어울릴 필요는 없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면 당장 그만둬. 동참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너를 절대 버리지 않을 거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경고였다.

멜빌은 레기아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더욱 신중한 선택을 하기를 바랬다.

‘네가 싫어하니까 나도 싫어.’ 따위의 이유로 복수극에 동참하는 거라면 결코 함께할 수 없었다.

레기아가 말했다.


“억지로 아니야. 아빠 때문도 아니고. 나도 황제 싫어.”

“왜지?”

“···내 보물을 빼앗아간 사람들의 대장이니까.”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침묵하던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난. 용서 못해.”

“그러냐.”


멜빌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꼬맹이도 다카르와 악연이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날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대로 위로 떠오른 태양이 마을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좋아. 그럼 오늘부터 우리는 황제 사냥꾼이다.”

“황제 사냥꾼. 멋지다.”

“멋지기는. 잉그리드를 죽이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테니 각오해 둬.”


멜빌은 말을 맺으며 석상에 침을 뱉었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액체는 정확히 잉그리드의 얼굴에 적중했다.

시작이 좋군. 입속말을 중얼거린 멜빌이 레기아를 마주보았다.


“레기아. 우리는 일단 강해져야 한다.”

“응. 강해져야 해.”

“그것도 보통 강해지는 걸로는 안 돼. 가로막는 잡것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황제의 목을 따려면 못해도 내 전성기 시절의 기량은 되찾아야 할 거야. 너는 바르바로스를 목표로 삼으면 될 거고.”


멜빌은 진지했다. 자신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긴 상대를 얕잡아 볼 생각은 없었다.

비록 마지막 전투가 끔찍한 악조건 속에서 치뤄지기는 했지만, 중요한 건 결과 뿐이었다.

레기아가 물었다.


“아빠는 얼마나 강했어?”

“흠. 숨을 멈추지 않고 불을 뿜어서 바위산 하나를 녹일 수 있게 되면 화력은 엇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봐야겠지.”

“···그게 가능해?”


레기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실 이것도 축소해서 말한 거였지만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멜빌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당연히 가능하지 요 녀석아. 내가 있잖아.”

“하지만 나. 불 자체를 못 뿜는걸.”

“다 배우면 그만이야. 너는 싹수가 있으니 요령만 파악하면 금방 깨우칠 거다.”

“우아아.”


멜빌은 레기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에 눈이 가려진 그녀가 버둥거렸다.

실제로 멜빌은 레기아에게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 나이에 그만한 마나를 처먹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예사롭지 않은 자질이었다.


“다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할 일?”

“그래. 이 땅이 하텐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지.”


멜빌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이 근방에 있는 다카르 놈들은 다 치우고 가야겠다.”

“치운다고?”


그의 시선은 보초를 서고 있는 다카르 병사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집 안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은 벌레의 집이 된 셈이었지만 그딴 건 멜빌이 알 바가 아니었다.


‘감히.’


나라가 망할 것을 예상했음에도 화가 치밀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하텐의 용기사였다.

이딴 꼬낙서니를 보고 그냥 넘기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했다.

레기아의 눈이 커졌다.


“그럼 죽이는 거네?”

“그래. 알카르라는 놈에게 네 복수도 할 겸.”

“나는 좋아.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곤란해지지 않을까?”

“오, 기특한 생각을 다 하는군.”


멜빌이 웃었다.

아주 사려깊고 통찰력 있는 발언이었다. 군인이 다수 죽는다면 보통은 반란이 벌어졌다 여길 터였고, 더욱 무자비한 탄압이 들이닥칠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걱정 마라. 주민들은 책임을 짊어지지 않을 테니.”

“왜?”

“모든 죽음은 괴물의 소행이 될 예정이거든. 애초에 마수병단이 왜 파견됐는지 기억나지?”

“···아하.”


말뜻을 이해 레기아가 주억거렸다.

본토의 마수병단은 레기아. 즉 정체불명의 괴물을 퇴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애초에 위험한 임무인 만큼 전원이 전사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터였다.

멜빌이 청소 계획을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빠바바밤! 빰!

갑자기 마을 전역에서 쩌렁쩌렁한 관현악이 터져 나왔다.


“썅, 뭐야?”

“귀 아파.”


반사적으로 욕이 나왔다.

레기아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목조 건물의 외벽이 삐걱거릴 지경이었다.

머지않아 음악이 멈추고, 발랄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상! 기상 시간입니다! 모든 주민은 일어나서 침구를 정리하고 오전 작업을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디서 떠들어대는 거지?”


멜빌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도 없는데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서 두리번던 찰나, 모든 숙소의 문이 일제히 열리며 주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크.”


