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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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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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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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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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피오네(Fionne)(4)

DUMMY

“저는 교단을 바꿀 겁니다.”


피오네의 그 말이 아릿한 잔향이 되어 귀에 머물렀다.

왜 기시감이 느껴지나 했더니, 과거에 그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난 이 세상을 바꿀 거다.’


황실의 기사였을 적 그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던 말.


겉으로는 제국의 부패한 문제점들과 개혁해야 할 부분들을 이야기했지만, 실상 그것은 제국을 바꾸기 위한 사명감이라기보다는···.


‘젊을 적의 치기와 나는 지구에서 넘어왔음으로 무언가 특별한 존재이며, 그러므로 마땅히 특별한 일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뒤틀린 사명감이 섞인 괴상한 결과물이었다.’


그렇다면 피오네의 경우는 어떠한가.


유논은 생각했다.


‘그녀는 나와 다르다.’


제국의 개혁을 주장하던 시절에도, 혁명을 이끌던 시절에도. 그는 제국인이 아니었다. 그의 정체성은 지구와 환상세계의 중간지대 어딘가에 표류해 있었다.


반면 지금 교단을 바꾸겠다 말하는 피오네, 그녀는 정화교의 사제였다. 그녀의 고향도, 신앙도, 가족도, 친구들도···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 모든 뿌리가 교단에 있었다.


유논처럼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서 아무런 책임 없이 쉽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근간을 잘못되었다 당당히 말하고, 또 바꾸겠다고 선언하는 데에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얼마나 오랜 고심 끝에 저 말을 내뱉을 수 있게 된 것일까.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과거의 그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피오네는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스스로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척을 지면서까지 정의를 추구하려 하고 있었다.


유논은 피오네의 결심을 듣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예정이지?”


교단과의 연이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또한 나름대로 정화교단이라는 한 세력이 탄생과 부흥을 겪던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피오네가 바꾸고자 하는 정화교의 뿌리 깊은 악습과 부패가 얼마나 지독한 것일지, 그것을 척결하기가 얼마나 고된 일일지는 어렵잖게 예상할 수 있었다.


정화교의 핵심 권력 주축들이 숨기고자 했던 치부를 건드리는 일이 될 것이고, 어쩌면 그들에게 역으로 당해 피오네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신중하고 또 확실하게 접근해야만 하는 거사였다.


“처음에는, 쉘터를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쉘터를?”

“예. 이곳이야말로 교단의 가장 큰 치부가 묻혀 있는 곳이니까요.”


정화교 쉘터.

정화교 영역의 가장 큰 도시들 중 하나임과 동시에, 독기의 골짜기를 가로막는 요새 역할을 하는 곳.

독기의 골짜기와 관련된 교단의 악행들을 떠올려 보면, 확실히 쉘터는 교단의 역린과 다름없는 장소였다. 교단을 바꾸고자 한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너무 위험할 뿐더러, 성공확률도 높지 않다고 그러더군요.”

“누가 그러던가?”

“제 어머니, 대주교 요한나 님께서 말입니다.”


유논은 침음을 흘렸다.

어쩐지 전쟁이 끝난 후, 피오네가 대주교에게 자주 불려가 대화를 나눈다 싶더니···.

가족 간에 못 다한 해후를 나눈 게 아니라, 교단의 개혁에 대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과연 대주교다운 통찰력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독기의 골짜기는 분명 정화교의 가장 큰 치부가 맞았다.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지금은 아니게 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성공확률이 높지 않은 이유는···교단이 저지른 악행의 피해자들이 전부 죽었기 때문이겠군.”

“예. 그렇습니다. 부끄럽게도···쉘터는 지켰지만, 그들은 아무도 지켜주지 않았죠. 그들은 쉘터를, 정화교를 증오하며 죽었습니다.”


정화교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독기의 골짜기의 독인들은, 도플갱어와 독인 마을의 장로들의 수작에 말려들어 전부 도플갱어의 시체 군단으로 화했다.

