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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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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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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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8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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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혼돈무제(混沌武帝) (5)

DUMMY

천의결 덕택인지, 혼돈의 인도 때문인지 나는 마나 드레인을 운용해서 그 힘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실할 수 있었다. 아주 손쉽게, 그저 땅에 떨어트린 물건을 다시 줍는 것처럼 그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도군, 혹시 어디 아파? 안색이 좀 안 좋아.”

쥬비가 걱정을 담아 살며시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이에 카터가 짓궂게 쥬비를 놀리고 쥬비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떼고 카터에게 소리를 버럭 내지른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쓸데없는 일보다 나는 금방이라도 내게 흘러들어올 듯한 힘에 집중하고 있었다.

“몸이 좀 안 좋아. 미안하지만 난 돌아가겠어.”

쥬비의 대답도 듣지 않고 나는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 쥬비가 내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 역시 들리지 않는다.

온갖 독사며 해충으로 가득한 진창 위를, 명주실 한 가닥에 의존해서 걷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그 사이한 것이 발끝을 타고 흘러들 것 같아 걸음이 점점 조심스러워지고 또한 빨라진다. 그러나 나는 그 사이한 기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족쇄와도 같이, 그 기운은 내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이보게 도군!”

족쇄를 떨쳐낼 수 없기에 차라리 걸음을 멈추었을 때, 약간 탁한 목소리의 노인이 나를 부른다. 제임스가 나무 그늘에 서서 나를 바라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급한 일이 없다면 시간 좀 내주지 않겠나?”

완곡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제임스는 반드시 나와 이야기를 나눌 심산으로 보였다. 내가 도망친다 해도 마법으로 쫓아오리라는 느낌이 강하다. 차라리 잘 됐다. 나도 그에게 몇 가지 할 말이 생각난 참이다.

“설마 아까 회의장에서 나갈 때부터 지금까지 뛰어다니고 있는 겐가? 무슨 땀을 그렇게 흘리는 겐가?”

땀? 슬쩍 이마를 훔치니 손등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배어나온다. 언제 이렇게 땀을 흘린 걸까? 그때 제임스가 손짓으로 마법을 부려 내 땀을 일순간에 날려버린다.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닐 텐데 땀이라고 식히고 이야기를 하도록 하세나.”

“감사합니다.”

제임스는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손끝으로 불을 붙인다. 그리고 한껏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뱉는다. 그 행동은 퍽이나 신경질적이어서 제임스가 상당히 불쾌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선 회의 이야기를 해 주겠네. 중간에 나갔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모를 테지.”

“제가 들을 필요가 있습니까?”

분명 드래곤을 물리치는 데 내가 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제임스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필요야 있지. 자네 자카이야의 무녀와 혼례를 치른다 하지 않았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알아야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지 않겠나?”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드래곤을 물리치는 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내 할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겁에 질려 도망치고 나서 그런 핑계가 떠올랐을 뿐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사실 별로 어려울 건 없다네. 혼례는 내일 정오에 시작되고, 그 전부터 예행연습을 한 다음에 치러질 거라네.”

“드래곤이 언제 나타날지 확실해진 겁니까?”

만약 혼례 도중에 드래곤이 나타난다면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쥬비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나와 맺어져야 했으니까. 그러나 제임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혼례 자체는 별 상관없다네. 도군 자네가 그 아가씨와 함께 있다는 게 중요한 셈이지.”

어쩐지 제임스는 이 괴상한 일의 연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잘 됐군. 이참에 물어보는 게 좋겠어. 어쩌면 이 혼례가 혼돈 같은 것과 연관되었을지도 모르고.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안되는군요. 자세히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별 것 아니라네. 그냥 사랑에 빠진 처자가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게 이유지. 요컨대 사랑의 힘으로 드래곤을 제압한다는 말일세.”

사랑이라니.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쥬비가 날 사랑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제임스가 실없는 소리를 할 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의 힘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도 모르겠고.

“나도 잘 이해는 되지 않네. 다만 그 쥬비라는 아가씨가 상당히 불안해하는 건 확실했어.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여린 아가씨였던 게지. 그나마 자네가 오고 나서야 조금 안정이 되는 모양이야.”

천의결의 직감으로 나는 그제야 이 괴이한 행사가 왜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쥬비는 결코 강한 사람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핏줄을 잘 타고난 범인(凡人)에 불과하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일에 도망치는, 그야말로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든 의지할 대상이 필요할 것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 대상은 나라는 놈인 모양이고.