두 사람이 석상 뒤로 몸을 감췄다. 못해도 삼백 명은 넘을 것 같았다.

의외로 남녀노소가 골고루 뒤섞여 있었는데, 남자들은 짧은 머리를, 여자들은 목덜미가 다 드러날 만큼 바짝 묶은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유를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게 그 식별 코드인가 뭔가 하는 거군.”


검은 직사각형을 수십 토막으로 쪼개 놓은 문신이 주민들의 뒷목에 새겨져 있었다.

자신이 미래에 떨어지자마자 질리도록 들어 왔던 식별 코드였다.

저걸 가리지 않는 것이 이곳의 규칙인 듯했다.


‘완전히 노예 낙인이잖아.’


멜빌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없는 게 좋은 거였다.

저렇게까지 중요시하는 걸 보면 신원 조회는 물론이고 위치를 추적하는 기능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숙소에서 나선 주민들은 하나같이 피로에 쩐 표정을 짓고 있었다.

터덜터덜 걷던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해가 밝았군. 제기랄.”

“그래도 다른 캠프보다는 나은 편이잖아요. 내일 예배 시간에는 쉴 수도 있고.”

“콜록, 콜록···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오가는 대화나 안색으로 봐서 별로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기괴하게도 전원이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석상 뒤에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멜빌이 입술을 비틀었다.


“이딴 게 마을이라고?”


살기 좋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건 도를 넘었다.

줄을 지어 저마다의 일터로 걸어가는 모습이 꼭 가축을 연상케 했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할당량을 못 채우는 놈들은 9캠프로 보내 줄 테다! 하루만 광산에 들어갔다 오면 여기는 천국처럼 느껴질 걸!”


다카르 군인들은 노예 감독관이 되어 주민들을 못살게 구는 중이었다.

손에 피 한번 안 묻혀봤을 것 같은 애송이들이 패악질을 부리는 꼴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씨발, 뭐 하는 짓거리야?!”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앳된 호소가 뒤따랐다. 멜빌과 레기아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방아깨비처럼 생긴 군인 앞에 한 쌍의 소년소녀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커다란 양동이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군인의 바지는 물로 흠뻑 젖은 채였다.


“썅, 오늘 아침에 다렸는데. 이걸 어떻게 할 거야?”

“서, 서둘러서 가느라···정말로 죄송합니다!”

“저도 이렇게 빌게요. 동생을 용서해 주세요!”


함께 용서를 비는 소녀는 친누나로 추정됐다.

아마 소년이 넘어지며 양동이를 쏟았고, 그게 하필이면 병사의 바지를 직격한 모양이었다.

근처에 있던 병사 한 명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어이, 무슨 일이야?”


입에는 얇은 종이담배가 물린 채였다. 친구 못지않게 관상이 좋지 않았다.

방아깨비가 으르렁거렸다.


“이 애새끼가 내 바지에 물을 쏟았어. 내일모레면 서른인 나를 오줌싸개로 만들었다고.”

“정말 그렇군. 난 당연히 오줌을 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지금 어떤 처벌을 할지 고민중이야. 무난하게 손가락 하나 자를까?”

“에이, 손가락은 좀 그렇다. 아침부터 피 보면 재수가 없어. 그냥 간단하게 가자.”


담배를 문 병사가 쭈그려 앉았다.

소년소녀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떨고 있었다.

입에서 담배를 뺀 그가 소년에게 말했다.


“야, 얼굴 이리 대.”

“네, 네···?”

“멀쩡한 바지를 망가뜨렸으니 너도 한 군데는 망가져야지. 어디가 좋아? 눈? 귀?”


병사는 낄낄거리며 담배를 소년의 얼굴에 가져다댔다.

이글거리는 단면을 본 소년이 헛숨을 들이켰다.


“히이익!”

“어디를 지져도 제법 볼만해질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제, 제발 용서해 주세요. 차라리 제가 당할게요. 네?”

“너는 너대로 놀아줄 테니까 걱정 말고 기다려.”


소녀가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병사는 담배를 눈앞까지 가져갔다 떨어뜨리는 짓을 반복하며 놀고 있었다.

문득, 멜빌의 옆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여도 돼?”

“조금만 참아.”

“왜?”

“나도 죽이고 싶은데 참고 있으니까.”


그리 말하며 옆을 돌아본 멜빌이 흠칫거렸다.

레기아가 이렇게 화난 건 처음 봤다. 그녀의 동공은 이미 세로 방향으로 좁혀진 채였다.

멜빌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뛰쳐나가서 병사 둘을 갈기갈기 찢어 놨을 기세였다.


