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급 용기사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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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도 아카데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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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30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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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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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지막 비행(2)

DUMMY

#02



“무너지는구나. 용의 나라여.”


안대 낀 노인이 중얼거렸다.

하나뿐인 눈동자는 멸망하는 하텐을 담고 있었다.

왕국 최후의 보루인 대요새는 이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길에는 시체가 즐비하고, 무너진 민가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기가 한 달 전까지 대륙에서 가장 번창했던 도시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허무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약해진 것은 짓밟히기 마련이니.”


그는 거대한 코끼리의 등에 타 있었다.

높이만 15m에 이르는 짐승의 몸은 육중한 갑옷으로 뒤덮인 채였다. 유일하게 갑옷이 없는 등 부위에는 강철로 된 망루가 지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 다카르의 정예 궁병들이 저주를 먹인 화살을 사정없이 쏴붙이고 있었다.

짐승의 이름은 엘펜.

다카르의 아홉 신수 중 하나인, 용의 불조차 견뎌내는 지상의 전함이었다.


“음?”


별안간 통증을 느낀 노인이 움찔거렸다.

안대 아래쪽의 눈구멍이 따끔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불쾌한 감각이었다.


“···설마.”


그것을 본능이 보내는 경고로 해석한 노인이 시선을 올렸다.

우려가 무색하게도 하늘에는 먹구름만 자욱했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훝어 보던 와중이었다.


“불편해 보이는군. 오르달.”


등 뒤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 신수장(神獸將) 오르달이 고개를 돌렸다.

늑대 가면을 쓴 여인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전하.”


오르달은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여인의 묵빛 머리카락이 열풍에 나부끼고 있었다. 몸의 윤곽을 따라 굴곡진 흉갑에는 지배자에게만 허락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잉그리드 폰 다카르.

다카르 대공국의 지배자이자 오르달의 새 주군이었다.


“의아하군. 자네가 모시던 대공의 복수를 하게 되서 기쁘지 않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전장에 나선지라 늙은 몸이 흥분을 주체 못하는 듯합니다.”

“흥분이라. 짐이 보기에는 겁에 질린 것 같다만.”


대공이 키득거렸다. 오르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오르달이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거짓을 고한 신을 벌해주십시오.”

“이런 사소한 일로 상벌을 논할 만큼 짐은 가혹하지 않다. 이번 여정 내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더군. 그 멜빌이라는 용기사에게 당했던 기억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건가?”

“······참으로 예리하십니다. 전하.”


오르달은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이번 원정 내내 편집증적으로 하늘을 살피고 있었다.


“이해하기 힘들군. 전설의 용기사였다 하더라도 결국 과거의 망령일 뿐 아닌가.”

“전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망령에 얽매이는 군인만큼 쓸모없는 부류도 드물지요. 그럼에도 멜빌의 망령은 저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군요.”

“그 정도였나? 고작 십 년을 활동하고 일선에서 물러난 걸로 안다만.”

“맞습니다. 겨우 십 년이지요. 허나 멜빌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십 년은 다카르에게 있어서 백 년의 압제보다 가혹한 시간이었습니다.”


머리 위로 드리우는 용의 그림자, 불길 속에 타오르는 도시와 사람들.

오르달은 진지하게 멜빌의 활동 기간이 오 년만 길었어도 다카르는 멸망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아직도 하늘 아래를 걷고 있자면 옛날의 지옥이 어른거립니다. 제가 십 년 동안 목숨을 부지한 것은 천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저만큼 늙은 다카르 인의 뼈에는 모두 멜빌에 대한 공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모신 주군인 대공, 즉 공녀의 조부 역시 멜빌에게 목숨을 잃었다.

대공이 주억거렸다.


“하긴, 돌이켜 보면 그 버러지의 마음을 부숴 버린 것도 멜빌이라는 자였지.”


오르달이 침묵했다.

버러지란 그녀의 부친이자 다카르의 전 대공을 지칭했다.

