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급 용기사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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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도 아카데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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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30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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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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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4. 조우

DUMMY

#04



“거기 서라!”


멜빌이 외쳤다.

나무에 부딪힌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이파리와 잔가지가 그의 뺨을 할퀴듯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멜빌은 괴물을 추격하는 중이었다. 시야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다카르 병사의 핏자국이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확실하다. 그건 바르바로스의 눈이었어.’


멜빌은 그림자의 정체가 바르바로스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단지 파충류의 비늘과 꼬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힘과 분노가 들끓는 황금색 눈은 그 오만한 마룡의 것이 분명했다.


“알았다. 이제 알았어.”


겨자를 바른 것처럼 코가 시큰거렸다. 멜빌이 중얼거렸다.


“내가 살아난 것처럼 너도 부활한 게야. 그렇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물방울이 새나왔다.

이럴 줄 알았지. 그 독한 놈이 그리 쉽게 갈 리가 없잖아.

입가에 손을 말아 가져다 댄 멜빌이 목청 높여 소리쳤다.


“이리 와라, 바르바로스! 멜빌이 돌아왔다!”


다시금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그 와중에 널브러진 여인의 팔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뜯긴 단면이 지저분한 걸로 봐서 살아남기에는 그른 것 같았다.

물론 멜빌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그가 다시 바르바로스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였다.


“크워어어억!”


갑자기 터져 나온 괴성에 멜빌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갈색 곰 한 마리가 수풀을 짓밟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눈치없는 짐승 같으니.”


멜빌이 혀를 찼다.

밥을 잘 먹고 다니는지 덩치가 상당했다. 피 냄새나 목소리에 이끌린 듯했다.

그는 총을 내던지고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장전할 시간도 없었거니와 거추장스러웠다.


“너 따위랑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다!”


단검을 뽑아든 멜빌이 노호를 터트렸다.

나무를 들이받거나 올라오려 하는 순간 목에 칼침을 박아넣어 줄 생각이었다.

단칼에 끝내기 위해 힘을 모으던 와중이었다.

파사삭!

갑자기 곰의 측면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바르바로스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새로운 짐승은 몸집이 약간 더 크고, 비늘 대신 갈색 털이 나 있었다.


“···늑대?”


멜빌이 눈매를 좁혔다. 그것은 몸길이가 3m쯤 되는 늑대였다.

단번에 곰의 목을 문 늑대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퀘에에엑! 퀘에엑!”


곰이 발버둥쳤다. 늑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자기와 무게가 비슷해 보이는 곰을 장난감이라도 된 것처럼 가지고 놀고 있었다.

하지만 진정 멜빌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거대 늑대가 아니었다.


“큰일날 뻔했군. 아직 이 숲에는 야만이 남아 있지.”


늑대의 등에는 다카르 군복을 입은 청년이 타 있었다.

금발과 푸른 눈동자가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곰의 최후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우드득!

곰의 목뼈가 부러지는 것을 확인한 청년이 멜빌을 올려보았다.


“괜찮은가. 소년.”

“······.”


멜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전에 봤던 두 연놈과 달리 신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었다.

각 잡힌 군모에는 대위 계급장이 붙어 있었다.


“해치지 않으니 안심해라. 제3 마수병단의 알카르 무어 대위다.”

“······알카르?”

“그래. 들어본 적 있나?”


자신을 알카르라 소개한 청년이 미소지었다.

이름이 귀에 익었다. 총에 맞아 죽어가던 병사가 횡설수설하며 지껄였었다.

본토에서 마수병단을 이끌고 괴물을 잡으러 왔다는.


‘이렇게 어린 놈이 마수병단의 지휘관이라고?’


멜빌은 적잖게 당황했다.

알카르의 주름 없는 얼굴은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 늑대보다 놀라운 것이었다. 마수병단은 자신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존재하던 부대였다.

군마 대신 마수를 타고 전장을 누비는, 다카르의 송곳니 역할을 하던 기병대.

당연히 장교 자리는 경험 많은 늙다리들의 전유물이었는데.


‘꽤 하는 친구인가 보군.’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알카르가 손을 내밀었다.


“뭐, 들어본 적 없어도 상관 없다. 잡아줄 테니 내려와라.”


금속 장갑에는 다카르 제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손목을 이대로 잘라 버릴까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멜빌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짝짝. 고양이처럼 사뿐한 착지를 본 알카르가 박수를 쳤다.


“잽싸구나. 좋은 몸이야.”


멜빌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알카르를 위아래로 훑는 중이었다.