‘도대체 예전에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사정이 제법 복잡한 듯했다.

어쨌거나 병사들의 행동은 멜빌도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 쓱싹 치워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로 유인해서 암살하면 되겠지.

계획을 세운 멜빌이 병사들을 부르려던 차였다.


“그만두게.”


또 다른 목소리가 분쟁에 끼어들었다. 어쩐지 귀에 익었다.

마주보던 레기아와 멜빌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없던 인물이 한 명 추가되어 있었다. 거대한 늑대 마수를 탄 청년이 병사들과 소년소녀를 내려보고 있었다.


“알카르.”


숲에서 마주쳤던 마수병단의 중대장이었다.

등에는 레기아의 옆구리를 찢어 놨던 창이 매달려 있었다.


‘어디 갔다 이제 온거지?’


멜빌이 몸을 조금 더 깊게 감췄다. 별로 좋게 끝난 사이가 아니었다.

황급히 그를 돌아본 병사들이 차렷 자세를 취했다.


“허억! 추, 충성!”

“황제 폐하 만세! 마수병단의 지휘관을 뵙습니다!”


조금 전까지 건들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가까스로 애꾸 신세를 면한 소년이 소녀를 부둥켜 안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훝어보던 알카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짓을 하려던 거지? 식민지의 주민은 제국의 소중한 자원이라는 걸 교육받지 못했나?”

“아, 아닙니다. 단지 기강이 해이해진 것 같아서···!”

“기강이라. 지금 자네가 내게 기강을 논하는 건가?”

“죄송합니닷!”


병사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의 다리는 바람 부는 날의 버드나무처럼 와들와들 흔들리고 있었다.

어지간히 겁을 먹지 않고서야 나오지 않는 반응이었다. 늑대 마수는 당장에라도 입을 벌려서 병사를 삼켜 버릴 것 같았다.

알카르가 말했다.


“업무에 복귀하도록. 반문은 받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충성!”


경례한 병사들이 물러났다. 달아났다는 표현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들이 건물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알카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것들이란···둘 다 괜찮나? 내가 대신해서 사과하지.”

“네, 네에. 덕분에···.”

“괜한 트집을 잡히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다음부터는 더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알카르는 나긋한 목소리로 조언을 해 주었다.

소년소녀는 황송함에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만 연신 조아렸다.

별안간 소녀를 돌아본 알카르가 질문을 건넸다.


“그대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

“나이요? 어음···올해로 열일곱. 아니, 열여덟이에요.”

“한창 싱그러울 나이군. 부러운걸.”


알카르가 웃었다. 서글서글한 미소에 소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를 훝어보던 알카르가 말을 이었다.


“혹시 괜찮다면 나를 좀 도와주겠나? 딱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한 일이 있거든.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하지만 오늘 할당량이···.”

“그건 걱정 마라. 내가 이곳의 관리자에게 잘 말해 놓을 테니까. 거기, 자네!”

“예입! 갑니다!”


알카르가 팔을 흔들자 저 멀리서 돼지처럼 살이 찐 병사 한 명이 뒤뚱거리며 달려왔다.

아까 둘과는 달리 나이가 꽤 있었는데, 행색을 보아하니 감독관인 것 같았다.

알카르가 말했다.


“사흘간 이 남매에게 휴가를 주도록. 개인적으로 맡길 업무가 있다.”

“1125번과 1126번 말이군요. 예예, 알겠습니다.”


감독관이 굽신거렸다. 멜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이곳의 주민들은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는 듯했다. 사람을 숫자로 부른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1125번 소녀를 힐끔거리던 감독관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흐흐, 운이 좋은 원주민이군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도록.”

“히익, 네엡!”


알카르가 미간을 좁히자 감독관이 쭈그러들었다.

용무를 마친 그는 엉덩이를 걷어차인 돼지처럼 허둥거리며 물러났다.

알카르가 소녀를 돌아보았다.


“이제 됐나?”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동생도 배려해 주시다니···!”


소녀가 눈물을 글썽였다.

늑대에 올라탄 알카르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지. 해가 지기 전에는 끝날 거야.”

“아, 알겠습니다!”


소녀는 그의 손을 잡고 올라탔다.

늑대가 얌전한 걸 보니 이런 일이 자주 있던 것 같았다.

시선을 내린 소녀가 동생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나 다녀올 테니까 숙소에서 쉬고 있어. 알았지?”

“으, 으응···조심해서 다녀와.”


1126번 소년도 손을 흔들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그런지 기뻐하기보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나.”


이윽고 알카르가 떠났다. 소년만 덩그러니 남아 멀어지는 누이를 배웅했다.

레기아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치.”

