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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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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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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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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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일보후퇴(一步後退)하면 이보전진(二步前進)하라. (1)

DUMMY

미지근한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눈을 떴다. 눈을 뜨는 것과 함께 정신을 잃기 직전의 기억들이 노도와 같이 몰려왔다. 멍한 머릿속을 울리는 그 사실에 도저히 그대로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말랑말랑한 바닥을 짚어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돌연 바닥이 사라졌다. 몸이 급격히 기울어지며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딘가로 굴러떨어진다. 무언가가 몸을 휘감고 있어 균형을 잡으려 움직일 수도 없었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어깨가 딱딱한 바닥에 부딪혔다. 그렇게 깊은 구덩이 따위는 아니었을까? 아니다. 점점 혼미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몸을 휘감고 있던 것의 감촉은 제법 푹신하고 매끄러운 이불이었다. 양팔을 휘저어 바닥을 만져보니 잘 다듬은 나무의 느낌이 났다.


“여긴.....”


모르긴 해도 나는 웬 침상 위에 누워 있었고, 지금 벌떡 일어나려다 그곳에서 굴러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꼴사나운 추태에 얼굴을 붉힐 여력도 없이, 놀라울 정도로 냉정한 머리가 작금의 상황을 추론했다. 하도 정신을 잃어대던 통에 이젠 진력이 난 것일까?


“일기당천은.... 한 대주는?”


이선엽과 피 터지게 싸우던 내가 침상에 누워있다는 건 누군가 나를 구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로 죽어도 이상할 것 없었건만 이렇게 살아있는 것을 보면, 분명 나를 구한 이는 심하령이나 다른 아군일 것이다.

더없이 다행스러운 상황에까지 생각이 미치고, 그 생각에 확신을 가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역시라고 해야 할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이 보인다. 정갈함이 느껴지는 방에는 반쯤 열린 창문만이 바람에 흐느낄 뿐, 적막함이 가득했다.


“하하...”


돌연 헛웃음이 나온다. 점점 또렷해지는 기억과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이끌어낸 결과다. 일기당천과의 양패구상. 비록 온전히 내가 이끌어낸 결과는 아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일기당천과 일대일로 맞붙어 이겼다면 좋았겠지.

물론 이제는 그런 것이 터무니없는 사치임은 잘 안다. 그렇기에 이리도 기쁜 것이겠지. 나는 내 한계를 안다. 그 한계의 틀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기쁠 따름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들떠 있었을까? 시간이 지나도 적막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점점 기묘한 기분이 들어 좀처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침상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나는 팔을 뻗어 침상 귀퉁이를 잡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팔이 너무 깡마르다. 침상 귀퉁이를 잡은 손아귀 힘 역시 터무니없이 약하다. 지독한 이질감이 든다. 분명 내 의식에 따라 움직이는 몸이건만 내 것이 아닌 것같은 느낌. 이 느낌은 오래전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의 기억을.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낯선 목소리에 덜컥 겁이 났다. 이 목소리가 오랫동안 누워있어서 변한 목소리이기를 바라고싶다. 깡마른 팔로 억지로 몸을 일으키니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엄습해왔다.

아무리 모자란다고는 하나, 새로운 기회를 붙잡은 나는 누구에게나 무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무력감은 대체 무엇인가? 이 몸은 무인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나약했다.

불안한 마음에 내공을 돋워 보려고도 했지만, 내공은 한 줄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기맥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무공이란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다.


“아아....”


다시금 든 불안과 추측에 힘없이 허우적대며 방을 나섰다. 힘없는 손짓에도 정갈하게 다듬어진 문은 스르르 열리며 나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나는 아무 기척도 없는 적막한 장원에 있었다. 몸을 휘감은 이불을 떨쳐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비틀거리는 몸에 현기증이 난다.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불안이 점점 커진다.


“누구 없습니까?”


힘을 내어 목소리를 내어 보지만, 조용하기만 하다. 힘없는 내 발소리와 목소리의 잔향 외에는 말이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죽어버려서 새로운 삶으로 다시 거듭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형편없는 몸은 그 결과겠지.


“미친놈.”


