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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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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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65)

DUMMY

벨린 데 란테가 산 루첸가에 자리잡은 자신의 거처 겸 로보 카사도르의 아지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두워져 거리에는 인적이 끊어진 뒤였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아스티아노의 중심가는 이사벨 황녀가 사실상 교회의 볼모로 여겨졌던 디에네 황녀를 구출했다는 소식으로 떠뜰썩 했다.

벨린은 진상을 알아보려고 드라고니스 여관으로 갔다. 그곳은 아스티아노에 흘러들어오는 모든 소문들을 듣기에 좋은 곳이었다.

벨린은 여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급부터 찾지않았다. 대신 그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셰리주를 한 잔 마시며 술집 앞에서 떠들어대는 수많은 사람들의 잡담에 귀를 기울였다.


대다수의 손님들은 오랫동안 권력의 일부분을 간섭받아온 황실이 디에네 황녀의 구출을 통한 이사벨의 결단으로 제2의 권력다툼을 일으킬 것이라고 수군대고 있었다. 덩달아 교회의 기사단원들을 통해 흘러나온 여러 소문들이 제국의 시민들에게 이야기거리를 제공한 모양이었다. 황녀의 밀명을 받은 어느 총사가 단신으로 수녀원을 기습하여, 수녀가 될 자신의 슬픈 운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디에네 데 아라고른을 구출했다는 식의 소문이었다. 아직 톨레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불온서적에 대한 이야기는 아스티아노 그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디에네 황녀의 구출이 그토록 신속하게 이슈화된 데에는 황실의 의도적인 소문 부풀리기가 있을 거라 벨린은 추측했다. 황실의 적이라 할 수 있는 히스파니아의 추기경은 히스파니아 정계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실력자였고, 그만큼 황녀는 신속한 대처가 그의 머리를 옥죄는데 수단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교회가 갑작스러운 선전포고를 받은 이 상황에서는 대중들에게 디에네의 구출이 정당한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유리했다.


벨린이 산 루첸가의 아지트로 돌아오자, 아리엘이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이미 저녁식사를 차려놨고, 미리 도착한 세 총사의 앞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피곤과 허기에 지친 알레한드로와 조안은 빵과 햄, 포도주로 차려진 저녁 식사를 배불리 먹고 식탁에 엎어져 골아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무리하게 움직인 두 총사보다 한결 컨디션이 좋았던 주안 스피놀라 중령은 기분좋게 포도주를 한 잔 마시는 중이었다.

"자네 이야기가 아스티아노 전체에 쫙 퍼졌더군, 벨린."

스피놀라가 웃으며 말했다. 벨린은 코트를 벗어 아리엘에게 주고서는 식탁에 앉았다.

"알고 있었군요, 스피놀라."

"나는 아스티아노에서 나름대로 정보력을 확보하고 있다네. 비록 소문이 과장된 것 같네만, 자네가 교회측에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준 게 틀림없군. 혹시 자네, 이러다 파문당하는 거 아닌가?"

"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스피놀라."

벨린이 식사를 시작하며 말했다. 그가 빵에 올리브유를 발라 씹어먹으며 말을 이었다.

"무신론자에게는 괜찮은 적이 될 테죠. 추기경은 이미 나를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더불어 근위총사대와 교회기사단간의 아슬아슬하던 평화상태도 종지부를 맞이하게 됐지. 나는 자네가 그 포문을 열었다는데 경의를 표하고 싶다네."

스피놀라가 잔을 들어 건배를 표했다. 벨린은 그와 살짝 잔을 부딪치고서는 차가운 햄 요리와 함께 거의 두 사람 분이나 되는 계란요리를 해치웠다.

벨린이 먹으며 말했다.

"책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죠?"

"글쎄..."

수염을 기른 날렵한 인상의 중년 총사가 이마를 긁었다.

"쓸데 없이 고생만 한 꼴이 됐지. 우리는 총사대 본부에서 어떤 자가 대량의 책을 아스티아노로 보내려고 한다는 첩보를 듣고 출동했네. 헌데 책들을 몰래 압수하여 모조리 뒤져보았는데, 생판 빌랜드의 대마법사 뉴턴이 썼다는 혁신적인 프리키피안가 뭔가하는 것밖에 없었어. 알고보니 아스티아노 대학의 출판부 것이었더군. 덕분에 하루종일 책만 뒤지고 다닌 조안과 알레한드로는 완전 지쳐버렸지. 심지어 글을 아는 알레한드로는 그 책들을 읽기까지 했거든. 덕분에 만유인력인지 뭔지 하는 마법 때문에 맛이 갔지."