대량 살상 마법이 역류한 그 날, 수도의 절반이 분해되는 것을 목도한 전 대공은 영원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미끼 신세가 되어 폭사하기 전까지 그는 날아다니는 모든 생물을 두려워했었다.

불현듯, 엘펜의 발 아래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 가관이군요. 엘펜의 주인께서 그깟 늙은이를 겁내시다니!”


대공과 오르달이 동시에 시선을 옮겼다.

웃음소리는 표범 형상의 마수에게서 들려오고 있었다.

엘펜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덩치가 상당했다.

화려한 안장 위에는 잘생긴 사내 한 명이 드러누워 있었다.


“신수와 새로운 마법 앞에서는 드래곤도 짐승에 불과합니다. 이번 전쟁으로 증명하셨지 않습니까.”

“자나프.”

“너무 과거에 연연하지 마시죠. 신수장께서는 눈을 하나 빼앗겼을 뿐이지만, 녀석은 모든 것을 잃고 은퇴하지 않았습니까.”


자나프라 불린 사내가 큭큭거렸다.

오만한 태도였지만 오르달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실력 하나는 확실한 젊은이였으니.

저 나이에 자신과 같은 신수장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오르달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던 것은 대공 전하의 계획이 성공해서일세. 프로스트나 엘리제 후작같은 걸물이 살아 있었다면 훨씬 더 어려웠을 게야. 더군다나 하텐의 마룡도 부재 중이지 않았는가.”

“과한 걱정일 뿐입니다. 전하의 계략이 대단했던 것은 인정하지만, 날개 달린 도마뱀들의 명성은 과대평가된 감이 있습니다.”


자나프가 아래로 턱짓했다.

그가 탑승한 신수의 목에는 용의 두개골을 엮어서 만든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자나프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설령 멜빌이 돌아온다 해도 문제 없습니다. 오히려 바라는 바입니다. 그 허울뿐인 전설의 목을, 제가 반드시 대공 전하께”


말이 맺어지려던 찰나였다. 화염의 기둥이 자나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굉음과 함께 적색광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오르달과 대공의 면면에서 그림자가 사라졌다.


“무슨···!”


오르달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윽고 빛이 잦아들었다.

새카맣게 탄 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장 위에서 반쯤 녹은 밀랍 인형처럼 변한 자나프가 떨어졌다. 신수의 갑옷은 들끓는 쇳물이 되어 그의 몸에 엉겨붙어 있었다. 뭉그러진 이목구비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입으로 추정되는 구멍에서, 옹알이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아에. 아아.”


그게 끝이었다. 꿈틀거리던 자나프가 이윽고 움직임을 멈췄다.

인간의 시체 위로 신수의 시체가 쓰러졌다. 숯과 다를 바 없어진 육신은 바닥에 닿는 순간 흙덩이처럼 부서져 버렸다.

펑! 폭발한 잿가루가 열풍을 타고 흩어졌다.


“이건.”


오르달의 전신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익숙한 공격 방식이었다. 오른쪽 눈구멍이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욱신거리고 있었다.

불현듯, 전장 한복판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공습! 공습! 붉은 죽음 바르바로스다!”

“하텐의 마룡이다!”


동시에 폭격이 시작됐다. 일전에 본 화염 기둥 수십 개가 전장에 내리꽂혔다.

콰과과광!

붉은 직선들이 하늘과 땅을 이으며 폭발을 일으켰다. 기둥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잔불은 꽃봉오리처럼 싹을 틔우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전장은 불길에 휩싸였다.

다카르 인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다급히 고개를 든 오르달의 눈에 붉은 용 한 마리가 엇비쳤다.


“···주인 없는 용이 돌아왔구나.”


오르달이 혼잣말했다.

십수 년 만에 보는 자태였다. 바르바로스는 전장의 하늘을 제 집이라도 된 것 마냥 헤집고 있었다. 거대한 아가리에서는 암적색 화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자나프와 그의 신수가 즉사한 것도 납득이 갔다.

