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당한 해결사가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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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과수
작품등록일 :
2024.09.09 23:19
최근연재일 :
2024.09.17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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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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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분

DUMMY

방벽에서 몇 시간을 더 떨어졌는지 모른다. 휑한 도로를 종횡무진했다.


빛이라곤 오직 헤드라이트뿐이었다. 다른 차들의 희미한 빛을 보기 시작한 건 방벽을 나서고부터 대략 4시간도 더 뒤였다.


-환영합니다. 이로부터 RZ구역입니다.-


도로가 점점 갈라지면서 여러 개로 나뉘었다. 외곽을 통하는 바깥쪽의 도로였다.


그리고 저 거대한 전광판. 진정한 도시임을 알리는 문구.


호송차 안의 멋들어진 창가로 볼 것을 언제나 고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런 일은 없었다.


더 빨리 보았다. 계획보다도 훨씬 더 빨리. 작별도 채 고하지 못하고서.


이는 기뻐해야 할 일일까, 그저 께름칙한 일일까.


루드는 점점 많아지는 차들 사이로 함께 내달리며 장갑과 두건을 벗었다. 단검집을 허리춤 안쪽으로 숨기고 장총은 뒷좌석에 놔두었다.


점차 창공 위로 연방정부 경찰들의 날아다니는 ‘글라이더’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눈에 띄는 건 사절이다.’


옷에 비정상적으로 때가 묻어나긴 했으나 빈곤한 놈들의 RZ구역에서 이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옷차림일 터였다.


루드가 창밖을 요리조리 살폈다.


점차 붉게 물드는 구역. 건물의 층층이 높아졌다. 4층에서 5층.


-환영합니다. 진사도에서 끝없는 열락을 느껴보세요!-


그리고 7층에서 9층. 붉게 번쩍거렸다.


‘삼합회, 마피아... 잠깐, 마피아?’


뒤얽힌 거리의 명칭은 홍등가, 홍등가, 식당가, 홍등가.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여 오묘한 보랏빛을 자아냈다.


-부릉!


차를 몰수록 소음은 악취처럼 풍겨왔다. 지이잉- 지이잉- 어디선가 들려오는 공사 소리, 다투는 소리, 토하는 소리....


냄새는 이윽고 소음이 되어 귓바퀴에 달라붙었다.


진한 국수 냄새, 그보다 진한 창부의 분내, 화약과 무언갈 불에 지핀 듯 코를 찌르는 탄내.


확연히 끝없는 열락이었다.


이내 도시는 울창한 정글로 뒤바뀌었다. 여기저기 후미진 마천루들이 줄창 줄을 섰다. 죄기덩굴인 듯 건물과 건물 사이 사방팔방 뻗어나가는 도로는 덤으로.


그 보랏빛 신음들에 경찰들의 글라이더마저 가려 이젠 보이는 일이 없었다.


진사도의 중앙쯤 다 와서야 루드는 차에서 내렸다. 실로 어지러운 사태였다. 고요가 곧 생존이 되었던 바깥 땅과는 다르다.


그래서 향수 비슷한 것을 느낀 것이다.


잠깐이나마 이 열락에 안기고 싶었다. 도시에서 추방당하기 전처럼. 그저, 안주하면 될 뿐인데....


띠링-


“어서옵시오.”


루드는 뒷골목의 한 펍에 들어섰다.


전등이 깜빡거리는 투박한 곳. 낡디낡은 거리와 퍽이나 어울리는 곳이었다.


사람은 몇 없었다. 이런 투박함마저 익숙함으로 승화시키는 놈들만이 자리했다.


“불타는 도마뱀 꼬리 하나.”


루드가 크레딧 카드를 건네며 주인장 바로 앞에 앉았다.


바깥 땅에선 쓸 일도 없는 크레딧 카드 또한 삼합회의 일부분이었다.


의뢰를 주선해주는 것도 삼합회, 거기서 5할 이상 수수료를 떼먹는 것도 삼합회, 종극엔 도시로 들여보내 준다며 남은 크레딧마저 싸그리 털어먹는 것 또한 삼합회.


카드를 받은 주인장은 별말 없이 위스키를 내주었다.


곧바로 한입을 삼킨 루드는 톡톡, 검지로 테이블을 작게 두드렸다.


“별일, 없나?”

“......?”


못 알아먹었다. 큼, 헛기침을 뱉은 루드는 다시 한번 말했다.


“별일 없었냐고.”

“무슨 별일?”

