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悲報).
<비보(悲報)>
의선인의 음성은 단호하면서 부드럽게 이어졌다.
“본시 본가는 오랜 숙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본가의 숙원이 무엇이던가?”
“..........?”
“왜 대답들을 못하는 것인가? 모두 꿀 먹은 벙어리 흉내인가?”
“사부님, 본가 인물치고 우리의 숙원이 무엇인지 왜 모르겠습니까? 갑작스런 사부님의 물음에 모두 의아해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 제일 앞에는 의선인의 제자들 십여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사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청수한 중년인이 자연스레 의선인의 물음을 이끌었다.
백의의 의원복장을 한 그가 바로 의선인의 수제자로 알려진 모필성이었다.
원래 의선인은 몹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자신의 가문의 숙원인 천하제일의가라는 칭송을 이루기 전까지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제자들이 명호를 가지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는 욕심보다도 명호에 고무되어 제자들의 정신상태가 해이해질 것을 염려한, 의선인의 노파심이 크다고 볼 수 있었다.
“성아! 이 사부가 다시 묻겠다. 본가의 숙원이 무엇이더냐?”
진지한 빛을 띤 사부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모필성이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포권을 만든다.
“사부님, 아무리 불민한 제자라지만, 어찌 사부님의 강령을 잊겠습니까? 본 활인가의 숙원은 바로, 조상님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천하제일의 의가를 이루는데 있지 않습니까?”
“하하....역시 잊지 않고 있었구나! 그럼 수제자인 너의 안목으로 보건데, 세월이 흐른다면 과연 본가가 그 위업을 이룰 수 있겠느냐?”
“사......사부님....그것이.........!”
모필성은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사부인 의선인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는, 하림의 존재가 계속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외인이 있는 자리에서는 극히 언변을 조심하고, 활인가의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도록 의선인에게서 수없이 들었던 탓이리라.말을 더듬는 모필성은 바라보면서 의선인은 의외로 부드럽게 웃었다.
“후후.....! 역시 대답이 어려운가 보구나.”
“사....사부님....! 그....그것이.....!”
“후후.....성아! 괜찮다, 그리고 지금부터 본가주가 하는 말에 모두들 세이경청해야 할 것이야!”
“예, 사부님, 하교하시지요.”
“하교 하소서!”
앞줄에 줄지어 있던 제자들이 한입을 모아 외친다.
의선인은 그런 제자들을 내려다보면서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오늘 아침까지도 본 장원 뒤 세죽림을 걸으면서 독한 고뇌에 휩싸였었다. 조상님들께서 내리신 숙원이 본가주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단숨에 말을 이은 의선인이 의식적으로 말을 끊고, 제자들과 식솔들의 얼굴을 훑어본다.
그들은 다음에 이어질 가주의 말을 목마르게 기다리며, 침을 꼴깍 삼키는 이가 대다수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가주는, 오늘과 같이 많은 말을 하는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항상 청정심을 잃지 않던 가주의 안색과 몸가짐은 지금 상당한 흔들리고, 이미 그 중심을 잃고 있다는 것을 모필성과 나머지 제자들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두시진도 되지 않아, 본 가주를 찾아온 대하오문의 장문주의 방문으로 뜻밖에 기연을 얻게 되었다.”
“............?”
“.............?”
(기연이라니......?)
(사부님은 무슨 말씀을.....?)
제자들의 모호한 마음들이 약간의 웅성거림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의선인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기연이라 함은 본 활인의가가 장문주의 대하오문으로 입문하는 것이다. ”
-우르르릉.......!
웅성거리던 제자들의 귀에 한줄기 우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헉! 사부님.....방금 하신 말씀은.......?”
“아니....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황당하게 하오문으로 들어간다니.....?”
“자.....자......! 조용히 해라!”
의선인은 제자들과 중인들의 반응을 미리 예상했기에 담담하게 손을 들어 제지 시켰다.
“물론, 모두 놀랐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여기에 계신 대하오문의 문주께서는, 어느새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를 아우르는 인재로 그 명성이 높으시다. 이는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본가의 모든 가솔들은 잘 알거라 믿는다. 더욱이 약간은 폐쇄적인 본가를 한 몸으로 이끄시는 장문주를 보고, 나이를 떠나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본가가 대하오문으로 적을 옮기는 순간, 천하제일의가가 단순한 꿈만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헉!....사부님, 지금 천하제일 의가라 하셨습니까?”
모필성은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이 황소 눈처럼 변해버렸다.
그의 반응에 의선인이 부드럽게 웃음을 머금었다.
“이사부는 분명 보았다, 장문주의 은덕으로 그 숙원을 풀어 나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대.....대체....이것이...무슨 말씀이시라는 건가?
