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 총사(62)
책은 정장이 잘 되어 있었다. 검은색으로 염색한 가죽으로 표지를 만든 하드커버였다. '아라고른 황가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는 표지의 제목은 은실로 정교하게 색인되어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표지의 뒷면에도 은실로 새겨진 문장이 적혀 있었는데, 히스파니아어로 '파렴치한 황실의 멸망을 기념하고자 721부만 생산하여 배부한다.'라고 쓰어 있었다. 차례 따위는 없었고 당시 유행하던 각 장의 제목을 나누어 분류하는 형식도 아니었지만, 금속활자가 보편화된 인쇄술의 발전이 이 책의 대량생산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했다.
책의 내용은 큼지막한 활자로 간결하게 찍혀 있었다. 얇은 책이었기에 내용을 완파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벨린은 책의 내용을 속독했다. 그가 책을 읽으며 말했다.
"불온서적이군요, 마마. 그것도 조잡한 재질이 아닌 돈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불온서적 말입니다."
"그 책은 단순한 불온서적이 아니다."
이사벨이 차갑게 말했다.
"황실을 배반하여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은 성전 기사단을 영웅으로 취급하고 현 황실의 정통을 기만하고 있다."
"성전 기사단 내용 말씀이시군요."
벨린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황실을 위협하기엔 그들의 전설은 너무 오래 됐지요. 이교도 원정 이후 반역죄로 처형된 성전기사단 단원의 수가 721명이었던가요?"
"나는 역사 따위에 관심없다. 데 란테."
이사벨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벨린 데 란테는 책을 펼쳐 문제의 첫장을 읽어내렸다.
학문 분야에서 주로 쓰는 소책자처럼 편집된 그 책은 200년전 처형당한 721명의 기사 가운데 첫번째로 희생된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었다.
벨린이 속으로 책을 읽어내렸다.
'이사벨 1세가 등극한지 3년이 되는 해, 성전기사단 단장 미카엘 빌보아는 여제의 명으로 저녁 무렵 이스티아노의 성 세바스찬 성당에 출도한다. 그날 오후 이사벨 1세는 중대한 계획을 눈앞에 두고 성 세바스찬 성당으로 떠나는 마차에 올랐다. 성전기사단의 박해를 개시한 그녀에게는 무슨 마음이 있었는가?'
공교롭게도, 황녀와 그녀의 총사를 태운 마차는 이제 목적지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아스티아노 근교의 성 세바스찬 성당으로 가는 길을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히스파니아가 제국으로 발전하던 시절, 히스파니아의 성장과 함게 태동한 성전기사단의 전설은 일반 히스파니아 신민들에게도 널리 받아들여져 있다. 성전기사단은 전 에우로파를 무대로 활동한 기사 조직이었고, 엄격한 기독정교의 교리에 입각한 규율과 형제애로, 이교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허나 이 조직은 히스파니아가 제국을 선포한지 30년이 지난 후인, 이사벨 1세 여제 시절에 탄압을 받는다. 그리고 그 탄압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처형자는 바로 성전기사단장 미카엘 발부아였다.
일반적인 전설에서 미카엘 발부아는 거국적으로 발전하는 성전기사단 조직을 사교의 무리로 타락시키려고 했다고 전한다. 그가 사악한 혁명을 일으키기 전 이것을 감지한 이사벨1세가 그를 성 세바스찬 성당으로 유인 후 체포하여 성 마르틴 광장에서 종교재판으로 화형시켰다는 것이다. 현 시대의 역사가들이 전하는 바도 유사하다. 대다수의 히스파니아 역사가들은 미카엘 발부아가 제국을 전복할 반역을 준비하다 발각당해 어쩔 수 없이 처형되었다고 기술한다.. 기사단장의 처형을 시작으로 미리 군주들끼리 정한 약조에 따라 전 에우로파에 퍼져있던 성전기사단 단원들은 박해를 받았고, 그 가운데서 처형당한 단원의 수만 721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벨린 데 란테는 모든 학문적인 지식을 어머니에게서 배웠지만 유일하게 역사만큼은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었다. 아버지는 종종 히스파니아 제국의 영광을 그의 아들에게 가르치고는 했다. 아라고른과 카스티야가 합쳐져 히스파니아 왕국을 건설한 이야기서부터, 제국이 선포되고 그 위대한 서해항로 탐사로 제국의 영토가 신대륙 '누에보 멘토'까지 확장된 역사까지. 아버지는 그에게 마치 조국의 역사를 신화처럼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벨린에게 성전기사단에 대한 역사를 이야기했을 때는, 유독 어투가 조심스러웠다. 그는 미카엘 발부아가 도를 넘었으며, 그 때문에 혁명을 모의하다 처형당했다고 가르쳤다.
"권력의 일부를 가진 이는 언젠가 권력의 전부를 가지고 싶기 마련이란다."
아버지는 미카엘 발부아가 그래서 처형당했다고 간주하고 있었고, 그것은 현 위치에 당도한 벨린에게도 충분히 교훈이 될만한 이야기였다.
마차가 성 세바스찬 성당에 도착하자, 이사벨 황녀와 벨린 데 란테는 마차에서 내려섰다. 늦은 오후였다. 오르간이 연주하는 찬송가가 성당 안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종교를 좋아하지 않는 두 남녀가 성당을 바라보았다. 초대황제 펠리페 1세 시절에 지어진 이 성당은 회반죽과 대리석으로 여러 탑을 쌓아 뾰족한 지붕을 세운 고전적인 양식이었다.
