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 총사(82)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어릴 적부터 말타기를 즐겼고, 검술과 기마창술을 배웠다. 그녀가 기절해있던 그 순간 하필 꿈을 꾸면서 어릴 적에 말을 타고 훈련을 하던 때를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니치의 공국 가운데 하나인 작센의 울란(Ulah) 기병이었던 할아버지에게서 마상 창술을 배웠는데, 그것이 큐레시어 기병인 그녀가 랜스까지 자유로이 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의식을 잃은 내내, 그녀는 할아버지에게서 배웠던 교훈을 꿈처럼 상기시켰다.
"란스를 들고 있을 때는 후사르에게 덤벼들면 안된다. 놈들은 창을 간단히 피해 네 목을 베어버릴 거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는 후사르가 되었고, 그녀는 그보다 더 강력한 큐레시어가 되었던 것인데...
검으로는 뚫지 못할 빛나는 흉갑을 입기 위해 그렇게 앙칼지도록 살아왔건만. 이제는 모든 게 후회스럽기만 했다. 벨린 데 란테에게 생전 처음으로 패하면서 흉갑이 총탄에 쉽게 뚫린다는 것을 깨우쳤을 때, 그녀는 지금까지 창을 들고 후사르의 기병도에 까불었던 거란 것을 깨달았고, 뒤늦게마다 그게 무척 서글퍼졌다.
석양의 노을빛이 은은히 퍼지는 가운데,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의식을 되찾았다. 말발굽이 딸깍거리는 소리, 말 특유의 페르몬 냄새와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말 잔등의 부드러운 갈기에 얼굴을 뭍고 등자에 두 팔을 끼운 채 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은 거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면서 고여있던 눈물이 두 뺨을 주르륵 타고내려갔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렸군, 까트린."
불과 몇 시간 전만에도 저주하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까트린이 흠칫 했다. 그녀가 재빨리 등을 곧추세우고서는 줄을 잡고 그녀의 말을 모는 자를 내려봤다. 벨린 데 란테였다. 삼각모를 쓰고 갈색 머리칼를 허리까지 기른 총사가 그녀의 말을 몰고 있었다.
바닷가를 오른 쪽에 두고 석양이 긴 그림자를 드리워주면서 그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너!"
까트린이 허겁지겁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자신이 길고 긴 포박상태에서 풀려난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이걸 찾고 있나?"
벨린이 유쾌한 목소리로 물엇다. 그의 손에는 까트린의 기병도가 들려 있었다.
"이리 줘!"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벨린은 기병도를 주지 않았다.
"그 전에 내게 했던 맹세 기억해? 내 부하가 되기로 한 거 말이야."
"그, 그런 약속 따위는... 완전 협박이었잖아! 날 윤간하려고 했으면서!"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벨린은 그저 웃기만 했다. 까트린이 말 위에 탄 채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펴보았다. 엉망이 되었던 술집에서와 달리 깔끔히 단정된 채로 있었다. 비록 기병용 재킷이 좀 찢어져 가슴이 약간 드러나긴 했지만.
그것을 발견한 까트린이 별안간 겁에 질린 듯이 내뱉었다.
"혹시, 술집에서 있었던 그 일이 꿈이 아니었다면, 너...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이봐, 세뇨리타."
벨린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아무리 여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걸 좋아한다 해도 도둑질은 하지 않아. 재미가 없거든."
그래도 그녀는 녀석의 태연함에 질겁했다.
"넌 그 동방회사군 녀석들에게 시켜서 진짜 날..."
"그럼 그때 순결을 잃도록 그냥 놔둘 걸 그랬나, 까트린?"
그 말에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바짝 긴장했다. 유쾌한 얼굴을 한 저 사내가 언제 또 자신을 함정에 빠트릴 지 모르는 일었다. 최소한 무기를 되찾기 전까지는 저 자에게 굽신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벨린이 까트린의 검을 만져보며 유쾌한 어투로 말했다.
"옛날 것 치고는 아주 좋은 검이군. 물결무늬를 보아하니 이교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모양인데. 뭐, 아무튼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기미가 보일 때 검을 돌려주도록 하지."
까트린이 할말을 잃은 표정으로 있었다. 벨린이 물었다.
"무슨 할말이라도 있나?"
당황하던 그녀가 최대한 벨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벨린이 피식 웃었다.
불길한 느낌이 든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벨린이 말을 몰고 가면서 설명했다.
"나는 비록 마법사는 아니지만, 공명 원리라는 걸 알지. 내게는 마법사인 내 어머니가 준 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이용해 동방회사군 녀석들을 정신차리게 만들었을 뿐이야. 놈들이 마시던 술에 그 귀한 걸 조금 탔거든. 사람을 얼마 동안 홀리게 만드는 물건이지. 그것을 공중에서 연소시켜 공명원리로 같이 터트려버리니 다들 정신을 차리는 대신 마력에 놀라 기절하더군 ."