“어둠... 에 관련된 것들. 괴상한 흑마법이 판을 쳤다거나, 어떤 인물이 난데없이 나타나 정계나 세상을 뒤흔들었다거나.”

“아침부터 별소리를 다 하는군. 그랬다면 우리 모두가 이렇게 태평하진 않았겠지.”


확실히 그랬다. 마치 바깥촌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처럼....


의아한 마음은 갈수록 속 깊이 타들어 갔다.


주위의 또 다른 손님들이 투박함을 익숙함으로 승화시킨 것과 같이, 루드 또한 의아함을 위스키의 탄 맛으로 승화시켰다.


그렇게 한입 더 삼키고서는 다시 주인장을 불렀다.


“마피아는 무슨 일이지? 삼합회 놈들이 구역을 뺏기기라도 한 건가?”

“요즘 같은 시기에 큰일 날 소리는 하는군. RZ구역은 간만인가 본데,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두들겨 맞을 거다.”

“그러니까 왜?”

“빈손으로는 안 되지.”


주인장은 볼을 쪽 빨아들였다. 루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크레딧 카드 자체를 아예 넘겼다.


“뭐야. 이걸 다?”

“어차피 십만 크레딧 정도밖에 없어. 내가 조금 중요한 사람이라서. 그래서, 마피아랑 삼합회는?”


대개 십만 크레딧은 RZ구역에서 ‘정도밖에’라고 간소화되지 않는다.


불타는 도마뱀 꼬리를 200잔은 더 시킬 수 있는 값이었다. 주인장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허, 실소를 터뜨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바깥 땅 관련된 사안이더군. 원래 마약 건으로도 치고 붙었던가 본데, 이젠 아예 도마 위에 올랐어.”

“바깥 땅?”

“풍문으론 삼합회 놈들이 바깥 땅에서 은밀한 일을 벌이고 있다던데. 나도 잘은 몰라.”

“그 때문에 마피아가 이쪽에 개들을 푼 것이고?”

“그런 셈이지. 워낙 여기가 비정상이라지만, 지금은 더더욱 사려야 할 때야. 그 삼합회 자식들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그 잔혹함을 친히 과장된 몸짓으로 설명해주는 주인장을 앞에 두고 루드는 잠시 고민했다.


“그래, 고마워.”


말을 끊었는지도 모르게 루드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눈앞의 위스키. 공업용임을 입증하듯 탄 맛만 일품인 쓰레기 같은 위스키.


지금만큼은 꿀보다도 달콤했으나 루드는 더는 마시지 않았다.


진작에 이럴 여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사롭게 열락에나 안길 때가 아니었다.


그는 펍에서 나선 직후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더 깊게 들어섰다. 빛이 짙어지는 곳이었다.


* * *


범죄조직은 대체로 돈과 관련된 것이라면 국세청보다도 치밀해지기 마련이다. 특정 몇몇을 빼면 애당초 이해관계뿐으로 얽힌 것이 그런 끈적하고도 연약한 관계였다.


크레딧 카드. 삼합회가 공인해준.


추적되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정부의 추적에도 취약했다. 어쩌면 이처럼, 뒷골목의 주정뱅이들보다도 더.


도시까지 끌고 온 차도 버렸고 몇천만 크레딧이 담긴 카드도 버렸다. 잡힐 구실은 전무했다. 한 단계 나아가 마력으로 추적될 순 있으나 그 정도 정성이면 어쩔 수 없다.


루드는 감시카메라가 있는지 잠시 둘러보았다.


없었다. 탁한 보랏빛 쾌락의 빛은 거리마다 이토록 존재하는데, 방범용 감시카메라 하나 있지 못했다.


벽에 기대 곤히 잠든 주정뱅이의 주머니를 뒤졌다. 온기 속 차가운 감각.


금액이 얼마나 들었는지는 상관없다. 곧바로 크레딧 카드를 챙기고 골목을 도로 나왔다.


하늘 위로 그물이 얽힌 듯 도로가 전염병처럼 만연했다. 그림자 진 길 아래 주홍빛 가로등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그러나 가로등 아래마저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그림자란 건 마치 대를 잇듯 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리박히고 있었다. 이곳은 도시였다. 어디도 아닌 도시.


“...도시.”


어쩌면 진작부터 형형색색의 빛들로 절감한 채였다.


두 주머니에 콕 손을 넣은 인형이 그림자가 되어 눈에 비친다.


그건 자신이었다.


도시 속에 자신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토록 바랐던 빛들이 몸을 감싸는 곳 위에.