장교용 제복이 고급스러웠다. 덧대어진 흉갑에는 방어 마법이 각인되어 있었다. 늑대의 고삐를 잡지 않은 손에는 기다란 창 한 자루가 쥐어진 채였다.

머지않아 견적을 낸 멜빌이 눈썹을 으쓱였다.


‘역시.’


겨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당한 실력자였다.

다부진 몸도 몸이었지만 느껴지는 마나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기습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몰라도 이 애새끼의 몸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희박했다.


‘총을 버리기 잘 했어.’


나무를 타기 전에 총을 버린 게 행운이었다.

그거 어디서 났냐고 추궁을 들었다면 귀찮은 일이 벌어졌을 터였다. 멜빌은 아예 단검까지 바지 속에 숨겨 버렸다.

곰을 뜯어먹던 늑대가 머리를 쳐들었다.


“크르르.”


마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붉게 물든 입가가 살벌했다.

멜빌의 손바닥보다 긴 송곳니에서 희뿌연 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얼어붙은 곰의 피가 붉은 구슬이 되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추악하군. 전혀 아름답지 않아.’


멜빌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래에서도 마수는 추하고 꼴도 보기 싫은 흉물이었다.

사악한 개조를 통해 탄생하는 이 짐승들에게서는 고결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다 놓치겠어.’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제 주인과 함께 자신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알카르고 마수병단이고 지금은 바르바로스를 만나야 했다.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차였다.

갑자기 인근의 풀숲이 갈라지며 마수병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 무슨 일입니까?”

“씨발.”


멜빌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좋지 않았다.

새로 나타난 마수병은 거대한 들개를 타고 있었다.

알카르가 말했다.


“별 거 아니다. 이 원주민 소년을 집에 데려다 줄 사람이 있나? 근처 마을에 사는 것 같다만.”

“원주민이요? 아아, 어디서 목소리가 들리나 싶더니···어이, 다들 이리 와 봐!”


병사가 외쳤다. 곳곳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빠져나갈 빈틈은 없었다. 순식간에 열다섯 명의 마수병이 멜빌의 주변을 에워쌌다.


‘낭패다.’


심지어 대부분이 마수를 타고 있었다.

알카르와 함께 숲의 괴물을 퇴치하러 온 병력이었다.

짧은 토의를 마친 병사 중 한 명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제가 가겠습니다. 원주민, 식별 코드가 뭐지?”


멜빌이 눈을 감았다. 또 그 멍청한 코드가 나오고 말았다.

말하기도 싫었지만 애초에 자신에게는 식별 코드가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병사들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원주민. 왜 말이 없나.”

“벙어리 아냐? 거 애새끼 눈 한번 못되게 생겼네.”

“이래서 막 잘해주면 안 된다니까. 너 우리 대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는 아냐? 원래대로라면 너희 원숭이들은 눈도 못 마주칠 분이라고.”


빈정거리는 말투는 멸시와 조롱으로 가득했다.

멜빌은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의 면면을 눈에 담았다.


‘꼭 별 거 없는 놈들이 이런 식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빈 마차가 요란하다는 격언은 미래에서도 들어맞는 듯했다.

떼거리로 몰려 있는 것만 아니라면 멜빌은 알카르를 제외한 전원을 죽여버릴 자신이 있었다.

보다 못한 알카르가 부하들을 저지했다.


“그만둬라. 겁을 먹으면 말문이 막히는 법이니.”


알카르는 부하들과 달리 멜빌을 무시하지 않았다.

늑대에서 내린 그가 멜빌과 마주섰다.


“소년, 말을 하기 싫다면 목 뒤를 한번만 보여주겠나? 그 정도는 괜찮겠지.”

“······.”

“안전하게 데려다 준다고 약속하마. 식민지의 주민들도 제국의 귀중한 자산이야.”


말투가 다정했다. 멜빌이 입술을 질겅였다.

별로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아니었지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이 애송이의 호의를 이용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협조하는 척을 하려던 찰나.


“끄아아악!”


누군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저 멀리서, 붉은 용 한 마리가 들개 마수를 입에 물고 있었다.


“너.”


멜빌이 헛숨을 들이켰다.

눈이 아플 정도로 새빨간 비늘이 햇살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뒤쫓던 그림자, 바르바로스라 확신하고 있던 그 용이었다.


‘어리군. 게다가 저 날개는···.’


다만 생김새가 예상과 달랐다.

몸은 가늘고 길었다. 육중한 바르바로스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마르고 유약한 인상이었다.

날개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거대한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원래는 날개가 있었다가 어떤 이유로 뜯겨나간 듯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상처들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멜빌이 혼잣말했다.