전설의 용기사 멜빌의 용.

화룡 중에서도 이런 화력을 낼 수 있는 개체는 바르바로스 뿐이었다.

순식간에 전황이 혼란스러워졌지만, 그는 이내 침착을 되찾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제 와서 무엇을 바꾸려는 거냐.”


멜빌이 없는 바르바로스는 두렵지 않았다.

용은 기수의 능력에 따라 강해지는 동물이었다.

바르바로스는 누구보다 뜨거운 불을 뿜었지만 몸이 둔했다.

단독 개체로서의 놈은 어떤 면에서는 여왕의 용이었던 엑셀리온보다 쉬운 상대였다.

오르달이 막 요격 명령을 하달하려던 찰나.


퍼엉-!


갑자기 파공음과 함께 바르바로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급가속이었다. 그가 당혹성을 흘리기도 전에 거대한 불기둥 하나가 마상(魔像) 위에 내리꽂혔다.


“키에에엑!”


사악한 주문이 멈췄다. 반투명한 거인의 형체가 일그러지듯 소멸했다.

화염이 치솟은 자리에서 병사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어, 어디서 쏘는 거야!”


오르달의 눈이 커졌다. 익히 아는 바르바로스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모든 신수장이 달려들었지만 허사였다. 구름 바깥으로 나왔다가 사라지는 그림자를 쫓는 것이 고작이었다.

콰아아아앙!

그리폰을 타고 추격하던 신수장 한 명이 화염에 휩싸인 채 추락했다.


“어떻게.”


뭔가 이상했다. 바르바로스는 의지를 가진 유성이 되어 전장을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갑자기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경우의 수가 오르달의 뇌리를 스쳤다.


‘아니야. 그럴 리가.’


그리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가만히 전황을 지켜보던 대공이 웃음을 흘렸다.


“날개가 네 장이군. 멋진걸.”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저 용을 보고 한 말이다. 네 장 달린 개체는 처음 보는군.”


대공의 시선은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오르달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면 안쪽의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 전장에서 유일하게 바르바로스를 눈으로 쫓고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르달이 경악한 것은 그녀의 가공할 동체 시력 때문이 아니었다.

손에 못을 박힌 죄수가 낼 법한 탄식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맙소사!”

“왜 그러나?”

“화, 확실히 네 장인 것입니까? 네 장이 확실합니까?”

“침착하라. 날개 넷 달린 용이 그리도 귀한 것이더냐.”

“아닙니다. 그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오르달은 몇 초 사이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다.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대공을 마주보았다.


“전하. 멜빌이 돌아왔습니다.”

“뭐라?”

“바르바로스의 날개는 멜빌과 함께할 때만 네 장이 됩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후퇴해서 전략을 다시 짜야 합니다.”


대공은 대답하지 못하고 벙쪄 버렸다.

오르달은 눈을 뜬 채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 같았다.


“분명 놈은 더 이상 용을 탈 수 없을 텐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지금 벌어지는 참상은 멜빌이 돌아온 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벌써 아홉 신수장 중에서 둘이 당했다. 병사는 어림잡아도 천 명이 넘게 죽었다.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제작한 마상들도 하나둘씩 소멸하고 있었다.

대공이 고개를 내저었다.


“침착해라. 후퇴하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전하.”

“과연 전설의 용기사로다. 자네가 그토록 경외한 이유도 알겠어. 이래서는 불이 꺼질 때까지 진입조차 할 수 없겠군.”


대공이 감탄했다. 바르바로스가 지른 불은 어느새 장벽을 이루고 있었다.

대요새를 빙 두른 화염의 울타리는 접근하는 모든 존재를 불사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아군의 퇴로마저 차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따로 빠져나갈 통로가 마련되어 있을 터였다.


“천 명은 바쳐야겠다. 포로가 몇 명 남았지?”

