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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입니다
작품등록일 :
2016.03.16 01:36
최근연재일 :
2016.05.31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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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03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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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상기(想起) - 10

DUMMY

쉬지 않고 말을 이어서 그런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역정을 부린 탓에 거친 숨이 목을 타고 흘렀다. 안젤라와 리프렌은 날 양옆에서 잡아끌며 말리려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시선은 우리를 욕한 놈들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마디라도 떠벌렸다간 인성이고 나발이고 한 대 칠 생각이다.

“감히 우리 교파를 쓰레기라 불러!”

“하! 너희 귀에는 그것밖에 안 들리지? 그러니까 너희 귀에만 들리는 걸 듣고 정작 필요한 말을 무시하니까 너희 꼴이 그 꼴이 된 거야!”

“신성모독이다! 당장 이 자리에서 베어주마!”

단원 중 한 명이 검을 고쳐 잡으며 내게 다가왔다. 얼굴에는 분기를 억누르지 못해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물이라도 뿌리면 수증기가 날 듯한 얼굴색이었다.

“레이 괴롭히지 마!”

“방해하지 마라!”

단원의 공격에 리프렌이 정권을 쥐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단원은 자신의 여동생뻘 되는 리프렌이 앞에 섰든 안 섰든 인정사정없이 검을 쳐들어 내리그었다. 단원은 검으로 리프렌을 내려치려, 리프렌은 자신을 내리치려는 검을 주시했다.

검과 리프렌이 맞닿기 일보직전,

“그만!”

눈 깜짝할 새에 그 사이를 파고든 케인이 빼든 검으로 검격을 막아냈다. 그의 등장에 우리나 저쪽 단원들이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 단장님! 어째서 이들을···.”

“단순한 도발에 현혹돼 일을 그르치지 마십쇼. 우리 본연의 임무를 잊으신 겁니까? 지금 상황을 판단하세요.”

냉철한 눈동자가 단원을 베어내듯 바라봤다. 그 눈동자를 직시한 단원은 겁을 먹은 것인지 정신을 차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흠칫하더니 검을 물리며 뒤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아뇨. 저희 교파를 더럽힌 자를 처단하시려한 그 결단. 크록슈 교파를 진심으로 신봉하는 자로서 참으로 기쁩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의 일에 전념하는 게 우선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십쇼. 지금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케인이 칼끝으로 한창 격전 중인 지역을 가리켰다.

아마 저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스켈레톤으로 들끓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쉬지 않고 땅에서 기어 나오는 스켈레톤 무리들. 손에 든 검에는 이가 나가고 녹이 슬었지만 두려움을 잃고 몸을 사리지 않게 된 스켈레톤에겐, 그것도 수 십 마리나 되는 스켈레톤들에겐 그 녹슨 검마저도 위험적인 무기가 되었다.

여기서 야습의 전야가 끝난다면 좋겠지만, 과연 불법으로 개정된 스켈레톤을 떼거지로 만들면서 준비한 야습의 주모자가 과연 여기서 허무히 끝낼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게 어쩌면 당연했다.

“주인님! 이제 한계예요! 수적으로 너무 열세라서 이 이상 버티기는 힘들 것 같아요!”

뒤를 돌아보니 킨이 홀로 활시위를 튕기며 스켈레톤의 핵심부인 두개골을 박살내고 있었다. 그녀의 활솜씨가 뛰어나긴 했지만, 그녀가 시위에 걸 수 있는 화살의 개수에 비해 스켈레톤의 수는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나 그녀의 재량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어보였다.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때라는 거겠지. 리프렌, 넌 주변에 오는 스켈레톤 정리해주면서 우리를 보호해줘. 킨은 계속 그런 식으로 멀리 있는 스켈레톤을 처리해주고. 내가 지원해줄게.”

“알겠습니다.”

“나한테 맡겨줘! 이런 일은 내가 잘한다고!”

안젤라는 일사분란하게 지휘하며 각자에게 역할을 줬다. 자신의 역할이 주어진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것도 못하고 서있는 내게 다가왔다.

“넌 마차 안에 몸을 숨기고 있어. 우리가 널 보호해주지 못할 지도 몰라.”

“도와드리고는 싶은데, 그럴 만한 처지가 안 되네요, 저는.”

몸이 성한 것도 아니고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다. 곤봉이라도 쥐고 도와주는 게 좋겠지만, 어쩌면 그것조차 안젤라들에게 부담을 씌어줄 수도 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뒤에 잘 숨어 있는 게 도와주는 거일수도 있다.

“아니 넌 충분히 도움이 됐어.”

“제가요? 그런 적 없는 것 같은데. 언제 해줬는데요?”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고, 욕을 먹었으면 먹었지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왜 없어? 참네, 이럴 때는 참 눈치 더럽게 없다니까.”