그러나 주머니에 넣은 두 주먹. 그 주먹에 담긴 것은 무엇도 아니라 어둠이었다. 주먹을 펼쳐보아도 주머니 속 어둠만이 유영하듯 손을 감쌀 뿐이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환락가의 향락이 몸을 보드랍게 껴안았다.


거리서 빨고 뱉어대는 담배 연기, 이젠 한층 코앞까지 풍겨오는 창부들의 분내.


무엇보다도 빛. 그림자처럼 대를 잇듯, 건물 저 높은 곳에서부터 내리박히는 수만 가지의 빛.


주로 전광판, LED, 네온사인.


“저기 오빠, 누나들이랑 놀래? 그쪽 진짜 귀여운데.”


모순된 말을 잘도 건네오는 반-엘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루드는 무수한 인파 사이를 가로질렀다.


잘못된 시작으로부터 찾아온 시점부터, 이 인파 사이를 섞일 수 없는 그는 자신이 이제 주머니 속 주먹이란 사실을 다분히 체감했다.


잘 알았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약 좀 있나?”

“아니... 다 털었어. 미장원에 있을 거야.”


점점 귀에 닿는 말들이 궤를 달리하기 시작할 거리였다.


“하수구촌 소식 들었어? 오염청소부 놈들이 새로운 화학 가스를 선보인다던데.”

“그딴 미친 곳에 발을 들일 바엔 대가리에 총알을 박고 말지....”


도착한 곳은 한 클럽이었다.


도박장, 신체‘단련’ 살롱, 매우 ‘건설적인’ 미용실 사이 ‘예홍룡(霓虹龍)’이라고 크게 한자가 쓰여있었다.


꽤 큰 곳인데도 대기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진사도였기 때문이다. 바로 앞 단지에 다른 클럽이 있고 그 옆 단지엔 또 다른 클럽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예홍룡이 단순한 클럽만은 아니지. 아직도 남아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사실 줄이 길든 짧든 예홍룡은 별반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저 진사도에서 가장 일반적인 업장으로 가장했을 뿐이니까.


루드가 입구로 다가가자 선글라스를 낀 가드가 루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장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는 큰 덩치였다.


“뭐야. 애새끼 같아 보이는데.”


가드가 툭 내뱉었다.


반-엘프들이 허리를 뒤흔드는 광경을 보기에 적절찮은 나이라는 뜻이 아니다.


꼬질꼬질한 코트. 희기보다 회색에 가까운 셔츠.


두건을 두르고 장갑만 끼면 영락없는 바깥 땅의 생존자 모습이었다.


지금만큼은 그게 덜해 그저 RZ구역의 저가 용병처럼 보일 뿐. 아니면 약에 꼴은 사냥개라거나.


확실히 애새끼에게 용병의 과업이란 나이에 비해 궂은일처럼 여겨질 것이다.


“양마담을 만나러 왔는데.”

“...양마담?”


그저 한마디에 선글라스 속으로 가드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이 보였다. 그 어둠마저 선명하다.


“갈라키스 님을 말하는 건가?”

“아니. 양마담. 갈라키스 말고.”


가드의 눈이 흔들리다가 주위를 슬쩍 훑었다.


양마담이란 통칭은 잘 사용되지 않았다. 애당초 여기 예홍룡의 주인을 낮잡아 부르는 소리다.


가드의 반응이 꽤나 모호하다는 것을 느낀 루드는 태연스레 한마디 더 덧붙였다.


“이 RZ구역으로 도망친 겁쟁이 년 말이야. 양마담.”

“이 개새끼가, 어디서 감히!”


가드가 으르렁거리며 당장이라도 한 대 칠 듯 멱살을 잡았다.


루드는 가만있었다. 수틀리면 칼을 슬쩍 꺼내 보여도 되나 그것은 극한으로 치달았을 때의 일이다.


그만큼 쥐뿔도 없는 현 상태에선 이곳이 새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어쩌면 이전 입지에 반의반만이라도 회생할 수 있을.


“장난이라니. 이렇게 진지한 장난도 있었나?”

“너 이 새끼, 정체가 뭐야?”

“알 거 없어. 얼른 문이나 열어봐. 멱살도 좀 풀고.”

“형체도 못 알아보게 으스러뜨리는 수가 있다. 빨리 토해내. 뭐 하는 놈이야?”

“갈라키스와 가장 절친한 사이지. 너 같은 새낀 끼어들지도 못할 정도로.”


멱살을 잡은 가드의 손이 약간 풀어졌다.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발끝이 좀 뜬 채로도 잘만 보였다.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양마담이란 표현은 낮잡아 부르는 소리기도 하나, 역설적으로 그만큼 갈라키스를 낮잡아볼 수 있는 놈들만 사용했던 표현이었다.