“···많아 봐야 두 자릿수입니다. 엑셀리온을 격추하는 데 워낙 난항을 겪었던 터라.”

“그렇다면 이쪽 패를 소모해야겠군. 남은 포로 전부와 평전사 천 명을 제물로-”


갑자기 대공이 말을 끊었다. 몸을 돌린 오르달이 눈썹을 치켜떴다.

바르바로스가 그들을 향해 강하하고 있었다. 가시에 가려졌는지 멜빌은 보이지 않았다.

대공과 눈이 마주친 바르바로스가 거칠게 포효했다.


【크아아아!!!】

“재밌구나. 정면 승부를 하자는 것이냐.”


대공이 미소지었다.

그녀가 반지 낀 손을 들어올리는 순간이었다.

화륵!

바르바로스의 형체가 일그러지더니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음?”


대공이 멈칫거렸다. 예상 밖의 전개였다.

애초에 환각이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찰나.


“네가 대공이구나.”


그녀의 턱 밑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공이 시선을 내렸다.

웬 늙은이 하나가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가면을 쓰는 걸 보니 얼굴에는 영 자신이 없는 모양이지?”

“무슨···.”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멜빌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용의 비늘을 가르는 참룡검이 호를 그렸다.

스각! 대공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대, 대공 전하!!”


오르달이 절규했다.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비틀거리던 대공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르달을 곁눈질한 멜빌이 입꼬리를 올렸다.


“살아 있었나. 애꾸 애송이.”

“멜빌, 네가 감히!”


오르달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노인이 되어 있었지만 멜빌이 분명했다.

순식간에 검을 뽑아든 그가 참격을 날렸다.


“이크, 위험하잖아.”


하지만 멜빌은 오르달과 검을 맞대지 않았다.

어깨를 비틀어 검격을 피한 멜빌은 곧장 엘펜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뭐?”


오르달이 당황했다. 투신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황급히 뛰어간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

눈앞에 붉은 벽이 드리우나 싶더니 강풍이 몰아쳤다.


“크윽!”


오르달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고개를 들자 수직으로 비상하는 용이 보였다. 일순 사라졌던 바르바로스였다.

오르달은 그가 엘펜의 다리 밑에 은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했다.


“이런 술수를···!”


멜빌은 어느새 바르바로스의 등에 타 있었다.

전장을 내려보던 그가 중지를 쳐들었다.


“입을 벌리고 잘 받아 먹도록 해라! 늙은 멜빌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동시에 바르바로스가 목을 비틀었다.

지상을 겨냥한 아가리가 벌어지며 검붉은 화염이 터져 나왔다.


“큭!”


오르달의 눈이 커졌다.

바르바로스의 불은 40년 전 다카르에서 봤던 것과 같은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가 대공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순간, 해일처럼 쏟아진 화마가 엘펜을 집어삼켰다.


****


“으하하, 어떠냐, 다카르 돼지들아!”


멜빌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바르바로스의 등에서 전투를 복기하고 있었다.

대공은 죽었다. 다카르 군이 화염을 피해 후퇴하는 꼬낙서니는 꼭 개미 떼 같았다.


"허억···봐라. 내가 오 분이면···충분하다고 했지?”

“······.”


바르바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날개 퍼덕이는 소리만 나지막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음만 같았으면 더 싸우고 싶었지만, 멜빌의 심장은 이미 한계를 아득하게 초월한 뒤였다.

주먹만한 핏덩이를 토해낸 멜빌이 구역질했다.


“쿨럭! 컥···우욱.”


눈앞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생명을 불꽃에 비유한다면 자신은 잿더미 아래 반짝이는 불씨보다 못한 존재일 터였다. 푹 젖은 수염 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죽겠구만. 역시 나이는 먹을 게 못 돼.”


그럼에도 후회는 남지 않았다.

지난 수십 년 간 지옥 같은 훈련을 하고, 감응력을 올려 주는 약물을 복용한 것은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고작 몇 분의 마지막 비행을 하기 위해 그는 밑 빠진 독에 물을 계속해서 부어야 했다.

