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대회(8)
<무림대회(8)>
무당일선 도경진인.
현 무림맹의 맹주를 맡고 있는 그는 일신에 회색도복을 입고, 얼굴에는 항상 자애롭고 넉넉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매우 자신에게도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도 그 곧은 잣대를 가져다 대는 것으로도 일가견이 높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인자한 그의 얼굴의 눈빛에는 조금은 깐깐한 그 무엇이 항상 자리 잡고 있어, 다른 이로 하여금 쉽게 마음의 경계를 풀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는 아직도 어두운 새벽에 갑자기 맹주의 침실까지 들어 닥친 도왕 팽립과 몇 사람들에게 밝은 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무언가 묵직한 무게감이 그를 처음대하는 하림에게 무겁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량수불...하오문주시라고 들었소, 장문주.”
“들으셨군요, 맹주님. 어쩌다보니 대임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맹주님.”
하림이 한발 나서며 포권을 하고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도경진인은 그런 하림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하림은 홍삼공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도경이 더욱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무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는 홍삼공의 인상은, 어쩌면 흔히 볼 수 있는 옆집에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나 보다.
“무량수불.....장문주, 무릇 하오문같은 거대문파의 지존자리는 하늘이 점하는 것이라오, 그래서 빈도는 장문주에게 거는 기대가 크오이다.”
“맹주님, 거대문파라니요, 하오문은 그저 강호의 이류정도 되는 문파에 불구하니 너무 치켜세우지 마시지요.”
“허허.....장문주, 그렇게 말씀하시면 빈도는 지나친 겸양이라 말할 수밖에 없구료. 천년이 넘어가는 역사를 지닌 하오문이 이제고작 이류라니오, 당치 않아요.”
“겸양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오문 잡배라 하지 않습니까, 맹주님.”
“허허허....장문주는 빈도를 너무 골방의 늙은이 취급을 하고 있구료. 빈도는 알고 있다오, 전국적으로 들이닥친 수해와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하오문이 곳간 문을 활짝 열고 구휼하고 있다는 것을 이 늙은이가 모를 줄 아오?”
하림은 은근히 깜짝 놀라서 맹주 옆에 서있는 맹의 총 군사인 제갈성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도 맹주를 따라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이미 전횡이 하오문 군사인 비돈 가우량과 함께 자신의 명을 신속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림은 무림맹의 발 빠른 소식통에 은근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은밀하게 진행하는 하오문의 일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모두 꿰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제갈성곡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하림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는다.
“장문주께서는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됩니다, 본맹의 소식통 또한 전 강호에 깔려 있는 관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밖에 없는 위치이니까요. 그보다 우선 아까 도왕께서 말씀하신 화산의 이야기를 직접 장문주께 듣고 싶습니다. 도왕께서 하신 말씀이 진정 모두 진실입니까?”
“그래요, 유감스럽게도 그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
“흐음.......!”
제갈성곡이 신음을 토하며 도경진인을 바라본다.
도경진인 또한 활짝 지었던 미소를 거둬들이고 두 눈을 진지하게 빛내기 시작했다.
“무량수불, 이 모든 것이 빈도의 미력함이라오, 그저 곁으로만 평화스러웠던 강호였기에 혈마와 마교의 준동도 느끼지 못했고, 이제는 마교의 농간으로 구파의 균형까지 깨지기 일보직전이니, 아무래도 빈도가 물러날 때가 다되어가는가 보오.”
“당치않습니다, 맹주님. 마음먹고 훔치러드는 도적은 열사람이 막지 못한다는 고사도 있습니다, 어찌 당금의 문제들이 맹주님의 탓이겠습니까, 오히려 그 흠을 찾자면 군사자리에 앉아있는 소생의 잘못이 크다 할 수 있겠지요.”
“무량수불, 어찌 제갈군사를 탓 하리오, 우선은 당면한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하오면 복안은 있으신지요?”
“허허....이제 생각을 해봐야지요, 일단 오늘 끝나는 무림대회를 성대히 끝내도록 해주시고, 이 사실들은 이방에 모이신 우리들만 아는 것으로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도경진인이 모두의 얼굴을 일일이 바라보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팽립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알겠네, 맹주. 그렇게 하도록 하지......!”
“허허....무량수불.....고맙네, 도왕, 그리고 개왕과 검후까지......!”
하림은 자신의 얼굴에 눈빛을 고정시키는 도경진인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희도 이제 모든 것을 맹주님께 맡기고 잊도록 하겠습니다.”
“허허...고맙소, 장문주. 오늘 장문주의 비무대회에 상당히 기대가 크오.”
“맹주님의 성원에 감사드려요.”
***
지독한 밤이었다.
하림은 자신의 손에 스러져간 살수들과 화산제자들을 생각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결코 원치 않는 살육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했고 살기위해 어쩔 수없이 크게 살수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간에 슬며시 사라진 흑색의 늑대 탈을 쓴 자의 뒷모습이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도왕이 등장했을 때였을 것이다.
도왕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때 그는 뒤도 안돌아보고 현장에서 줄행랑을 쳤다.
그런 자가 무슨 살수업을 한다고.......
아마도 그는 한동안 하림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이미 꺽 인 사기는 더욱 크나큰 공포로 다가오기 때문인 것이다.
잠을 청하기는 힘들다 생각한 하림은 잡념을 떨쳐내며 운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몸에 난 수많은 상처야 이미 새살이 돋고 회복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것도 아마 내공이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다면 그 속도가 월등히 빨라질 것이다.