“······아름답군.”


그럼에도 굉장히 아름다운 용이었다.

살인 기계에 불과한 마수와는 전혀 달랐다.

길고 유연한 꼬리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채찍 같았다. 용 특유의 으르렁거림이 폭풍의 맥박처럼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두가 그 위압감에 짓눌려 있던 차였다.


“나타났다! 모두 격발하라!”


가장 먼저 마성을 뿌리친 알카르가 늑대에 올라탔다.


“···허억!”

“괴물 녀석, 감히 드로이를!”


그의 외침과 함께 마수병단의 정신이 돌아왔다. 총을 꺼내든 병사들이 용을 겨냥했다.

열 명의 마수병이 고삐 풀린 사냥개처럼 뛰쳐나가는 순간이었다.

타다다다당!

날카로운 총성이 빗발처럼 울려 퍼졌다.


“이런, 도망쳐라!”


멜빌이 외쳤다.

누구보다 용을 신뢰하는 그였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녀석은 자신이 현역 때였다면 당장 병동에 잡아 처넣었을 만큼 상태가 나빴다.


“왜 멍하니 있는 거냐! 그따위 몸으로 뭘 하려고!”

“······.”


하지만 붉은 용은 멜빌을 말을 듣지 않았다.

들개를 내던진 용은 어째서인지 그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마수병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악!”

“초, 총이 안 통하다니. 무슨 괴물이···!”


총알 대부분이 비늘에 튕겨 나갔다.

마수들의 송곳니는 바람처럼 움직이는 용에게 닿지 못했다. 예리한 발톱이 휘둘러질 때마다 인간과 마수가 치명상을 입고 쓰려졌다.

촤아아악!

앞을 가로막던 자칼 마수가 반으로 찢어지는 순간이었다.


“죽어라!”


빈틈을 포착한 알카르가 창을 던졌다.

창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푸른 꼬리를 그렸다.

푸확!

직선으로 날아간 창이 용의 옆구리에 적중했다.


“캬아아악!”

“안 돼!”


서늘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직! 휘청거리던 용이 나무를 들이받았다.

혀를 찬 알카르가 두 번째 창을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안 빗나간다.”


그리고 용을 겨냥했다.

멜빌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바르바로스가 대검에 격추당하는 장면이 눈앞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단검을 뽑아든 그가 알카르에게 달려들었다.


“애미애비도 몰라볼 놈아! 당장 그만두지 못해!”


용납할 수 없었다. 멜빌은 늑대 마수의 꼬리를 붙잡으며 뛰어올랐다.

벌침처럼 예리한 단검이 알카르의 경동맥을 노리고 쏘아지려는 순간이었다.

살기를 감지한 알카르가 고개를 돌렸다.


“너···!”


멜빌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알카르는 당황하면서도 대처에 나섰다.

용에게 겨누어지던 창이 멜빌을 향해 날아들었다.


“에이. 씨발.”


멜빌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단검보다 알카르가 더 빨랐다.

소년의 몸은 멜빌의 사고를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창대가 그의 얼굴을 후려치기 직전이었다.

파아아아앙!

소리가 찢어지는 파공음과 함께, 용이 멜빌의 앞에 나타났다.


“무슨.”


멜빌이 굳었다. 공간 이동에 가까운 속도였다. 둘은 공중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큼직한 황금색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용의 아가리가 들썩였다.


【너. 왜 거짓말 해?】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미성이었다.

벙쪄 버린 멜빌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콰직!

용의 아가리가 쫙 벌어지며 멜빌을 통째로 삼켜 버렸다.


****


“잘 있었어?”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

.

.


“허억.”


멜빌의 눈이 번쩍 떠졌다.

튕기듯이 몸을 일으킨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이 아니었다. 한 방향에서 스며든 빛이 곳곳에 솟아난 종유석과 석순을 밝히고 있었다.


“···동굴?”


멜빌은 동굴 한복판에 서 있었다.

자신이 누웠던 자리에는 푹신한 이파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둥그렇게 부푼 모습이 꼭 침대를 연상케 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멜빌이 앞머리를 쥐어싸맸다.

목욕탕에 들어간 것처럼 목소리가 울렸다.

잡아먹힌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붉은 용은 알카르의 목에 칼침을 놓으려던 그를 꿀떡 삼켜 버렸다. 실제로 멜빌의 몸은 침으로 추정되는 액체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용이 한 짓이겠지. 의도를 모르겠군.’


마수병단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 용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음험한 박쥐 무리만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멜빌이 혼잣말했다.