“혼례가 끝난 다음에, 자네는 그 아가씨가 드래곤의 움직임을 제한할 때까지 그녀를 지켜야 하네. 그리고 드래곤의 움직임이 약해지면 그 아가씨를 지키면서 몸을 피하도록 하게.”

제임스는 담배냄새가 물씬한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 눈빛이란 실로 최고의 마법사이자 드래곤 슬레이어다운 위엄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무거운 이야기를 꺼낼 것이 분명하다.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는 대충 이 정도지. 하지만 자네가 정말로 명심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네.”

“엠펠로니아.”

나는 어느새 양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엠펠로니아에 대적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함께 힘을 갈구하는 욕망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욕망을 따라 므로아에 잠든 힘이 더욱 적나라하게 뇌리에 파고든다.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만 명심하게. 절대로 엠펠로니아와 싸워선 안 돼. 제피온은 결코 이 세상을 위해 싸울 녀석이 아니야. 아마 드래곤을 물리치고 나서, 우리는 곧바로 그놈과 싸워야겠지.”

제임스가 그렇게 확신하고는 지옥의 겁화가 깃든 것 같은 살의를 억누르고 말을 이었다.

“제피온은 왜인지는 모르지만 자네를 노리고 있어. 그리고 어쩌면 그 아가씨도 노릴 수 있지. 드래곤을 제어할 무녀만 사라져도 이 세상은 미래가 없어.”

“그렇다면 제가...”

싸워야 하나? 고작 내 정도로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 어쩌면 일순간에 처참하게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돌연 분노와 두려움이 몰아친다. 이렇게 언제나 전전긍긍하다가 죽어버린다고? 무공이고 뭐고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야만 할까? 그러나 제임스가 바라는 것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니 도망치게. 절대로 엠펠로니아와 싸워서는 안돼.”

“저는.....”

“잘 아네. 자네도 싸우고 싶겠지.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자존심을 죽이게. 나는 이번 싸움에 목숨을 걸 생각이라네. 하지만 자네라는 변수가 있으면 나는 제피온을 막을 자신이 없어.”

제임스가 분노에 찬 얼굴로 자조했고, 나는 씁쓸함을 감추며 시선을 돌렸다. 싸우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분노하지 않았다. 한순간이나마 환희했다고 생각한다. 역시 나는 그런 녀석이었다.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평범한 인간. 아니, 어쩌면 더 못난 그런 인간.


자괴감에 빠져 숙소로 돌아가니, 소렌이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제길, 그녀를 볼 낯이 없다. 누구는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데 나는 또 헛된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점심은 먹었어?”

“아니.”

벌써 점심시간은 한참 전에 지났고, 이제는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소렌이 시계를 힐끗 바라보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식당으로 이끌고 갔다. 입맛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막상 음식 냄새를 맡으니 식욕이 돈다. 이제는 스스로를 욕할 기력도 없다. 차라리 먹자. 도망칠 기력이라도 만들어 두는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도군!”

테이블에 앉자마자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쥬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쥬비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방긋 웃으며 물었다.

“같이 먹어도 되지?”

제임스에게 그 말을 듣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쥬비의 행동이 이제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안타깝게도 나는 쥬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지만 그걸 드러낼 생각은 없다. 쓸데없는 짓으로 큰일을 그르쳐서는 안 되겠지.

“아, 일행이 계셨구나. 합석해도 될까요?”

이미 자리까지 잡아놓고 뭐 하러 물어보는지 모르겠군. 의도적으로 그녀를 무시하는 걸까? 이런 식으로 그녀를 대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조금은 걱정이 앞선다.

“인사가 늦었군요. 처음 뵙네요. 쥬비 아탄샤라고 해요.”

쥬비가 건네는 인사에 소렌은 침묵을 지키면서 식기를 내려놓고 무뚝뚝한 인사를 건넨다.

“소렌 폰테일입니다.”

“어머, 소렌 님이셨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답니다.

테이블에 앉아 식사가 나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일언반구 없이 침묵을 지켰고 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라 자연히 침묵을 즐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금 꺼림칙하긴 하다. 쥬비가 은연중에 소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군하고 같은 하이스쿨에 다니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소렌이 그녀 앞에 놓인 차를 들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기품이 넘치는 그 태도에 쥬비의 드센 태도가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돌연 다시 기세를 되찾는다.

“그럼 그냥 학우일 뿐이군요. 괜히 걱정했네요. 도군하고 아무 관계도 아니라서.”

