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
[태연의 이야기]
어제 밤의 피로가 아직 안 풀리는 것 같다. 친구들과 마신 술이 몇 잔이었더라. 취하도록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해롱거렸던 것 같은데. 오빠가 나름 오늘이 첫날밤 아닌 첫날밤이라며 밤새 괴롭힌 탓에 푹 자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해가 중천에 떠 내 눈을 마구 괴롭히고 있었지만 쉽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우리 여보 아직도 자요?”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양 볼을 꼬집으며 흔드는 오빠.
“아앙. 하지 마.”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자 나를 살짝 감싸 안으며 내 어깨를 토닥여준다.
“일어나야지. 오늘 중요한 일 하기로 했잖아.”
“알았어. 나 일으켜줘.”
이불을 걷어내는 오빠에게 양 팔을 내밀며 앙탈을 부렸다. 그러자 오빠가 아빠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아 올렸다. 체구가 작은 것이 나름 콤플렉스였는데 이럴 땐 제법 좋다.
오빠가 아이처럼 나를 안아 들고 화장실 앞에 내려주었다. 불을 켜고 안으로 들어가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강한 물살이 세면대에 부딪힌다. 쏴아아아. 얼굴에 물이 닿지 않았지만 이 소리만으로도 잠이 깨는 것 같다.
꼭지를 냉수 쪽으로 틀어 얼굴에 물을 적셨다. 한 번, 두 번. 물을 맞아갈수록 정신이 명료해졌다.
이제 5일 남은 건가? 그것도 오늘 포함해서. 카운트다운 들어간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한 손으로 꼽을 정도가 되었구나. 한 손. 한 손. 손가락이 한 100개쯤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 조금 더 손을 꼽을 수 있을 텐데.
기분 나쁜 긴장감과 오늘이 주는 설렘이 내 가슴을 들었다 놨다 한다. 널뛰는 기분.
좋다, 좋지 않다.
“여보야. 서류 챙겼어?”
나의 물음에 오빠가 흰색 플라스틱 케이스로 된 서류함을 들어 흔들어 보인다. 조금은 낡은 서류함. 학번이 쓰여 있는 것을 보니 학교 다닐 때 A4지를 넣어 다니던 것 같다.
“응. 여기 있어! 혹시 상할까봐 여기 넣어놨지.”
“증인란도 다 채워져 있지?”
“응. 재훈이랑 미영씨한테 어제 미리 받아놨지.”
“또 필요한 게 뭐 있지?”
“우리 신분증이랑 혹시 모르니 도장 정도?”
오빠가 대답을 하며 물건들을 가방에 챙겨 넣는다. 몇 번을 다시 확인을 해본 오빠는 가방을 툭툭 두들기며 개구쟁이 아이처럼 웃는다.
“가자. 완전 기대된다.”
오빠의 손을 잡고 마을버스를 타러 나왔다.
“동사무소는 안 된다고 그랬나?”
“된다는 사람도 있고 안 된다는 사람도 있어서 그냥 바로 구청으로 가려고.”
“덕양구청?”
“응. 아 저기 버스 온다.”
오빠가 가리키는 곳엔 노란색 60번 버스가 있었다.
“발판 조심해. 여보.”
버스를 오르는 나를 잡아주는 오빠. 아니 그런데 이 사람이!
“여보야. 나 잡아주는 건 좋은데 왜 자꾸 엉덩이만 잡아주는 거야?”
“응? 내가?”
시치미를 떼는 오빠의 옆구리를 꼬집어주자 또 씩 웃는다. 점점 이래. 뭐 나쁘진 않지만. 요즘 많이 먹어서 엉덩이가 좀 퍼지는 것 같은데 운동을 몰래 해야 하나?
오빠의 옆에 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창밖의 풍경. 이제 벌써 꽃잎이 다 떨어져 간다. 앙상한 가지가 드러나고 파란 잎사귀가 나기 시작한다. 곧 여름이 시작되겠지? 벌써 낮에는 좀 더운 것 같던데. 반팔을 사야하나? 하긴 지금 사기엔 애매하지. 곧 다가오는데. 더우면 조금 참지 뭐. 며칠만 있으면 되니까.
“내리자 다 왔어.”
나의 상념을 깨우는 오빠의 음성. 그의 손을 잡고 내리자 깨끗하고 큰 건물이 우리를 반긴다.
“구청 예쁘다.”
“일 보고 밥 먹자. 금방이래.”
구청에 도착한 우리는 혼인신고서의 나머지 칸을 작성했다. 부모님란이랑 증인 부분은 어제 미리 작성해두었다. 나머지 칸은 우리가 여기서 직접 하자고 했다. 그래야 뭔가 있어 보인다면서.
