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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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최근연재일 :
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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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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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흑색의 마법사(3)

DUMMY

공간이 얼어붙는 느낌을 아는가?


그것은 지독히도 끔찍하다.

평소에 향유하는 공기, 땅, 움직임···모든 것이 공간이기에, 모든 것이 전부 겁에 질린 듯 멈추어 버린다.


몸은 투명한 껍질 속에 갇힌 듯 아무리 뇌에서 명령을 내려도 받아들이질 않는다. 눈을 깜빡이거나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사고의 속도는 너무나도 빠른데, 신체의 속도는 너무나도 느리다.

온 세상을 눈에 보이지 않는 젤리가 뒤덮은 것처럼 숨조차 쉬어지지 않아 갑갑했다.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코끝과 등 한쪽의 가려움이 뇌를 맹렬하게 괴롭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치열하게 겨루고 있던 눈앞의 언데드 칼날 개미 또한 똑같이 굳어 있다는 것.


만약 저 괴물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상태였다면 정말 끔찍했을 것이다.

정화교의 베테랑 전투사제들 중 한 명, 피오네와 시드와 함께 언덕을 방어하는 싸움을 했던 그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결국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뿐이지, 이 정체불명의 이상 현상이 그에게 이롭게 작용할지, 이게 끝나면 과연 무사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세상이 얼어 버리기 전, 저 칼날 개미를 포함해서 나한테 달려들던 언데드가···총 다섯 구.’


공간을 인지하는 감각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수십 번 생사의 고비를 건넌 사내의 육감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는 머리 위 상공에서 덮치려 독침을 내리꽂는 말벌들과 옆쪽에서 칼날로 저미려 드는 또 다른 칼날 개미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실감했다.


‘아, 난 제대로 좆됐구나.’


그는 십 년 넘게 교단을 위해 헌신한 베테랑 전투사제였다. 무술과 생존법, 괴수 사냥의 실력을 극한까지 가다듬은 달인이었다.


그러나 초인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기준에서의 뛰어난 인간에 불과했다. 유논 일행과 윌리엄 스왈로우처럼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일당백의 실력까지는 없었다.


현재 그의 능력으로는, 오랜 싸움으로 지치고 무뎌진 그의 전투감각으로는 기껏해야 칼날 개미 둘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무려 다섯이, 그것도 칼날 개미만큼이나 까다로운 강철 말벌까지 합쳐진 죽은 괴수들의 무리가 그를 노리고 있었다.


공간 자체가 멈춘 것 같은 이 정지의 현상이 끝나자마자 개미의 칼날에 썰리든, 말벌의 침에 찔리든 어느 쪽으로든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 같았다.


‘이건 오히려 이 괴상한 현상이 최대한 오래가기만을 빌어야 하는 상황인가?’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게 죽음 직전에 마지막으로 정화신께서 주신, 생각을 정리하고 이승과 작별을 나눌 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적어두었던 유언에 부족한 점은 없었을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여러 가지 잡생각들이 떠오르던 무렵이었다.


‘젠장. 동생 녀석한테 유산을 떼어주지 말았어야 했어. 그 자식 내가 모아둔 정화코인들 받으면 환장하면서 도박에다 다 써버릴 텐데. 그냥 그 돈 전부 교단에 기부나 할 걸.’


‘우리 여편네는 이제 나 죽었겠다, 남편도 없으니 신나서 애인 만들고 다니겠구먼. 그간 내가 외부 임무 나갈 때마다 은근슬쩍 바람피우던 게 이제는 당당하게 만날 수 있게 되겠어. 죽어서까지 저놈의 집구석은 꼴도 보기 싫겠군.’


‘그나마 믿을 만 한 건 하나뿐인 딸내미인데, 요 녀석도 요즘에 이웃 푸줏간 집 아들이랑 놀러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영 불안하단 말이지. 고놈 자식 기도도 제대로 안 한다고 얘기가 많던데···그런 양아치랑 어울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지금 죽으면 안 되는데···.’