그 지옥 같은 언데드들의 물결에서도 살아남은 독인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그 정도 숫자로는 교단에 큰 압박을 가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정화교를, 쉘터를 바꾸고자 한다면 분명 교단에서는 눈치 채고 마지막 남은 독인들까지 전부 없애려 하겠지요. 그들에게 그런 부담을 전가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아닐지언정, 쉘터는 정화교의 치부였던 곳이다.

그만큼 교단이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는 요주의 지역일진데, 그런 쉘터에서 독인들을 이용해 교단을 바꾸고자 하는 정치적 행동을 펼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을 터였다.


피오네나 쉘터 신도들의 위험도 위험이지만, 독인들의 안위가 가장 위험해질 것이다. 교단 측에서는 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없애서 흔적을 지우려 할 터이니.


“저는 교단에, 그리고 쉘터에 두 가지 계급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상급 신도들과 하급 신도들. 백색 구역과 어두운 구역의 두 신분이 있다고만 알고 있었죠.”


완전히 틀린 착각이었습니다─.

피오네는 그리 일축하며 말했다.


“제가 모르고 있던,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끔찍이 고통 받던, 정화교의 세 번째 계급이 존재했습니다.”


독기의 골짜기 속 독인들.

정화교의 최하위 계급.

살이 문드러지고 온몸이 기형으로 변하는 독기 속에서, 강철 말벌과 칼날 개미들 같은 변형된 괴수들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 지독하게 살아가던 그들.


쉘터의 하급 신도들은 그나마 쉘터에서 생활한다. 괴물들과 생사를 건 전투를 벌이지도 않고, 독기에 짓눌리지도 않는다.

불가능에 가까운 신분 상승의 기회를 노려볼 수 있는 자격이라도 존재한다.


독인들은 아니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지옥 같은 독기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없다. 결코 신분을 벗어던질 수 없다.

바깥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 쓰레기장의 통로는 정화교가 막고 있기에, 그들은 영영 골짜기에서 밑바닥 계급으로 썩을 수밖에 없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워하던 이들이기에, 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피오네는 찬 숨결을 뱉으며 말했다.


“그래서, 쉘터는 독인들을 치료하고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돕고, 또 전쟁의 피해를 덜어낸 뒤에는 하급 신도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쪽으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그랬다가는 교단을 바꾸고자 하는 데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할 텐데?”

“예.”


피오네의 입에서 나온 새벽의 입김이 푸른 안광 사이로 흩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쉘터를 떠날 예정입니다. 다른 곳에서부터 시작해, 정화교를 바꿀 생각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기 때문에, 유논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물었을 뿐이다.


“그러면 쉘터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대주교 요한나 님께서 맡아주시겠지요. 대주교님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또 약속을 했습니다. 쉘터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주실 겁니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해 보이는 전략이지만, 중요한 전제조건이 빠져있었다.


유논은 입가를 매만졌다.


“···대주교를 믿나?”


피오네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대주교는 정화교의 기득권 중 하나였다. 정화교 권력의 큰 주축 중 하나인 그녀가 쉽사리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일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피오네와 약속을 맺었다고는 하나, 요즘 같은 시대에서 가장 못 믿을 만한 것이 바로 같은 사람 사이의 약속 아니던가.

그렇기에 걱정했으나···.


“물론, 대주교님을 마냥 믿을 수는 없겠지요. 제 어머니이지만···정의롭기만 한 분은 아니시니까요. 그렇지만, 아마 약속을 지키실 겁니다.”

“어째서?”

“약속을 어긴다면, 제가 이단심판관장이 된 뒤 가장 먼저 칼날을 겨눌 방향이, 제 어머니 쪽이 될 테니까요. 그리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리 말하는 피오네의 전신에서는 차가운 기도가 흐르고 있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베여 버릴 것 같다.


유논 또한 피오네의 과거사와 이단심판관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수긍할 수 있었다.