루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거의 노골적으로 보이게 뒀다. 허리춤 아래 시퍼런 단검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너 이 새끼....”


느닷없는 불청객에 만감이 교차한 가드는 끝내, 그리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 들어가 봐. 대신, 갈라키스 님을 다신 양마담 따위로 부르지 마라. 네가 설령 흡혈귀 군주래도 그 뚫린 입을 잘만 나불대면 반으로 접어줄 거니까.”


대답 대신 작게 웃어 보인 루드는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예홍룡.


둥, 둥, 둥. 대지를 울리는 음악이 발을 타고 점점 심장에 가까워지듯 선명해졌다.


그 본질은 다르나 겉은 결국 클럽이다.


모든 잡음이 뒤섞인 거리와 달리 한 가지의 음악만으로 명백히 좁혀들었다. 일렉트리와 힙합 사이의 괴상한 무언가.


그리고 약에 취한 듯 끄아아-! 장내를 울리는 괴성까지.


인테리어는 곳곳마다 붉은 커튼으로 장식돼있었는데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아예 붉은 커튼이 막고 있었다.


더불어 주위에 배치된 가드들. 루드와 눈을 마주치자 길을 비켜줄 따름이었다.


스르륵- 커튼이 몸을 지나치며 바닥 아래로 나풀거리듯 떨어졌다.


2층은 바였다. 한 여자만이 술잔을 들고 적막히 앉아있는 바.


양마담. 그러니까 갈라키스는 언제나 저리 술을 마셨다. 꼴에 고독함을 달래기 위해서.


루드는 옆에 조용히 다가가 앉았다.


그러고선, 그 움직임처럼이나 조용히 말을 건넸다.


“가드라도 새로 구했나 봐.”


붉은 머리의 새까만 암흑 엘프.


루드의 목소리에 움찔 떤 그녀가 아래를 향하고 있던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바텐더 뒤로 장식된 무수한 술병들을 눈 담고 있는 소년, 아니, 남자.


돌아본 얼굴을 목도하자 죽은 자라도 다시 본 듯 갈라키스의 눈에 일순 경악이 어렸다.


“...루드?”

“잘 지냈지? 갈라키스.”

“오랜, 만이네. 얼마 만이지?”

“5년 만인가?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더라. 네 가드들이 나도 못 알아보는 것처럼.”

“.......”


제 딴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는 듯하나 그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루드가 다시금 찬장 위의 술병들로 눈을 돌렸다. 21년산, 30년산... 하나같이 값졌다. RZ구역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뭐 하고 지냈어?”

“...그냥 뭐, 여러 일 하면서.”

“난 뭐 하고 지냈는 줄 알아?”

“몰라. 알아야 할 필요라도, 있나?”


갈라키스는 최대한 의연하게 술잔을 머금었다. 강한 48도 술이 잘도 검붉은 입술로 넘어갔다.


입맛을 쩝 다시며 루드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 사실 나도 몰라서 물어보러 온 거거든. 갈라키스, 지금쯤이면 난 어디에 있었을까? CT구역? 너처럼 술이나 까고, 약이나 빨고, 휘황찬란한 건물 아래 지나다니는 시민들이나 개미처럼 내다보고 있었겠지?”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자꾸 이상한 말만 지껄이네. 5년 만에 나타나선.”


다시 한번 술을 머금는 그녀는 극도로 조심스레 옆을 흘겨보았다.


루드는 여전히 술병들만을 눈에 담고 있었다. 손가락을 거슬리게 톡 톡 두드리면서.


단둘만의 대화이면서, 정작 말하는 데에 갈라키스라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도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난 바깥 땅에 있었어. 갈라키스.”

“...바깥 땅?”

“그래, 바깥 땅. 바깥 땅 말이야.”


순간, 루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그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나는 곳에서 몇 년이고 좆뺑이나 쳐야 한다는 소리지. 난 거기서 살아남았어. 너 때문에. 돌연변이 씨발 것들을 쳐 죽이고, 쳐 죽이고, 쳐 죽이고, 상처를 내고. 내 몸에조차.”


또 위험한 의뢰를 거듭하고, 의뢰인을 몇이나 죽이고.


그리고 허황된 얘기를 듣고, 의뢰인을 다시 한번 죽이고, 그렇기에 바깥촌이 멸했고, 세카리를 죽게 두었고.


“그 와중에도 잘만 지냈나 봐. 너는.”