죽음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죽어서는 안 될 이유들을 생각하던 순간, 보이는 게 있었다.


모두가 멈춘 세상 속에서,

공간이 얼어붙은 것만 같은 이상 현상 속 정화교 쉘터의 성곽을 여유롭게 걷는 인물들이 있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고개와 한정된 시야 너머, 그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죽은 괴수들과 굳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갔다.


“아저씨, 이건 뭐에요? 어떻게 한 거예요?!”

“다급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단 인근의 공간을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게끔 한 자리에 고정시켜 뒀다. 이러면 피해를 꽤 줄일 수 있겠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 소녀와, 그 옆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사내.


그는 저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도플갱어 사냥 작전에 참가했던 마법사, 유논과 그의 제자 시드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지금 이 기적 같은 상황도 저 마법사가 뭔가를 해서 일어난 것 같았다.


입만 열 수 있다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신을 살려준 저들에게 하고 싶은 감사의 인사가 산더미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혀와 입술이 꽁꽁 묶여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 표정이 조금 불편해 보이는데, 저대로 놔둘 거예요?”


놔둬야지, 당연히. 지금 이 상황 덕분에 내가 살아있는 건데. 생명의 동아줄이라고.


마음속으로 시드의 말에 대답하던 전투사제는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에 식겁했다.


“···그래, 풀어줘야겠군. 멈춰 있던 공간계가 열리면서 뭐가 막 날아올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응!”


안 돼!

그거 풀어주면 난 죽는다고!


마음속으로 절실히 소리쳐 보았으나, 그래봤자 들릴 리 없다.

유논은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에 지팡이를 그었고, 거기서부터 일어난 울림이 사방으로 번졌다.


다음 순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눈이 깜빡였고 또 손발이 움직였다.


“어?”


순간 되돌아온 전신의 감각과 공간감, 내가 이 공간을 차지한 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낯설어서 휘청였다.


황급히 앞을 바라보니 다행히 그건 언데드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지, 죄다 땅으로 추락하거나 바닥을 구르는 식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기회다!’


그리고 노련한 전투사제의 감각은 아수라장 속에서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손에 쥔 무기를, 아직도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을 앞쪽으로 거세게 밀어냈다.


예감이 좋았다.


이 한 방으로 칼날 개미의 갑각을 깨부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휘이이익─


그러나 빗나간 확신이었다.

제법 큰 동작으로 휘두른 망치는 칼날 개미의 머리에 맞지 않았고,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애꿎은 땅바닥을 강타했다.


‘어째서?’


분명 정확했는데.

잠시나마 공간을 상실한 경험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고는 하지만, 무려 수십 년간 단련한 무기술이었다.


감각이 교란되었다 해서 타점이 저리 쉽게 빗나갈 만큼 그가 쌓아온 경험이 가볍지는 않았다.

무언가 다른 요인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지금은 그 원인을 파악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안위를 신경 쓰는 게 먼저였다.


‘내 공격이 실패했으니, 분명 놈들이 반격해 올 거다. 공격을 받아내면서 역공의 기회를 노린다.’


그런 판단으로 수비적인 태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언데드들이 다가오질 않았다. 오히려 점점 멀어지는 듯한 느낌.


“이건 또 무슨···.”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도 개미, 벌, 독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언데드들이 전부 보이지 않는 손길에 끌려가듯 밀려나가고 있었다.

그 정체불명의 인력 때문에 망치 또한 빗나갔던 것.


멍하니 선 채 바라보니, 다른 모든 물체나 사람들은 멀쩡한 채 오직 도플갱어의 시체 군단들만 일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강력한 언데드 괴수들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흡입력에 허공으로 날아간다.

그렇게 수천, 수만의 언데드 괴수들이 곳곳에서 날아다니며 사라져간다.


