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리그 8강(5)
승아는 시간을 벌고 있었다. 교체한 마우스와 키보드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개인리그인 만큼 팀에서도 원재정도만 나와 있기에 똑같은 제품의 여분의 마우스와 키보드를 팀에서 챙겨오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시간을 벌고 있었다.
승아는 손목이 조금만 더 괜찮아지기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천천히 단축키 세팅과 키보드, 마우스의 감도 조정을 계속했다.
그러기를 무려 20여분.
그 상황을 지켜보는 승아와 경기장에 같이 온 원재는 많은 걱정이 되었다. 아무런 문제가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도 이렇게 계속해서 경기가 지연되고, 해설자들이 시간을 끈다면 문제는 선수들에게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승아가 3경기에 질 때, 원재는 승아가 아픈 것을 알았다. 하지만 경기가 계속 지연되자 승아의 손목이 많이 아픈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게임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힘든가? 왜 4세트 시작을 안하지?’
생각을 마친 원재는 승아의 대기실에 다가갔다. 다행히 같은 팀인데다가 많이 알려진 게이머라 그런지 원재의 접근을 운영요원이 막지 않았다. 원재는 부스에 들어가 승아를 부르며 승아의 손목을 보았다.
“승아야.”
“엇.. 원재오빠!”
“무슨 문제 있니? 손목이라도?”
“에.. 그게.. 아니에요. 키보드랑 마우스가 세팅이 좀 그래서요.”
“그래? 그럼 문제가 있는데.. 내가 좀 볼까?”
“아.. 아니에요! 이제 다 됐어요!”
“그래? 다행이네. 1경기만 이기면 되니까 힘내고!”
“네! 오빠!”
승아는 원재가 들어왔을 때 순간 마음이 덜컹거렸다.
자신의 검은 속을 알아본 것 같아서.
하지만 다행히 그것은 모르는 것 같았다.
‘휴우-’
사실 승아는 헤드셋까지도 교체하려 했다. 소리를 듣는 선을 살짝 당긴다면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양심에 걸렸다. 그렇게까지 일부러 헤드셋을 상하게 한다면 진이슬의 프로게이머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자책감도 있었다.
뭐.. 사실 이미 이렇게 시간을 끈 점에서 스스로에게 떳떳하지는 못했다. 부정한 수를 쓴 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으니까.
“윤승아 선수, 세팅 완료되었나요?”
“네. 이제 다 되었어요.”
- 윤승아 선수, 경기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승아의 이야기가 운영요원의 무전기를 통해 상황이 전해지고, 광고시간을 포함, 30분 가량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8강 4세트 경기가 시작되었다.
맵은 신들의 황혼.
승아가 세팅한다면서 쉬는 동안 창환도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지난 경기의 흐름을 보며 승아가 쓸 수를 예상했다.
1경기는 평범한 운영을 생각했지만 오토바이를 포함한 러쉬. 2경기는 초반 스텔스기를 쓸 것으로 예상했지만 평범하게 수비를 하다가 스텔스기로 한방. 3경기는 평범한 전략을 쓰는 잊혀진 사원 맵에서 자신이 초반 빠른 하피로 승리. 생각해보면 승아나 자신이나 상대가 쓸 법한 작전을 반대로 써 왔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한 쪽이 이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승아가 쓸 작전은...
‘운영! 운영이야!’
신들의 황혼은 프로리그 초반 XK의 문용갑이 자주 출전하여 이기면서 맵 분석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인간종족의 극초반 러쉬가 매우 좋다는 분석이 이루어졌다. 그 대처법이 나온 뒤에 용갑이 패배를 해서 종원이나 원재가 출전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종족이 초반에 극히 좋은 맵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 종족이 인간이더라도 극초반 일꾼+소총병 러쉬를 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면 나도 먼저 일꾼을 뽑지 않고 공격유닛이나 방어건물을 짓고 버티고 있다면 당연히 자원을 계속 캐고 있던 수비하던 방어측이 이기는 경우가 나왔다. 결국 심리싸움.
게다가 승아가 이렇게 세팅을 많이 한다는 것은 단축키를 1번부터 10번까지 다 활용할 뿐만 아니라 F1 F2등 키보드의 단축펑션키를 이용한 부대지정과 화면지정까지 전부 활용하겠다는 의지였을 것으로 창환은 추측했다. 그렇다면 승아가 생각하는 것은 초반 운영을 통한 장기전!
자신이 만약 그 수를 읽지 못했다면 초반에 촉수건물 같은 쓸데없는 방어타워들을 짓고 사냥개를 뽑으면서 자원을 낭비했으리라.
‘그리고 졌겠지. 윤승아.. 생각보다 똑똑한데? 중학생이라고 얕볼게 아니었어.’
이제껏 했던 게임의 특성상 항상 승아는 창환 자신이 하지 않으려는 쪽으로만 빌드를 운영했다. 하지만 이제 창환 자신이 승아의 패턴을 알아낸 이상, 이제 승리는 자신에게 있었다.
“후후후.. 너의 패텅은 모두 파악되었다!!”
창환은 혼자서 혀짧은 말로 혼잣말을 하며 경기에 들어갔다.
신들의 황혼에서 승아는 11시, 창환은 1시. 가로방향에 걸렸지만 아직 둘은 알 수가 없었다. 창환은 시작하자마자 왼쪽 11시를 향해 비올란테 정찰을 보냈고, 승아는 아래로 일꾼 정찰을 보냈다. 정찰운은 창환이 좋은 편이었다.
“정창환, 1시에 자리했구요. 윤승아, 11시에 자리했습니다.”