교단을 바꾸고자 마음 먹은 피오네는 언젠가 이단심판관장이 되어 정화교의 가장 무시무시한 무력집단을 거느리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정화교 내에서 피오네가 베지 못할 존재는 거의 없다시피 할 것이다.

이단을 심판하는 까마귀들의 재판장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설령 대주교라 할지라도 약속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쉘터를 떠나야 하는 거로군.”


유논은 단박에 이해했다.

피오네가 쉘터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예, 이단심판관이 되기 위한 시험을 거쳐야 하는 이단심문관청은 쉘터가 아닌, 교단의 성지에 있으니까요.”


교단의 성지.

정화교의 본단이 위치한 곳.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정화의 땅이라 하여, 토호라טָהֳרָה라 부른다.


네 가지 거대 세력 중 하나인 정화교단의 중심이자 모든 핵심 기관과 권력들이 밀집되어 있는 장소.


“그곳에서 다시 이단심문청에 들어가, 이단심판관이 되고, 이단심판관장이 되어 또 교단을 바꾸려고 합니다. 정화교를 바꾸기 위한 시작점으로 정화교의 성지만큼 적절한 장소도 또 없겠지요.”


피오네의 말대로였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정화교의 가장 부패한 권력이 있는 성지의 땅을 밟지 않고서 정화교를 근본부터 바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정화교를 바꾸고자 한다면 피오네는 성지로 향해야만 했다.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문제는···.


“사실, 어쩌면 제가 쉘터에 남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피오네가 살벌하던 기세를 풀고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논 님께서 쉘터에 계실 예정이었다면, 저 또한 한동안은 쉘터에 남아서 여러모로 당신께 도움을 드린 후에 성지로 떠났을지도 모르죠.”


그 씁쓸한 미소가 찬바람에 묻혀 사라질 즈음.


“하지만, 떠나실 예정이시죠. 그렇지 않습니까?”


피오네의 질문에 유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문제는, 유논은 피오네와 함께 성지로 가지도 않을 것이며, 쉘터에 남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


“그러실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유논 님은 어딘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신 적이 없으니까요. 쉘터에서 하고자 하는 일들을 전부 끝내셨으니, 곧 또 떠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지금까지는 우연히 목적과 가는 길이 일치해 동료로서 함께했지만, 유논과 피오네는 애초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피오네가 정화교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고, 교단을 바꾸기 위한 길을 걷고자 한다면, 유논은···.


‘적어도 내 길이 더는 이곳 쉘터에 없다는 것은, 그리고 정화교의 성지에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유논이 정화의 성지에 한 번쯤 들를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피오네가 우연히 유논과 마주치게 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곧 작별을 나누어야만 했다.


“지금은 헤어지지만···분명, 제가 미래에 유논 님께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겁니다.”


피오네는 확신에 가득 찬 눈동자로 말했다.

그 푸른 눈빛 속에 가득한 신념. 스스로의 미래를 불안해하면서도 확신하는 그 영웅의 기상.


피오네는 그녀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짊어질 수 없을, 정화교의 개혁이라는 기나긴 고행의 길을 걸으면서도 도리어 유논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인물과 잠시나마 동료로서 함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축복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지금의 이별에서야 되새기건대, 피오네의 존재는 그들 일행에게 있어서 실로 행운이었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유논은 그 심중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어놓지는 않았다.

말은 마음보다 가볍고, 마음은 말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한 마디만 내뱉었다.


“···고맙다.”


피오네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자유도시를 지켜 주셨고, 이번에는 쉘터를 지켜 주셨지요. 제가 일평생 마음에 두었던 두 고향을 전부···유논 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전부 갚을 수는 있을지 의문입니다.”

“······.”


의뢰였을 뿐이었다. 피오네를 처음 만나, 자유도시를 구한 것도 의뢰였고, 이후 그녀와 함께 움직이고 정화교 쉘터를 구한 것도 의뢰였다.

시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와의 만남도 되새겨보면 황실의 직계 혈족을 찾아 달라는 의뢰로부터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유논과 시드, 피오네···그들의 인연은 의뢰로 시작했으되, 의뢰로 끝나지는 않게 되었다.