헛소리도 이만저만이 아니군. 마음이 불안해지니 별 시답잖은 생각조차 다 든다. 지금 나는 중원의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무슨 다른 삶을 산단 말이냐? 다른 가능성은 무시하고 오로지 언어만으로 확신을 굳히고, 계속해서 혹시 다른 누군가가 없는지 계속 드넓은 장원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돌아다니기를 얼마간. 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떨쳐내고자 거울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화장할 때나 쓰는 물건이 아무데나 널려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장원을 헤매다 후원에 이르렀다. 저 멀리 작은 연못과 나무 몇 그루, 그리고 꽃밭이 보인다. 연못. 그래, 저 연못에서 얼굴을 확인하자. 터무니없다 무시하려 했지만, 막상 얼굴을 비칠 기회가 생기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후원에 가까워지고, 저 멀리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얀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누군가는 후원 한가운데 앉아서 연못을 향해 있었다. 내 얼굴이 어떤지 확인할 것도 없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순식간에 저 멀리 앉아있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저기...”


조심스레 하얀 옷을 입은 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 움직임에 맞추어 하얀 옷은 흩날리듯 산개하며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사실 내가 옷이라 여겼던 것은 새하얀 머리카락이었다. 더없이 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그 머리카락. 나는 어째서 그 머리카락을 보고 침이 마르고 몸이 움츠러드는 것일까?


“너는!”


갈라진 목에서 피가 나올 것처럼 거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선엽. 일기당천 이선엽이었다. 아무도 없는 이 장원에 오로지 있는 것은 나와 이선엽 뿐이라니. 설마 여긴 정말로 저승 같은 곳이라도 된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이선엽의 신색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나는 입술을 질끈 물어뜯었다. 그때 이선엽 역시 만신창이가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외려 나보다 상태가 좋아 보인다. 물론 이전처럼 패도적이며 위압적인 느낌이 들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이목구비 언저리에는 그때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이선엽이 공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오히려 반문했다. 더욱 상황이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아 재차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


더할 나위 없는 긴장과 적대감이 밀어닥친 순간 완전히 말라붙은 줄 알았던 내공이 미미하게 몸속을 오가는 것이 느껴졌다. 됐다. 실낱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것 같았다. 그 기세를 타고 더욱 힘차게 이선엽을 몰아붙였다.


“말해라! 그리고 여긴 어디지?”


나름대로 존대를 붙이던 적도 있었지만, 생사를 도외시하고 덤벼들었던 상대에게 그런 배포를 보일 만큼 대단한 놈은 못 된다.

하찮은 존대 따위는 머리에서 지우고, 이선엽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길고도 하얀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이선엽의 온몸을 냉철하게 감시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색이 보이면....


“죽고자 한 나를 살린 건..... 아니, 그 모습을 보니 너도 온전하지 못했던 게로군.”


“너도?”


설마 하며 되물은 한마디에 이선엽이 천천히 몸을 연못 쪽으로 돌리며 뜻밖에 순순히 짤막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황상의 은혜도, 유일한 목적도. 단지 그뿐이다. 이제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그 말에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과 공허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제는 일기당천이라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노골적으로 터럭 같은 내공을 모으고 있음에도, 이선엽은 이제 더는 대화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큭!”


바로 그때, 미약하게 끌어모았던 내공이 느닷없이 폭발해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기경팔맥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뻗어 가는 내공에 그만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아악....”


격통에 몸을 뒤틀며 몸을 웅크리고 발광하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불가항력이다. 급기야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을 움켜쥐다못해 아예 갈기갈기 찢어댔다.


“무림의 아이야. 너도 나와 같다. 무지몽매한 짓으로 큰 것을 잃었지.”


이선엽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미한 정신을 일깨우며 이선엽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이선엽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다시 이선엽의 위용이 떠올라 두려움에 떨었다. 승리의 기쁨도, 승자의 자신감도 모두 잊은 채.


“그러니 포기해라. 이대로 죽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해코지할 심산은 아니었을까? 이선엽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니, 이젠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일말의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날뛰는 내공에 밀려 마음속 깊은 곳으로 사라져갔다.


“끄아아악!”


