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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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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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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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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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외전 1. Superior Progress : 폰테일 공작의 고뇌.

DUMMY

소렌 폰테일은 천재다. 만약 그녀가 다른 영애와 마찬가지인 삶을 살았다면 그녀는 조금 재지가 뛰어난 소녀로 이름을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운명처럼 걸음마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부터 검에 관심을 보였다.

소렌이 일찍부터 검에 관심을 보인 것은 불세출의 검사이자 드래곤 슬레이어인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사실 그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지대했다. 소렌의 어머니, 엘레나 루이 로베른은 어린 소렌을 돌보면서도 검을 차고 있었다. 그 덕분에 소렌은 검에서 흘러나오는 쇠 냄새와 기름 냄새를 어머니의 체취처럼 친숙하게 여길 수 있었다.


“소렌에게 본격적으로 검을 가르치겠다고요?”


미모와 무용을 겸비한 여장부로 이름난 엘레나는,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뒤에도 미모는 여전했다. 또한, 그 미모에 어울리는 가시는 오히려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롤랜드 폰테일은 그 가시에 찔려 몸을 움찔했다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어, 어흠. 안될까나? 그래도 소렌의 재능은 너무 아까워. 아직은 어설프지만 소렌은 이미 검술의 기본을 완벽히 알고 있어. 단지 눈으로 따라보기만 한 건데 말이야.”


“그건 저도 봤어요.”


엘레나는 한숨을 내쉬며 언덕 너머에서 조악한 목검을 만지작대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남편이 너무 검에 미쳐 있던 탓일까? 소렌의 장난감은 인형이나 장신구 따위가 아니라 나무로 된 검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어쩐지 자신이 못난 어미가 된 것 같아, 도저히 롤랜드의 말을 곱게 들어줄 수가 없었다.


“저기, 있잖아?”


롤랜드가 장난스럽게. 그러나 그답지 않게 더없이 진지한 모습으로 엘레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정말로 자연스럽게 그녀를 품 안으로 잡아당겼다. 엘레나는 조용히 롤랜드의 단단한 가슴에 안겨들었다. 포근하지는 않지만 듬직한 느낌이 든다. 어쩐지 그 느낌이 그녀가 품고 있는 걱정을 저만치 치우라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소렌이 우리처럼 더러운 정치놀음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롤랜드는 엘레나의 어깨를 타고 내려가 탄력 있는 팔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근육이 붙어 여성스러운 느낌은 없었지만, 롤랜드는 그런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검을 좋아하는 딸을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소렌만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위해 살게 해 주고 싶어. 소렌이 학문에 뜻이 있다면 학교를 만들어 줄 거고, 마법사가 되고 싶어한다면 제임스라도 납치해 올 거야.”


“제임스는 당신보다 강하잖아요.”


엘레나가 무표정하게 쏘아붙인 말에 롤랜드는 멋쩍어서 그만 그녀에게서 살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은근슬쩍 분위기를 잡아서 소렌의 진로를 정하려 했지만 역시 그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당신 말이 맞아요. 롤랜드.”


봄바람이 불어온다. 엘레나는 봄바람에 떠밀려 그만 롤랜드의 품속에 다시 안겼다. 롤랜드는 그 행운을 감사드리듯 아주 잠시, 속으로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물론 그는 신에 의존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소렌이 정말로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제임스를 납치하는 일 정도는 돕겠어요.”


“후후, 좋지. 그런데 더 좋은 일 하지 않을래? 둘째 만드는 거 말야. 소렌도 혼자면 심심할 거야.”


롤랜드가 은근슬쩍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엘레나를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딸이 어느새 포근한 풀밭에서 잠든 것은 이미 똑똑히 봐 두었다. 그러나 분위기에 달아오른 것은 롤랜드 뿐이었다. 엘레나는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롤랜드의 양 팔을 풀어내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어요.”


“에엑! 아니, 왜?”