멜빌이 재차 질문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쿨럭, 너도 이만큼 날뛴 건 오랜만이지 않아?”

【시끄럽다. 안 그래도 머지않은 명을 재촉하지 마라.】


그제야 싸늘한 대꾸가 돌아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바르바로스의 미간에는 주름이 팍 들어가 있었다.


“후우우···세월이 야속하구나. 이 노기사의 마지막 전투는 어땠나?”

【형편없었다. 전성기에 비하면 절반의 기량도 내지 못했어.】

“변함없이 가혹하구만···흐흐, 그런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빌어먹을 심장만 다치지 않았어도 만 명은 더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멜빌이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적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하텐은 결국 멸망할 터였다.


“그래도, 킹은 잡았으니까.”


그럼에도 멜빌이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이유는 대공을 처치해서였다.

네 장의 날개를 펼친 바르바로스를 유일하게 눈으로 쫓던 자.

내버려 뒀다면 틀림없이 대륙을 위협하는 거악으로 등극했을 터였다. 그 비극을 저지한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테메르도 혼란을 틈타 빠져나갈 수 있겠지.

눈속임 작전이 통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커억!”


멜빌의 몸이 다시 한 번 들썩였다.

입가를 문질러 닦은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군.”


더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입 안에 핏물이 가득함에도 비린맛을 느낄 수 없었다.

말단부터 서서히 굳어 가는 팔다리가 임종이 닥쳤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바르바로스···더 높이 가자.”


어차피 하늘에서 죽을 거라면 파란 하늘을 보고 싶었다.

바르바로스는 아무 말 없이 고도를 높였다. 자욱한 구름 탓에 옷이 축축해지고 있었다.

계약자가 힘을 다했기에 바르바로스의 날개는 다시 두 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멜빌이 말했다.


“역시 너는···날개가 네 장 달려 있을 때 제일 근사해.”

【쓸데없는 소리를.】

“아니, 정말이다. 두 장은 별로야. 너는 몸이 워낙 두터워서 불 뿜는 돼지 같거든. 이제 여생은 돼지로 살아야겠구나···.”


멜빌이 웃었다. 인생 마지막 농담에도 바르바로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왜 나와 계약한 거냐.】

“으응?”

【네놈에게는 더 좋은 선택지가 많았다. 엑셀리온, 티그벨. 인정하기는 싫지만 테네그리프도 강력한 용이었지. 그 모두의 부름을 받았음에도 너는 나를 선택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용기사를 죽인 나를.】


갑자기 바르바로스가 말을 걸었다.

멜빌이 갸웃거렸다. 청력이 사라지기 전에 말을 섞을 수 있어서 기쁜 한편,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지 의아했다.


【대답해라. 이유를 듣고 싶다.】


바르바로스가 채근했다.

힘없이 숨을 들이내쉬던 멜빌이 입술을 달싹였다.


“······폭풍에는 죄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뜻이지.】

“너는 애초에 폭풍으로 태어났다···거칠고, 호전적이고, 두려울 만큼 강했지. 나 이전에 너와 계약한 용기사들은 날뛰는 바다에서 항해할 능력이 안 됐을 뿐이야···허억, 주제를 몰랐기에 그들은 단명한 거다.”


바르바로스는 자신의 강함만큼 위험한 용이었다.

싸움법은 거칠었고, 감히 계약을 맺은 용기사에게는 일반적인 용의 수십 배에 달하는 마나와 감응력을 요구했다.

수많은 용기사들이 그의 힘을 탐내서 계약을 맺었지만 모두 죽고 말았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좋아했다···나를 닮은, 오만하고 강한 네가 좋았다. 그래서 남들에게도 폭풍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난폭함의 미학을···.”