그녀는 이해가 안간다는 얼굴이었다. 짧은 인생을 기병으로 살아온 그녀는 과학은 물론 마법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럼 그 자들은 전부 죽은 거...야?"
그녀가 고민하다 간신히 물었다.
"나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아." 벨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지금쯤은 깨어나서 동방회사 상관에서 이사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허나 너나 나에 대해서는 절대 기억하지 못할 테니 안심해. 심지어 놈들에게 보여줬던 네 알몸까지도 말이야. 녀석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우리는 해가 지기 전 동방회사의 전용 부두로 갈 테고 그곳에서 멋진 밤을 보낼 테니까."
순간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저 자에게서 여전히 씻지 못할 증오를 품고 있었음에도 소름끼칠 정도로 이상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잘 생긴 얼굴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잔악무도한데도, 석양이 지고 있는 이 와중만큼은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고난을 당하고서도 저 자가 매력적이게 보일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원리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자가 마법을 부린 건 아닌가 두려울 정도였다.
이런 함정에 빠져선 안 돼. 하고 그녀가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저 놈은 내 몸을 더럽히려고 했던 자야. 이런 식으로 현혹한다 해도 절대 용서치 않을 거야.
그들은 거대한 범선들이 정박해 있는 항만구역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인적은 거의 없었고, 갈매기들만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줄을 잡겠나? 까트린?"
벨린이 말고삐와 연결된 줄을 들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완곡한 자유를 주겠다는 소리였다. 그녀의 한 손에는 아직도 승마용 장갑이 없었는데, 벨린이 품안에서 까트린의 한쪽 장갑을 꺼내서는 줄과 함께 건냈다.
그녀는 놀라움과 불안감이 잔뜩 점철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자유를 주다니, 또 저 자가 함정을 파는 건 아닐까 염려되어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채로 장갑을 손에 끼며 물었다.
"정말, 처음부터 나를 엿먹이려고 함정을 팠던 게 아니었어?"
"몇 번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네가 복종하겠다고 약속한 이상 나는 널 해치지 않아. 그저 네 무덤을 네가 스스로 팠을 뿐이지."
벨린이 그렇게 대꾸하면서 앞장 서 갔다. 배에 적재하는 수화물이 가득 쌓인 부두 근처로 숨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들은 2미터 높이로 한 가득 쌓인 큰 나무 상자들 틈에 자리를 잡았다. 까트린이 타고 온 말까지 숨기기에 아주 적당한 장소였다.
벨린이 머스킷총을 어깨에 걸친 채 상자에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해가 질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군. 이제 좀 말에서 내려 쉬는 게 어때? 카발리스."
까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저 자가 자신을 카발리스라 부르는 게 궁금해서, 그녀가 안장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자꾸만 나를 카발리스라 부르는 이유가 뭐지?"
"라투니스어로 기병대원을 카발리에라 부르지. 여성형이니 카발리스 아니겠어?"
이 대답에 까트린은 여전히 벨린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저 자가 생각보다도 훨씬 박식한 자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기병대는 생각보다 무식한 자들이 많았던 터라, 그녀는 라투니스어는 커녕 히스파니아어도 제대로 쓸 줄 몰랐다. 이 전통은 중장기병을 창시한 카를로스 대제가 한때 에우로파 전역을 휩쓸었음에도 까막눈이었다는 것에서 이어진다. 더구나 그녀의 심리가 벨린이 생각했던 것 보다도 단순했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그녀는 후사르들의 주 복장인 한쪽 어깨를 가리는 두꺼운 외투를 걸쳤다. 이것은 원래 후사르라는 병종의 원류인 동에우로파의 후사르들이 걸치던 '돌만'이라는 것인데, 후사르였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옷이었다. 재킷이 찢어져 속살이 드러난데다 바닷바람이 슬슬 차가워지고 있어 보온용으로 껴입은 거였다.
이제는 벨린의 속셈을 알아봐야했다. 정말 저 자가 그 빌랜드인 첩자들이 숨은 곳을 찾아낸 걸까?
까트린이 등자에서 바닥으로 발을 딛으며 신중히 물었다.
"그렇다면 정말 그 빌랜드인 첩자들을 잡으려고 이리로 온 거야?"
그가 자신의 머스킷총을 점검하며 대답했다.
"녀석들 뿐만 아니라 궁지에 몰 수 있는 자가 한 명 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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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과 관련해서 생소한 언어가 많이 나오죠? 까트린 데 세비아노의 복장이라면. 음, 나폴레오닉 워나 그런 쪽에 관심있는 분은 금방 떠오를 텐데요. 이미지를 펐으면 좋겠건만...여긴 군대라서 이미지를 퍼오기가 힘들군요. 굳이 묘사하다면 기병답게 화려한 복장이거든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선보이기로 하고 암튼 계속 가보죠.
까트린의 심리묘사에 대한 묘사를 조금 수정했음. 항상 지적은 참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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