롤랜드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시무룩해져서 물었다. 이에 엘레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반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롤랜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엠펠로니아와 접경한 북방요새가 위태하다는 말이 있어요. 제가 개척한 땅이니 제가 지켜야겠지요.”


롤랜드를 만나기 전, 엘레나는 국왕의 명으로 개척민과 약간의 병력을 이끌고 험한 불모지를 개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롤랜드를 만났다. 어쩌면 그곳에 그녀에게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책임감이 아니라 롤랜드를 만난 곳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엠펠로니아인가.”


엘레나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도. 그리고 자신은 한 번도 엘레나의 뜻을 꺾어 본 적 없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롤랜드는 상쾌하게 웃으며 그녀를 보낼 수 있었다.

자신도 함께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까지 자리를 비우면 딸이 정치놀음에 희생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롤랜드는 다시금 정치판에 신물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철저히 숨기며 잠든 딸을 안아 올렸다. 마지막 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소렌은 그렇게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그러나 소렌은 철부지가 아니었다. 공작가의 여식이라는 위치에 걸맞은 의젓함을 보이며, 소렌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고 검을 다루는 실력 또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성장했다.

그 천재성은 놀라웠다. 경이로웠다. 아니, 두려울 정도였다. 롤랜드가 그 재능에 두려움마저 느낀 것은, 소렌이 미들스쿨의 검술교사을 이겨버렸을 때였다. 비록 검술교사가 제한을 걸고 대련을 치르기는 했지만, 그건 하이스쿨 학생이 소드마스터를 이긴 것이나 다름없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공작 각하께는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희는 더 이상 영애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르쳐 드릴 수 없습니다.”


“가정교사를 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롤랜드의 말에 교장은 고개를 저었다. 일국의 공작 앞에서 교장은 단호하게 교육자로서의 책임을 다할 작정이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영애께서는 이미 미들스쿨에서 가르치는 것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학자들이나 할만한 생각을 질문해서 교사들이 곤란해 하는 것도 다반사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니요?”


롤랜드가 교장의 벗겨진 머리 위에 맺힌 식은땀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이를 눈치채고는 교장이 재빨리 손으로 땀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하, 학업에 열중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결과를 내는 데에 외압이 있었다는 오해가 빚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오해로 끝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만. 제가 딸에게 들은 것과는 조금 사정이 다르군요.”


롤랜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드래곤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검사에게서 무언의 압박을 느낀 교장은 더듬대며 손수건을 찾아 품속을 더듬었다.


“그, 그러니까.. 드러내고 따돌리거나 하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그리고 대련을 빙자해서 싸움을 거는 일도.... 무, 물론 저희는 공작각하께서 청탁 따위를 용납지 않으시는 청렴한 분이시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허둥지둥 변명을 덧붙이는 교장에게 손을 내저으며 롤랜드는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렌이 학교에서 대판 싸웠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지만, 막상 소렌이 담담히 말한 평소 생활상을 들으니 소렌이 지금까지 멀쩡히 다닌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 것 때문이었군요. 하지만 이번에 소렌이 독하게 손을 쓴 학생은 우리 가문을 모독한 학생이라 들었습니다만.”


“그, 그렇습니다. 이미 그 학생에게 징계조치를 취했으니 심려 놓으시지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저를 대신해 그 학생일가에게 사과를 전해 주십시오. 시간이 되면 직접 찾아뵙겠다 말씀도 전해 주시지요.”


다 젖은 손수건으로 연신 얼굴의 땀을 닦아내리는 교장에게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며 롤랜드는 그렇게 말했다. 폰테일 공작이 아니라 한 사람의 부모로서 미들스쿨의 교장을 탓할 수 없었다. 사실 이 사건의 원인은 일찍이 검을 가르친 자신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다행히도 영애께서 영민하신 덕에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학생들은 더욱 난리법석입니다. 아직 진짜 강한 게 무엇인지 모를 아이니까요.”