【난폭함의 미학이라.】

“단 한 번도 계약을 후회한 적이 없다. 내 짧은 전성기는, 너와 함께했던 십년은 황금보다 빛나는 시간이었다. 벗의 등에서 이렇게 숨을 거둘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

“부디 좋은 기수를 만나기를 비마. 네놈과 하늘을 날 수 있어서,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이었다.

전성기는 짧았을지언정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반짝거렸다.

부와 명예, 우정, 아름다운 여인들.

바람 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바르바로스는 여전히 구름 속을 날고 있었다.

달빛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아직 탁 트인 하늘이 나오기에는 먼 것 같았다.

바르바로스가 그를 불렀다.


【멜빌.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부탁이라니···지금 말이냐?”

【그래. 지금밖에 못 하는 부탁이다. 지난 12년 동안 내가 왜 자리를 비웠나 궁금해 했었지.】


목소리가 비장했다. 멜빌의 눈이 커졌다.

바르바로스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사실은···.】


바르바로스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날개 밑의 구름이 찢어지며 집채만한 대검이 튀어나왔다.


“뭐.”


멜빌이 정색했다.

회피 기동을 시도하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바르바로스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퍼억!

그대로 쇄도해온 대검이 바르바로스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

“맙소사, 바르바로스!”


꿰뚫린 위치가 좋지 않았다. 멜빌이 비명을 질렀다. 바르바로스가 피를 토했다.


【커헉, 컥.】

“바, 바르바로스! 정신 차려라, 바르바로스!”


바르바로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명멸하는 황금색은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균형을 잃은 거구가 상승을 멈추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안 돼.”


멜빌이 헛숨을 들이켰다.

누구보다 많은 용을 탔고, 그만큼 죽여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치명상이었다. 대검은 바르바로스의 심장이 있는 자리를 꿰뚫고 있었다. 시커먼 아지랑이가 검신 위로 스멀거리고 있었다.


“안 돼. 안 된다. 이런 법이···허억,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멜······빌···.】

“눈을 감지 마라! 늘 하던 대로라면 이겨낼 수 있어! 정신을 집중하고, 나와 네 마나를 상처 부위에···크학!”


바르바로스에게 마나를 보내 주려던 멜빌이 쓰러졌다. 심장의 흉터 탓이었다.

그의 마나는 가슴에 얽힌 채 움직이지 않고 체내로 역류하고 있었다.


“바르, 바르바로스···.”


멜빌은 바들거리며 얼굴을 들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충혈된 눈 아래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멜빌이 미친 사람처럼 눈가를 문질러 닦던 와중이었다.


[하는 수 없지. 부탁은 없던 일로 해야겠군.]


머릿속에 바르바로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성을 못 낼때 사용하는 전음 마법이었다.


“바르바로스?”

[즐거웠다.]


멜빌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훨씬 더 작아진,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나지막이 번졌다.

[그렇지?]

“너···!”


그것이 끝이었다.

간신히 시야를 되찾은 멜빌이 바르바로스를 쳐다봤다.

거대한 눈동자는 빛을 잃고 꺼진 채였다. 멜빌이 그의 비늘을 움켜쥐었다.


“바르바로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힘이 다한 날개가 정지하며 추락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어느 순간, 구름이 찢어지며 시야가 탁 트였다.


“저건.”


멜빌의 눈매가 좁혀졌다.

전장 한복판에 못 보던 생물이 버티고 서 있었다.

팔이 네 개 달린 거인이었다. 그 덩치가 어지간한 첨탑에 비견될 만 했다.

근육질 몸에는 처음 보는 글자로 쓰여진 문신이 빼곡하게 새겨진 채였다. 네 개의 팔에는 아까 봤던 대검이 각각 한 자루씩 쥐어져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 충격적인 외견이었지만 멜빌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온몸에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엘펜, 그 거대한 코끼리의 등 위에 다카르 대공이 서 있었다.

멜빌을 발견한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명중.”


분명 잘렸던 머리가 붙어 있었다. 대공은 멜빌을 향해 검지를 뻗고 있었다.