전투사제는 언데드들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허공의 검은 구멍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고오오오오오오─



심연을 보는 듯한 흑점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새카만 파장에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문득 세상이 어두워진 것 같다는 느낌에 위를 올려다보니, 거대한 암흑의 헤일로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그 천문학적인 크기에 아득한 감각만이 남아 머리를 짓눌러서, 그만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허허허···.”


그저 웃음만 나올 뿐.


너무나도 초현실적인 상황에 무어라 반응하기도 힘들었다.


다만,

저 불길하고 어두운 색깔의 기적들이 놀랍게도 쉘터를 언데드들로부터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이 지긋지긋한 공성전의 끝이 머지않은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살았다.”


그 말 한 마디만 새어나왔다.


전투사제는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 개 같은 집구석이지만, 역시 더러운 전장보다는 나았다.


‘그래, 전장보다는 낫지. 아무렴···.’


그의 푸념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천공을 감싼 고리가 불길한 광채를 뿜으며 일렁였다.




* * *




“와···미친.”


유논은 허공에 떠 있는 검은 태양,

시체들을 청소기마냥 끊임없이 빨아들이고 또 흡수하는 검은 구멍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시드에게 말했다.


“내가 무슨 마법을 쓴 것 같으냐?”


시드로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저게 무슨 마법인지, 도대체 어떻게 서클 원으로 저런 이적을 부릴 수 있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마법의 세계는 너무나도 넓고, 아직까지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는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모르겠···는데요. 전혀.”


유논은 선심을 쓴다는 듯 말했다.


“힌트를 하나 주마. 나는 이곳에 온 뒤, 새로운 마법이라곤 하나도 쓴 적이 없다.”


새로운 마법을 쓴 적이 없다니.

그러면 지금 저기 있는 검은 회오리 구멍은 도대체 뭐···.


항의하려던 시드는 문득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다.


생각해보니, 유논은 비슷한 마법을 이미 쓴 적이 있었다. 이곳, 정화교 쉘터를 향해 공간을 넘어서 올 때.


그때 부렸던 마법이 분명 [구멍─다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간에 구멍을 뚫는 마법이라고 설명했었다.

그 마법으로 새카만 점을 만들어서, 그렇게 생긴 입구를 통해 공간을 도약했었다.


만약 저 무시무시한 흑색의 흡입점이, 그때의 그 구멍이라면···.


“그, 그럼 아까 우리가 저 위험한,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지 모를 통로를 타고 왔다는 거예요?”


하얗게 질린 시드의 낯빛에 유논은 피식 웃었다.


“물론 아니지. 우리가 탔을 때까지는 평범한 공간의 통로에 불과했다. 그때는 저 흡입력도 우리가 목적지까지 신속하게 도달하도록 추진력을 제공하는 용도로 쓰였지.”


마법의 핵심은 응용이다─.


유논은 그렇게 말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의 가벼운 동작에 검은 구멍이 갑작스레 크기를 불리며, 새카만 천체의 크기가 되어 마지막 남은 적 언데드까지 쥐어짜내듯 전장 곳곳에서 빨아들인다.


“똑같은 마법이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의 지점이 되기도, 중력의 왜곡을 일으켜 모든 적들을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압축점이 되기도 하는 거다.”


불길한 검은 태양이 갑작스럽게 새카만 빛을 분출했다.

마치 배가 고프다고,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떼쓰는 아이를 보는 것 같아 시드는 움찔했다.


시체 군단 수십만을 단숨에 빨아들여놓고,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것 같은 저 무서운 모습에 섬뜩했다.


‘내가, 저걸 타고 여기까지 왔다고.’


눈 깜빡할 사이에 독기의 골짜기에서부터 정화교 쉘터까지 이동했던지라 되게 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유논이 위험하지 않았다 말해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심적으로,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저 속으로 잘못 발을 내밀기라도 했다간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떨리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시드가 느끼는 두려움 정도면 양반이었다.