이사벨이 말했다.
"짐은 이 자리에서 고해성사를 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이 일은 전적으로 추기경을 추궁해야한다. 어디 이 나라의 재상이자 치안장관이라는 자가 무슨 의견을 갖고 있는지 보자."
감색 제복을 입은 히스파니아 교회의 사병들, 일명 성 세바스찬 기사단 단원들이 성당 근처의 주교관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이교도 전쟁때 살아남은 기사단의 후예였으나, 사실상 교회의 사병조직이 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은빛 수장에 단창을 쥔 기사단원들이 문을 막아섰다. 이사벨 황녀가 바닥에 끌려 거치장거리는 드레스자락을 두 손으로 쥐며 다가갔다.
기사단원들이 이사벨과 벨린을 바라보았다.
"짐은 제국의 제1황녀 이사벨 데 아라고른이다. 추기경에게 짐이 도착했다 전하라."
근위총사대 제복을 입은 벨린 데 란테가 곁에 있는 것만 해도 그녀의 말은 신빙성이 있었다. 기사단원들이 정중히 예를 갖추더니, 이런 식의 만남이 처음은 아닌 듯, 주교관 안으로 소식을 전달했다. 잠시 후, 누군가 답장을 가지고 왔다.
그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리베라 추기경이 마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이사벨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벨린이 그녀를 따르려고 하자, 기사단원들이 창을 들어 제지했다. 그들이 말했다.
"추기경 각하께서는 무기를 소지한 인원을 주교관에 들여보내길 원치 않으십니다. 교회법에 의해 치외법권인 이 지역에서 무기를 소지한 총사대원을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그는 짐의 호위총사다. 그를 들여보내지 않으면 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사벨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순간 벨린이 검자루에 손을 댔다. 그것을 본 기사단원들이 적대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검을 뽑았다. 어떤 이는 수발식 권총을 빼어 호위총사에게 겨눴다.
돌발상황이었지만, 황녀는 침착을 유지했다. 벨린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호위총사에게 족히 다섯 명이나 되는 교회의 친위대원들이 둘러쌓여 있었지만, 벨린 데 란테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표정의 변화도 없이, 자신의 행동을 마무리지었다. 검집을 벨트에서 분리하여 바닥에 내려놓은 것이다. 그리고는 소지하고 있던 권총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벨린이 바닥에 떨어진 그의 검을 잡은 기사단원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마께서 하사하신 검이오. 잘 간직하길 바라오."
그제야 기사단원들이 무기를 내렸다. 그리고는 황녀와 그녀를 호위하는 신사에게 무례를 사과하고서는 그들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주교관 안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양 옆 벽으로 창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었다. 유화로 채색된 성물화가 드문드문 걸려 있었고, 성물화의 양 옆에는 촛불이 배치되어 어두운 복도를 밝혔다.
기사단원들의 안내를 따르며, 이사벨이 벨린에게 작게 말했다.
"추기경이 왜 너를 데려왔나 묻거든 짐에게 맡겨라. 그는 짐이 누군가와 같이 만나는 것을 놀랍게 여길 것이다."
그녀가 잠시 벨린을 바라보았다. 황녀는 그날 처음으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도 옆에 호위총사를 두고 있으니 든든하구나, 데 란테."
"황공합니다."
벨린 데 란테가 대답했다. 기사단원들이 그들을 추기경의 집무실 앞까지 안냈다. 깃털달린 삼각모에 레이피어를 찬 기사단원이 문을 두드렸다.
"추기경 각하, 히스파니아 제1황녀마마와 마마의 호위총사가 당도했습니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는 것이 긍정의 신호이기라도 하듯, 기사단원이 문을 열었다. 이사벨과 그녀의 호위총사가 안으로 들어갔다. 햇빛과 함께 추기경의 집무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홍색 사제복에 붉은색 주교 모자를 쓴 추기경이 데스크에서 일어나 있었다. 손님을 안내한 기사단원들은 간단히 절을 하고서는 세 사람만 남겨놓고 방을 떠났다.
추기경이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벨린또한 그를 보았다. 추기경은 깡마른 체격에 수염을 기른 사나이로,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했고, 머리털과 수염은 히끗했지만, 날카로운 눈동자에서 뿜어내는 안광이 범상치 않았다.
추기경과 총사가 서로의 시선을 재빨리 교환하면서 마치 연극을 하듯 예를 갖췄다.
추기경이 집무실의 가운데로 걸어나와 이사벨의 반지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마마께서 호위총사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짐도 이제 신변에 더욱 신경을 써야할 때가 되었지."
이사벨이 태연히 대답했다. 추기경이 소리내어 웃었다.
"마마를 위해 바람직한 일입니다. 신교도 반란세력들은 여전히 위협적이지요."
이사벨 황녀가 비웃었다.
"짐에게 적이 고작 영혼까지 차가운 신교도들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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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과의 담판... 그전에 성전기사단이라 함은... 많이 쓰인 이름이라서 바꿀까 했는데 성전기사단, 일명 템플나이트 만큼이나 이 설정에 어울리는 이름이 없더군요... 설정의 모티브는 실제 역사에서 땄는데요... 단지 설정일 뿐.. 방향은 완전 달라요.
리플과 추천, 감평은 힘든 군생활의 힘이 됩니다.. 그럼 담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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