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계 부저추신
2계 부저추신
광화 6년.
한 살 더 먹은 선우명은 다섯 살이 되었다. 1년이란 시간 동안 절대 놀고먹지 않은 선우명은 한어에 능숙해졌다. 그리고 학문을 익혔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우명에게 거는 기대가 큰 승원이 멋대로 글 선생을 두게 해서 억지로 익힌 것이었다.
선우명의 글 선생은 인근에서 학문으로 명성이 자자한 왕성은 예주자사 왕윤의 사촌으로 관직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재능 있는 아이를 가르치며 소일을 하다가 이번에 선우명을 가르치게 된 것이었다.
승원의 서재에서 마주앉은 채로 선우명을 가르치던 왕정은 답답해서 고함을 질렀다.
“이놈!”
염소수염을 푸르르 떨며 역정 내는 왕정과 달리 선우명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보기에는 왕정이 화낼 이유가 전혀 없어서였다.
왕정이 이렇게 화내는 이유는 아무리 가르쳐도 선우명이 그걸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서였다.
“어떻게 된 녀석이 어제 말한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
“스승님, 어제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시는데 스승님은 제가 어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스승님도 기억하지 못하시는데 어찌 저보고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일상에서 한 말과 가르침이 같으냐.”
“다를 것도 없지 않습니까.”
“가르침이란 도리와 지식을 가르치면 그걸 배우는 것을 말한다. 어찌 한 귀로 흘려도 되는 대화와 비교하려 하느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 삼백 편을 다 외우더라도 벼슬을 주었을 때 능히 해내지 못하고, 타국으로 사신을 보내졌을 때 능히 대처하지 못한다면, 많이 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걸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넌 어제도 그 말을 했다.”
정확히는 어제도 똑같은 주제로 말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선우명이 이 말을 외운 이유도 바로 이렇게 써먹기 위해서였다.
도저히 안 되겠는 왕정은 고개를 흔들며 일어나서 말했다.
“아무리 가르쳐도 배울 생각이 없는 널 가르쳐봤자 소용없으니 그만두겠다.”
선우명의 말을 듣고 싶지도 않은 왕정은 서재를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선우명 또한 왕정과 같이 불만이 많았다.
“거지 같이 가르친 주제에.”
왕정이 가르치는 방법은 이 시대의 평범한 학자와 똑같았다.
암기.
단,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무조건 외우는 것이 이 시대의 기본이 되는 교육법이라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선우명은 고의로 외우려 하지 않았다.
현대의 교육이나 지금의 교육이나 외우는 건 똑같으나 중요한 것을 외우는 것과 교과서 전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라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외울 수 있는데도 외우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사서삼경을 외웠다고 했을 때 이걸 쓸 수 있는 곳이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보통 선비가 학문을 익히는 이유는 출세를 위해서인데 이 시대에는 과거란 것이 없어서 익혀봤자 출세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이 시대에 관직에 오르는 방법은 상급자가 하급자를 임명하는 형태라서 돈으로 사거나 관직에 있는 사람과 친분이 있으면 굳이 학문을 익힐 필요가 없었다.
단적인 예로 누이동생이 황후가 됐다는 이유로 백정에서 하남윤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일신의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임용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어서 실력보다는 뒤를 봐줄 누군가가 더 중요했다.
선우명이 학문을 중히 여기지 않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그는 관직에 오를 생각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동탁의 죽음뿐이고 그 죽음을 위해서 필요한 건 학문이 아니었다.
시간이 많지 않은데 복수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학문을 익히며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선우명은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마음 같아서는 십상시의 난으로 동탁이 정권을 잡기 전에 죽이고 싶은데 문제는 그때가 돼도 선우명의 나이는 겨우 열 살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열 살이란 나이는 자기가 주도적으로 뭘 하기에는 어린 나이라서 답답하기만 했다.
왕정은 그냥 가지 않고 승원에게 말하고 가서 굳은 표정의 승원은 서재로 바로 달려왔다.
“주인님.”
“왕정 학사에게 들었다. 말을 듣지 않았다고?”
“어떻게 말했는지 몰라도 무조건 외우라고 하는 방식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거라면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네가 총명한 것은 알겠으나 이 인근에서 왕정만 한 학사가 없으니 찾아가서 사과해라. 그리고서 다시 스승으로 모셔라.”
“주인님,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그딴 스승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가서 사과하고 스승으로 모셔라.”
“싫습니다.”
“왕정은 예주자사의 사촌이다. 장차 네가 관직에 올랐을 때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서 사과해라.”
“주인님, 전 관직에 뜻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관리가 될 생각이 없단 얘기입니다.”
“관리가 안 될 거라면 말이나 키울 것이지 무엇하러 학문을 익혔던 것이냐.”
“그건…….”
이 시대 사람은 학문을 있는 자들의 전유물로 여기기에 학문을 익혔단 얘기는 당연히 관리가 되려는 목적으로 여겨졌다. 실제로도 대부분 그런 목적으로 학문을 익혔다.
어디서 익혔는지 대답할 수가 없는 선우명은 입을 다물다가 말했다.
“저는 이제 겨우 다섯 살입니다. 관직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봅니다.”
“아니야. 너 정도로 총명한 아이라면 관직에 올라야 한다. 나이가 어린 것쯤이야 네 진가를 알면 다들 수긍할 것이다.”
자기는 천재가 아니라고 누누이 얘기했으나 승원은 그걸 겸손한 걸로 받아들여서 먹히지가 않았다. 덕분에 시동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접을 받는 중이었다.
언어와 중원 관습에 익숙해졌으니 이제 떠나야 하지만, 승원에게 받은 은혜 때문에 떠나질 못하는 선우명은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무슨 생각할 시간을 말이냐?”
“제가 관직에 오르는 것 말입니다.”
“관직에 오르겠느냐?”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알았다. 천천히 생각해라.”
“예.”
생각해 본다는 것을 관직에 오르겠다는 말로 알아들어서 기분이 좋아진 승원이 밖으로 나가서 혼자 남게 된 선우명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렇게 유약했었나.”
처음 한어를 가르친 사람이 바로 승원이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챙겨주면서 시동 이상의 대우와 함께 은근슬쩍 양자가 될 생각은 없는지 물어왔기에 솔직히 말해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복수를 하려면 독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다.
최소한 받은 만큼의 은혜를 돌려줘야지만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는 선우명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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