역시 한 칸, 한 칸을 채워나가는 기분이 묘하다. 무언가 우리를 감싸고 있던 세상에 대한 편견이 한 꺼풀씩 벗겨지는 느낌이다. 동거인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부부로 거듭나는 느낌.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성충이 되듯 빈 칸에 글자가 채워질 때마다 변화하는 것 같다.
“여보야. 기분 어때?”
“오묘해.”
“어떻게 오묘해?”
나의 물음에 그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뭐랄까. 책임감 같은 것도 생기고. 우리가 진짜 부부구나 하는 기분도 들고. 단지 서류 한 장일뿐이지만 무언가 우리의 사랑에 대해 인정받는 기분도 들고.”
말을 이어가는 오빠의 표정이 마치 꽃밭에 든 여고생 같다. 두 눈엔 감성을 가득히 담고, 내 뱉는 음성에는 설렘을 담는다. 그래 저 모습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지. 내가 사랑하는 모습이고.
그의 사랑스런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의 양 귀를 잡고 입을 맞춰준다. 쪽 소리가 나도록.
“나도 그래.”
그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도 입을 맞추어준다. 그리곤 꼭 안아준다. 이 행동도 나를 기분 좋게 한다. 항상 입을 맞춰준 이후엔 나를 온 힘을 다해 안아준다. ‘아프도록’이 아니라 ‘온 정성을 다해서’ 말이다.
“가서 접수하자.”
번호표를 뽑고 잠시 기다리니 우리 차례가 왔다.
“혼인신고 접수하려고요.”
“예. 서류 주세요.”
직원의 말에 오빠가 서류 대신 사진기를 내밀었다.
“그 전에 저희 사진 좀 찍어주시면 안 돼요?”
오빠의 말에 직원이 웃으며 사진기를 건네받는다. 그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이 흔하지는 않아도 종종 이런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보다.
“이 서류랑 우리 얼굴하고 어깨 정도가 꽉 차게 나오게요.”
“예. 걱정 마세요.”
역시나 자연스럽게 거리를 조절하더니 능숙하게 사진을 찍어준다.
“접수 되었고요. 행복하게 사세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와 의자에 잠시 앉았다. 조금 기다리니 즉석 사진에 우리의 모습이 나타난다.
“우와. 완전 잘 나왔다.”
사진 속의 우리는 서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진짜 잘 나왔네.”
“오늘도 한 장 건지고! 그럼 밥 먹으러 가자.”
내 손을 잡고 일어서는 오빠. 그의 손을 잡고 구청을 나서려는데 각종 민원서류를 모아놓은 곳에 있는 사망신고서가 눈에 들어왔다. 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오늘따라 그냥 지나치긴 힘들다.
오늘은 혼인신고. 오 일 뒤엔 사망신고.
오늘은 우리 손에. 오 일 뒤엔 가족 손에.
“우리 여보, 나 좀 봐봐.”
오빠가 내 고개를 돌려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한다.
“우리 여보는 나만 보면 되는 거야. 알았지?”
따뜻하고 굳건한 그의 시선.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우리 여보야만 보고 있으니까.”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입을 맞춘다. 그리고 꼬옥 안아준다. 나를 침식하려던 불안이 그의 폼을 통해 빠져나간다. 들썩이던 가슴이 편안하게 가라앉는다. 그의 품에서 나는 상큼한 향기가 답답했던 속을 쓸어준다.
내 어깨를 감싸 쥐고 걸어가는 그. 나는 그의 허리를 손으로 두르며 품에 안긴다. 날씨 때문에 살짝 더운 감이 있었지만 오히려 기분이 더 좋다. 우리의 사랑이 그 만큼 뜨거운 것 같았으니까.
“우리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가자.”
“제주도?”
“외국도 좋지만 그건 나중에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시간도 애매하고. 그러니 제주도로 다녀오자.”
“여보야가 좋으면 나도 좋아.”
“그럼 내려갈 땐 배로 갈까?”
“웬 배?”
“배도 타보고 싶어서. 목포에서 가는 배가 엄청 크데. 밤에 목포로 갔다가 다음날 아침에 배 타고 제주도로 가면 낮에는 도착하나보더라.”
“그래. 그러자.”
그의 따스한 품에 안겨 그의 따스한 음성을 들으면 내 마음에 차던 부정적인 감정이 어느 새 사라지고, 그의 사랑만이 가득해진다.
“좋다.”
“뭐가 좋아?”
“다. 따뜻한 기온도. 파란 하늘도. 옆에 있는 우리 여보야도.”
“나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그도 나를 바라본다. 그래. 내가 볼 것은 오직 그 사람뿐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 작가의말
이제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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