다들 당장에라도 눈 돌리고 싶지만 동시에 눈을 떼지 못하는 비합리적인 흑색의 공포에 사로잡혀 온몸을 발작하듯 떨고 있었다.


심지어는 다들 시체 군단과의 전투에서도 용맹히 싸운 용사들임에도 불구하고, 저걸 보고는 오줌이나 변을 지리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생리현상을 전혀 통제할 수 없게 만드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되는 근원적인 두려움.


저 검은 구멍 속에는 존재의 상실이 있었다.

지성체라면 누구나 자연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든 빨아들이고 삼키도록 만들어진 심연과 공허의 끝.


누군들 저것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리.

오직 한 사람만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검은 구멍Black Hole의 창조자, 흑색의 마법사.


유논.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저 이적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듯 했다.


“무결하던 공간계에 구멍을 뚫으면, 필시 주변의 공간은 그 부족한 지점을 채우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기 마련이지. 그 점을 이용한 거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펼쳐지는 언제나 같은 마법 강의의 시간.


“쉘터까지 올 때는 그 자연스러운 공간의 흐름을 이동수단으로 사용한 것이고, 여기서는 아군과 다른 중립 물체들은 좌푯값에서 제외한 채 오직 적군들만 공간계의 대상으로 적용시켜 빨아들이게 한 거지.”


일렁이는 검은 태양을 등 뒤에 둔 채 태연하게 마법을 가르치는 스승님의 모습에, 시드는 할 말을 잃었다.


“같은 [공간─다리] 계열의 마법일지라도, 조금이라도 변형을 가하면 이렇게까지 다른 쓰임새로 응용할 수가 있는 거다. 나는 각각 [웜홀]과 [블랙홀]이라고 부른다. 본래 이 명칭이 가리키는 것들의 열화 버전이라고 보아도 좋겠지.”


저런 유논이 서클 하나로 시체 대군을 무찌르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품었던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도대체 저게 어딜 봐서 서클 단 하나로 저지른 일이냔 말이다.


“그 중에서도 [블랙홀]은 절대 다수를 상대로 사용할 때 특히 유용하지. 아무리 빨아들일 것들의 숫자가 많아도, 저 구멍 하나가 지니는 질량의 한계치에조차 도달하지 못하거든.

지금은 중력의 수치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덜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공간마력을 불어넣었다면 소드마스터 같은 강자들조차 저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지경이었을 거다.”


시드도 중력이라는 단어의 정의 정도는 알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행성이 잡아당기는 힘 아닌가.


그런데 저게 그 중력이 ‘높지 않은’ 편이라니. 도대체 높은 편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겁부터 났다.


“아까 내가 한 가지 마법밖에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지?”


문득 강의 도중 들려온 유논의 질문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공간을 멈추게 만드는 마법은 어떻게 사용했을까. 그것도 이 [블랙홀]을 응용한 거다. 공간계의 좌표와 법칙 일부를 구멍 내부로 잠시 치환해,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둬 놓은 것이지.”


굳이 비유하자면 블랙홀로 빨아들인 언데드들도 지금쯤 비슷한 상태에 처해 있을 거다─유논은 그리 설명하며 말을 이었다.


“전부 저 검은 구멍 속, 공간의 소실점에 꼼짝도 못하는 채로, 득시글하게 쌓인 채로 갇혀 있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저것들을 풀어줄 수도 있을 테고, 잘만 하면 적대 세력들을 괴롭히는 전략적 무기로 사용할 수도 거다.”


풀어주거나 무기로 사용한다고?

시드는 저도 모르게 으윽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풀어주는 건 애초에 재고의 여지도 없는 선택지였고, 다른 쪽도 만만찮게 싫었다.

유논이 저 끔찍하게 징그러운 죽은 벌레들의 시체, 그리고 불쌍한 독인들의 유골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시드의 부정적인 반응에 유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솔직히 이것들을 남겨두고 싶지는 않다. 전부 없애 버리는 편이 깔끔하겠지.”


