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근황을 보고 드립니다.
글을 쓰기가 많이 무서워졌습니다.
그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짐작하신 대로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올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찌 보면… 뭔가 꽉 막혀 진행이 되지를 않으니 드릴 말씀도 많이 궁했었다고 할까요?
그래도…
그 동안의 경과와 진행사항을 알려드려야 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고, 요즘 들어 나름대로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그간 있었던 일들과 계획에 대해 담담한 기분으로 보고 말씀 올립니다.
출판이 많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영화는 커다란 프로젝트로 굳세게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기성의 벽에 부딪쳐가며 꽤 많은 곡절을 겪고 이제야 올바른 방향과 궤도로 들어가고 있다는 기분입니다.
우선 출판에 대해 그간 경과와 제 근황을 엮어서 말씀드립니다.
꽤 많은 진통이 있었습니다. 컨텐트는 지난 4월에 완성되었지만 출판될 내용에 대한 출판사와 작가 사이의 이견 때문에 수없이 많은 논쟁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출판사 사장님과는 꽤 막역한 사이이고, 그 전에 제 책(경영학 서적)을 두 번 출판한 경험이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먹고 사는 문제에서 아직은 아쉬운 형편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 동안 저는 총 5권에 이르는 분량을 네 번에 걸쳐 다시 손봤고, 많은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출판사 역시 개정된 원고를 다시 편집과 교정을 거쳐 제게 보내왔었습니다. 그러나 근 5개월 동안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저는 출판사의 전문 편집자가 건드리고 추가하고 수정한 부분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반면 출판사는 제 원고가 ‘책’으로 나가기에는 표현이 난삽하고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장르’ 쪽 출판과 서점 출판은 그 내용과 격이 달라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직도 그 격(格)이라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확실히 전문가에 의해 편집된 텍스트는 훨씬 깔끔하고 ‘점잖게’ 잘 읽혔습니다. 그러나 제가 견디지 못했던 것은 -그 격이 높아진 것과는 상관없이- 바뀐 내용과 전개 방식이 제가 애초에 설정했던 많은 장치를 없앴고, 따라서 의도했던 효과를 없애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제 소설에서 독자가 작가와 함께 주인공의 바로 옆에서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껴주길 바랐습니다. 현장감보다 더 강한 것, 바로 임장감(臨場感)이라는 것이죠. 그 속에서 독자 분들이 호쾌함, 팽팽한 긴박감, 절제된 애잔함, 아릿한 안타까움… 동정, 그리고 따뜻한 호기심을 가져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점잖은 글에서는 금기라고 할 만한 것들을 과감하게 넣었습니다. 바로 독자 여러분이 연재 분에서 보았던 그런 방식이었죠. 시제의 파괴, 시점의 전환, 인터넷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 표현방식들, 구두점, 심지어 의성어까지…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에 필요하다면 그것들을 넣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그 표현들이 결코 저열하지 않았고, 평등해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무수하게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얼굴을 붉히고 고성이 오갈 정도로 격렬했습니다.
저는 주장했습니다. 나는 무슨 문단의 평판을 노리는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들의 고아한 취향에 맞출 의무가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이야기를 보다 재미있게 쓰고 싶었던 사람이다. 또한, 적어도 그 취향도 까다롭고, 재미없으면 가차없이 채널을 돌리는 문피아 독자 분들 2만명이 재미있게 따라오셨다면 그 나름대로 재미의 요소가 있는 ‘입증된’ 텍스트가 아니냐. 이걸 그토록 딱딱하고 단정한 형식에 가두면 과연 더 재미있어지겠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요.
그러나, 출판사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보다 현실적으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작금 냉정한 서점가의 현실을 보면 과연 이 텍스트가 통할지는 정말 모험이다.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내용은 반드시 고쳐야 하고, 세련된 전문가의 교정을 거쳐 ‘무리 없는’ 책으로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출판사의 리스크도 생각해야 하고… 그것도 이해를 할 수 있는 내용이었죠.
결론적으로,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위험을 보는 관점이 달랐던 것이지요. 서로의 취향이 달랐고, 시장을 보는 관점도 달랐습니다. 저는 인터넷 텍스트에 익숙한 세대의 눈높이를 가진 분들을 주요 독자로 보았고, 출판사는 출판물(인쇄물)에 익숙한 광범위한 독자층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판단은 노련한 출판사가 옳을 겁니다. 게다가 인터넷에서 제 글은 이미 읽힌 글이라는 핸디캡까지 있고, 인터넷 독자는 결코 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출판사의 우려는 매우 합리적일 것입니다. 그 판단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색다른 관점으로 제가 추정한 시장에 대한 가설을 한번 믿어보려고 합니다. 그 가설은 인터넷 독자와 offline 독자가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사실은 통합된 하나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터넷 독자는 훨씬 까다로워서 검증된 컨텐츠가 아니면 쉽게 구매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현재, 앞으로도 인터넷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offline에서는 소문조차 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비록 실패의 확률이 높아도 끝없는 혁신과 도전만이 진정한 팬을 만든다는 것. follower 전략은 안전하지도 확실하지도 않다는 것. 고맙게도 영화사 사장께서는 제 감각을 지지해주셨습니다. 같이 ‘박’을 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어제 이 주제로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쪽박일지 대박일지 모르지만 박은 박일 거다…)
결국, 저와 출판사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시간은 이미 반년이상 지나갔고, 마케팅 단계도 아닌 텍스트 수준에서 서로가 이토록 불만인 상황이라면 더 이상은 시간낭비라고 보았습니다. 그 결론이 어제 이루어졌습니다. 출판은 영화사에서 같이 하게 될 겁니다. 출판, 영화가 동일한 concept에서 기획되고 통합된 컨텐츠로 다시 진화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원소스 멀티유즈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영화사에서 준비해온 이미지, 지도, 캐릭터 등등이 책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꽤 되는 분량의 설정집이 보너스 혹은 상품으로 나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거 쓰느라 꽤 고생했습니다) 영화사 주도로 홈페이지가 준비될 것입니다. 독자 분들의 무한 참여가 가능한 형태로 기획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 국내처음으로 독자와 작가와 회사가 함께 만들어가는 책/애니/영화컨셉이 나올 지 모르겠습니다.
금주부터 이 기획이 시작됩니다. 그 동안 이런저런 일도 참 심력을 많이 소모했습니다.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지치기도 했었죠. (뭐 하나 마무리가 되어야 털고 상큼하게 시작할 텐데… ) 책은 가급적 빨리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선호작 취소를 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약속을 드리기는 뭐 하지만 앞으로 무척 재미있어지는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디, 계속 유지해주시기를 부탁 드리고, 다음 소식이 마련되는 대로 연락 올리겠습니다.
요삼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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