그 만남과 헤어짐이 너무나도 낯설어서, 유논은 말을 돌렸다.


“다시 만날 때에는, 교단의 이단심판관장이 되어 있겠군?”

“그럴 겁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이라 예상하지?”


피오네는 대답했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그 눈빛은 더없이 맑고 진지했다.


“하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 저는 유논 님께 전혀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하겠죠.”


이렇게나 많이 은혜를 입었는데,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함께해 드리지도 못할 겁니다─.

피오네는 그렇게 말하며 유논의 눈을 바라보았다. 주춤하며 털어놓는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으려고. 앞으로의 여정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른 아침의 추위 탓인지, 이쪽을 향해 말하는 피오네의 볼이 살짝 발그레해져 있었다.


이 여사제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잠시 고민하던 유논은, 잠시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이런 놀라운 일이 다 있나.


“지금, 그것 때문에. 앞으로는 도움이 되어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수천만 정화코인에 달하는 정화교의 부채를 내가 지니도록 했다는 말인가?”

“일차적인 이유는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지만···예. 그렇게라도 유논 님께 도움을 드리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요.”


피오네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 빚을 지워놓고 난 뒤라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교단의 어느 영역에 들르더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으실 테니까요. 저 대신···이라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정화교가 유논 님을 도울 겁니다. 부채를 갚기 위해서라도, 도울 수밖에 없겠지요.”


단지 그것이 옳다는 이유로, 그것으로 은혜를 갚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2825만 2021개의 정화코인에 달하는 정화교의 채권을 유논에게 건넨 저 대쪽 같은 여인.

피오네는 아침의 햇살 너머에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유논 님께 드리는, 작별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사실상 제가 한 일이라고는 보수 청구의 대리인으로서 활동한 것밖에 없으니, 제 선물이라고 말하기에 무리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리 덧붙여 말하는 것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논은 어이가 없어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입과 목이 지칠 때까지 너털웃음을 흘리다가, 피오네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것 참 안된 일이군.”

“······?”

“선물이 영 마음에 안 드니 말이야.”


뒤이어 잇는 말.


“나에게는, 이천만의 정화코인보다 한 사람의 존재가 더 든든했는데 말이지.”


고개를 갸웃하던 피오네가 그제야 농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유논을 따라 옅게 웃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여사제의 웃음소리였다. 유논은 미소 지은 그대로 손을 뻗었다.


“아무튼.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다고, 작별 선물을 받았으니 어느 정도는 돌려주어야겠지.”


피오네의 팔목을 붙잡은 채, 흑색의 마력을 뿜어낸다.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껴 움찔했던 피오네였지만, 이내 유논을 믿고 팔을 그대로 가만히 놔두었다.


유논의 손끝에서 분출된 흑색마나와 공간마력이 처음에는 무형의 물질로서 흘러가다, 이내 피오네의 손 모양에 맞춰 조형되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오른손을 감싸고 있는 것은 암흑으로 제련한 듯 새카맣고, 부드럽고 유연하며 동시에 단단하고 날카로운 건틀릿Gauntlet이었다.


마치 손과 하나로 일체된 듯, 자연스럽게 달라붙어 있는 그대로 쥐락펴락하며 손가락을 움직여 보던 피오네는 놀란 듯 물었다.


“이건···?”


피오네가 무기를 쓰지 않는 데에는, 맨손만으로 싸우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그녀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장애물 없이 맨손인 상태가 편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녀의 능력을 버틸 수 있는 무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먹만으로도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틀릿 같은 무구들도, 능력을 버티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뻑뻑해 차라리 맨손만 못한 경우가 많아 여태껏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흑색의 건틀릿은···달랐다.


비단으로 감싼 듯 매끄러우며 가볍게 움직였다. 그렇다고 또 마냥 가볍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언제라도 공격을 위해 힘을 가한다면 충분한 중량을 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유논은 감탄하는 피오네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시험해 보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오네의 주먹이 허공에 뻗는다.