“무슨 말입니까?”

소렌의 태도가 조금 사나워졌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알고 지낸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딱딱한 태도에 가려진 가시 하나를.

“말 그대로지요. 아무리 드래곤을 제압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지만 아탄샤의 부마가 쓸데없이 추문을 흘리는 건 꼴불견이니까요.”

소렌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쥬비는 싱긋 웃으며 음식을 입에 가져댄다. 특별히 시선을 주고받거나 으르렁대는 기색은 없지만 마치 절정의 무인들이 주고받는 기세싸움이 일어난 듯한 느낌이 든다.

이쯤 되니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두 사람의 사이가 별로 순탄하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별다른 접점도 없던 이들이 이렇게 서로를 앙숙처럼 여길 줄은 몰랐는데.

“혹시 도군과 치르는 이 혼인이 마음에 드시나요?”

“푸훗!”

소렌이 던진 한마디에 쥬비가 급하게 입을 틀어막아 터져 나오려는 음식을 막아낸다. 그리고는 힘껏 입을 다물고 음식을 모두 삼키고 거칠게 입가를 닦아낸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소렌의 말을 받아쳤다.

“무,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왜 그걸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가요?”

“물론 아니라는 건 잘 압니다. 다 드래곤을 제압하기 위해 하는 일일 뿐이지요.”

“그럼요! 그냥 정략혼 같은 것일 뿐이에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

쥬비가 단정적으로 내뱉은 한 마디가 오래된 기억을 끌어낸다. 심가장으로부터 파혼을 당한 사실이 새삼 떠오르고 나는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좋은 신랑감은 아닌 모양이다. 정말 소문주 노릇을 더 하지 않은 게 다행이군.

“그럼 드래곤을 물리치고 나서 도군을 다시 부대로 복귀시키는 것에는 동의하시겠군요.”

“그, 그건 우선 도군의 의사가.....”

쥬비가 이상하게 기가 죽어서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잠시 예전 생각을 하고 있다가, 쥬비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문득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어쩐지 소렌도 조금은 부아가 치민 것 같은 모습이다. 쥬비의 태도가 마음에 거슬렸을까?

이렇게 된 바에야 아예 내가 무림에 갈 생각이 있음을 밝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서. 무슨 말로 그 이야기를 시작할지 궁리하던 도중,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이 끼어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소렌 양.”

제법 유창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서역 말. 그곳에는 소렌에게 포권을 쥐고 있는 비룡검객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 행색이 조금 초라하다. 마치 온갖 고초를 겪은 낭인과도 같은 느낌이 강하다.

“반갑습니다. 먼길을 오시느냐고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소렌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고, 쥬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누구야?”

“폰테일 공작가에 몸을 의탁했던 사람이지.”

“흐음, 꽤 어두워 보이네. 원래 저런 사람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룡검객의 모습이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탓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내가 반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비룡검객은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는 이채를 띈 눈으로 내게 눈인사를 건넨다.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내가, 이제는 비룡검객 자신만큼이나 강해진 내가 놀라운 모양이다.

“그런데 뒤에 계신 분들은....”

소렌이 비룡검객의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는 죽립의 사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 역시 상당히 초라한 행색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립 사내들의 선두에 서 있는 사내에게서는 상당한 기세가 엿보였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이분은....”

“제 소개는 제가 하도록 하지요.”

비룡검객보다 훨씬 유창한 서역 말을 내뱉은 선두의 사내는 놀랍게도 나와 비슷한 연배의 청년이었다. 그 청년이 죽립을 벗으며 소렌을 바라본 순간, 나는 그야말로 뻣뻣하게 굳어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정말로 놀라서 죽립을 벗고 소렌에게 포권지례를 취하는 청년을 응시한다.

“백윤이라 합니다. 이제 막 도착하여 인사를 드립니다. 그토록 명망 높은 공작 각하를 직접 뵈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백윤. 이제는 조금 흐릿해진 기억 사이로 백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기억이 현실과 뒤엉켜 저 청년이 정녕 백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분들께서 이번에 빙룡을 제어하실 무녀 일행이신가요?”

백윤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친 몸짓에 의자가 요란한 소리르 내며 나동그라지고, 쥬비가 깜짝 놀라서 식기를 쥔 채 덩달아 일어선다. 나는 딱딱하게 포권을 쥐어 보였다. 백윤이 조금 이채를 띤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포권을 취하는 자세가 제법 그럴듯해서일 것이다.