스피놀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 그 책을 톨레도를 중심으로 유포해서 황실의 명예를 실추하려고 한 것은 분명해. 톨레도는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이고, 황실의 종주지인 아라고르 지방의 주도이자, 여러 모로 학문이 발달했으니까. 마마의 지지층인 황실파 귀족과 부유한 상공업자들도 많지."

"책이란 물건은 말입니다. 스피놀라."

벨린이 말했다.

"애당초 평민들을 목적으로 둔 물건은 아닙니다. 만약 평민들을 선동하려고 성전기사단의 결백과 그에 따른 황실 멸망의 필연성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면, 무지랭이 평민들은 알아 듣지도 못할 겁니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황실이 필요이상의 세금을 착복하고 있다는 소리가 더 씨알이 먹히겠죠."

"그렇다면 그 책은 식자층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겠군. 귀족들이나 지식인, 부유해서 사교모임을 흥미롭게 이끌거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바로 살롱입니다. 스피놀라."

주안 스피놀라가 눈을 깜빡였다. 벨린이 빈 저녁 그릇을 구석으로 밀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책내용을 다 봐서 하는 소리입니다. 사실상 성전기사단의 저주가 황위계승권을 물려받을 두 황녀를 파탄에 일으킬 것이란 내용은 그저 공갈에 불과하지요. 도리어 황실에게 가장 자극적인 내용은 책의 처음과 중간부분입니다. 미카엘 발부아와 이사벨1세의 관계를 새롭게 풀어놓은 것이 귀족이나 지식층에게는 솔깃한 이론이 되겠지요."

스피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벨린이 계속 말했다.

"황실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히려는 것이겠죠. 그 책의 내용대로 이사벨 1세가 미카엘 발부아와 그런 관계였다면, 동명이인이자 똑같은 상황에 쳐해 있는 마마로써는 지식층들 사이에서의 위신에 금이 갈 우려가 있는 겁니다. 톨레도에서 퍼지기 시작한 그 책의 내용이 처음 어디서 퍼졌답니까?"

스피놀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자네 말대로 살롱이었네. 톨레도의 어느 공작부인이 저명한 손님들을 초대하고 이야기하던 도중에, 어떤 자가 책의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요약하고서는 모든 손님들에게 선물로 한 권씩 주었다더군. 책을 잘 포장에서 제목을 가린 채로 말이야."

벨린은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와인을 마셨다.

스피놀라가 감탄했다.

"참 용하군, 자네는 무력도 뛰어나지만 아는 것도 많고 머리도 참 잘 돌아가는 것 같아."

벨린이 술기운에 피식 웃었다.

"제 어머니는 하다 못해 사냥꾼이 되더라도 이런 것을 많이 아는 게 쓸모있을 거라고 하셨죠."

"좋아,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 텐가? 톨레도로 떠나서 뒤를 밟아볼 텐가?"

스피놀라가 그렇게 물었지만, 벨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립니다. 조안과 알레한드로가 지쳤어요. 더구나 이사벨 마마께서는 저를 그렇게 먼곳으로 보내지 않을 겁니다. 마마께서는 저를 계속 주변에 두길 원하시거든요."

벨린이 의자에 편히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마께서 진정 심려하시는 일은 소위 배웠다는 자들과 권력을 지닌 귀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이겠죠. 그녀는 강력한 황권을 원합니다. 그 일환으로 교회에게 칼을 들이댄 거죠."

스피놀라가 술잔을 내려놓고 대뜸 물었다.

"그건 그렇고 어떤 자들의 소행일까? 혹시 앙심을 품은 성전기사단의 후예들인 걸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죠."

벨린이 묵묵히 대꾸했다. 그가 술잔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나려는데 스피놀라가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다, 불쑥 한 마디 했다.

"자네는 지금, 이사벨 마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세."

벨린이 몸을 돌려 스피놀라를 바라보았다. 수염을 기른 중년 총사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나는 30년 전쟁 초반에 발트 왕국의 군대와 싸워 이긴 공으로 황족의 호위총사가 되었네. 대위로 임명되어 이사벨 마마를 전담하는 임무를 맡았지. 마마께서 불과 10살이셨을 때의 일이었어. 그래서 총사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보다도 마마의 마음을 잘 안다고 자부했지, 자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벨린은 가만히 서 있었다. 스피놀라가 낄낄거렸다.

