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당한 해결사가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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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과수
작품등록일 :
2024.09.09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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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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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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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이 있었다

DUMMY

“한 왕이 있었다.”


전란의 시대였다. 그러나, 전란을 규합한 시대기도 했다.


“각칸.”


영웅들이 모였다. 묘한 시대였다. 갈기갈기 찢어진 세상을 봉합합소사 신의 축복이라도 내려진 듯, 각자가 한 시대를 풍미할만한 영웅들이었으므로.


“그것이 왕의 이름이었다.”


각칸.


한 왕이 있었다.


“황제의 전언을 받들겠다. 우린 이를 기점으로 제국의 깃발 아래 하나의 적만을 둘 것을 기약한다.”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제국의 백금빛 석상 위로 수많은 대륙의 얼굴이 비쳤다.


“전 대륙의 엘프를 대신해 전하니, 대지모신이 기약한다.”

“놈조차 우리 전쟁의 권역을 흐트러트릴 순 없다. 기약하겠다.”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을 것이다. 의회의 첫 대상은 엘프, 그다음은 오크였다.


그 의의가 흉포하고 야만성만 가득한 돼지들도 모이게 한 것이다.


“놈들의 목숨줄도 별로 남지 않을 테다. 기약하겠다.”

“대요정의 신비가 적을 찢어놓기를. 기약하겠다.”


드워프와 요정이었다. 늑대인간과 그 앙숙인 흡혈귀, 오우거와 놀이었으며 쥐인간과 하피, 이내 미노타우로스까지 합세했다.


어둠에 동족을 잃은 종족은 어둠만이 점철된 대륙에서 그리 드물지 않았다.


“...평화의 시대를 되찾길 고대하오니, 전 인류는 이로부터 각칸의 섬멸을 선포하는 바이다.”


왕이었다.


한 왕이었다.


“각칸.”


쩌적-!


소리 없이, 다만 섬광만이 번개로서 내리쬐는 그곳의 주인이 ‘왕’이었다.


“흑마법의 시초자. 유일하게 모든 생물 위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인물. 천군만마가 그의 땅에 발을 들인 것은 머잖은 일이었다.”


오직 어둠만이 소리칠 수 있는 그곳을 그들은 저주받은 땅이라 일컬었다. 한없이 고요하다. 하지만 세상 어떤 것보다도 끔찍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저것은...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어둠이 뒤틀리고 있었다. 길 잃은 수풀의 새끼 사슴일 뿐이었다.


파리가 꼬이듯 어둠이 새빨간 사체 위로 퍼져나가고, 이내 어떤 무언가가 형성되기도 잠시. 어둠이었다.


직전의 사체의 모습을 똑 닮은, 그저 어둠이었다.


“...신이시여. 당최 이게 무슨.”


썩어가는 요새, 억겁을 방치된 태곳적의 유적들... 곰팡이처럼 피어난 어둠이 시야도 그들의 마음도 서서히 좀먹었다.


기사단의 검이 오크의 그 도끼가, 그 각각의 화살과 손톱과 어떤 날붙이가 어둠을 꿰뚫는대도 어둠은 다시금 베어낸 그곳에서 똑같이 피어올랐다.


“겁먹지 마라, 각칸의 성채까지 멈추지 말고 진군하란 말이다!”


진흙과도 같았다. 발이 빠질수록 더더욱 빠져가는.


끝없는 절망 속에 겁도 없이 발을 들인 것이다.


“...발사! 빛의 화살! 장전, 발사! 장전, 발사!”


그러나 점차 역설적으로 보인 희망이었다.


어렴풋한 빛 아래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위 어렴풋한 그 목숨들. 바람을 스치는 촛불 같은 그 목숨들.


목숨 외엔 잃을 것이 없었다.


“거룩한 분이 함께할지니, 죽여라! 부숴라! 어둠을 몰아내라!”


제각각 어둠을 해치는 방식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신의 이름을 되뇌고, 제 용맹에 몸을 맡기고.


각 시대를 풍미할 만한 영웅들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의 봉합과 규합은 허투가 아니었다.


포위망이 좁혀들기 시작한 건 결정적으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어둠이, 영웅과 그 군단의 힘 앞에 차츰차츰 쓸려나간 것은.


“그 파렴치한 낯짝을 보는 일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끝까지 몰아붙여야 한다!”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바야흐로 제국 기사단의 합창이 어둠마저 온전히 몰아낼 무렵이었다.