“······글쎄다.”


멜빌이 눈매를 좁혔다. 뭔가 께름칙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지만, 알카르라는 놈에게서는 언제나 구린 냄새가 풍겼다.

나이는 왜 물어본 걸까. 감독관은 왜 그런 태도를 보였지?

멜빌이 알카르의 행동을 분석하던 차였다.


“야, 좋냐?”

“쥐좆만한 새끼가 아주 신났네. 너 이리 와 봐.”


사라졌던 목소리가 다시 나타났다.

설마하며 고개를 든 멜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달아났던 병사들이 소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벼, 병사님들!”

“아주 꼬셨겠어. 나도 못 받는 휴가를 원주민 나부랭이가 받아?”

“그, 그게···컥!”


소년에게는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방아깨비가 소년의 멱살을 쥐고 뒷골목으로 끌고 갔다.

레기아가 말했다.


“멜빌.”


멜빌은 대답하는 대신 눈짓만 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병사들을 뒤따랐다.

숙소 건물 뒤편에 다다른 방아깨비가 소년을 내동댕이쳤다.


“야. 우리가 개똥으로 보여?”

“우리가 혼나는 모습이 아주 즐거웠지? 내 바지는 어쩔 거야. 엉?”

“아, 아니에요! 한 번도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소년이 고개를 내저었다.

허나 아무리 호소해 봐도 별 소용이 없었다.

병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박살낼 생각이었다.

방아깨비가 총을 뽑아들고, 다른 한 명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들이 낄낄거리며 소년에게 팔을 뻗으려던 찰나.


“나는 했어. 그런 생각.”

“뭐, 뭐야?”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병사가 당황하며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뻐억! 뻑!

레기아가 그들의 복부에 주먹을 한 방씩 꽂아 넣었다.


“억!”

“흐억.”


병사들이 고꾸라졌다.

그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식식거리는 소리만 냈다.

두 사람의 목을 동시에 움켜쥔 레기아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치울게.”

“그러려무나.”


멜빌이 끄덕거렸다.

비유를 인용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자, 잠깐···!”


그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레기아가 양 손에 힘을 주었다.

와드득!

사람 몸에서 나면 안 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억.”


두 병사의 눈이 뒤집혔다.

레기아가 손을 떼자 연골처럼 유연해진 목이 드러났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즉사였다. 바지로 지랄하던 놈의 하반신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더러운 놈.”


멜빌이 혀를 찼다. 그는 다른 병사의 손에 쥐어진 담배를 빼서 입에 물었다.

한 번 들이쉬고 내쉬자 뇌가 팽팽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미래의 담배도 썩 괜찮았다.

레기아는 병사들의 시체를 보이지 않는 골목 깊숙이 던져 버렸다.

손을 탁탁 턴 그녀가 소년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네, 네에···당신은?”

“다행이다. 건강하게 살아.”


그리고 등을 돌렸다. 참 시원시원한 용이었다.

후드만 제대로 쓰고 있었더라면 완벽했을 텐데 말이지.

너무나도 용의자로 특정하기 쉬운 적발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사흘 정도만 자고 일어나 줘야겠어.’


어쩔 수 없이 입막음이 필요했다.

멜빌이 소년을 기절시키기 위해 다가가려던 차였다.


“저, 저기···저기요!”


갑자기 1126번 소년이 레기아를 불렀다.


“제국군은 아니신 거죠···? 그쵸?”

“응. 아닌데.”

“그, 그러면···후우, 처음 보는 사이에 이런 말을 하는게 이상하다는 건 알지만···!”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기립하려던 그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졌다.


“이상하다는 건 알지만···흐윽.”

“정말 이상한 놈이군.”


멜빌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이라도 기절 시켜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멜빌과 레기아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소년이 무릎을 꿇었다.


“저, 저희 누나 좀 구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응?”

“못 돌아올 거에요! 제발, 저한테는 누나밖에 없어요! 벌써 세 명째라구요!”


레기아가 갸웃거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 나왔다.

벙쪄 있던 멜빌이 눈썹을 으쓱였다.


“흥미롭군.”


그가 1126번 소년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자세히 말해 봐라 소년. 뭐가 세 명째라는 거지?”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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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 감응 +1 24.09.06 622 23 14쪽
5 5. 꿈 따위가 아니다 24.09.05 634 19 14쪽
4 4. 조우 +3 24.09.04 702 26 18쪽
3 3. 불시착 +1 24.09.03 811 25 13쪽
2 2. 마지막 비행(2) +3 24.09.02 1,014 31 28쪽
1 1. 마지막 비행(1) +2 24.09.02 1,322 4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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