“뭐라시는 건지.”

“됐어. 나 바쁘니까 몸 숨기고 곰곰이 생각해봐. 자, 자. 얼른 마차 안으로 들어가라고.”

안젤라가 피식 웃더니 날 반 강제로 마차에 밀어 넣었다.

“느닷없이 숙제나 주고. 뭐하는 시츄에이션인지.”

“잔말 말고 들어가기나 해.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나오지 말고 있어.”

“꼭 자식한테 안전해질 때까지 나오지 말라는 부모같이 말하네요. 흔해빠진 레퍼토리 중 하난데.”

“또 이상한 말 하네. 어쨌든 내 말 흘려듣지 말고 귀담아 들어. 이번엔 진짜 심각하니까.”

“알겠어요. 그보다는 안젤라님이···.”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없었다. 새까맣던 하늘이 아침의 여명이 밝듯 빛으로 물들었고 그 빛은 내 시선과 정신을 앗아갔다. 하지만 아침이 오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다. 그럼 안젤라의 뒤로 발하는 엄청난 후광은 무엇일까?

그걸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젤라! 조심해!”

리프렌의 다급함이 귀를 찔렀다.

“세상에···!”

안젤라의 경악이 조용히 고막을 후려쳤다.

“주인님!”

킨의 비통이 머리에 꽂혔다.




★★★★★




온몸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닥여도 먼지가 돼 하늘로 흩어질 것 같았다. 고통에 눈을 뜨자마자 눈앞이 아찔해졌고 정신은 아득해져갔다.

“하···. 하···.”

어지러웠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비명과 신음소리, 무언가 불타는 소리가 들렸다. 입안에선 쇳기가 느껴졌다. 맛의 괴리감에 입 밖으로 뱉으니 피였다. 짙고 묽은 한 줌의 피. 그걸 본 순간 내 몸이 어느 정도로 망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으윽···.”

그때 어디선가 안젤라의 신음이 들렸다. 근처였다.

“안··· 안젤라님···!”

있는 힘 없는 힘을 짜내 간신히 안젤라를 불렀다. 부들거리는 팔로 몸을 지탱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근육이 찢어지고 관절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통증이 몸을 지배했다. 통증이 커질수록 더욱 눈앞이 더욱 아찔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찾을 수 있었다.

꼼짝없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안젤라. 옷은 먼지로 더러워진데다 거의 헤진 상태였다. 송송 뚫린 구멍으로 그녀의 속살과 상처들 사이로 흘러나온 혈흔이 보였다. 피는 그녀의 옷을 묽게 물들였다.

“안젤라님···.”

한 걸음씩 내딛어 안젤라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씩 그녀와 가까워질 때마다 주변으로부터의 소리가 멀어져갔고, 오직 그녀의 소리만이 명확해져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또 내딛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드디어 그녀에게 손만 뻗으면 되는 거리까지 다다랐다.

“···레이크.”

내 기척을 알아챈 안젤라의 가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스러지듯 주저앉았다.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 했다.

안젤라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꽉 찬 내 시야에 시꺼먼 주먹이 날아 들어와 내 얼굴에 꽂혔다. 주먹이 꽂힌 순간 시야가 번쩍 빛났고,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땐 내 몸은 어느 샌가 땅 위에 누워있었다.

“이놈, 아직 살아있다. 어떻게 할까?”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 쇠끼리 부딪치는 듯한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놈은 너무 망가져서 못쓴다. 뼈도 망가졌다. 악베른님께서 쓰레기는 가져오지 말라셨다.”

“그럼 죽일까?”

“악베른님께서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하셨다. 쓰레기를 처리할 시간에 이 여자나 챙겨라. 이놈은 내가 알아서 한다.”

“알았다. 빨리 와라.”

보이진 않았지만 두 명 중 한 명이 자리를 떴다. 안젤라를 데려가려는 것 같았다.

“흠. 다시 봐도 쓰레기다. 그냥 죽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다.”

목소리만 들리던 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가, 가고일···.”

언젠가 안젤라가 가지고 있던 도감에서 봤던 생물이었다. 거대한 날개와 도마뱀을 닮은 신체와 머리. 그리고 끝이 화살처럼 생겨 위협적인 무기처럼 보이는 꼬리. 흡사 날개가 달린 거대한 파충류를 연상케 하는 모습은 도감에서 본 그대로였다.

“우리를 원망하지 마라. 우리가 강하고, 너희가 약할 뿐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건 당연하다.”

“거, 건들지, 마. 아, 안젤라를.”

