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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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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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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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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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지저의 도시(1)

DUMMY

Ep.5 침묵의 겨울(Silent Winter)


타닥타닥-


모닥불이 섧은 불길을 내며 바람에 흔들렸다.


별과 달이, 은하수가 내려다보는 차가운 밤의 하늘 아래 얼어붙은 황야.


세상 모든 움직이는 것들이 서리에 가라앉는 침묵 속에서 별똥별 스치는 소리만 들려온다.


겨울잠 자던 우주의 별빛용이 불씨 튀기는 낌새에 놀라 내려다본다.


잠 깨 졸려 부비는 눈으로 지상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마주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은하의 신비 따위는 한낱 티끌로 치부하는 듯 그 흑색 심연을 담은 눈.


우주룡이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 몸을 떨자, 그 여파로 비늘 몇 개가 떨어져 유성이 되어 내린다.


호다닥 달아나는 용의 별자리의 꼬리가 반짝이며 성운을 흩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잠의 꺼풀처럼 망각의 약이 되어 세상을 가린다.


문어가 먹물을 뿌리듯 도망치며 분출한 그 산란되는 푸른 성간 물질들이 사라지고 나자, 오직 공허만이 남았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그것을 끝으로 차원의 우주는 다시금 외로운 고요를 만끽했다.


“······.”

“뭐 해요, 스승님? 하늘에 뭐라도 있어요? 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시드가 아무런 말도 없이 목이 빠져라 밤하늘만을 쳐다보고 있는 유논의 모습에, 고개를 이리저리 내빼며 물었다.

유논은 고개를 저었다.


“별 거 아니다. 그저···.”

“그저?”

“그저, 차원 너머의 세계에는 재미있는 생명체들이 꽤 있다 싶어서.”


그 말에 시드도 흥미가 생긴 듯,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그때 이야기해줬던 다른 차원의 이종족들을 말하는 거예요? 우주에 학교도 세우고, 술집도 만들고 그런다는?”

“'저것'을 이종족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가 너에게 말해주었던 그 아카데미 출신은 아닌 것 같구나.”

“그러면 아저씨가 본 건 도대체 정체가 뭔데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유논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시드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간 제대로 정확하게 알려주는 게 없는 스승님이다.


원래는 주입식으로 뭐든지 딱딱 확실한 정답을 가르쳐줬었는데, 언젠가부터 변했다.


마법 경지가 일정 수준까지 오르고 또 상식도 어느 정도 갖춘 다음에는 뭘 물어보든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발전이 있을 거라며 쉽사리 대답해주지를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시드는 지금껏 거의 모든 순간 유논의 옆에 붙어있다시피 했다.

유논의 변화에 적응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흑색마법을 되찾은 이후 모든 행동에 여유가 생긴 유논은 물고기를 직접 구해다주지는 않을지언정, 물고기 잡는 법에 관해서는 가르침을 아끼지 않는 스승이었다.


‘그러니까, 물고기에 관해 묻기보다는 물고기 잡는 것에 대해 물어보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이 말이지!’


시드는 은근히 떠보는 투로 말했다.


“아, 궁금하단 말이에요. 나중에 다른 차원들 좀 데려가주면 안돼요? 그 정거장이라는 데도 구경시켜주고, 거대한 함선이나 우주 괴물도 보여주면 진짜 우리 스승님 너무 멋있을 텐데.”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난 이미 충분히 멋있는 스승인 것 같아서, 안타깝지만 사양하마.”


역시 유논은 유논. 노련한 그는 쉽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시드의 재기 발랄함도 만만치 않다.


노마법사에게 노마법사의 방법이 있듯이, 소녀에게는 소녀만의 방법이 있는 법.

시드는 특유의 활기찬 모습으로 유논의 한쪽 팔을 붙잡고 말했다.


“칫. 알았어. 데려가 달라고는 안할게요. 그 대신 내가 나중에 아저씨처럼 차원 이동하는 방법 알아내서 우주여행하면, 그때 같이 따라가 주긴 해야 해요? 관광 가이드 역할쯤은 해줄 수 있잖아!”

“···이제는 네 스승을 가이드쯤으로 여기고 있는 거냐.”


여전히 부정적인 모습이지만, 이전과는 달리 아예 파고들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드는 고민하는 유논의 어깨에 매달려 잔뜩 칭얼댔다.


“어어어어? 분명히 누가 나한테, 내가 어디를 가든 같이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거 같은데.”

“······.”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던 것 같은데. 설마 제자랑 맺은 약속도 안 지키는 스승이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그게 우리 스승님일 리는 더더욱 없겠지?!”


