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면수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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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사가미프
작품등록일 :
2012.05.30 23:59
최근연재일 :
2012.05.30 23:59
연재수 :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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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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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글자수 :
207,496

작성
12.03.15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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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5.

DUMMY

곤란하다. 호흡이 가빠온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 비밀번호를 바꾼 기억은 있는데, 뭐로 바꿨는지 떠오르질 않는다. 예전 비밀번호를 셀 수도 없이 눌러보지만 아무 소용없다. 머리를 쥐어뜯는다. 손톱을 물어뜯는다. 손톱은 배를 채워주지 못한다. 외려 배가 고프다는 생각만 더 간절해진다.

벨을 눌러본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다.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내가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던가.

열쇠수리공을 불러야 하나. 그는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문짝을 뜯어낼까? 아, 드라이버 같은 걸로 어떻게 할 수도 있겠구나. 그럼 열쇠수리공을 하다 그만둔 사람은 빈집털이도 가능하단 말인가? 모르겠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경비실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생각해 본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비밀번호를 바꿨는데 까먹어서요, 라고 해야 하나.

다시 현관으로 돌아가 떠오르는 숫자들을 눌러본다. 맞을 리가 없다. 신경을 긁어대는 경보음만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한숨을 쉰다. 문을 한번 걷어차 보지만, 문이 무슨 죄가 있겠나.

하는 수 없이 경비실로 내려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중에도 경비원에게, 열쇠수리공에게 할 말을 떠올린다. 최대한 덜 부끄러울 만한 말은 무엇일까.

순찰 중입니다, 라는 글이 쓰인 아크릴판이 경비실 유리창에 당당하게 매달려 있다. 빌어먹을. 허기 때문에 어지럽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경비실 앞에 쪼그려 앉는다.

방구석에 박혀 게임만 하고 지냈던 지난 삼 년의 시간을 다큐멘터리 혹은 흑백 무성영화라고 한다면, 최근 한 달 동안 일어났던 일들은 헐리우드판 액션 스릴러영화 같이 느껴진다. 모진 시련과 고통 속에서 주인공은 피투성이가 되지만, 결국엔 승자가 되고 히로인과 뜨거운 키스를. 히로인이 누구인지, 악당은 누구인지, 주인공은 누구인지. 난 주인공의 총알에 쓰러질 엑스트라가 아닐지. 내가 악당이라도 될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지하실에 쓰러져있던 문지기의 김밥과 라면이 떠오른다. 양심을 떠올리며 자리를 떴던 내가 생각난다. 잠시 미쳤던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되돌아가서 먹고 올 용기는 생기지 않는다. 깨어나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이고, 다 먹어버렸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내 발끝을 툭툭 찬다. 이건 뭘까 생각하다 내가 경비실 앞에 쪼그리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고개를 들어본다.

맙소사, 키티가 서 있다.

“어?”

“어, 뭐?”

키티는 집에서 잠옷처럼 입는 하얀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집에서 뒹굴다가 먹을게 생각나서 편의점이라도 다녀오는 듯한 사람의 나른한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아니나 다를까 왼손에는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비닐봉지만 봐도 침이 질질 새어나오려 한다. 봉지 안에 날고기가 들어 있든, 프라이팬이 들어 있든, 어떤 게 들어있든 먹어치울 수 있을 것만 같다.

“뭐해?”

그의 얼굴을 본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한 건가?

“그냥 앉아 있는데, 저기 형은 어디 다녀오세요?”

다녀온다는 말이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비밀번호를 바꾸고 나서 처음 집으로 돌아오는 건지도 모르니.

그가 말없이 내 앞에 봉지를 들이민다. 봉지 안의 각종 내용물이 보인다. 대파, 양파, 감자. 맛없게 생긴 것들과 엄청 맛있어 보이는 과자들이 보인다. 정말로 침이 흘러내린다.

힘겹게 눈을 돌려 키티를 본다. 비밀번호가 바뀐 걸 모르나 보다. 조금 미안하기도 하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언제 일어났어?”

“얼마 전에요.”

“왜 잡놈이 전화를 안 하지?”

“잡놈요?”

“그래, 너도 봤을 거 아냐.”

“혹시 그 문 앞에 있던 사람요?”

“그래. 그 문 앞에 있던 사람.”

고개를 끄덕인다. 옷걸이로 문지기를 무찔렀단 말은 하지 않는다. 그가 걸어간다. 그의 뒤를 따라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현관문 앞으로 다가간다. 침을 삼킨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태연하다.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한다. 0부터 누른다. 그의 손가락 끝을 뚫어지게 본다. 그가 날 힐끔 보더니 왼손을 펴서 오른손을 가린다.

“뭘 봐, 새끼야.”

0으로 시작되는 비밀번호. 빌어먹을 다음 숫자는 뭐였지? 뭐였을까. 괜찮다. 어차피 키티도 틀릴 것이다. 하하…….

딩동댕. 성공음이 들리고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난다. 그가 문을 연다. 그리고 들어간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간다. 그가 내 가슴을 거칠게 민다.

“너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와. 내가 알아낸다고밖에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씨발놈이 날로 먹으려고.”