하늘 꼭대기에 다다른 듯한 기다랗고 시커먼 성채. 주위의 어둠은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껏 어둠만을 베어왔다. 그들에게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나둘 선봉대가 계단을 올랐다. 걸음은 느리지만 확실하다. 그 끝은 알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거기서 깨달았겠지. 부르짖던 수많은 신의 광명도, 축복도 용맹함도 투기도 결국은 무용지물이었음을.”


콰릉!


번개가 내리친다.


이번만큼은 선명히도 들려온 소리였다. 너무도 선명해서, 뇌리에 박히고 찢길 만큼.


쩌적-!


무언가 갈라졌다. 알현실이었다.


백몇의 횃불이 휙 꺼졌다. 한 번에.


그리고는 어둠이 다가왔다. 정확히는 임박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짙은 어둠. 무엇도 보이지 않게끔, 무엇이든 감싸는.


몇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았던 전우들이었다. 지금은 실랑이조차 꺼졌다.


까마득한 것들이 한데 모였으니까.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끅.”


단말마. 고요한 곳에서 툭 하고 튀어나왔다. 다시금 물속의 비명처럼 가라앉을 뿐이었다.


“...척후단장?”


그 각각의 개인조차 귀가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입도 그랬다. 사실 코도 그랬다. 모든 감각기관이 그랬다.


선봉대에서도 최전선에 섰던 장군과 왕들은 그쯤 한 가지 더 알았다.


“족장... 오크 족장? 인간들이여?”


고립되었다.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드르륵- 쿵! 어디선가 문이 닫혀왔다. 분명 오와 열을 맞추어 굳건히 당도했건만, 지금은... 지금만큼은... 흐트러졌다.


까드드드득!


점점 다가오는 불길한 소리. 불경한 소리.


“제, 젠장! 어딨는가? 친... 친위대여! 나 고귀한 엘프의 여제가 바로 여기 있을 터인데!”


까드득, 까드득, 까득!


목숨 외엔 잃을 것이 없다. 한데 지금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둠 위 어렴풋한 그 목숨. 바람을 스치는 촛불 같은 그 목숨들.


목숨보다도 중요한 무언갈 상실하고 있었다. 까득, 까득. 무언가 파이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확실시해진다.


불경하고... 세상의 이치와 심히 동떨어진 듯한 그 소리가....


“...제, 제발. 신, 신이시여. 성대한 묘목이시여... 아, 아.”


꽈득-!


“풉!”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소리였다.


풉.


비웃는 소리.


그리고, 스낵을 한 조각 씹는 소리.


꽈득-


한 번 더.


“아, 죄송해요. 이런 멋들어진 이야기에 제가 결례를 그만.”


어둠, 연합, 엘프의 여제니 뭐니, 어쩌고저쩌고.


그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말은 이렇게 전하면서도.


앞에 앉은 남자는 그만큼이나 진중했다. 본디 진중한 것이 도를 지나치면 우습지 않은가? 과장된 몸짓, 격양된 어투며 눈빛 하며.


한 가지 더, 얘기를 전하던 남자가 유세와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여서 그런 것도 있었다.


“...그래, 안 믿길 법도 하지. 이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결국 조소로 승화했으니. 너처럼.”


지금 보는 것처럼 싹 사라지는 표정.


다시 저 창백하고 무심한 얼굴에서 루드는 무엇도 읽지 못하게 됐다.


검은 무색의 정장. 헝클어진 듯하나 고운 백색의 꽤 긴 머리칼.


범상찮은 인물인 것은 확실히 범상찮은 인물이었다.


거미줄이 잔뜩 늘여진 이곳과 다르게, 남자는 아마도 대학교수 따위의 고위층의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기품있는 정신병자는 또 오랜만인데.’


그가 남자를 마주한 곳은 허름한 바의 내부였다.


이딴 헛소리에 이리도 잠자코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남자가 의뢰를 요청했기 때문에.


정신병. 더불어 고위층. 이런 남자도 통칭 ‘바깥 땅’에선 길잡이가 필요했다.


쉬이 말하자면 손을 대신 더럽혀줄 자들이었다. 정계나 암투 등 복합적 요소가 얽힌 도시의 용병과는 물론 다른 유형이었다.


돌연변이나 괴생명체. 온갖 미쳐버린 생물들. 그저 칼만 잘 다루면 됐고 총만 잘 다루면 됐으니까.


그래서였다. 정신병자나 약쟁이는 대개 무관심으로만 대응하던 그도 의뢰만큼은 일전의 남자처럼 진중히 여기는 이유는.


“아뇨. 얼마나 흥미로웠는데요. 그러니까, 그 왕이란 작자 때문에 직접 바깥 땅으로 나왔단 거죠?”