움찔. 갈라키스의 목소리가 순간 몸처럼 떨려 나왔다.


“...그래서? 그런 말을 전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고?”

“아니. 이 말을 전하려고. 넌 용병을 팔아먹고 잘도 살아남았잖아. 연방정부 그 개새끼들한테서.”


루드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5년 전 갈라키스가 무슨 일을 했는지.


꽤 오래전부터 추방당하기 직전까지 갈라키스는 중개인인 동시에 규모가 꽤 되는 범죄조직의 수장이었다.


불꽃꾼. 그녀가 단신으로 이끈 화염 마법사들은 거의 테러리스트에 가까웠는데 그게 바로 화근이었다.


그딴 조직을 이끌어나가면서도 연방정부의 눈에 띄지 않을 거라는 오만함.


그러함은 곧 은연중 악마 같은 새끼들의 수색망이 좁혀들고 있음을 암시하는 착오가 되었다.


“갈라키스. 네가 팔아먹은 놈들 대부분이 죽었어. 처형당하거나, 추방당하고 미쳐서 돌연변이가 되거나. 그리고 그 돌연변이에게 잡아먹히거나.”

“대체 누가? 누가 그러지? 내가, 팔아먹었다니?”

“연방정부가 직접.”


갈라키스의 입이 돌처럼 굳었다.


연방정부. 공식 명칭으로선 연합도시안보위원회.


갈가리 분열된 각 정부가 이만큼은 임시동맹으로서 굳히자 해 설립된 범도시적 경찰.


본래 기원은 그랬으나, 근세엔 세가 커져 도시 내 독자적인 패권으로 새로이 자리매김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패권의 군대가 추적해온다는 두려움을 끝내 이기지 못한 그녀는 수십에 되는 용병과 사냥개를 밀고하고 말았다.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도망을 준비하기 위한 작디작은 수단.


도망치고, 이딴 외지에 은거하기 위해 벌인 기행과 가까운 수단.


“난....”


갈라키스가 입을 채 떼기도 전.


루드가 순간 그녀의 머리를 쥐어 잡았다. 쾅! 그대로 벽에 밀어 박았다. 테이블부터 뒤의 찬장까지 거칠게 흔들렸다.


“으, 흐윽!”


당황하는 바텐더의 눈초리가 갈라키스의 찡그린 얼굴에 닿을 찰나.


깡! 쨍그랑-!


갈라키스가 쥐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에 그대로 꽂아 깨뜨렸다.


산산이 조각난 파편을 루드가 하나 쥐어 들었다.


한바탕 소란에 가드가 몰려와 총을 꺼내 들었으나, 그뿐이다.


루드가 갈라키스의 목에 조각을 찔러 넣을 듯 바싹 붙였다. 장미가 새겨진 새까만 목.


그처럼 붉은 피가 한 방울, 두 방울씩 맺히기 시작했다.


“나도 원랜 안 보려고 했어. 초콜릿 바른 좆이나 닮은 네 얼굴 봐서 좋을 것 하나 없잖아. 근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서.”

“미, 미안해. 미안해 루드.”

“아냐. 고마워해야지.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목에 날 선 것을 겨누면서도 죽이지 않기에 감사하라는 것은 다소 모순된 문장이었다.


“새 신분을 준비해. 내가 돌아왔다는 걸 누구한테도 발설하지 않고.”

“그, 그거면 돼?”

“아니. 장난하냐? 정계에 최대한 닿아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와. 수상한 낌새까지, 모두 다.”

“저, 정계? 그건 정말 안 돼. 발 다 뺀 지 오랜데...!”

“그럼 얌전히 묫자리나 파든가.”

“루... 루드....”


일순간의 확답일 수도 있으나 갈라키스는 눈을 질끈 감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루드가 뒤에 깔린 가드들을 보며 눈짓했다.


갈라키스의 목소리가 손아귀 아래로 힘겹게 새 나왔다.


“총, 총 내려! 병신들아....”


상황 파악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가드들은 어리둥절하며 겨눴던 총구를 내렸다.


루드는 잡은 뒷목을 그대로 풀어주었다.


갈라키스. 그녀에 대한 빚 청산은 이걸로 시작될 것이다.


주먹 속에 새 든 어둠. 그딴 어둠만이 자욱한 바깥 땅과 다르게, 도시에서만큼은 그도 자신할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첫 발판이 새로운 신분이었다.


옛적의 ‘루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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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신분 24.09.12 22 0 19쪽
4 진사도(辰砂島) 24.09.11 22 0 11쪽
3 명목 24.09.10 2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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