“편하게 보내주겠다. 우리가 너한테 베푸는 최소한의 자비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가고일이 거대한 독수리 같은 손을 얼굴에 댔다. 놈의 거칠거칠한 손바닥이 얼굴을 통해 느껴졌다. 얼굴을 손에 쥔 놈은 놓치지 않으려는 것인지 약간 힘을 주더니 내 목을 그대로 비틀어서 꺾어버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목을 통해 전해지는 엄청난 통증이 감각에 엄습해왔다. 하지만 비명은 지를 수 없었다. 이제 비명을 지를 만큼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편히 쉬어라.”

곧 뺨으로 서늘한 풍압이 느껴지며 곧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이 이곳을 떠나려는 듯했다.

날갯짓소리와 바람소리가 점점 멀어져갔고, 내 의식도 점점 멀어져가는 걸 느꼈다.


“···드레이크님! 드레이크님!”

“레이! 정신 차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드레이크님! 정신이 드십니까!”

“다행이다. 난 레이가 눈을 못 뜨는지 알았어.”

눈을 뜨자 우리가 타고 온 마차의 천장, 그리고 킨과 리프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킨은 가면에 금이, 리프렌은 얼굴에 눈물로 범벅이 돼있었다.

“너희 괜찮, 윽!”

“운신하지 마세요! 드레이크님은 그 어느 때보다 중태십니다! 안젤라님이 챙기신 언데드 전용 포션이 없었더라면 쇼크사하셨을 거예요. 꺾인 목도 포션으로 힘들게 붙인 거라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시면 안 돼요!”

언데드용 포션. 회복력을 극대화시켜주는 일반 포션은 이미 죽어버린 언데드에겐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안젤라가 회복력이 아닌 신체조직을 생성하는 포션을 개발한 건데, 그게 바로 언데드용 포션이었다. 이거 덕분에 다시 세상 빛을 보게 된 것 같다.

“맞아. 안젤라, 안젤라는 어디 있어!”

킨이 안젤라를 언급해 통증으로 잊고 있던 그녀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가고일이 내 목을 꺾기 전, 한 가고일이 자신의 동료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제발 속으로 아니라 외치며 킨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드레이크님! 일단 안정을···.”

“어디 있냐고!”

마음속의 불안감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게 느껴졌다. 가고일의 대화와 안젤라의 행방이 엮이고 엮여 내 이성을 종이가 불에 타듯 갈아먹었다.

“납치됐습니다. 다른 몇 명들과 제 몇 단원들과 함께.”

“당신···.”

안젤라의 행방에 대해 입을 연 건 마차 밖에 있던 케인이었다. 그의 상태를 보아하니 킨과 리프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공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갑옷은 리프렌 못지않게 그을려져 있었고 골절이라도 된 것인지 왼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놈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경과를 계획에 두고 움직인 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하지?”

“우리가 방금 받은 공격, 마법이라는 건 눈치 채셨죠? 그 마법, 초급마법을 응용한 고위마법 중 하나인 ‘데들론’이라는 광범위 공격용 흑마법입니다.”

“데들론?”

“대살상용 마법이면서도 효율적이라 흑마법 계열에선 제법 유명하죠. 거대한 운석을 소환해 근방을 순식간에 박살내는 비효율적 메테오와는 다르게 마나를 술식의 중첩을 가해 여러 개로 응축시켜 중요지점을 메테오보다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파괴력으로 박살내버리죠.”

그 결과가 이거라는 건가. 그런 공격이 하나가 아니었다니. 그런 파괴적인 마법이 베이스캠프 곳곳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그걸 굳이 우리한테 알려주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그렇게 정화하겠다, 없애겠다는 둥 갖은 위협을 하시던 분이 갑자기 친절해지시다니.”

이유 없는 선의 없고, 지금 이 말은 케인에게 해주기 딱 좋았다.

내 말에 케인이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시선을 피했다.

“아시죠? 당신이 우리에게 했던 언행들. 여기서 당신 입 밖으로 내가 생각하는 말이 나온다면 참 당신들한테 실망할 것 같네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구할 겁니다. 다만 당신과는 절대 같이 가지 않을 겁니다. 가증스러운 것에도 정도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훈계하던 자부심이 의심스럽네요.”

내 말에 케인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도 답답한데 자신의 자존심에도 금이 가니 오죽할까.

“후, 어쩔 수 없군요.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당부하죠. 이번 일에 개입하지 마십쇼.”

“···뭐라고요?”

이게 자존심에 금이 가더니 개념을 상실했나.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네.

“다시 말씀드리죠. 이번 일에 개입하지 마시고 일선에서 물러나시라는 겁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우리 쪽 사람이 납치됐다는데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끼지 말라고요?”

우리보고 빠지라는 건 지들끼리 간다는 거고, 당연히 네크로맨서인 안젤라를 구하지 않을 게 뻔했다. 뚱딴지같은 소리도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는 없을 거다.

