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함께 부활한 축구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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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윈리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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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윈리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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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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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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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승재

DUMMY

6.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승재


이승재가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 했을때 그는 최악의 영입이라 욕을 먹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이승재는 영국축구시장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선수중에 하나다. 21/22시즌에선 헤리케인, 모하메드 살라, 케빈데브라이너 같은 월드클래스와 함께 EPL TV광고의 메인모델로 섰다.


세계에게 가장 축구를 잘하는 사람들이 뛰고있는 그곳에서 그 누구도 아시아의 작은 축구 변방에서 날아온 선수가 EPL의 정상에 서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 했다.


이승재는 타고난 천재는 아니었다. 철처히 훈련된 득점기계다.


그렇게 말할수 있는 이유는 이승재에게는 위대한 스승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스승은 바로 그의 아버지인 이정웅이다. 그의 아버지는 축구선수 였기 때문에 어릴적부터 공을 가지고 놀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젊었을때 부상으로 이른 은퇴를 했다. 때문에 늘 스스로를 실패한 선수라 말했다.


직업으로서의 축구선수가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지 경험했기에 이승재에게 절대로 축구선수가 되라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승재에게 축구는 그저 공놀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이승재에게 축구부에 들어가자고 조른것이 바로 나였다. 나와 이승재는 유치원 기린반때 만났다. 이승재와 함께 동네 골목에서 공을 차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나는 한창 축구에 재미가 붙었고, 그무렵 나와 이승재는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이승재에게 축구부에 같이 들어가자고 졸랐고 그렇게 해서 나와 이승재의 축구인생이 시작됐다. 이승재는 나와 가장 친했기에 나와 놀기 위해서 억지로 축구부에 들어간것이다.


우리는 축구부의 에이스였다. 내가 이승재 보다는 더 잘했고 두각을 보였다. 이승재는 나에게 밀려 내 교체 선수로 주로 벤치에 앉아있었다.


이승재는 아버지께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인 이정웅은 이승재에게 진지하게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건지, 힘들어도 후회 안 할 자신이 있는지를 되물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꺼예요!"


아들의 자신있는 대답에 이정웅은 자신의 실패를 거울 삼아 아들의 꿈과 자신의 꿈을 동시에 이루려했다. 나와 축구부에서의 훈련이 끝나고 이승재는 아버지와 따로 훈련을했다.


우린 같은 중학교에 들어갔다. 가장 친한 친구인 승재와 같은 중학교에 배정 받은것을 알고 포옹을 하며 기뻐했다. 중학교 3년동안 이승재는 키가 155에서 176까지 대나무 자라듯 커졌다. 그리고 축구 실력도 키 처럼 엄청나게 성장했다.


나도 중3때 키가 175까지 컸으니 작은키는 아니었다. 하지만 신체검사때 이승재보다 1CM가 작은것을 알고 키가 커지기 위해 별짓을 다했지만 결국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이승재는 183cm, 나는 181cm이 되었고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이승재의 프로필을 봐도 키가 아직 183cm인것을 보니 그 놈도 거기가 끝인가 보다.


우린 고등학교도 함께 진학했다. 이승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친구라곤 우리 서로밖에 없는듯 했다.


중학교 3년을 거치며 이승재의 축구 실력이 상상 이상으로 발전했음을 경기를 한번 뛰고 난 후에 바로 느낄수 있었다.


나와 이승재는 포지션이 겹쳤고, 친했지만 같은팀에선 경쟁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은 나와 이승재를 동시에 쓰며 호흡을 맞추게 했다. 우리 둘은 딱히 라이벌 의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만들어낸 라이벌 구도였지 우린 관심이 없었다.


이승재와의 호흡은 꽤나 잘 맞았다. 이승재와 나는 서로 어시스트를 밀어주며 밥 먹듯이 골을 넣었다.


우린 매일 같이 먹고 자고 연습했다. 우리 둘은 최고의 투톱 공격수였고 전국 고등학교 축구 대회를 연승하며 우승에 가까이 다가갔다.


축구협회에서도 우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우린 영혼의 단짝처럼 항상 붙어다녔다.


그쯤 이승재가 나에게 했던 약속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유럽에 나란히 진출해 같은 팀에서 뛰며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자는 그 약속! 난 왠지 그 것이 허왕된 꿈이 아닐거라고 확신했다. 우린 전국 최고의 투톱이었으니까


그 일이 있기전까지는...


어느날 나와 승재가 다른 팀이 되어 모의 경기를 가졌다. 훈련이지만 늘 실전 처럼 했고, 17살 밖에 안된 우리들은 한창 테스테토스테론이 넘쳐났다.


내가 공을 몰고 드리블을 할때 승재가 따라붙어 수비를 했고, 나는 승재를 제끼고 골대를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승재는 뒤늦게 공이 아닌 내 발목에 태클을 했고, 난 발목을 꺽였다.