차라리 대련을 통해 죄다 팔다리를 분질러 놨다면 소렌은 분명 어느정도 실력을 인정을 받고 그에 맞는 대우는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렌은 평소 롤랜드 자신이 하듯 다치게 하지 않고 상대를 제압했을 테고, 상대는 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더욱 문제가 커진 셈이다.


“알겠네. 다른 학생에게도 누가 될 테니 미들스쿨에는 더이상 나가지 않도록 해 두겠네.”


“감사합니다. 공작각하. 하이스쿨 진학에는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요컨대 졸업장은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주겠다는 말이었다. 뛰어난 아이라서 가르칠 수 없다니.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롤랜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교장이 저택을 나간 뒤에는 급기야 화가 치밀어 책상에 쌓여있는 서류를 팽개쳤다.

딸이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준다며 자신만만하게 외친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호언장담을 해버린 걸까? 당장은 가정교사나 자신이 가르친다 해도, 그것 역시 한계는 있었다. 특히 검을 가르칠 자신은 공작이라는 위치 때문에 좀처럼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이거야 원... 미들스쿨이야 이렇게 넘겼지만 하이스쿨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데.”


롤랜드는 꼬장꼬장한 블로펜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소렌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든 소렌을 하이스쿨에 붙잡아 둘 것이다. 하이스쿨의 인재들은 모두 왕국의 재산이나 다름없으니까.

더욱이 소렌 자신이 배움에 굶주려 있었다. 그래서 분명 하이스쿨 진학을 바랄 것이다. 소렌이 원하는 길을 걷도록 돕기로 한 만큼, 롤랜드는 그녀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이스쿨에 가더라도 문제는 똑같다. 소렌은 이미 하이스쿨 수준을 넘어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과연 소렌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아, 블로펜 그 녀석은 청탁도 통하지 않을 거고... 어쩐다? 그냥 다 때려치고 소렌이나 가르칠까?”


농담처럼 내뱉은 혼잣말을 시작으로 롤랜드는 그런 상황을 상상했다. 그러나 곧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는 확신에 접어들었다. 엘레나와 함께 떠나지도 못한 자신이 대체 무슨 베짱으로 공작위를 팽개친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검이나 학문 이외의 것이었다. 자신이나 엘레나나 영원히 소렌과 함께 있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심란한 국외상황을 고려한다면 언제 소렌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런 상황 속에서 소렌이 과연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지독한 외로움에 사무쳐 억지웃음을 짓고 고독을 칭송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롤랜드는 그때 가장 환하게 웃었고 또한 가장 괴로웠다. 서커스단원과 언제나 웃고 떠들었지만 그의 재능과 고통을 이해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롤랜드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분명 천방지축인 자신을 한 사람의 귀족으로 만들어낸 사랑하는 아내의 것으로만 들렸다. 그래서 롤랜드는 잔소리를 듣기 전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엉망이 된 서류를 정리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소렌이 모습을 보였다. 목소리는 놀랄만큼 비슷했지만, 엘레나는 아직도 개척지에서 몬스터와 씨름하고 있었다. 롤랜드는 서류 귀퉁이의 모양을 가다듬던 중 문을 두드린 것이 소렌임을 깨닫고 헛기침을 하면서 의자에 파묻히듯 앉았다.


“어, 어흠! 너였구나. 무슨 일이니?”


엘레나가 떠난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긴 시간 떨어져 있었기에 딸과 엘레나를 겹쳐 본 것은 아니었다. 딸은 자랄수록 놀랄 만큼 엘레나를 닮아갔다. 단지 다른 점이라 한다면 부모 양측의 재능을 합쳐놓은 것 같은 천재성이었다. 그 점에서만은 자신이 조금 보탬이 되었다 생각하며 롤랜드는 사랑하는 딸을 바라보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음, 그래. 용돈 필요하니? 요즘은 자카이야 풍 드레스가 인기라더라. 그걸 사려고 하는구나?”