옆에는 새카맣게 그을린 오르달이 서 있었다.


“똑바로 누르게 신수장. 이러다 떨어지겠어. 그러면 만 명이나 바친 보람이 없잖나.”

“···죄송합니다. 전하.”


행색을 보아하니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듯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대공의 정수리를 위에서 꾹 누르고 있었다.

마치 손을 떼면 목이 다시 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대공이 말했다.


“썩 유쾌했다. 멜빌.”

“너···.”

“그대를 잊지 않겠다. 잠깐이나마 짐을 오싹하게 한 것은 경이 처음이었다. 짐은 그대의 용맹을 기리는 석판을 세울 것이다.”


대공의 입가 위로 균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텐이라는 망국의 토사 위에.”

“······감히.”


멜빌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괴물이 뭔지, 대공이 어떻게 살아났는지는 모른다.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바르바로스였다. 늘어진 혓바닥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힘차게 퍼덕이며 바람을 가르던 날개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멜빌은 계약자였기에 느낄 수 있었다.

벗의 죽음을. 영원한 이별을.

핏물이 목구멍을 역류하고 있었지만, 멜빌은 그것을 뱉지 않고 다시 삼켰다.

그리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나는 네놈들을 죽일 거다.”


멜빌의 머리 위로 세상이 쏟아지고 있었다. 불과 피, 죽음으로 점철된 세상이었다.

그는 대공과 일곱 신수, 그 위에 올라탄 다카르 신수장들의 면면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세가 존재하지 않기를 빌어라. 이건 맹세다.”


귓가에서 바람이 포효하고 있었다.

더 저주를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상과의 간격은 눈에 띄게 좁아진 채였다.

그가 증오 어린 눈빛으로 다카르를 노려 보던 찰나.

파아아앗!

갑자기 바르바로스의 주검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


멜빌이 고개를 들었다.

빛은 바르바로스의 가장 큰 등가시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콰장창!

불현듯 등가시가 깨지며 사람 머리통 만한 구체 하나가 튀어 나왔다.

바람처럼 날아든 구체가 멜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알?”


멜빌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구체는 영락없는 알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멜빌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끌어안았다. 추락하던 남자와 땅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뭉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멜빌의 의식이 끊어졌다.


그것이, 전설의 용기사 멜빌의 최후였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르바로스!”


신음하던 멜빌이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었다.

튕기듯이 몸을 일으킨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허억..이건?”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바르바로스와 함께 추락한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멜빌이 멈칫거렸다.

타오르는 전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그는 풀 짧은 들판 위에 홀로 서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야트막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가···.”


더는 심장이 아프지 않았다. 소실됐던 오감도 완벽하게 돌아온 채였다.

멜빌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냇가를 향해 걸어갔다. 갈증이 너무 심해서 목부터 축여야 할 것 같았다. 쪼그려 앉아 손을 뻗던 그가 얼어붙었다.


“뭐야 이거.”


수면에 비친 얼굴은 익히 아는 늙은이의 것이 아니었다.

웬 애새끼 한 명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이게 나라고?”


덮수룩한 머리카락은 새벽처럼 검었다. 앳된 얼굴에는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멜빌은 갈증이 나던 것도 잊어버린 채 벙쪄 버렸다.

멍하니 물에 비친 자신을 쳐다보던 도중이었다.


“수상쩍은 놈이군. 이 주변에서는 못 보던 것 같은데.”


갑자기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멜빌이 몸을 돌렸다. 스무 걸음 뒤에서 생경한 제복을 입은 사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검이 아닌 요상한 쇠붙이가 쥐어져 있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사내가 추궁하듯 말했다.


“거기 너, 식별 코드를 말해라.”

“이건 또 무슨 당나귀 좆 빠는 소리야.”


멜빌이 눈살을 찌푸렸다.

황량한 들판 가운데서, 제 12구역이라 적힌 금속 간판이 바람에 삐걱거리고 있었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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