과장스러운 감탄사로 호들갑을 떨어대며 은근히 압박하는 시드의 모습에, 유논은 푹 한숨을 쉬었다.

저런 되바라진 제자 녀석이 다 있나.


이런 쓸데없는 부분에서만 기억력은 또 어찌나 좋은지, 푸른 불의 비가 내리던 자유도시에서 사제관계를 맺으며 했던 약속을 아직까지 써먹는 모습에 기가 찼다.

직접 마법으로 서약한 내용이니 무를 수도 없을 노릇이고.


약속을 들먹이면 거절 못할 것을 알았는지 얄밉게 헤헤 웃는 그 이마에 딱밤을 한 대 시원하게 먹였지만, 이제는 내성이 생겼는지 별로 아파하는 것 같지도 않다.


유논은 혀를 쯧쯧 찼다.

최근 들어 이야기할 때마다 대화의 흐름이 전부 시드의 의도대로만 흘러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서 저런, 거절과 승낙의 중간선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당기며 떼쓰는 교묘한 화술을 배워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런 걸 연습할 시간에 통제 훈련이나 더 했다면 제 마력 갈무리도 못하고 칠칠맞게 흘리고 다니지는 않았을 텐데.”

“아잇, 또 잔소리! 서클 늘어나서 마력이 너무 많은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요! 대신 해결해줄 것도 아니면서. 대답이나 해요. 같이 가줄 거지?”


유논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약속한 거예요? 모른 척하기 없기!”

“알았다고.”

“예쓰!”


저런 경박한 어휘는 또 어디서 배운 건지. 날마다 변해가는 질풍노도의 시기 제자의 모습에 유논이 격세지감을 느끼던 때였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또 말이냐?”


유논이 슬슬 진저리를 치며 시드로부터 슬슬 멀어지려고 하던 때였다.

시드가 이번에는 진짜 중요한 문제라는 듯 목소리를 낮추고 진지하게 물었다.


“우리, 서쪽으로, 그러니까 제국의 수도였던 황도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 출생의 비밀을 찾으려고?”

“그랬지.”


유논이 에에에엑?! 하는 반응을 보이던 시드에게 ‘너는 황실의 마지막 남은 두 번째 직계 혈족이다.’ 라고 설명해준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유논에게 갖가지 상식들을 배우고, 세계의 역사를 책으로 읽은 시드는 처음에만 조금 놀랐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평정을 되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실 직계 혈족의 검은 머리와 금빛 눈의 형질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상식이었다.

요즘에는 유논에게 배운 마법으로 알아서 자기 눈동자 색을 검은색만 보이도록 위장하고 다니기에 더더욱 들킬 일도 없고 남들이 알아볼 일도 없었지만.

다름 아닌 시드 자신만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제국의 신혈’을 언급한 자유도시에서의 달튼 공작과, 그녀를 ‘황녀 전하’라고 부르던 소드마스터, 제국주의자들의 섭정공 파빌리안 스트라우스까지.

모든 정황이 그녀와 제국 간에 어떠한 연관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만 그게 제국의 마지막 황녀쯤 되는 어마어마한 출생과 엮여 있을 거라고는 감히 짐작하지 못했던 것.


‘아가씨는 귀하신 분입니다. 스스로를 귀히 여기십시오.’


‘아가씨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이며,앞으로는 더욱 고귀해지고 또 위대해지실 겁니다.’


‘아가씨는 세상의 주인이 되실 분입니다.’


최초의 기억, 그 흐릿하게 남은 중후한 목소리.

그것이 뜻하는 바가 제국의 신혈과 연관 있었던 것일까.


유논에게 무어라 더 물으려던 시드는, 문득 얼마 전에 수면 위로 부상한 또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이름이 뭐야?’

‘───── 시드 ───입니다, 아가씨.’


그렇게 그녀의 이름은 시드가 되었다.


시드는 스스로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시드, 시드, 시드 카라얀. 시드 카라얀···뭔가 이상하잖아.’


어째서인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지하게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다는 거냐.”


유논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꺼져가는 모닥불에 불의 마력을 더하며 태연히 말하는 그 모습에 상념이 절로 날아가 버렸다.


시드는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휘휘 저어 도리질한 뒤 입을 열었다.


“아, 아. 그러니까, 황도는 서쪽에 있다면서요?”

“그렇지?”

“그런데 우리는 왜 북쪽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랬다.

유논에게 서쪽으로 간다고, 서쪽에 있을 황도로 간다는 설명을 들은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

그러나 지금 그들은 서쪽이 아닌 북쪽의 황야를 나아가고 있었다.