게다가 좀 전까지 같이 가자 도움을 요청하던 사람이 싹 태도를 바꿔 이번엔 개입하지 말란다. 원수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힘들다는 걸 아는 사람의 태도라고 보기엔 이상한 발언이었다.

“그 말에 제가 굳이 대답할 이유는 못 찾겠군요. 다만 이것만은 알려드리죠. 우리를 공격했던 무리들의 우두머리와 저희는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있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

“저는 분명 당신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만약 이를 어기면, 그 자리에서 바로 베어버리겠습니다. 어차피 놈들의 본거지를 아는 건 저희뿐이니까 찾지도 못하겠지만.”

케인은 그 말만 남기고 미련 없이 돌아서서 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단원들의 머릿수를 세보니 저쪽에선 2명 정도가 납치된 듯했다.

“드레이크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저희들의 전력으로는 주인님을 다시 모시고 오는 건 역부족입니다.”

엄청난 수의 스켈레톤, 심지어 그 수는 정확히 알 수도 없는 스켈레톤 무리와 사람 목은 손쉽게 비틀 수 있는 완력과 두꺼운 가죽을 가진 가고일,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고위마법을 주창할 수 있는 마법사까지. 그에 비해 우리 전력은 부상당한 드래고니안과 언데드. 그리고 행동불능 상태의 나가 전부였다. 확실히 전력 차가 극심했다.

어쩌면 케인의 제안을 걷어찬 게 실수일 수 있다. 상당한 실력을 갖춘 성기사 8명이라는 전력이 합쳐진다면 격퇴까지는 아니어도 납치된 안젤라를 구할 수는 있을 거다.

“알고 있어. 지금의 우리로는 안젤라는커녕 그놈들의 대가리 지척에 가는 것도 힘들 거야.”

“그렇다면 어째서 저자의 제안을 거절한 것입니까?”

안절부절 못하는 킨. 안젤라가 많이 염려되는 거겠지. 평생 귀여움을 주고 지금은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주인이니까. 킨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나도 안젤라가 걱정되는데 그녀 옆에만 있던 킨은 더할 거다.

“레이. 혹시 방법이 있는 거야?”

“···아마. 있을지도.”

그렇다고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홧김에 케인을 문전박대할 정도로 내가 몰상식한 놈은 아니다. 다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문제였다.

“방법이 있는 건가요?”

“그래. 다만 그게 우리들의 재량과 약간의 운이 좀 필요해.”

“안 해보는 것보단 낫습니다. 말해주십쇼.”

“레이랑 킨도 소중하지만 안젤라를 그냥 둘 순 없어. 말해죠, 레이.”

킨과 리프렌의 진중한 표정을 보니 더 이상 뜸들이긴 힘들 듯했다.

내가 생각해낸 방법. 쉽게 발상할 수 있지만, 결단을 내리긴 힘든 방법이다. 예전에 나라면 절대로 입 밖으로 뱉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어쩔 수 없다 묵인했겠지. 누군가를 희생시켜 발판으로 딛고 올라온 인생이니까.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부터 진짜 사회로 나아가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밟고 가야하는 삶을 진저리가 나도록 지내게 될 나에게 내가 아닌 누군가가 사회에서 도태되는 건 발에 치이는 시시한 일이자 일상이었다. 어리고 미숙했던 작은 사회에서의 난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경쟁이야말로 날 계발시키고 더 나아가 세상에 이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사회로 나가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 순간 모든 게 바뀌었다. 좀 더 큰 세계에 발을 디디고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생각은 극단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됐다. 그저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는 것만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다는 걸. 그리고 느리지만 함께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걸. 그걸 깨닫자 대학에 들어오기 전 지난 13년간의 형식적이고 획일적인 공부를 떨쳐내고 진짜 배워야할 것을 배우게 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사고를 겪고 영혼을 잃게 되면서 의지와 감정이 무뎌졌을 때, 내 결심은 무너져 내려 그날의 결심은 사라져버린 영혼처럼 모습을 감춰버렸다. 하지만 마법공격을 당했을 때 다시 기억할 수 있었다. 온몸이 부서지고 손 하나 까닥하는 것조차 버거워 숨만 몰아쉬며 죽을 때를 기다리기만 했던 내게 잃어버렸던 의지를 상기시켜준 건 바로 안젤라였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흐름.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죽음으로 인해 생긴 허무함이 앗아간 의지가 단지 안젤라의 유무로 다시 가슴에 피어오른 것이다.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할 것 같은 건 똑같았는데, 그저 그녀가 있었던 것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리고 다시 피어오른 의지의 아지랑이는 내 이전의 꿈을 상기시켜줬다. 이제 내가 이루지 못하고 미뤄뒀던 꿈을 이룰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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