“그래도 덕분에 살았다.”


하마터면 알카르에게 당할 뻔했다.

상대적으로 피지컬이 떨어지는 소년의 몸이었다지만, 사각에서의 기습에 반응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멜빌이 상황을 타개한 것은 용이 자신을 물고 와 준 덕이었다.

그는 천천히 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꼭 꿈을 꾸는 것 같군.”


스며드는 햇살은 오렌지색을 띠고 있었다.

같은 방향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머지않아 동굴을 빠져나온 그가 짧게 신음했다.


“윽!”


하마터면 실명하는 줄 알았다. 멜빌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안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석양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거목에 둘러싸인 공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허어.”


멜빌이 순수한 감탄을 흘렸다.

천국의 변두리에서 볼 법한 풍경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높게 솟은 나무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직 가을이 아니었음에도 노을에 젖은 이파리는 단풍에 물든 것 같았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공터 한구석에는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윤슬 일렁이는 연못은 바닥이 보일 만큼 맑았다.

주위를 훝던 멜빌의 시선이 한 곳에서 정지했다.


“···저건?”


깊숙한 곳이었다. 거대한 참나무에 인간의 해골 하나가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몸에는 다 해진 가죽옷이 입혀진 채였다.

멜빌이 멈칫거렸다.


“설마.”


낯익은 가죽옷이었다. 그것도 몹시.

자신이 노을빛에 눈을 다친 것이 아니라면 저건 하텐의 용기사가 입는 조종복이 분명했다. 가슴팍에는 용의 머리를 본 따 만든 용성(龍星)훈장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거칠어진 숨을 들이내쉬던 멜빌이 입을 뗐다.


“······나?”


저 세 개를 다 받은 건 하텐의 역사를 통틀어 자신 뿐이었다.

해골의 앞에는 웬 알껍데기처럼 생긴 파편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째서인지 눈에 익었다.

멜빌이 막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거짓말쟁이가 깨어났네.”

“······!”


일전의 미성과 함께, 참나무 뒤편에서 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너는?”


많아봐야 십대 중반이었다. 머리카락은 빨갛고 눈매는 날카로웠다.

누더기처럼 꼬질꼬질한 원피스가 야윈 몸을 가려 주고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나무그늘 속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멜빌이 움찔거렸다.


‘그 용이다.’


자신을 여기 데려온 용이 확실했다.

소녀의 목덜미에는 붉은 비늘 서너 개가 돋아 있었는데, 이는 폴리모프를 어설프게 한 용의 특징이었다.

해골을 마주보며 앉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걸까. 나를 보고는 뭐라 했었지? 바바르? 바르···윽, 까먹어 버렸다.”


해골을 보는 소녀의 눈빛은 가족이나 형제를 대하는 것처럼 다정했다.

멜빌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라고?”

“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그러자 소녀가 멜빌을 돌아보며 으르렁거렸다.

너는 뭔데 끼어드냐는 태도였다.


“기다려. 내 친구랑 말하고 있잖아.”

“허.”


뭐라 말하려던 멜빌이 기가 찬 듯 실소했다.

소녀는 해골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상이 아니군.’


아무래도 머리가 살짝 이상한 용 같았다. 뭐라도 말을 해보려던 차였다.


“있지.”


고개를 뒤로 확 젖힌 소녀가 멜빌과 눈을 맞췄다.


“어떻게 알았어?”


머리카락이 쏟아지며 이마가 드러났다. 세련된 이목구비는 인형처럼 오밀조밀했다.

눈을 깜빡거리던 그녀가 손가락으로 해골을 가리켰다.


“내 친구 이름이 멜빌인 거.”

“······!!”


멜빌의 눈이 커졌다.

해골의 이름은 자신과 같은 멜빌이었다.

그 순간, 멜빌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쳤다.


‘그때···.’


죽음 직전의 기억이 범람하고 있었다.

복수의 맹세를 마친 직후였다. 바르바로스의 등가시가 부서지며 알 하나가 튀어나왔다.

빛을 뿜으며 날아온 알은 멜빌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그는 본능적으로 알을 끌어안으며 추락했다.

이름 모를 하텐의 숲 위로.


“······너.”


기억의 파편이 합쳐지고 있었다.

미래의 세상, 바르바로스와 닮은 용, 과거 자신의 해골과 널브러진 알껍데기.

둘 다 말을 하지 않았기에 바람 소리가 크게 들렸다.

벙긋거리던 멜빌의 입에서 조금 메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바르바로스의 자식이구나.”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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