-웅성웅성.......!
“조용, 이제 본가주가 정식으로 대하오문에 입문하는 예를 차릴 것이다. 본가의 모든 가솔은 경건하게 대하오문의 문주님을 배알하기 바란다!”
“예엡...!”
“예...!”
“알겠습니다...!”
의구심이 잔뜩 몰려왔으나 하늘같이 믿고 있는 가주의 일성(一聲)이다.
활인의가 사람들은 감히 그의 명을 거역할 기세를 가지지 못했다.
의선인이야 말로 그들의 거성(巨星)이었기에.......
의선인은 몸을 돌려 하림에게 정중하게 술을 따랐다.
하림 또한 그의 정중함에 허리를 숙이며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의선인의 술잔에도 그득하게 채웠다.
이윽고 가볍게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은 빙긋 웃음을 머금었고, 돌연, 의선인의 입에서는 청량한 큰소리가 흘러 나왔다.
“본 활인의가 가주 의선인은, 대하오문의 장하림문주님의 휘하로 들어감에 무한한 영광과 문주님께 감사 말씀 드리오.”
나이답지 않은 맑은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펴졌다.
순간, 약 백여 명이 못 미치는 숫자였지만, 의가의 장원 떠나갈 정도로 천둥과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속하들이 대하오문의 문주님을 뵈옵니다.”
-쿵!
자리에 무릎을 댄 가솔들을 바라보며 의선인은 감개가 무량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순간 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장내를 향해 큰소리로 외친다.
“모두 일어나세요, 저는 여러분들과 서로 돕고 돕자는 취지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니 모두 일어나세요.”
앳된 모습과 가냘프지만 힘이 넘치는 하림의 말이 묘하게 벅찬 감흥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림의 음성에 이끌려 하나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본 문에 들어오기를 한 치도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가주님의 결정에 따르는 여러분들을 보고 저는 높은 경의를 표합니다.”
하림은 앞으로 몇 걸음 뗀 후 두 손으로 포권을 만들어 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던 가솔들은, 하림과 마찬가지로 큰소리로 외치면서 마주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문주님!”“전 약속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결정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그리고 의선인께서는 당대 천하제일의선(天下第一醫仙)이 되실 것이라는 것을 약속드리죠.”
“우와와와와와.....!”
“와아아아아아....!”
“와아.....장하림 문주님 만세!”
“대하오문 만세....만만세......!”
“활인의가! 만만세!”
하림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천둥과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진한 홍조로 물들어 있었고, 의선인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조차 격동을 참지 못하고 가슴속에 맺혔던 그 무엇인가를 끝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함성과 격동은 한동안 계속 됐다.
그리고 찾아든 어둠과 함께 모두 모여 하림을 환영하는 잔치가 이어졌다.
그 밤은 그렇게 또다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적어도 향후 백년간은 대하오문의 중요한 기둥하나를 바치고 있을 의방이 탄생하는 것이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보유한 의각이 말이다.
****
산길을 나서서 관도위로 올라서는 삼인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하림일행.
간밤에 잔치의 여흥으로 부작용이 좀 있으려만 그들의 안색은 그저 밝기만하다.
“주공, 어제는 정말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요지부동의 활인가를 움직이시다니요.”
“하하...도림,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야, 만약에 나에게 개세기전이라는 비서가 없었다면 어림없는 짓이었겠지. 하지만 난 애초에 자신이 있었어, 왜? 세상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자에게 너그러우니까. 활인의가는 아마도 내가 살아있는 한 우리에게 충성을 다하게 되겠지.”
“하하.....탄복했습니다. 주공....!”
운령이 나서며 대소를 터트리는 것을 보고 하림의 눈이 새초롬해진다.
“운령, 행동과 혀의 경솔함은 언젠가 칼과 창이 되어 돌아온다.”
“예, 주공, 명심하겠습니다.”
운령이 멋쩍어하며 뒤통수를 어루만진다.
바로 그때였다.
앞서가던 도림이 도를 빼들고 하림의 앞을 막은 것이다.
“주공, 자객입니다!”
“으응...? 아....! 도림 아니야, 본문의 살각에서 혁세가 온 것 같아!”
“아....!”
하림의 말에 도림이 도를 거두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에서 새카만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주공을 뵙습니다!”
“응, 혁세,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주공, 우려하던 일이 터진 것 같습니다.”
온혁새는 품속에서 곱게 접힌 서찰을 꺼내 들었다.
“무.....무슨.....일이기에......그러지?”
하림은 온혁세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설상가상, 온혁세가 품속에서 꺼내든 서찰이, 불안한 마음을 동조라도 하듯,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워 내고 있는 것 같았다.
- 작가의말
좋은날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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