이미 몸이 체득한 단계에서 오는 짐작이리라.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팽도림은 이미 삼매경에 접어든 것 같다.
하림은 상념을 지우고 무위식속으로 더욱 깊숙이 침잠되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이 들어있는 방안에는 일체의 호흡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문밖을 지키는 운령의 두 눈에는 더욱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느덧 무림맹의 아침은 밝아오기 시작한다.
무림대회의 마지막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간밤에 화산파의 사람들이 슬그머니 맹을 빠져나간 사실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은 들떠 있었다.
많은 무림인들은 이번 무림대회를 통해 새로운 신성으로 떠오른 적혈마도 장하림에대하여 끝없이 열광하고 있었다.
하오배라 지칭했던 하오문도로써 강호를 일거에 뒤집는 무공으로,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샛별같이 등장한 장하림에 대하여, 그동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들의 구태의연하던 태도들에 식상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서 쌍수를 들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른 아침임에도 하림의 얼굴을 보기위하여, 하림이 머물고 있는 하오문의 숙소로 모여 들었지만 검각과 개방, 그리고 하오문의 문도들이 뒤섞인 치밀한 경계에 어쩔 수없이 아쉬워하며 몸을 되돌려야했다.
무림대회의 마지막 날에 본선에 오른 열 명의 기재들은 모두 우열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특이하게 많은 인파로 부터 환호성을 받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하림이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적혈마도 장하림! 역시 멋있다!”
“와아아아아! 역시 적혈마도.....!”
오전에 이미 한차례 비무를 통해서 가볍게 공동파 제자라는 자를 제압하고, 본선에 오른 하림은 부전승으로 결승에 올라 있었다.
어찌 보면 이것도 운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무예를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을 토로해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특이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검각의 조소접이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시종일관 하림의 옆에 붙어서 열렬하게 응원하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것아, 너는 비무에 참가 안 할 거야?”
“피이...사부님, 본선에 올라서 하림오빠와 싸우라는 건가요? 전 죽어도 못해요.”
“이것이........!”
돌발적인 조소접의 반응에 검후 이호란의 아미를 사정없이 좁히게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호란 역시 강하게 질책하지 못한 것이 이미 사도옥으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본 검각으로서는, 이번 무림대회보다 대회 우승이 확실한 하림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이 실(實)이라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하림은 자신의 의자(義子) 아니겠는가?
그 후로 조소접은 하림이 어디를 가던 그의 옆에 찰싹 붙어 다녔고, 영준한 하림의 모습에 좀 더 그와 가까워지려 곁으로 몰려드는 여협들에 대해서 쌍심지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하림 또한 그런 그녀의 행동이 싫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고, 오히려 빙긋빙긋 웃어주어 뭇 여협들의 애간장을 들끓게 만들었다.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하림이 무림맹에 들어서고, 그를 안 좋게 폄하하고 매도했던 많은 소문들이, 이제는 표면적으로나마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다만 몇몇 기득권층인 문파에서 단순히 그의 강함을 시기하여 아직도 대놓고 이빨을 으르릉 거리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하림이 신경을 쓰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역시 강호는 강자존의 힘의 역학적인 논리임은 분명하다.
소림불검 법송.
태극검협 방호상.
적혈마도 장하림.
오전의 치열했던 비무가 끝나고 오후에 치룰 삼파전의 장원 세 사람이 드디어 결정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지하는 인물이 장원에 오르자 끝없이 열광하며 박수를 보냈고, 오후로 접어들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무림맹의 연무장이 터져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방호상과 법송의 대결은 용호상박의 양상답게 무려 두시진이나 길게 계속되었고, 드디어 법송이 반 초식 차이의 득으로 방호상을 물리치고 결승전으로 오를 수 있었다.
이제 하림과 법송의 마지막 일전만을 남겨놓은 무림대회의 대미가 점점 다가오자, 그렇게 들끓던 인파들도 오히려 잠잠하게 잦아들며, 무림맹에는 때 아닌 긴장감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공정한 대결을 위해 체력을 소진한 법송에게 두시진의 긴 운기조식의 시간이 정해졌다.
그리고 그사이 다가오는 저녁노을은 어느새 무림맹의 안과 밖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완전히 넘어가고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몰려들고 있을 때 쯤, 드디어 하림이 서서히 연무대위로 오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잠잠했던 사람들의 우뢰와 같은 함성이 또다시 밤하늘을 찢어놓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거의 비슷한 찰라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법송이 활기찬 모습으로 비무대 위로 떨어져 내린다.
이미 총관의 비무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서로 포권을 하며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아미타불, 소림의 법송이오, 장시주!”
“장하림입니다!”
이마에 계인이 선명한 법송은 서른쯤 돼보였는데, 선한 눈망울이 한없이 착하게만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무예를 지켜본 하림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무예를 연마해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검 끝은 생긴 모습과는 달리 예리하고 매서웠다.
“그럼 잘 부탁드리오. 장시주!”
“저 또한....그럼......!”
서서히 검을 빼드는 법송의 선한 눈빛이 한순간에 독수리의 그것처럼 매섭게 변해갔다.
“달마신검...........! 해광승불...........!”
-쫘르르르륵........!
결승에 오르기까지 결코 사용하지 않았던 비장의 검술이 하림을 향해 쏟아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하림은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예리한 검기들이 희미하게 남기는 그 잔상은, 문득 아름답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적아는 이미 붉은 기운을 비치기 시작했고, 그 빛은 곧바로 피처럼 붉은 적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쓰르르르릉.........!
- 작가의말
고맙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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