"아 안돼!"


이승재는 자신의 태클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태클이 들어갔을때 이미 이건 크게 사고가 났음을 선수 본인이 제일 잘 알수 있다.


이승재는 쓰러진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상태를 살폈다. 그의 비명은 더 커졌다. 내 발목은 기형적으로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이승재는 나의 끔찍한 발목 상태에 충격을 받고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땅에 쳐박고 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축구부에 연습경기에 의료진따위는 없었다. 감독은 얼른 나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바보같은 나는 오히려 이승재가 너무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이었다. 나는 감독에게 업힌채로 억지로 이승재를 향해 입고리를 올렸다.


그후 부상과 회복으로 6개월 가량 경기를 뛰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전국 고등학교 축구 대회 경기에 불참했고, 이승재는 그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 했다. 난 병실에 누워서 그 경기들을 지켜봤다. 아쉬웠지만 우리학교가 우승하는걸 보며 위안을 삼았다. 병원에서 퇴원하면 더 강해질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대회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둔 이승재는 U-17 청소년 국가대표에도 발탁되었다. U-17 대표팀에서도 이승재는 최고였다.


나는 몇 달이 지나서야 간신히 재활 훈련에 돌입 했고 이승재는 내 옆에서 재활을 도왔다. 승재의 아버지 또한 나를 어떻게든 다시 그라운드에 세우려고 애썼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복귀를 했지만 부상의 여파로 예전의 폼으로 올라오기는 쉽지 않았다. 주전 공격수였던 나는 자주 교체가 되었고, 그 자리는 늘 이승재가 채웠다. 경기에 이겼어도 이승재는 라커룸에 돌아와 나를 가장 먼저 찾았고, 매번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나도 곧 제 기량을 회복할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이승재를 오히려 다독였다.


하지만 우리 둘은 곧 헤어지게 되었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어린 우수선수들을 뽑아서 독일로 단기 연수를 보내줬는데, 거기에 이승재가 포함 되었던 것이다. 나는 축하를 해줬지만 이젠 초조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내가 승재보다 조금 앞서간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조금씩 뒤처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초조함은 나를 더욱더 추락시켰다. 돌아간 발목은 다시 돌아왔지만 부상당하기전의 폼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 사이 이승재는 19살의 나이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독일로 넘어갔다. 독일 2부리그인 홀슈타인 킬에서 그의 해외축구 선수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의 아버지 이정웅은 이승재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다. 이정웅은 이승재의 유럽생활을 지원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모든 생활을 접고 독일로 들어갔다. 이승재가 유소년 숙소에 있을때 그의 아버지는 훈련장에서 가까운 허름한 모텔에서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이승재는 훈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세찬 비가 몰아 치는 날 이승재는 훈련중 쓰러졌고. 너무 힘들어 포기 하고 싶었다. 문득 훈련을 지켜보고 있을 아버지를 찾았는데, 이승재의 아버지는 훈련장 밖 커다란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며 그를 지켜 보고 있었다. 이승재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팀 훈련이 끝나면 다시 아버지와 함께하는 개인 훈련에 들어갔다. 죽도록 지켜운 기본기를 몇년째 시켰다. 왼발 오른발로 번갈아 가며 트래핑을 하루에 수천번을 반복했고, 쓸데없다고 생각한 팔굽혀 펴기도 하루에 200개를 채우지 못하면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그렇게 그의 독일에서의 시간을 흘렀다. 그 사이 독일 클럽에서의 첫골이 터졌고, 두번째 골, 세번째 골... 홀슈타인킬에서 3년간 34골을 넣었다. 24살의 젊은 공격수에 대한 다른 클럽들의 관심은 높아졌고, 이승재는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에 입성했다. 이승재는 노란 유니폼을 입고 입단식을 하며 아버지를 부등켜 안았다. 둘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그때 나는 의왕 택배 물류창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하고, 나보다 못 하는 후배들에게 밀려 벤치에 앉아 있는것은 지옥보다 힘들었다. 방황했고, 이승재와도 연락이 끊겼다. 나를 잡아주는 어른들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축구를 포기했다.


쉬는 시간에 이승재가 도르트문트에 입단했다는 뉴스 가사를 봤다. 누구때문에 이 고생을 하며 축구를 포기했는데, 분노가 차올랐지만 내가 할 수 있는건 없었다. 그저 거기까지가 이승재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점이길 바랬다. 이승재가 얼른 추락하길 빌었다.


하지만, 이승재는 노란 유니폼을 입고 벌처럼 분데스리가를 쏘아 붙였다. 입단 첫 해에 적응기도 없이 11골 6도움을 올리더니, 다음 시즌에는 14골 10도움으로 분데스리가 2년만에 10-10 클럽에 가입을 했다. 이젠 영국과 스페인에서까지 이승재를 데려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아스날과 아틀렌티코 마드리드에선 꽤나 적극적으로 이승재를 영입하려 했다.