“문도 쉘터 북문 성벽 몰래 넘어서 왔고, 내가 아저씨한테 배운 게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 별자리만 봐도 우리 계속 북동쪽으로 가고 있는데···완전히 다른 방향 아니에요?”


‘혹시 이 아저씨가 노망이라도 난 건가’ 싶은 눈길로 천천히 뜯어보는 시드의 눈초리에, 유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다.”

“그러면 왜 북쪽으로 가는 건데요?”

“황도가 서쪽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서쪽으로 바로 갈 수는 없으니까.”

“···?”


시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유논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설명했다.


“정화교 쉘터의 서쪽에는 뭐가 있지?”

“아.”


시드도 그제야 깨달았다.


쉘터의 서쪽은 그들이 지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쉘터의 서방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독기의 골짜기. 한 번 발길을 들이면 다시 나갈 수 있는 경로는 정화교 쉘터로의 길밖에 없는 바로 그곳이다.


본래대로였다면 독기의 골짜기를 건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고대의 하늘다리를 통해 서쪽으로 움직일 수 있었을 테지만···.


“그 하늘다리는 내가 부숴버렸고, 정화교의 기술력으로는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시피 한 건축물이었지.”


그렇기에 쉘터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끊겨 있다. 다시는 이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거기까지 사고가 닿자, 시드는 번쩍 하고 머리에 전구가 켜진 느낌이었다.


“어?”

“왜 그러냐.”

“아저씨, 그런데. 다리가 끊겼으면, 다시 지으면 되는 문제 아니에요?”

“정화교의 기술력으로는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니까. 이미 말한 것 아니···.”


또다시 잔소리가 시작되려던 찰나.

시드는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아저씨 마법으로 다시 지으면 되는 거잖아요.”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시드는 왜인지 눈치가 보여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아닌가···?”

“너는 내 마법이 만능의 수단쯤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솔직히 될 줄 알았죠. 아저씨가 여태까지 쓴 마법들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다리 하나 못 짓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공간계에 구멍을 뚫어 공간과 공간 사이를 뛰어넘고, 그 구멍으로 수십만의 대군을 한꺼번에 압살해버릴 수 있는 수준의 대마법사가, 고작 다리 하나를 못 지을 리가.


시드의 합당한 의문에 유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음만 먹는다면야 얼마든지 지을 수는 있겠지. 단순히 우리 둘만 건너갈 다리를 짓는 게 아니라, 영구적으로 세상이 또 멸망할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다리를 지을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다리를 짓고 서쪽으로 가지 않는 거냐는 물음.

유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생각해봐라. 다리 건너편에, 그리고 자유도시 근처의 서방에 무엇이 있는지.”

“뭐가 있기는···? 황야밖에 없지 않아요? 기껏해야 방사능의 아이들 옛 쉼터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아니, 더 있었다.


“그리고 또 제국 출신 수백 명의 황실 기사단이 있지. 죽은 단장을 찾기 위해 다리와 독기의 골짜기 근처에서 진을 치고 있을 강력한 무력집단이.”

“······!”


맞다.

시드는 입을 떡 벌렸다.


제국의 기사단에 쫓기던 것이 너무나도 옛날 일처럼 느껴져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어쩌면 파빌리안 스트라우스라는 한 사람이 발하던 존재감이 그가 이끌던 기사단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던지라, 그가 죽고 나니 제국주의자들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졌다 착각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을 그들의 단장을 기다리며 무너진 하늘다리 너머의 땅을 지키고 있을 터였다.

눈에 불을 켜고 섭정공의 흔적과 제국의 마지막 황녀를 찾고 있을 그들에게 모습을 들킨다면···.


모르긴 몰라도, 결코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가 아니라, 제국주의자 쪽 사람들이 걱정되어서, 그 사람들한테 엄청 나쁜 일이 일어날까봐···좀 그러네.’


유논의 성격상 도플갱어의 시체 군단을 쓸어버렸을 때처럼 제국군을 전부 죽이지는 않겠지만, 애초에 그들과 마찰을 빚거나 그들을 애써 피해가는 것만으로도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다.


“아, 그래서.”

“그래. 그래서 아예 다른 길로 갈 생각이다. 오히려 이편이 황야를 걸어 서쪽으로 향하는 것보다도 훨씬 빠를지도 모르지.”


훨씬 빠르다고?


유논이 그리 말하는 순간, 시드의 머릿속에는 그것보다도 ‘훨씬 빠른’ 방안이 떠올랐다.

이걸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주저하던 때.


유논이 시드를 바라보며 마음이라도 읽은 듯 말했다.


“[구멍-다리]를 말하려는 거라면, 물론 가능이야 하다.”