문이 닫힌다. 왠지 억울하다. 그보다 키티가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0……. 0으로 시작되는 비밀번호. 나도 알고 키티도 아는.

내 전화번호를 눌러본다. 오류.

키티의 전화번호는 모르겠다. 그럼 아는 게 더 없단 소린데.

벨을 누른다. 집안에서 희미하게 벨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누구세요, 라고 묻는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전 데요.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그가 순순히 전화번호를 불러준다. 엄청난 기억력으로 전화번호를 외우고 눌러본다. 오류. 다시 눌러보지만, 역시 오류.

가짜번호를 불러줬거나, 이게 비밀번호가 아니란 소리 같은데. 솔직히 아닐 것 같다. 아무리 정신이 나갔더라도 그렇지,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전화번호를, 게다가 키티의 전화번호를 비밀번호로 설정해놨을까.

다시 내 전화번호를 눌러본다. 오류. 벨을 누른다.

“누구세요?”

“저기 좀 열어주시면 안 돼요?”

“안돼.”

“제집인데.”

“너 씨발, 나 엿 먹으라고 비밀번호 바꿨잖아. 네가 바꿔놓고 왜 몰라, 웃긴 새끼네.”

웃기긴 하다. 나도 내가 이렇게 웃긴 놈인지 몰랐다. 춥고, 배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0으로 시작하는 숫자조합은 떠오르질 않고.

숫자를 마구잡이로 눌러댄다. 당연히 마구잡이로 틀린다. 경보음이 울려댄다.

“이 새끼 죽여버린다.”

문 저편에서 위협해온다.

“몇 글자예요?”

“몰라.”

“힌트 좀 주세요.”

“일곱 글자. 딱 다섯 번 더 틀리면 이 집은 내 집이다.”

“그런 게 어딨어요.”

“싫으면 맞추던지.”

“내가 왜.”

대답은 없다. 영으로 시작하는 일곱 자리의 숫자. 머릿속에서 억지로 숫자를 생각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다섯 번이란 기회가 정해져 있으니 함부로 누를 수가 없다. 눌러보지 않아도 이 번호가 틀렸다는 걸 알고 있다. 맞을 리가 있나.

벨을 누른다.

“누구세요?”

“택배 왔습니다.”

“미친 새끼.”

“힌트.”

“죽고 싶냐?”

“힌트 좀 주세요.”

“쉽다.”

“힌트 좀 달라니까요.”

“쉽다니까. 너도 알아.”

당연히 알지 내가 바꿨는데.

“그거 말고요.”

“영으로 시작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일곱 자리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씨발, 뭘 더 어떻게 주라고.”

“같은 숫자가 있어요?”

“없어.”

“형은 어떻게 알았어요?”

“너도 알 건데.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에디슨만큼 똑똑해.”

대답하지 않는다. 침묵이 흐른다.

“딱하나만 물어봐.”

“어떻게 해야 생각날까요?”

“네가 어떻게 해야 생각날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거 말고 다른 거 물어봐.”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 주세요.”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좀 가르쳐 주세요. 제발.”

“에이 씨. 모르겠다. 너만 아는 건데 내가 너한테 배운 숫자야 됐어? 다섯 번 틀리면 이 집 진짜 내 거다. 벨 다시 눌러도 실격이다.”

내가 키티에게 가르쳐준 숫자라면 전화번호와 집의 동 호수. 또 뭐가 있을까. 전화번호는 이미 눌러봤고, 동호수는 다 합쳐서 일곱 글자니 0을 붙이면 여덟 자린데. 일단 0을 붙이고 동호수를 눌러본다. 오류. 니미.

“네 번!”

땀 한 방울이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 정말. 기억해내야 한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집을 뺏길 순 없잖아. 제발. 제발 제발. 어? 혹시? 그래 그건 여섯 자였으니 0을 붙이면 일곱 자리가 되고.

숫자 패널을 또박또박 누르고 별표를 누른다. 경보음은 울리지 않는다. 성공음이 들리고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손잡이를 돌리고 잡아당긴다. 문이 활짝 열린다. 비밀번호는 예전 비밀번호 앞에 0을 붙인 숫자였다. 정수리 끝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흐른다.

곧장 주방으로 걸어가 밥솥을 열고 주걱으로 밥을 입에 퍼 넣는다. 행복하다. 달콤하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본다. 키티가 과자 봉지를 손에 들고 우뚝 서 있다.

“씨발, 내가 너무 가르쳐 줬어.”

어색한 미소를 날려준다.

“미친 새끼. 아, 맞다.”

“네?”

“네가 잡놈 때려눕혔다며?”

어깨를 으쓱한다.

“잘했어.”

그가 거실로 걸어간다. 나는 밥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화장실 따윈 나중에 가도 좋다. 지금 여기서 싸 버린다 해도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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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82 파인더
    작성일
    12.03.15 14:54
    No. 1

    혼돈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Gellita
    작성일
    12.05.30 20:00
    No. 2

    으앜ㅋㅋㅋㅋ 그 난리를 쳤는데 결국 제자리인 거였습니까!? 키티도 그렇고 주인공도 그렇고 ㅋㅋㅋㅋ 오랜만에 보지만 역시 재밌습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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