분명 지금의 팀보다 빅클럽이긴 했지만, 이승재의 아버지는 도르트문트에서 조금더 선수 생활을 보내기를 원했다. 지금 아스날이나 아틀렌티코 마드리드로 간다면 벤치 후보 선수밖에 될수 없다는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승재는 2년을 더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뛰었다. 그리고 2년간 분데스리가 우승과 챔스 4강이라는 성적을 내고 27살의 나이에 도르트문트의 간판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난 물류센터의 조장이 되었다. 축구에 대한 생각은 일절도 없었고, 회사 야유회때 족구 몇번 차는것 이외에는 전혀 공을 만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는 잊혀졌다.


이승재만 아니었다면 나도 유럽에서 뛰고 있을까? 아니 유럽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K리그에서라도 축구를 하면서 먹고 살았을텐데... 이젠 다 지난간 일이지..


일이 끝나면 늘 안주 없이 소주를 마시며 이승재의 축구경기를 시청했다. 이젠 그를 응원하지 않았다. 제발 경기력이 안 좋기를, 퇴장 당하기를, 빌고 빌었다. 지금 나락으로 떨어진 나의 처지를 비관하며 이승재를 저주했다.


그의 추락을 기도 했지만 이승재는 매년 기록을 갈아치웠고, 드디어 독일을 떠나 더 큰 빅리그로의 이적을 결심했다. 행선지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세계 최고의 클럽인 맨체스터 시티!


그가 맨체스터시티에 입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때 난 다시 축구공을 들었다. 27살의 나이에 다시 축구를 시작한다는건 무리였다. 대신 축구를 가르쳐보자 생각했던 것이다. 물류센터일을 그만 두고 다시 연습을 시작 했지만 당연히 축구 실력은 퇴보했다.


하지만 더이상 다른 일을 하며 살기보다, 축구로 먹고 살고 싶었다. 그렇게 이승재가 맨시티에서 활약하는 5년 동안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모은돈과 대출로 작은 유소년 축구클럽을 인수했다.


나와 이승재는 돌이킬수 없이 차이가 벌어졌고, 이제는 연락조차 할수 없는 저 꼭대기에 위치한 신처럼 보였다. 사실 우리 둘은 싸운적도 절교한 적도 없었다.


독일로 떠날때도 공항에 가서 배웅을 했다. 이건 순전히 몇년간 내가 스스로 키운 증오심이었다. 난 하루의 대부분을 이승재에 대한 증오와 질투로 보냈다.


이승재는 나에 대해 하루에 단 1초라도 생각할까? 아니 나를 기억이나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새벽마다 이승재가 출전하는 EPL경기를 시청할뿐이었다.


***


우리나라에서 이승재가 EPL에서 활약하는걸 싫어하는 사람이 나 밖에 없을꺼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승재의 활약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것이 아니라 그냥 불편한 사람 말이다.


바로 대표팀 감독 프랭크 램파드였다. 팀의 에이스의 폼이 절정이면 감독이 좋아해야 하는것이 당연하지만 문제는 이승재가 클럽에서 만큼 국가대표에서의 활약을 못해주고 있었기때문이다. 더군다나 클럽에서 이승재의 활약이 계속 될수록, 언론에서는 램파드 감독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높아졌다.


100년에 나올까 말까한 선수를 데리고 그런 성적 밖에 못 나오는지, 모든 것이 감독의 자질 문제라고 지금이라도 새 감독을 선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의 활약을 보며 자신도 충분히 한국을 강팀으로 만들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했지만 처음 해보는 국가대표팀 감독의 어깨는 무거웠다. 거기에 초반 평가전 성적까지 부진하자 축구협회에서도 램파드 감독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대했다. 또한 감독의 선수 기용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렘파드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져있었다.


램파드 스스로 찾아낸 보석같은 선수는 없었다. 선수 발굴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새로운 선수를 찾기 램파드는 K리그 경기장을 돌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선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승재 하나만 보고 가는 팀이라는 비판을 벗겨내기 위해 뉴페이스를 찾아 방황하던중...


그런 와중에 나를 일산 호수공원에서 만난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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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 램파드와 5인의 프로패셔널 24.09.16 19 0 12쪽
7 7. 통역사 24.09.15 20 0 12쪽
» 6.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승재 24.09.14 27 0 14쪽
5 5. 호수공원 메시 24.09.13 26 0 12쪽
4 4. 프랭크 램파드 24.09.12 35 0 15쪽
3 3. 국가대표 24.09.11 45 1 12쪽
2 2. 축구의 신 24.09.11 61 1 11쪽
1 1. 정영수의 한심한 하루 24.09.10 74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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