실없는 농담에 소렌은 뚱하니 롤랜드를 바라보았다. 한편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던 롤랜드는 아차 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차라리 새 목검을 들먹였다면 반응이라도 보였을 것을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교장선생님께서 다녀가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미들스쿨에 나오지 말라는 말씀이셨나요?”


싱글대던 롤랜드이 표정이 시간을 멈춘 것처럼 굳었다. 적당한 핑계를 떠올리려 했지만 똑똑한 딸은 속지 않을 것이다. 결국 롤랜드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렇군요.”


소렌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롤랜드는 소렌이 정말로 아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렌은 이런 아이다. 언제나 배움에 목말라 있는 귀여운 딸. 그런 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미들스쿨은 물론이고 하이스쿨도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혹시 엘레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녀라면 애초에 검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현명함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문득 그녀가 보고 싶었다. 롤랜드는 멍하니 엘레나를 닮은 딸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블로펜은 벽난로에서 뿜어지는 열기를 받아 조금 붉게 물든 얼굴을 끄덕였다. 이에 롤랜드는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포자기해서 블로펜을 찾아왔건만 블로펜은 뜻밖에 자신의 처지와 소렌의 상황에 대해 이해해 주는 눈치였다.


“솔직히 말해도 되겠나?”


“우리 사이에 무슨. 전우 아닌가 전우.”


롤랜드가 싱글벙글 웃으며 블로펜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블로펜은 단호하게 그 손을 떨쳐내고는 차를 단번에 들이키고 말했다.


“그럼 솔직히 말하지. 나는 자네 딸의 행복을 위해 하이스쿨 입학을 재고해보라는 말이 아니야.”


“그, 그럼 뭔가?”


“단지 자네 딸이 더 훌륭한 검사가 되어 로베른을 위해 싸우기를 바랄 뿐이지. 하이스쿨은 좁아. 이런 곳에 천재를 던져 두어봐야 좋은 것이 하나 없어. 나태해지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크레베스만 봐도 충분히 알만한 사실 아닌가?”


블로펜은 생사를 함께한 또다른 전우, 크레베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블로펜과는 달리 순탄한 길을 택한 그는 귀족이 되어 뭇 검사의 존경은 받았지만 그만큼 실력은 추락해 버렸다.


“흠, 그렇군. 나야 엘레나 덕분에 열심히 싸웠지만 그 녀석은 슬슬 배가 나오는 것 같더라고.”


“그래도 요즘은 자기가 나태한 줄은 알고 열심히 하더군. 좋은 일이지.”


왕실을 수호하는 근위대장이 강해진다는 건 로베른에 있어서 분명 좋은 일이다. 그리고 친우가 아직 검을 꺾지 않았다는 것 역시 싸늘하기 짝이 없는 블로펜에게 미소를 안겨줄만한 일이었다.


“음,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간단하지. 유학을 보내게.”


“그, 그건 안돼!”


그 순간 팔불출 같은 성격이 튀어나와 롤랜드는 자신도 모르게 마나까지 운용하며 가세를 발했다. 그러나 백전연마의 군인인 블로펜은 대수롭지 않게 그 기세를 흘려내고 말했다.


“농담이 아니야. 인정하기는 싫지만 로베른은 좁아. 자네 딸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더 큰 무대가 필요하지.”


“설마 너 라스탄트에 내 딸을 보내라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가는 나 엘레나한테 맞아죽어. 그 어린 것을 엠펠로니아로 보내는 야만인들한테 내 딸을 맡길 수는 없다고!”


“라스탄트라. 나쁘지는 않지. 그나저나 저번 매칭 때 볼마르그의 후계자를 본 적이 있다네. 과연 그 아비에 그 아들이더군. 하지만 이번에도 솔직히 말하지. 자네 딸이 라스탄트에 간다면 오히려 볼마르그가 손해를 볼 걸세.”


