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대회(7)
<무림대회(7)>
분명 허공에서 우뢰와 같은 노성이 들려 왔었다.
하지만 하림은 소리의 근원을 찾을 만큼의 시간이 없었다.
그는 귀영신보를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자신의 신법이면 충분히 팽도림을 빼낼 수 있을 것이다.
-파앙
-스슷
장내에는 두 가지의 소음이 들려왔고 온몸을 제어 당하고 있던 팽도림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짧은 생이었지만 어쩐지 후회나 미련이 생기지 않는 것이 본인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그는 언뜻 눈앞에서 사라지는 하림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띠워 올린다.
만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뭔가 가슴 벅차오르는 기대감과 잔잔한 감동들이 많은 나날들이었다.
저 어린 주군과 한평생 강호 주유라면 자신의 인생도 참 즐거웠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 팽도림...그는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하림의 신형이 팽도림의 후위에 나타날 쯤에, 잔인한 살소를 머금은 육금황의 검이 팽도림의 목을 맹렬하게 쳐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하림의 시선은 문득 다른 곳을 향해 돌아갔다.
거도(巨刀). 하림의 큰 키보다 더 커 보이는 거도가, 온 도신에 푸르스름한 기를 잔뜩 휩싸인 채로 허공 높은 곳에서 육금황을 반으로 갈라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싸아아악!
“아.......안 돼..........!”
이번에는 창공을 찢어내는 듯한 처절한 비명이 화산 장문인 육대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스걱.....!
“아악...!”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육금황은 자신의 오늘 팔을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번개 불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곧이어 찾아온 끔찍한 고통에 폐부를 찢는 것 같은 비명을 쏟아내었다.
-휘루루루룽!
육금황의 오른팔을 베어버린 거도는 곧 그를 지나쳐 일장이나 날아간 뒤에, 허공에서 뛰어내리는 백발의 노인에게 크기가 점차 작아지면서 돌아갔다.
-휘이이익...!
-휘라라라락!
그리고 백발노인 옆에 거의 동시에 일남일녀가 떨어져 내린다.
“황....황아......!”
어느새 날아온 육대본은 한 팔을 잃고 쓰러지는 육금황을 안아들며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그는 거도가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두 눈에 엄청난 살기를 실어 노려보며 노성을 질렀다.
“어떤 놈이 나의 아들의 팔을 베었느냐?”
“육장문, 그 냉철하던 화산의 육장문이 어디가고 한낱 모리배 같은 자만 남지 않았는가. 나 도왕 팽립이야, 그러는 그대는 무슨 자격으로 본 팽가의 핏줄을 죽이려하였는가?”
“헉......! 도....도왕.......!”
얼굴색이 붉은 약간은 사각 진 턱을 가진 백발의 노인이 바로 도왕 팽립이었다.
그는 붉은 얼굴에 노기를 잔뜩 끌어올린 채로 이쪽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꾸욱......꾸욱.....!
그가 내딛는 발자국이 단단한 바위임에도 불구하고 한 치나 깊이 들어갔다.
그가 얼마나 노기를 발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개왕 홍삼공과 검후 이호란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세 사람을 발견한 육대본의 안색이 똥 씹은 사람처럼 처참하게 구겨졌다.
“육대본, 노부가 묻지 않는가? 그대는 무슨 권리로 나의 손자에게 위해를 가하고 목숨을 지우려 했는가?”
“팽대......팽대협....이건 따지고 보면 모두가 저 하오문 잡배 놈의 농간 때문이었소. 한마디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오.”
“오...해...? 흥....! 지금 오해라 했나?”
“그렇소, 이건 정말 오해 때문에 일어난 일이오, 하북팽가와는 본인도 전혀 감정이 없소이다.”
“좋아....! 오해라....! 그럼 그 오해로 인하여 노부가 자네의 귀한아들의 팔을 베었으니 이제 어쩔텐가?”
“이....이.........!”
팽립의 말에 육대본의 인상이 또 한 번 구겨질 대로 구겨져버린다.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육금황을 내려다보면서 지그시 입술을 깨문다.