이제 와서 귀를 기울이는 척을 했으나 남자는 무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노골적인 침묵에 루드는 그저 그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깥 땅은 주로 극악무도한 범죄자만이 추방당하기 마련이었다. 높은 분들의 눈 밖에 난 겁 없는 놈들도 포함해서.


그리고 이 남자는 추방당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 두 개 난 들개도 있고 세 개 난 들개도 있듯 으레 예외는 있었다.


이쪽에서의 예외란 제 발로 영광을 찾아 떠나온 정신이상자들이었다.


의뢰란 틀을 가장해 곁에서 지켜본 바, 모두가 영광이란 허상을 찾는 것에 가까웠지만.


“말동무 구하려고 절 고용하신 건 아닐 테고요.”

“...각칸. 그의 봉인된 유해가 이쯤 어딘가에 있다더군.”


그제야 입을 뗀 남자에게 루드가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요, 그래서 저한테 의뢰를 맡기신 거고요?”

“그래. 넌 나와 함께 갈 거다. 유일하게 생의 최정점에 설 뻔했던 인물... 각칸의 유해는 보존되어야만 한다. 그게 우리 필멸자들의 운명이니까.”


왕의 얘기만 나오면 어딘가 눈이 반들반들해지는데 과연 야망은 높은 분들이 더 컸다.


루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후는 뻔한 얘기였다. 선금과 보수, 대략적으로 걸릴 기간과 유해의 위치.


도시에서 추방당한 이래 몇 년을 더 여기서 벌어먹었다.


옛 유적의 발굴을 염원하던 학자들, 힘을 찾고자 하는 흑마법사들... 그에게 정신이상자들의 황당무계한 스토리도 더 이상 별반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 이상기후도 그렇고, 내일 아침부터 출발하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은 그렇게 끝이 났다.


루드는 여전히 술을 홀짝이는 남자를 두고 홀연히 바를 나왔다.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컴컴했다. 새까맣다는 게 더 알맞은 단어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위, 한층 더 새까맣게 드리운 구름 몇 조각.


어쩌면 암흑과도 같았다.


마치 남자가 눈 돌아가며 설명한 ‘왕’의 영역처럼.


“흑마법의 시초는, 니미 뽕.”


루드가 몇 발자국 더 나아가며 전자담배를 물었다. 마력으로 작동하는 담배였다.


사실 역사나 교학 따위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살아남는 게 급선무인 이곳에서 지식? 무일푼 거렁뱅이가 창녀를 사는 것만큼이나 사치가 아닌가.


빨아들인 연기, 그리고 함께 빨아버린 어둠.


하늘에도 허공에도 자욱한 저 어둠.


바깥 땅도 도시도 피해갈 수 없는 저 어둠은 세상의 평생을 장식했다. 마치 그의 인생에 있어, 어깨에 멘 장총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제, 연합, 족장? 뭐라고 했던가. 어둠이었는가?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함께할 부인을 찾는다며 도시를 떠나온 미치광이도 봤고, 대기를 떠도는 이상기류가 자신을 오염시키는 기분이 순전히 좋아 이곳으로 떠나온 미친 자도 보았다.


숱하게도 겪은 정신병자들이었다.


그런 웃기지도 않은 사연들에 연연하는 것은 나름 잔뼈 굵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무언가, 괜시리 신경이 쓰인다고 하나.


점점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은 이상한 것이다.


마지막 연기를 뱉은 루드는 머리를 털고 걸음을 옮겼다.


역시 허튼 생각이었다. 악착같으나, 도시로의 입성도 머잖은 일이었다.


“...헉, 끄윽....”


걸을수록 눈에 띄는 옛 유적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건물들. 자연스레, 어둠 아래 나앉은 저 병약한 얼굴들까지.


사형조차 아깝다고 판결된 도시의 무법자들은 이곳에서 저렇게 골골댔다.


바깥촌. 추방당한 부랑자들이 모여 결성된 바깥 땅의 유일한 안식처.


그러나 오염된 것은 매한가지다. 더 이상 이런 땅에서 머리를 곪게 두는 것은 당연하게도 사절이었다.


루드는 대신 멀찍한 곳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고 어슴푸레하게 빛이 어린 곳.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머잖다. 머잖은 일이었다. 저, 휘황찬란한 도시로의 입성은.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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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도시 전체로 24.09.14 11 0 20쪽
6 중개소 24.09.13 20 0 13쪽
5 새로운 신분 24.09.12 21 0 19쪽
4 진사도(辰砂島) 24.09.11 22 0 11쪽
3 명목 24.09.10 21 0 12쪽
2 살아있는 어둠 24.09.10 27 1 17쪽
» 한 왕이 있었다 24.09.09 7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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