자신만만한 이들일수록 그보다 뛰어난 이를 보면 더욱 열등감에 빠지는 법이다. 그리고 터무니없게 밝은 빛을 받으면 그 어떤 새싹이라도 말라비틀어질 뿐이다. 롤랜드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소렌이 그 정도인가?”


“자네도 조심하게. 내가 볼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자네는 추월당하게 되어 있어. 자네마저 무너지면 소렌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아. 그렇게 되면 그 천재성도 더는 빛나지 못할 것이야.”


롤랜드는 그 말을 듣고 더는 농담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오리엔트에 보내게.”


블로펜이 말했다. 이에 롤랜드는 저택에 상주하고 있는 오리엔트의 검사를 떠올렸다. 드래곤을 상대하며 인연이 닿았던 그 검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곳에서 자네 딸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없네. 하지만 오리엔트라면 모르지. 그곳은 나도 잘 모르는 곳이니 가능성이 있을지도...”


“아니. 분명 가능해.”


롤랜드는 확신을 가졌다. 유한겸이 들려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위용마저도 빛이 바래게 하는 이야기투성이였다. 단신으로 기천의 군대를 압도한 괴물 같은 자나, 자카이야의 도움 없이 드래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까지. 드래곤의 힘을 직접 겪었던 그였기에 그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무용담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가능성이 보였다. 그런 자들이 소렌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한겸 씨가 늘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니 그에게 딸을 맡기면 되겠군. 좋아. 그렇게 하겠어. 좋은 충고 고마워.”


롤랜드는 마치 젊은 시절 블로펜에게 말하듯 가벼운 말투로 감사를 전했다. 더없이 위험천만한 상황에 나누었던 그런 말투였기에 블로펜은 롤랜드의 마음을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블로펜은 오히려 반문했다.


“딸과 떨어지는 일이야. 조금 더 심사숙고해서...”


“내 생각을 해 줄 필요는 없어. 나는 나. 소렌은 소렌이야. 부탁이야. 내 결심을 흔들지 말아줘.”


롤랜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코트를 챙겨 들고는 곧장 짙푸른 한겨울의 추위로 가득한 밤거리로 나섰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롤랜드는 찬바람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차가운 공기를 맞으니 눈물이 쑥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내의 대화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시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며칠 뒤에 블로펜이 갑작스레 롤랜드를 찾아온 것이다.


“왜 왔는지 궁금한가?”


“아니, 그보다 왜 그렇게 쪼개고 있는지 궁금한데?”


딸을 떠나보낼 생각에 침울해진 롤랜드는 경박한 말투로 블로펜의 말을 받아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에 블로펜은 기가 찬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다음 품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게 뭔데?”


“자네 딸의 입학원서일세.”


“야 인마. 이건 또 무슨 헛짓거리야? 소렌은 오리엔트로...”


“그럴 필요 없다는 의미일세. 믿을지는 모르지만 소렌 만큼이나 터무니없는 녀석이 하이스쿨에 들어오기로 되었다네. 아스트리다가 운영하는 고아원 출신인데....”


롤랜드의 침울한 표정이 마치 몇 달 전으로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롤랜드가 블로펜의 손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히고는 손수 차를 내오며 물었다.


“어떤 녀석이라고?”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이상하게 소렌 이야기가 아니군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다음편은 정말로 소렌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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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외전 1. Superior Progress : 깨달음. 그리고 비극. +5 15.02.06 713 14 14쪽
177 외전 1. Superior Progress : Before Dawn 15.02.03 654 14 20쪽
176 6. 북천(北天)의 망령(亡靈) (4) +7 15.01.30 863 15 14쪽
175 외전 1. Superior Progress : 변화 +4 15.01.27 693 15 18쪽
174 외전 1. Superior Progress : 모든 게 처음이었다. +6 15.01.23 683 13 24쪽
173 외전 1. Superior Progress : 소렌이 나아갈 길 +6 15.01.20 727 10 17쪽
» 외전 1. Superior Progress : 폰테일 공작의 고뇌. +4 15.01.13 748 14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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