"자네가 그래서 마마의 마음을 사로잡은 유일한 사람이라 단정하는 걸세. 내가 들은바에 따르면 마마는 성년이 된 이후로 아무도 가까이 두지 않았네. 내가 잘 아는 시녀의 말에 따르면 섭정이 되고서는 친구와도 결별하셨고, 매일 그녀를 보살피는 시녀와 시종들은 물론이고 아무한테도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고 하더군. 게다가 요즘에는 시녀들의 도움없이 옷을 고르고 화장까지 직접 하신다지."

스피놀라가 즐겁다는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직접 옷을 고르고 화장을 하신다는 말에 나는 감탄했다네. 그렇게 차기 여제가 되고자 위엄을 보이던 마마가 어느날부터 더욱 아름다워보이려고 화장을 더 신경 쓰고, 밤에는 잠까지 설치신다는 거야. 자네가 마마를 처음으로 구한 이후에 말이야. 뭔가 짐작가지 않나? 그건 누군가에 마음을 빼앗긴 여인만 할 수 있는 행동이란 말일세. 아마 마마께서는 가슴앎이를 심히 하셨을 걸세. 체면상 위엄을 보이긴 해야될 텐데 말일세. 나는 마마의 그 대상이 자네라고 확신하네."

"그것을 어떻게 단정하죠?"

벨린이 물었다. 스피놀라가 대답했다.

"그야 자네의 몸에서 마마의 향수 냄새가 나니까."

황녀의 호위총사가 순간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웃음이 스피놀라에게는 실소처럼 보였다. 벨린이 스피놀라의 곁에 앉더니 재빨리 말했다.

"제법이군요, 스피놀라. 맞아요. 나는 그렇게 성은을 얻었던 거죠."

"한 가지 자네에게 충고하자면, 세뇨르 데 란테."

스피놀라가 술에 취한 듯이 벨린을 바라보았다.

"권력을 지닌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자네에게 득이 되고 실이 될 것이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보는 게 좋다네."

"그 부분은 염하지 않아도 됩니다. 스피놀라."

벨린이 와인에 취한 듯 유쾌하게 말했다.

"나는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 결심은 지켰으면 좋겠군. 으음, 시간이 이렇게 됐나?"

스피놀라가 회중시계를 꺼내어 봤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네. 마누라와 토끼같은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스피놀라가 일어나서 자신의 삼각모를 썼다. 그가 몸을 살짝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벨린이 그를 배웅했다.

"정말 다행이군."

스피놀라가 떠나기 전에 한 마디 했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최소한 미카엘 발부아처럼 화형당할 일은 없을 거 아닌가?"

스피놀라가 작별인사를 하고서는 집을 떠났다. 벨린은 어깨를 으쓱 하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미 밤이 깊었다. 그는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알레한드로와 조안을 깨워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도록 부축했다. 잠에서 깬 그들이 잠결에 벨린을 알아보고서는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벨린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침대로 뉘여 재웠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간 벨린은 동료들이 자신과 이사벨 황녀의 관계가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알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그러나 두 총사는 비록 용기와 무력, 재치를 갖췄을 지라도 무언가를 눈치채는 혜안은 부족했다.

아마 당분간은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스피놀라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벨린은 아리엘을 불렀다. 충실히 가사일을 수행하던 그녀는 요즘 들어 벨린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벨린은 그녀가 가사일 때문에 힘들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아리엘은 힘든 기색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는 듯했다.

아리엘이 허리를 조이는 보디스에 스커트 차림으로 그의 앞에 섰다. 벨린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훔쳐보았다. 그는 아리엘의 몸매에 어떤 풍의 옷이 어울릴까 잠시 생각하고서는, 주인의 시선에 불안해 하는 여자 노예에게 한 마디 했다.

"내일 정오까지 황궁으로 가 봐야 해. 그때 쯤 깨우도록 해. 조안과 알레한드로는 휴식이 필요할 테니 정오가 될 때까지는 잘 챙겨줬으면 좋겠군. 그들에게 첫번째 시에스타가 시작되기 전에 근위총사대 본부에서 봤으면 좋겠다고 전해줘."

"네, 주인님."

"그리고 아리엘."

벨린이 짓궂게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내일 오후 네 시까지 드라고니스 여관 앞으로 나와. 나와 내일 갈 곳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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