그리 말하며 유논이 머리 위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아귀를 주먹으로 말아, 꽉 쥔다.


쥐어짜듯 움켜쥔 마법사의 주먹.


그리고 신호에 맞춰 절묘하게 움직이는 흑색마법.



우드드드드드드득────!



무언가, 엄청나게 많고 또 더러운 것들이 일제히 압축되고 갈려 나가는 소음이 비틀린 채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검은 태양, 블랙홀이 급속도로 크기를 줄이고 있었다.


걸레를 비틀어 짜듯, 온갖 가축들로부터 기름과 피를 짜내듯 우그러지는 귀곡성이 들려왔다.


그 섬뜩한 소음에 시드는 모골이 송연해졌으나, 유논은 개의치 않고 더욱 주먹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드그그그그그그극──!


뼈가, 살이, 죽은 것들이 전부 먼지가 되어 고운 가루처럼 흘러내리며.


태양은, 천체는 구체가 되고, 이내 큰 공만 한 크기가 되더니, 다시금 구슬만큼 줄어들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안식을 찾은 성불의 묘지가, 검은 일점이 되어 한곳에 안착한다.


유논의 손바닥 위였다.


이내 자리한 것은,

새카만 모래알 하나.


유논은 그것을 뻗어 시드에게 내밀었다.


“바람을 불어봐라.”

“···바람, 이요?”

“그래, 바람. 입으로 불어봐라.”


영문 모를 요구였으나, 시드는 유논의 말대로 했다.

입으로 바람을 후-하고 불었다.


어떠한 마법적인 기운도 가미되지 않은, 그저 입바람에 불과했으나.

그것에 닿자마자 검은 구슬이 펑 하고 터져나갔다.


털끝만큼도 위험하지 않은, 그저 고운 검은색 먼지가 되어 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시드는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흩어져 멀어지는 죽은 것들의 가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화교 쉘터를 멸망시키고, 훗날 정화교 전체를 위협할 뻔했던 도플갱어의 시체 군단.


수십만의 강력한 언데드들은 그 순간 한 줌 먼지가 되어 최후를 맞이했다.


자유롭게 흩날리다,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물과 만나기도 한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사라진다.


그렇게 멀어져, 또 멀어져 갔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감히 먼저 입을 열지 못하는 전쟁의 끝자락.

맑은 고요 속에서, 유논이 말했다.


“의뢰 완수로군.”


시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문득 정화교 쉘터가 이번 의뢰의 보수로 내놓아야 할 금액이 얼마 정도일지 궁금해졌다.

사실상 유논 혼자서 정화교의 위기를 전부 해치워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데···.


‘···쉘터 파산하는 거 아니야?’


뭐, 솔직히 이제 와선 쉘터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긴 했다.

다 죽어가던 거 구해줬으면 그만이지, 여기서 뭘 더 바라면 그게 나쁜 놈이었다.


시드는 무책임하게 고개를 돌렸다.


성벽 너머를 바라보니, 하늘을 덮었던 흑색 헤일로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멀리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둠의 요람이 세상의 모든 죄와 벌을 감싸는 시간이 오고 있었다.


저녁과 밤이, 별들이 점차 가까워진다.


창공은 붉게 물들고, 대지는 그림자가 짙었다.


시드는 정적 속에서, 유논의 어둠 짙은 얼굴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영문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후련하고, 또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뒤늦게 승리의 기쁨에 빠진, 혹은 얼떨떨함에 빠진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아스라히 들려왔다.

모두들 살아남았다는 것에, 자기들의 집과 땅, 가족들을 지켜냈다는 것에 눈물과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감동적인 광경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피오네, 윌리엄 스왈로우, 전투사제들···.

여러 아는 사람들의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들이 다가왔다. 시드는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두근────.