내공의 흐름이 범상치 않다. 내공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지 못했던 것일 뿐이다. 사지백해에 흩어져 있던 내공이 한번 동요하니 마치 풍랑처럼 끝없이 요동쳤다.

설령 단전을 폐한다 해도 경맥은 남는 법. 경맥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단전과 경맥이 통째로 으스러진 결과였다. 단약의 힘이 마치 혼돈의 힘처럼 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포기라니....”


꿈속에서 두 번. 이번이 세 번째여서일까? 느닷없이 닥쳐온 무력감은 그리 마음을 흔들지 못하고 금세 잠잠해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후원을 나서던 이선엽의 걸음이 잦아든다. 고통이 몰아치는 가운데도 가까스로 균형을 찾아 완전히 몸을 곧추세웠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무얼 포기하란 말이냐!”


거칠게 고함을 토해내며 단숨에 진탕된 내공을 휘어잡았다. 서슬 퍼런 기백에 고삐 풀린 내공이 일순간에 자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금방 다시 제멋대로 날뛸 것이다. 아직 마음만으로 육신과 기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뒤로하고, 나는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고작 남이 준 것이 부서졌을 뿐이다. 아직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어!”


내공을 잃더라도 양요평이라는 이름을 걸고 이루어낸 것들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선엽과의 싸움으로 확인한 그것이 있으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오히려 이제 시작했을 뿐이다. 포기는 그 끝에 이르러서 해도 족하다.


“너는..... 분명 나와 다르다. 이제 내가 왜 질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구나...”


이선엽이 말끝을 흐리며 다시 내게 관심을 보였다. 아니, 관심이랄 것도 없다. 슬쩍 내 쪽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이선엽은 다시 힘없이 고개를 돌리고 스스럼없이 후원을 나섰다.


“쿨럭, 쿨럭.”


연신 기침을 토하며 다시 꿈틀대는 내공을 다잡았다. 경맥이며 단전이 없으니 내공을 통제하는 일이란 허공에 흐르는 물을 띄우고 뭉치는 일과도 같았다. 천의결의 효용을 누릴 때는 본능적으로 그 방법을 취했지만, 지금은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한다.


“제....기랄.”


죽지 않는다고 말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죽어가다니. 점점 시선이 아래를 향한다. 비척비척 걸어서 후원을 벗어나기 직전에 이르자 점점 정신이 흐려진다.

그렇게 다시 정신을 잃으려던 순간, 번쩍하는 굉음이 머릿속을 울리고 다시금 피를 토해냈다.


쿵쿵쿵.


한 사발 피를 토해냄과 함께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울리는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어느새 나는 포근한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른다. 단지 청아한 약 냄새와 미지근한 바람만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으 느끼게 할 뿐이었다.


“깨어났느냐?”


늙수그레하지만 그 안에 굳은 심지가 느껴지는 목소리. 정말로 오랜만에 심유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선엽은 어디 가고 심유환이 있는 것일까? 전후 사정을 추론하기에 앞서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아니, 취하려 했지만 몸이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아 그저 신음하며 상체를 비틀었을 뿐이다.


“가만히 있거라.”


심유환이 능숙하게 온몸에 침을 꽂아 넣자 저절로 몸이 스르르 움직여 침상에 누웠다. 침을 꽂아넣는 것으로 나를 자연스럽게 눕힌 것이다. 의술과 무공 양자가 뛰어난 그였기에 가능한 그야말로 기예(技藝)다.


“어르신. 대체.....”


“호심몽(護心夢)이다. 의술과 진법으로 이끌어낸 꿈이다.”


“마음을 보호한다? 그럴 필요가....”


무심코 중얼거리던 중 문득 심유환이 뜻한 바를 깨닫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순간 몸 상태를 살핀 다음에야 천천히 입을 열 수 있었다.


“혈맥은 물론이고 단전마저 망가졌군요.”


추측건대 호심몽이란 무공을 잃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꿈이라 할 수 있었겠군. 무인에게 무공을 잃었다는 사실은 심지를 앗아갈 정도로 커다란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오래전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었었지.