“먼저 오해를 불러일으킨 본인의 실수이니 여기서 덮겠소, 팽대협께서 손에 사정을 두어줘서 고맙게 생각하오. 잊지 않겠소.”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의 두 눈에서 살기가 살짝 비춰지다 사라진다.
“흥, 마치 원한을 잊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팽립의 얼굴에 조소가 피워 오른다.
“그럴리가 있겠소. 팽대협!”
“화산의 장문인의 말이니 노부도 받아들이지, 하지만 난 끝나지 않았네.”
“............?”
팽립의 말에 육대본이 고개를 버쩍 치켜든다.
“어...어쩔 생각이시오?”
“내 손자 놈 몰골을 보게, 저렇게 참혹하게 고문한 흔적이 역력한데 그것도 감히 나 도왕의 핏줄에게, 내가 참고 넘어가야 되는 것인가?”
잔잔하게 흘러나오던 팽립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노기를 띠면서 점차 큰소리로 변했다.
“어....어쩌란 말이오.”
“난, 돌아가서 맹주에게 이 사실을 모두 이야기 할 것이야. 그리고........!”
“그리고...........?”
팽립의 말을 듣던 육대본의 안색이 검게 변해간다.
“하오문주인 적혈마도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명확하게 밝혀볼 참이야.”
“하오문주...라니오......?”
“흥. 어리석군, 설마 그대는 싸우고 있는 상대가 하오문의 문주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는가?”
“헉...! 팽대협 무슨 말이오, 그럼 저 애송이가 하오문주란 말이오?”
“맞네, 그는 바로 당금 하오문의 현 문주이네.”
“...........?”
육대본은 할말을 잊은채로 하림을 멍하니 바라본다.
이틈에 부축한 팽도림을 바로 세운 하림이 팽립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올린다.
“장하림이 도왕어르신을 뵙습니다.”
“됐다, 예는 차리지 않아도 된다.”
“할아버님, 도림이 인사드립니다.”
“못난 놈! 꼴이 그것이 무엇이더냐,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구나.”
“송....송구하옵니다, 할아버님.”
팽도림이 고개를 숙인다.
하림이 장삼을 벗어 팽도림에게 건네주고 앞으로 몇 발짝 나선다.
“할아버님과 어머님도 오셨군요.”
“흠...이놈, 그런 일이 있었으면 냉큼 알리지 않고 혼자 처리하려들었더냐?”
“림아, 다친 곳은 없어? 어머....저 피 좀 봐.......”
하림이 홍삼공의 뒤에 있는 운령에게 신선을 고정시키자, 운령이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에 하림은 고개를 흔들고 서서히 입을 열었다.
“육노괴가 진실을 입으로 밝히지 않는 한 아무도 소손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문제로 할아버님까지 노심초사하시게 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고요.”
“그래도 그렇지 이놈아, 헹....고얀놈.....!”
홍삼공이 그래도 서운한 속이 풀리지 않는지 하림을 노려본다.
팽립은 홍삼공을 끌어 자신의 옆쪽으로 당기면서 하림을 바라보고 입을 연다.
“그래, 어떠냐? 육장문의 자백을 들었느냐?”
하림은 그를 마주보며 눈빛을 빛낸다.
“어른께서도 이곳에 오신지 꽤 되었으니 분명히 듣지 않으셨습니까?”
“으엉? 우리가 와있는 것을 일고 있었느냐?”
팽립이 놀랍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뜬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홍삼공이 혀를 찬다.
“그것 보게, 저놈이 저렇게 어려 보여도 이미 뱃속에 능구렁이 열 마리는 들어있을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호호....아버님....우리 림아가 얼마나 멋진데 능구렁이라니요? 정말 자꾸 그러시면 림아에게 금존청을 드리지 못하게 할 거예요.”
“헛...누...누가 모자간 아니랄까봐, 툭하면 이 노개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술가지고 협박하는구나.”
“호호...그러니까 말조심하세요.”
한쪽에서 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육대본의 안색이 거의 까맣게 죽어 있었다.