무언가가 깨어나려는 것처럼,

가슴 속에서는 심상치 않은 박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드는 어딘가 불편한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Ep.4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

End.


작가의말

네 번째 에피소드가 끝났군요. 불쾌한 골짜기 에피소드를 쓸 때는 ‘와..28화네. 길게도 썼다.’ 라는 생각을 했는데, 죄와 벌 에피소드는 그걸 훌쩍 뛰어넘은 58..????!!! 화가 되어버렸네요. 맙소사. 

맙소사, 진짜 맙소사. 중간에 외전이 좀 섞여있긴 했지만, 아니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엄청 길었네요.

이 정도면 여태까지 쓴 소설의 절반 가량을 죄와 벌 에피소드가 차지하고 있지 않았나 싶은 압도적인 분량! 그에 반해 내용은 별 거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여태껏 뿌려두었던 떡밥들을 많이 회수해서 후련하기도 하고,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장면들을 나쁘지 않게 표현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 또 더 잘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네요.

불쾌한 골짜기 에피소드까지 합치면 대략 90화 가량을 이 좁은 정화교 쉘터와 독기의 골짜기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게 했으니, 독자님들께서 많이 답답하다 느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중간에 일주일씩이나 연재를 쉰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작가의 죄가 크군요.

이제 예정된 완결까지는 2/3정도의 길을 넘어온 것 같습니다. 스토리라인은 전부 구상해 두었고요, 쓰는 일만 남았지요. 여태까지 보셨다시피, 저 나름 계속 쓰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요. 완결은 무조건 낼 생각입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대뜸 끊어버리는 건 저로서도 슬플 것 같거든요.

따라와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따라와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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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시장바닥의 대왕들(2) +12 21.01.24 751 46 25쪽
139 시장바닥의 대왕들(1) +11 21.01.23 752 37 13쪽
138 드워프(4) +12 21.01.22 745 43 17쪽
137 드워프(3) +13 21.01.21 737 40 14쪽
136 드워프(2) +8 21.01.20 728 43 13쪽
135 드워프(1) +12 21.01.19 758 45 14쪽
134 지저의 도시(7) +10 21.01.18 780 42 13쪽
133 지저의 도시(6) +15 21.01.17 784 48 16쪽
132 지저의 도시(5) +4 21.01.17 735 43 12쪽
131 지저의 도시(4) +12 21.01.16 755 45 15쪽
130 지저의 도시(3) +14 21.01.15 767 45 15쪽
129 지저의 도시(2) +19 21.01.14 801 43 17쪽
128 지저의 도시(1) +30 21.01.13 829 50 18쪽
127 막간-윌리엄 스왈로우(William Swallow)(3) +10 21.01.12 779 47 18쪽
126 막간-윌리엄 스왈로우(William Swallow)(2) +6 21.01.12 736 36 14쪽
125 막간-윌리엄 스왈로우(William Swallow)(1) +12 21.01.11 801 47 16쪽
124 막간-피오네(Fionne)(4) +20 21.01.10 812 48 20쪽
123 막간-피오네(Fionne)(3) +17 21.01.09 862 48 17쪽
122 막간-피오네(Fionne)(2) +6 21.01.09 796 37 18쪽
121 막간-피오네(Fionne)(1) +14 21.01.08 840 49 13쪽
» 흑색의 마법사(3) +27 21.01.07 908 57 20쪽
119 흑색의 마법사(2) +18 21.01.06 884 48 17쪽
118 흑색의 마법사(1) +18 21.01.05 886 53 14쪽
117 유논(12) +17 21.01.04 829 52 13쪽
116 유논(11) +9 21.01.04 769 44 16쪽
115 유논(10) +10 21.01.03 796 45 16쪽
114 유논(9) +12 21.01.02 773 40 12쪽
113 유논(8) +7 21.01.01 779 45 14쪽
112 유논(7) +9 20.12.31 806 46 17쪽
111 유논(6) +7 20.12.30 832 4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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