“헌데 생각보다 빨리 꿈에서 깨었구나. 내 사실 꿈에서 깨는 건 몸을 완치한 다음이 될 것이라 했거늘. 과연 둔재라도 정천검의 핏줄이라는 게로구나. 한 달 만에 사실을 받아들이고 호심몽에서 깨어나다니.”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몸을 완치한다는 말씀은....”


혹시 무공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심유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여기저기 꽂혀있는 침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런 일은 대라신선이 와도 불가능하다. 나는 단지 네 근맥이며 뼈를 고칠 뿐이야. 기맥을 가볍게 다친 것도 아니고 단전까지 통째로 터져나갔는데 무슨 재주로 그걸 살려낸단 말이냐?”


“그렇군요.”


정말로 호심몽 덕분일지, 아니면 서역에서 이미 겪었던 일이어서인지 나는 생각보다 쉽게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내 태도가 어째서인지 못마땅한 걸까? 심유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에이, 고약한 놈. 설마 알면서 의뭉스럽게 구는 게 아니기를 바라마. 그런 능구렁이였다면 애초에 쉬운 길을 버리지도 않았겠지.”


심유환의 손이 이마에서 떨어진 순간 갑자기 이마부터 머리 한가운데까지가 시원해지며 나도 모르게 묘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심유환의 손에 들린 것은 꽤 기다란 침이었다. 그 침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나는, 오래지 않아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혹시 금제가 아닙니까?”


이마에서 빼낸 저 물건은 심하령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청한 금제다. 그러나 사실 금제는 아니고 내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물건이라고 했었지. 그리고 보니 아직도 심하령은 금제가 거짓인 것을 모르겠군.


“금제는 무슨. 그새 잊었느냐? 이건 네 몸을 살피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아니, 지금으로선 그 이상이지.”


“그 이상이라 하심은?”


“이 침으로 심신을 보하고 진력을 지키지 않았다면 너는 진작 죽어 나갔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 덕분에 그나마 네가 쌓아온 내공만은 온전히 남게 된 게다. 대체 얼마나 난리법석을 떨었는지 비장의 침이 고물이 다 되었구나.”


심유환이 한 손으로 침을 뚝 분지르며 혀를 찼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도, 이선엽을 이길 수 있던 것도 저 침의 효용이 컸다는 말이군. 과연 무작정 나를 내보낸 게 아니라는 말이다.


“어르신의 혜안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며 은혜에 또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절로 포권을 쥐어 심유환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더없이 공손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심유환은 뭔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혹시 내가 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니, 심유환이 분질러버린 침을 뒤로 휙 던지며 중얼대듯 말했다.


“흥, 은혜를 베풀면 무엇하느냐? 잠자코 수련이나 하고 있었으면 천의검문과 심가장의 도움으로 금방 무공을 대성했을 텐데 굳이 무림에 나가서 죄다 쓸모없게 만들지 않았느냐?”


“그렇다 해도 무공의 진전이 전혀 없던 것도 아니며, 무공 외적인 부분으로는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장하셨습니다. 종조부님께서는 부디 그런 점도 헤아려 주시는 게 어떨까요?”


심유환의 뒤편에서 한여름 신록처럼 맑디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인 그녀를 보니, 정말로 이선엽과의 싸움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흥, 이럴 때는 제 할아비를 닮았구나. 아쉬울 때만 사리(事理)를 들이미는 꼴이라니.”


툴툴대면서도 심유환은 조금 전보다는 기분이 풀렸는지 한결 홀가분한 모습으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내 쪽에서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심유환이 베푼 은혜는 천하에 둘도 없을 만큼 지대한 것이다.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멋대로 나돌다 만신창이가 된 것이 너무나도 죄스럽게만 느껴졌다.


“면목이 없습니다.”


“빈 소리는 되었다. 그보다 이제는 확실히 밝혀 두어야 할 사실이 있지.”


분위기가 바뀌었다. 심하령은 조용히 서서 심유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 역시 무거워진 공기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잠시 후, 심유환이 대수롭지 않은 사실을 꺼내듯 돌려 말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군 너는 지금 무공을 잃었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오랜만에 올립니다. 다른 일이 바쁜 관계로 미리보기와 정지연재는 무기한 중단해야겠군요. 최대한 시간을 내어 글을 써나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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