“이번 신들의 황혼에서 윤승아 선수가 이기면 4강에 오르게 되고, 반면 정창환 선수가 이기면 마지막 5세트까지 가게 됩니다.”
“두 선수 모두에게 이번 세트가 고비인데요.”
“윤승아 선수, 언덕위에 막사를 짓고 소총병을 빠르게 생산합니다.”
“보급고 보다 소총병 생산이 빠르다는 것은 초반러쉬죠?”
“이 맵에서는 아무래도 인간 종족이 초반에 너무 좋으니까요. 그런 것을 정창환 선수도 충분히 알고 있... 어라? 정창환!! 노못 더블입니다! 연못 없이 앞마당에 멀티를 떴어요!!”
“망했어요!!!”
해설자들은 승아가 항상 하던대로 이 맵 초반을 노린 극초반 일꾼+소총병 러쉬를 준비했는데 창환이 연못 없이 앞마당을 가자 무슨 생각인가 싶었다. 그런 생각은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 정창환 무슨 배짱이지? 여기 신들의 황혼이야.
- 그러게. 아무리 가로방향인거 몰라도 비올란테 오는거 보면 다 알지 않나?
- 일꾼 아래로 보내서 없으니 승아도 1시 아니면 5시인줄 알텐데...
- 그러게.. 무슨 깡이지?
- 승아 벌써 소총병 2마리 모았어. 바로 간다!
- 1마리 더 생산되면 추가돼!
- 정창환 이제 연못 올리는데? 끝났어 이건.
창환은 승아의 장기전을 예상했다가 비올란테 밑에 오는 소총병 2기를 보고 매우 당황했다.
‘뭐..뭐지? 분명히 3경기까지는 서로 생각 반대로 갔는데.. 쟤가 한번 더 꼬아서 생각한 건가?’
아니었다. 승아는 그저 손목이 아파서 빨리 끝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4경기나 5경기가 길어질경우 최악의 경우에는 프로리그 전까지 쉴 시간이 거의 없을 수도 있었다. 지금 거의 30분정도 가까이 세팅을 하며 시간을 끌며 손목과 손가락이 어느정도 괜찮아진 지금, 빨리 끝내야 했다. 승아는 꼬아서 생각해서 러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 맵에서 최적의 전략을 남들처럼 쓴 것이었다.
“정창환! 비올란테로 오는 소총병을 봤어요!!”
“당황합니다! 얼굴이 빨개졌어요!!”
“아니! 대체 이 맵에서 왜 노못더블을 한 건가요! 이건 윤승아 선수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쓸 법한 전략이었어요!!”
“정창환의 앞마당에 윤승아의 소총병과 일꾼이 달라붙습니다!”
“정창환! 앞마당을 버려야죠! 위에서 막아야해요!”
“그래도 늦었어요! 촉수도 없고, 사냥개도 이제 나와요! 망했어요!!!”
해설자의 말 그대로 창환은 망한 게임이었다. 승아는 앞마당을 깨러 멈추지 않고, 앞마당에 한두마리 붙어있던 일꾼만 잡아 준 뒤에 전 병력과 일꾼을 위로 올려서 창환의 일꾼을 잡아주었다. 4마리의 사냥개가 부화되어 나왔지만 승아는 나오는 부근에 이미 일꾼으로 둘러싸 벽을 만들고 있었고, 사냥개는 뒤에서 쏘는 소총병의 공격에 금새 녹아내렸다.
창환은 건물은 남아있지만 어느새 일꾼도 털렸다.
이젠 GG뿐이었다.
창환은 승아의 부스를 한번 보고 고개를 떨궜다.
- 아.. 이 지니어스한 대천재 정창환님이.. 8강에서..
[GG]
“GG!! 지난 시즌 개인리그 준우승자인 정창환이 8강에서 탈락합니다!! 윤승아가 3:1로 4강에 진출합니다!”
“정창환 선수, 앞선 경기의 판단은 좋았는데 왜 4경기의 판단이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이 맵이라면 당연히 초반 러쉬를 생각해야 하거든요.”
“아쉽습니다.”
해설진들은 아쉽다면서도 본분에 맞게 승아의 4강 진출과 지난 경기들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날 오후, 승아가 3:1로 이겨서 4강에 올라간 것은 우주전쟁의 팬들이라면 다수가 예상한 내용이었지만, 4경기의 내용이 우주전쟁 팬들 사이에 오르내렸다. 1~3경기의 정상적인 경기와는 달리 30분 가까이 키보드, 마우스 세팅을 하면서 길었던 2경기와는 다르게 불과 4분 30여초만에 끝난 4세트 경기.
승아가 초반에 세팅을 오래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정창환이 잘하고도 진 것은 아니기에 내용만 보자면 승아의 승리일지 몰랐다. 하지만 세팅시간을 길게 잡은 것이 논란이 되었다.
과연 3세트까지 멀쩡했던 키보드와 마우스가 이상이 생겼을까 라고 말하는 측과, 그러면 승아가 일부러 세팅을 오래해서 얻을 이득이 있겠느냐고 하는 측의 대립이 인터넷을 달궜다.
멀쩡한데 심리전을 위해서 일부러 승아가 시간을 끌었다가 초반 러쉬를 했다는 팬들도 있었고, 승아의 장비가 정말로 고장이 났기에 원재까지 부스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팬들도 있었다. 승아의 손목에 연관지어 생각하는 팬들은 없었지만, 무언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팬들은 있었다.
확실한 것은, 이날 경기로 인해 팬만이 존재하던 승아에게 안티팬이 약간이나마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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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o님, 솔현님, 허니콤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빨리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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