“무림의 예법을 잘 아시는군요.”

백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는 어조로 말한다. 이에 비룡검객이 내가 혼혈임을 언급하고 백윤은 다시 한 번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토록 칭찬하였던 기재가 바로 이분이셨군요. 천의검문의 백윤입니다.”

빌어먹을, 다 잊었다고?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소리는 다 개소리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천의검문을 들먹이는 백윤을 보니 평정을 찾을 수가 없다. 간신히 천의검문이라는 말을 집어넣고, 나는 새로 얻은 이름으로 스스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대륙연합 별동부대의 부관....”

여기서 도군이라는 이름을 밝혀도 되는 걸까? 혹시 백윤이 나를 의심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렇기에 내 이름을 말하는 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알 수 없는 침묵에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할 때쯤에야 나는 내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도군입니다.”

“반갑습니다.”

백윤이 흠칫 놀라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고 인사를 받아준다. 빌어먹을. 왜 그러는지 내막을 아는 나는 절로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그 멍청한 소문주와 이름이 같아서 놀랐겠지.

하지만 그 도군과 지금 눈앞에 있는 도군이 같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떨쳐버린 게 분명하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둔재가 검기를 발하는 고수가 될 리 없기에. 그리고 애초에 도군이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었기에 이토록 쉽게 의심을 떨쳐낼 수 있었을 터다.

“무림을 대표하여 두 분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변변찮은 선물이지만 부디 사양치 마십시오.”

백윤이 소매에서 옥갑 하나를 꺼내어 내게 건네준다. 무심코 그것을 받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옥을 깎아 만든 가락지 하나가 있었다. 상당히 값비싼 물건임이 분명했고, 쥬비는 탄성을 내지르며 내 손에서 옥갑을 빼앗아 든다.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백윤이 공손히 포권을 쥐고 자리를 피하고, 소렌이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는다.

“뭐, 해? 다 갔으니까 앉아.”

쥬비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억지로 앉힌다. 내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걱정을 담아 묻는다.

“도군, 아직도 몸이 안 좋아?”

“아, 응.”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백윤이 온 것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더욱 심각한 문제가 숨겨져 있다.

“미안, 나는 먼저 들어가서 쉬겠어.”

두 사람을 뒤로 하고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일이 숨겨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다. 내 허튼 짐작에 불과했다면 좋겠지만 천의결로 단련된 내 직감은 별로 틀린 적이 없다. 그게 나쁜 짐작일 경우에는 더더욱.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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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16 스킨크
    작성일
    14.02.18 03:01
    No. 1

    백윤이 뭔가 심상치 않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2 요개
    작성일
    14.02.18 03:37
    No. 2

    너무 기대하지 말아 주세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4 아침기상
    작성일
    14.02.18 05:43
    No. 3

    심란하겠군요. 제 생각엔 제일좋은 고문이 희망고문과 아무도 없는 흰방에 가둬놓는거같습니다. 민간인에게는 육체고문이 효과좋을지 몰라도 육체파 무인에게는 그런거 많이 당하잖아요. 그러니가 희망고문 추천이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2 요개
    작성일
    14.02.18 07:13
    No. 4

    독이 든 당근을 주라는 거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수수깡
    작성일
    14.02.18 11:41
    No. 5

    백윤이 등장할꺼라 생각 했지만 도군에게 그보다 심각한게 뭔지 궁금해지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2 요개
    작성일
    14.02.22 15:50
    No. 6

    다음 편에 나올 겁니다. 막상 써놓고 보니 별로 안 심각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드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6 Kaibutsu
    작성일
    14.12.09 21:51
    No. 7

    도군의 내면은 무수한 생각을 하는데
    그 생각을 말로 뱉은적은 정말 적네요...
    보면서 항상 이 생각을 했어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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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3) +8 13.11.11 1,632 32 14쪽
89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2) +7 13.11.08 2,173 37 12쪽
88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1) +4 13.11.06 1,844 39 17쪽
87 8. 무인과 군인 (14) +3 13.11.01 1,776 41 16쪽
86 8. 무인과 군인 (13) +3 13.10.23 1,857 41 14쪽
85 8. 무인과 군인 (12) +8 13.10.19 1,965 34 16쪽
84 8. 무인과 군인 (11) +4 13.10.17 1,645 38 14쪽
83 8. 무인과 군인 (10) +5 13.10.13 2,203 49 13쪽
82 8. 무인과 군인 (9) +6 13.10.11 2,150 4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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