순간 음속에 달하며 공기를 찢는 소닉붐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



“······.”


분명 사라졌던 권격이 공간을 뛰어넘어 저 멀리 산맥의 중간을 강타해 돌무더기가 우르르 떨어지는 모습에, 피오네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유논은 흡족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공간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담긴 물건이지. 아마 변이 능력 같은 경우에도 무리 없이 담아내고, 또 증폭할 수 있을 거다.”


그리 말하며 손가락을 까딱하자, 피오네의 손에 착 달라붙어 있던 건틀릿이 검은 부정형의 액체로 변해 떠올랐다.

그새 새 무구에 애착이 든 것인지, 앗 하는 탄성과 함께 손을 뻗은 피오네의 모습.

유논은 짧게 웃은 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검은 창의 형태로 바뀐 무구가 피오네의 손 위로 떨어진다.


마치 처음부터 한 사람을 위해 설계하기라도 한 듯, 완벽하게 손에 착 감기는 흑창 한 자루.

피오네가 그것에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는 동안, 유논이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서 사용할 수도 있지. 평상시에는 건틀릿으로 사용하더라도, 유사시에는 창, 검, 도끼 등등 여러 가지 무기로 응용해서 쓸 수 있을 거다.”


과연 정말인지, 저 짧은 순간 사이에도 피오네의 손 위에서 수십 차례나 형태를 바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에서 검으로, 검에서 도끼로, 도끼에서 채찍으로, 그리고 또 둔기로···.


그리 재미있게 가지고 놀며, 장난감을 처음 본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피오네의 모습에 끊임없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 철두철미하던 여사제가 이리도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얼마만이던가.

유논은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말했다.


“나는 흑색무장黑色武裝이라 부르는 물건이다. 모든 차원에서 너를 포함해 단 두 사람만이 지닌 무구일 거다, 피오네.”


다른 한 사람은 지금으로서는 다시 도달할 수도 없는 머나먼 차원에 있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는 피오네가 유일한 소유자라 보아도 좋을 터.


이 흑색무장은 이름 없는 지팡이의 원재료, 어떤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는 '신의 금속'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공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흑색의 만능형 무기였다.


만드는 데에도 긴 시간이 걸리고, 그 속에 힘을 불어넣는 게 지금의 유논으로서도 꽤나 벅찬 물건이기에 겨우 기한 내에, 피오네가 떠나기 전에 완성할 수 있었다.


“흑색무장이라···좋은 이름이군요.”

“네가 원한다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아니요. 흑색무장으로 하겠습니다. 마음에 듭니다. 몹시요.”


그 잔뜩 흥분한 모습에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가 보낸 선물을 친우가 저리도 즐겁게 받아줄 때 느끼는 기쁨보다 더한 것이 있으랴.


피오네도 손에 든 흑색무장을 마음껏 만지작대며 유논과 함께 깔깔대며 웃었다.


그들은 그렇게 웃으며 작별의 시간을 보냈다.


작가의말

피오네와 헤어질 때가 왔군요.

언젠가 다시 만날 일이 있겠지만, 지금은 다들 피오네와 작별 인사를 합시다.


그동안 고마웠다, 피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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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막간-피오네(Fionne)(1) +14 21.01.08 839 49 13쪽
120 흑색의 마법사(3) +27 21.01.07 907 57 20쪽
119 흑색의 마법사(2) +18 21.01.06 884 48 17쪽
118 흑색의 마법사(1) +18 21.01.05 886 53 14쪽
117 유논(12) +17 21.01.04 829 52 13쪽
116 유논(11) +9 21.01.04 769 44 16쪽
115 유논(10) +10 21.01.03 796 45 16쪽
114 유논(9) +12 21.01.02 773 40 12쪽
113 유논(8) +7 21.01.01 779 45 14쪽
112 유논(7) +9 20.12.31 806 46 17쪽
111 유논(6) +7 20.12.30 831 4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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