[구멍-다리]. 유논이 독기의 골짜기에서 시드와 함께 단번에 정화교 쉘터로 이동할 때 썼던 공간 도약의 마법.

확실히 그것을 사용한다면, 단순히 빠르다는 어휘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한순간에 제국의 옛 수도까지 이동할 수 있을 터.


“황도의 공간 좌표도 머릿속에 있고, 그곳까지 구멍을 뚫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긴 하지. 아마 마법을 쓴다면 바로 도착할 수는 있을 거다.”


그런데 왜 안 쓰냐고 지금 당장에라도 묻고 싶은 기색 역력한 채 얼굴 찡그리는 시드의 모습에, 유논은 무심히 말했다.


“그런데 네가 [구멍-다리] 마법이 너무 무섭다고, 다시는 그거 타고 싶지 않다며 온갖 투정과 엄살을 부리지 않았더냐.”

“···!”


한마디로, 시드를 생각해서 이 먼 길을 돌아갈 예정이라는 소리였다.

단순 거리만 놓고 봐도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시드가 유논의 [블랙홀]과 [구멍-다리]가 같은 계열의 흑색마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제 그거 안 탈 거라며 떼를 썼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 하나 때문에 앞으로의 여정에 있어 이렇게까지 큰 시간 소모를 선뜻 감수할 줄이야.


시드는 유논의 말에 너무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아···안 그래도 되는데. 굳이.”

“네 말이 맞다. 안 그래도 되지. 복에 겨워가지고 하는 헛소리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사실 원래는 시드 네가 싫다 해도 강제로 끌고 마법으로 공간을 뛰어넘어 갈 예정이었다.”

“······?”


뭔가 이상한데.

한창 감동을 받아 열띤 상태였던 마음이 다시 차갑게 식는 듯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는 길에 들러야 할 곳도 있고, 그곳에서 해치워야 할 일이나 만나야 할 사람들도 꽤 되더구나. 그리하면 돌아가더라도 그렇게까지 오래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고···.”

“······.”

“그래서 네 그 터무니없는 엄살도 들어줄 겸, 다른 길로 가기로 결정한 거다. 철이 가면 일이 절로 끝난다고, 가끔씩은 너무 빨리 해치워서는 안 되는, 충분한 시간 동안 뜸을 들여야 하는 것들도 있는 법이지. 이번 건이 그런 종류였다.”


유논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만을 말했다.


흑색마법의 힘을 되찾은 그는 저 멀리 황도의 상황과, 그가 가고자 하는 모든 길의 향방을 전부 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따져본 결과, 지금 당장 공간마법을 통해 제국의 옛 수도로 직행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그랬다가는 득보다 실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다른 여러 문제들도 함께 해결하기 위해, 동시에 시드의 불만도 잠재울 겸 다른 경로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고, 이성적인 진실의 결과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었다.


어째선지 모를 이유로, 시드는 유논의 그 말에 잔뜩 삐져 무엇을 말하건 흥흥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도 않는 상태가 되었다.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내린 판단으로 도리어 불만이 더욱 커지고 만 괴상한 형세.


자꾸만 ‘터무니없는 헛소리하는 제자 따위는 그냥 마법으로 먼저 보내고 혼자 가지 그랬냐.’ 따위의 온갖 짜증을 다 부려대는 까닭에,

무려 한 시간가량을 바짝 달라붙어서 달래주고 온갖 맛난 음식들을 내민 끝에 겨우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제야 조금 흥분을 삭힌 시드가 아직 화가 덜 풀렸다 주장하는 듯한 목소리로 처음 내뱉은 말.


“그래서, 그 다른 길이라는 게 어디로 가는 건데요. 이쪽으로 가면 뭐라도 나와요? 지도에는 아무것도 없던데.”

“지도에 있을 리가 있나.”


시드가 가지고 있을 지도, 정화교에서 받아온 것은 오직 땅 위의 지형지물만 표시하는 그림이었다.


땅 아래에 있는 것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난쟁이들이 세운 발밑 지하의 거대한 도시 같은 것들은, 지도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유논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가면 지저의 도시를, 그곳으로 가는 출입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곳으로 갈 거다.”


지저의 도시.


그곳이 그들의 다음 행선지였다.


작가의말

방사능을 피해 지하로 숨어드는 사람들.

유구한 클리셰 아니겠습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떡밥을 뿌려 두었던 지하도시에 드디어 가게 되겠군요.

+아, 맞다. 그리고 저 오늘 생일이에요. 주변 사람들이 많이들 축해해줘서 충분히 감동받긴 했지만, 독자님들께도 축하받고 싶네요. 축하해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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