적혈마도가 하오문의 문주인 것도 놀라운데, 거기다가 들리는 소문대로 개방과 검각까지 배경에 두고 있다.
그리고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이제는 하북팽가와도 인연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진퇴양난에 빠진 자신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들이 이대로 맹주 앞으로 나서서 고변을 하게 된다면 화산의 내일은 없다.
아무 일 없이 평화롭던 강호에 지루함을 느껴갈 무렵에 불쑥 찾아왔던 반쪽의 일월신공비급, 지금 생각해보면 의문점도 많았지만 그 당시에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호는 더없이 평화로웠고 화산은 이 평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잠깐 욕심을 내었던 것뿐이었는데.......
육대본의 눈가로 가느다란 마기가 피워 올랐다 사라진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앞으로 나서서 도왕등을 바라보며 포권을 한다.
“오늘 본 파로써는 많은 피해를 보았소, 세분께서 그 점을 생각해서 오늘은 그만 돌아가게 해주시오.”
“돌아가게 해 달라?”
“그렇소, 홍방주. 여기 적혈마도가 내세운 의문은 훗날 스스로 찾아와 맹주를 만나겠소.”
“우리는 오늘 맹주에게 말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무어라 말할 수 없소, 생각을 정리한 후에 스스로 결자해지 하겠소이다.”
모처럼 진지한 육대본의 말에 팽립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지, 스스로 결자해지해야 된다는 말은 곧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드리지, 내가 맹주에게 그대로 전하겠네.”
그의 말에 아무대꾸도 하지 않고 육대본이 포권을 하고 서둘러 몸을 돌린다.
“모두 서둘러라! 본산으로 돌아간다.”
성한사람이 별로 되지 않는 화산의 제자들이 서둘러 서로를 의지하면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후 팽립이 하림을 돌아보며 묻는다.
“어떻게 된 말이더냐? 정말로 육가가 마교의 신공을 익혔더냐?”
하림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의 정보로는 구파의 서너 곳에서 마교가 뿌린 암계에 걸린 것 같습니다.”
“뭣이....서너 곳이나....?”
“네, 점창, 곤륜, 청성이 그런 줄로 압니다.”
“그...그자들이......”
“하지만 어르신, 화산을 제외한 나머지는 차마 익히지도 못하고 감춰놓고 있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흐....음.....정말 큰일이구나! 마교는 의도한대로 화산이 무림맹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 아닌가?”
“오랜 평화가 폭풍전야였던 셈이었군, 혈마와 마교가 동시에 준동하다니, 당금에 큰 피비린내 나는 혈란을 피할 수 없지 않은가?”
홍삼공이 팽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팽립은 하림을 바라보고 있다.
“하오문주라 했더냐?”
“예, 어르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흐음...노부는 하오문이 잡배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네?”
“하오문의 역사는 깊다. 그 깊은 역사 속에 갖추어진 저력을 어느 누구도 감히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덜 찬 인간들이야 잡배가 어쩌구저쩌구 하겠지만, 오래된 역사를 가진 하오문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현 강호상에는 없다. 그것이 설령 현 무림맹주라도 말이다. 노부가 왜 아무 말 없이 도림을 너에게 보내주었는지 아느냐, 그건 바로 네가 하오문주라 하였기 때문이다.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자존심 강한 팽가가 유능한 자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어줄 수 있는 곳은 현 강호상에 없다. 그만큼 노부는 너에게 거는 기대가 널 대면하기 전부터 컸었다.”
긴 팽립의 말에 하림이 포권을 하면서 고개를 숙인다.
“도림과 같이 저희들의 강호를 만들어가겠습니다, 어르신!”
“너희들의 강호라.....하하하핫! 듣기 좋군.”
지금껏 미소한번 짓지 않던 팽립이 큰소리로 대소를 터트렸다.
“좋아! 너희들의 강호가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지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겠구나. 자! 가자, 서둘러 맹주를 만나보아야겠다.”
그들이 떠나가고 여운이 길게 남은 주유산에 팽립의 커다란 웃음소리만이 메아리로 여러 번 맴돌았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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